박철영 시인

조회 수 330 추천 수 1 2023.04.01 19:05:49

 

 

                           시적 발화에 관한 담론 속 중심어들

                         -조선의 시집 반대편으로 창문 열기중심

 

                                                                                           박철영

                                                              (시인, 문학평론가)

 

 공도 공간이다. 시인은 위태위태한 허공에서 줄타기를 하듯 자모의 결합적 텍스트를 통해 인간의 심연을 벼르고 다듬어 문장을 직조하는 사람이다. 이 땅의 모든 광물들이 보석이 될 수 없듯 혼신을 다해 생산한 문장을 버려야하는 아픔도 연연하지 않으며 때로는 독하게, 때로는 처연하게 오로지 한가지 일에 몰두한 장인처럼 문장을 다루며 언어를 도구로 필생을 겸허히 수행하는 이들이 바로 시인이다. 그렇게 초연한 의지를 갖고 시인은 주체적 삶을 향한 욕망 의지를 철저히 타자화 해야 하고 대상이라는 사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가 아닌 화자라는 입장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무에서 유를 문장으로 구조해가듯 허공에다 형상화해가는 상상력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다. 어차피 인간의 복잡한 심상에서 사유를 정제해 가는 작업이기에 시어로 결집하는 과정에서 감성에 대한 이성적 저항은 당연히 감안해야 한다. 조선의 시인의 금번 시집 속 시편들도 그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무방할 것이다. 특히 시인의 변별성을 관통하고 있는 생명 중시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매 문장마다 면면한 가치를 언어의 위중함으로 말해준다. 결국 전체적인 시의 맥락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시적 위의는 생명성에 대한 존재 인식과 사랑에 대한 천착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물에 대한 속성과 내재된 가치의 재인식에서 비롯된다. 흔히 사물을 통해 시적 이면을 비유나 상징으로 환기하는 것에 의한 불편의 표출일 수도 있다. 어차피 시적인 사유로 선택된 모든 대상에는 평범하지 않는 의미가 내재되어있다. 처마의 물방울이 결빙되어 생기는 고드름도 그런 사유에서 촉발된 시적 발상이다.

 

빙하기를 표류한 빛살 속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빤히 나를 바라보는

길쭉한 물방울 병정들의 연대가 깜냥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드름이 향한 곳은

처마 끝이거나 뜬 눈이 부신 밑바닥

 

 

 

이렇다 할 옹이도 없이 아래로 오르는 정점

설원에 닿지 못해 사라진 입김들이

난반사되듯 구름의 역린에 달라붙는다

 

그 흔한 곁가지 하나 내지 않고

거꾸로 매달려 생을 몰두하는 무골의 종족

-<고드름의 뼈> 부분

 

첫 행이 부여하는 긴장감이 단순하지 않다. “빙하기를 표류한 빛살 속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시간까지 관통하고 있다. ‘고드름의 생성은 상상할 수 없도록 아득한 빙하기부터 존재한 영원성을 전제하고 있다. 단순히 허공을 질러오다 기상변화로 형성된 얼음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드름을 통해 불가능한 우주라는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고드름은 처마 끝에 매달린 물의 결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내재된 생명의 비밀과 연관성까지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숨소리를 죽이고 빤히 나를 바라보는/ 길쭉한 물방울 병정들의 연대가 깜냥이라고 말은 하지만, 시인은 그 안에 감도는 신비한 기운을 감지한다.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허공이라는 공간을 유의미한 실재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러면서 관심 밖이었던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연속성을 보여주려 한다. 자연스럽게 볼 수 없던 지점까지 현재라는 시간으로 환기한다. 그런 사물적 지시점을 새롭게 변주하여 시적 감성으로 전달하고자 한 변별성을 조선의 시인만의 시적 확장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고드름은 단순한 결빙 덩어리가 아닌 생명의 근원까지를 함의한 것으로 본 것이다. 사실 고드름의 근원은 물에서 시작된 것이다. 물은 허공 아닌 땅 위에 존재하고 낮은 곳을 지향한다. 그 속성을 실현하려는 의지는 항상성이어서 변함이 없다. 허공에서 어쩔 수 없이 고드름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드름이 향한 곳은/ 처마 끝이거나 뜬 눈이 부신 밑바닥을 향하고 있다. 고드름이 갖는 욕망은 아래로 향한 속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라는 액체가 외부 환경에 의해 다른 형태로 변형되지만, 근본을 지키듯 그 흔한 곁가지 하나 내지 않고/ 거꾸로 매달려 생을 몰두하는 무골의 종족이었다는 자부심에 대한 각성마저 시인 정신을 닮았다. 그런 의지가 지금의 여전한 모습을 유지하게 한 동력이다. 뾰쪽한 끝이 향한 결기의 응집은 상승을 추구하는 욕망이 아니다. 언제든지 한순간도 감출 수 없는 투명한 기척을 잊지 않고 실천해야 할 무욕의 정신이다. ‘고드름의 뼈라는 지지력이 곧 의 복원력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속성을 재현할 수 있다. 우주 속에 존재한 생물체들이 갖는 개별적 고유성이 꼭 특별한 것은 아니다.

 

나무에 물이 오르면 서로를 교감하는 파원이 생기죠

 

켜켜이 모이는 원

 

쓸데없는 물기를 제거하면 수직이 가벼워요 그래서 천장이 둥둥 뜹니다

 

우듬지 아래에서부터 아버지 허리는 쉽게 꺾였죠

-<나이테> 부분

 

<나이테>는 나무가 성장하면서 맞닥뜨린 엄혹한 시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나무가 감당한 계절과 매번 다를 수밖에 없는 시류의 변화들이 민감하게 축적되어 상황을 각인한다. 환경에 적응하며 성장이란 유전적 본성을 실현해간다. 그때마다 필요한 만큼의 허공을 필요 공간으로 점유한다. 지상부를 점유한 공간은 나무의 근경을 초과하지 않으면서 경계를 사사로이 긋지 않는다. 그것마저 생존을 위한 일상이어서 나이테라는 연대기는 빈틈없이 빼곡하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땅 속 물을 끊임없이 길어 올려야 한다. 생존을 위한 물길의 통로는 유일하지만, 정량만 필요해 우듬지까지 정체는 없다. 해당 기록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나이테에 새김하고 어떤 외력에도 수정되지 않는 유일성을 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무라는 이미지는 착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며, 나무가 추구하는 성장(생존)은 주변 식물군과의 교감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사회성처럼 켜켜이 모이는 원을 지향한다. 나무는 필요한 만큼 수분을 섭취하기에 수원을 악화시키지 않는다. 나무가 갖는 이미지는 유익하고 선량하다. 거기에 더해 부피로 계량할 수 있는 형상적 질량은 무욕적 삶을 실천한 사상체다. 여기까지는 나무가 갖는 긍정성에 대한 예찬이다. 하지만, “우듬지 아래에서부터 아버지 허리는 쉽게 꺾였죠라는 시행부터 대상에 대한 전환을 예고한다. 우듬지허리는 특정한 부분을 지시하지만, 자연스럽게 사람의 행위로 이전된다. 사람이 나무를 심었지만, 어느 순간 나무가 현대인의 사회 활동에 지장을 초래한 것이다. 그런 나무는 가차 없이 가지와 몸통까지 전기톱에 잘려나간다. 몸통만 존재한 나무를 보면서 막막한 시절을 살아왔던 아버지들의 모습을 연상한다. 우듬지를 키워 든든한 나이테를 만들었듯 오직 가족의 안위를 위해 헌신한 아버지가 노쇠해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과 닮았다. 당당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언젠가부터 굳어진 근심이 지붕과 처마를 짓누르는 탓에 무릎관절은 시도 때도 없이 삐걱여 당신의 몸도 가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가 가지와 몸통이 잘려나간 토르소 같은 나무 덩어리와 같다. 성실하게 일한 대가로 가족의 안위가 든든했던 것처럼, 우듬지를 위로 키워 나이테의 속을 충실히 채워가던 나무, 우리의 아버지들과 닮은 것도 운명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갖는 노령층에 대한 경시 풍조를 몸통 잘린 나무를 통해 삼강오륜적 윤리 회복을 성찰하게 하는 문장이다.

 

오식도에서 신시도까지*

파도는 흐느낌이었고 갯벌은 그래도 행복한 농사였다

잊혀진 이름을신시댁이라고 불러준 것도 섬이었다

 

동이 트는방향으로 갈매기는 날고

서쪽으로 모든 노을이 꽃잎처럼 쏟아지면

당신의 불안을 캐내기 위해갯벌로 향했다

살아갈수록 언제 불어올지 모르는 태풍의 예고를 알면서도

익숙하다는 것은 위험한 동반보다 가까운 일상 아니던가

 

부안은 군산에 닿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고

해안은 바다로 나가려고 멈칫거렸지만

당신은 섬 그 자체로 살았다

바다 속 섬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 안의 섬이 된 어머니를 뒤늦게 알게 된 것은

바다로부터 나의 외로운 민낯을 확인할 때였다

*새만금방조제

-<, 어머니의 에필로그> 부분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을 보면 어딘지 모를 고독과 그리움 같은 낭만을 품고 있을 애수로 번진다. 조선의 시인의 , 어머니의 에필로그는 그런 인상적 이미지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세대를 떠안아야만 했던 어머니들은 섬은 물 위에 핀 꽃/ 가시 위의 꽃처럼 사방이 막다른 문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고단한 시간을 운명처럼 짊어져야 했다. 망망한 바닷속 에서 모든 것을 팽개치고 떠날 수도 없는 막막함에 절망하지 않았던 우리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마침 광활한 바다를 메운 새만금 간척지를 보며 상전벽해의 위용에 찬 감회가 아니다. 저 매립된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갯벌과 혹독한 고통을 마다치 않고 당신을 속박하며 살아온 어머니를 떠올린다. 새만금 방조제로 이 파괴되어 육지가 되어버린 신시도에 와 있다. 화자의 기억 속 신시도동이 트는방향으로 갈매기는 날고/ 서쪽으로 모든 노을이 꽃잎처럼 쏟아지던 환상적인 섬으로 기억한다. 그런 반면 어머니로 인한 아픔도 깊다. 섬이 에워싼 갯벌에서 어머니의 발목을 한시도 놓아주지 않던 거친 신시도의 바다가 잊힐 리 없다. 불쑥불쑥 엄습한 당신의 불안을 캐내기 위해갯벌로 향해야만 했던 불면의 밤과 어머니를 힘들게 한 빈궁은 이곳에서는 목숨 걸지 않고 되는 일은 없었다/ 인생이 꼬인 기분이 들 때마다/ 차라리 자신을 바다에 탕진하려고 악착같이 일어났다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막막한 그 자체였다. 태풍이 코앞에 닥친다 해도 생존을 위해 갯벌 노동을 멈출 수 없었던 어머니였다. 또한 신시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은 매번 갯벌로 내몰았다. 화자가 추억하고 있는 갯벌은 원망과 안타까움으로 비례 상승하여 한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섬과 갯벌을 바라보는 인식도 변화되어 이제는 낭만적인 여행지거나 피부 미용을 위한 장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뀐 현실을 보는 화자의 속내는 불편하다. 어머니의 생애가 곧 섬(신시도)이었던 과거는 아직도 생생하다. 매립되어 육지가 되어버린 신시도를 들러보며 착잡하기만 하다. 고통에 겨운 상처를 덮은 방파제 너머에서 일렁이는 파도소리가 아픈 기억들을 되살려놓기 때문이다. 방파제에 갇혀버린 신시도()를 보며 그토록 간절한 삶을 감당해온 어머니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사라진 섬 대신 스스로 섬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가슴속에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자도 이미 그곳의 섬이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부재한 섬이지만, 더는 외롭지 않다. 어머니의 섬은 영원히 화자의 가슴안에 본래의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친 환경에서도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은 강인하고 영원한 것이다.

 

하우스 문이 잠깐 열렸다 닫히는 동안

 

유예기간도 없이 찢겨버린 투명한 비닐들은 하늘의 폐활량을 가늠했다

 

아득하게 돌아가기엔 먼

빛조차 직립으로 분류되지 못했다

 

에민한 내 안의 무표정이 어머니의 굽은 척추를 지탱하고 있다

-<무너진 직립> 부분

 

 

 

<무너진 직립>에서 삶의 순간을 비닐하우스가 붕괴된 상황과 병치시켜놓았다. 비닐하우스가 온전치 못해 찢기고 기어이 직립의 힘으로 버텨주던 하우스 철 구조물이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수없이 드나들던 비닐하우스가 붕괴된 것처럼 강인했던 당신의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몸은 병실에 누워있지만, 마음만은 당장이라도 일어설 것만 같다. 그렇지만, 다인실에 입원한 환자들 상황이 제각각인 것처럼 일어서기 위해 몸을 눕힌 병실의 침상마다 서로 다른 불안이 선명한 것을 보며 시시각각 덮쳐오는 운명의 시간을 예감한다. 무너져 내린 하우스가 복구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듯 어머니를 바라보는 화자는 유예기간도 없이 찢겨버린 투명한 비닐들은 하늘의 폐활량을 가늠해봐도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붕괴된 비닐하우스 안의 작물이 생존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득하게 돌아가기엔 먼어머니에 대한 애잔함만 깊어진다.

 

구겨진 그늘 속에서 순간의 영원이 꿈틀거렸다

한 생애 딱딱한 그리움과 가슴 깊이 들여놓은 상처까지, 꽉 찬 고독을 끌어안고 세상에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우직하고 과묵한 돌멩이는

자신을 속박하거나 상한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웃자란 시간을 베어버리거나

 

밀어를 깨우는 눈물이었으니

 

무표정에 익숙해질 때 어색한 감정을 유예하지 못하고 피어나는 것이, 돌꽃이다

-<돌꽃 피다> 부분

 

시선과 닿은 순간도 시간의 축적은 진행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소멸과는 별개인 생성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여기에는 부정이나 긍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존재한다면 무수한 반동으로 모색한 활로를 스스로 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인 것이다. ‘돌꽃이라는 형상에 부여된 생명성은 지극함을 은유한 생명의 끈질긴 애착이다. 스스로 생명을 얻어 생존하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만든 사랑의 표상인 것이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돌꽃이다. ‘에 부여된 생명성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스스로 축적된 시간을 얻는다 해도 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불가능한 의 지극한 염원이 꽃의 신종으로 발현했다. 조선의 시인이 발견한 돌꽃처럼 우연한 삶이 없듯 자연도 그렇다는 걸 확인한다. 귀가 닳아 세상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눈과 얼굴이 세월에 풍화되어 온전치 못해도 옹골찬 기상은 꺾을 수 없다. 온갖 풍상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처럼 돌이 품고 있는 성정도 마찬가지임을 보여준다, 물결에 쓸려 떠내려가다 어딘가에 묻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묵묵히 보내야만 했을 의 생애가 삶과 다르지 않다. 조그만 이지만, 그 안에 담긴 자연의 이치가 오묘하듯 변화무쌍한 인간의 생애를 떠올렸을 것이다. “한 생애 딱딱한 그리움과 가슴 깊이 들여놓은 상처까지, 꽉 찬 고독을 끌어안고 세상에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는 단언은 풍상의 고초를 경험한 뒤에야 가능한 말이다. 살며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을 고난의 시간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현재를 의 형상은 증언한다. 그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거대한 바위였을 의 전생을 우직하고 과묵한 돌멩이는/ 자신을 속박하거나 상한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웃자란 시간을 베어내며 스스로 작아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난 뒤 평상심으로 피워낸 화엄같은 표정을 꽃으로 피워낸 것이다. 사람의 얼굴에서 살아온 내력이 보이듯 의 표면에 드러난 문양에서 자연의 비의를 읽을 수 있다. 봄에 피고 지는 꽃이나 돌꽃이나 다를 것이 없다. 다소 시차의 간격이 있겠지만, 영원은 없어 소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산을 넘으려는 늙은 해를 바라본다

역광을 발산하며 서녘의 구멍을 뚫고 있는 열아홉 시

 

처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대추는 하늘에서 익는다

 

노을의 눈꺼풀 속으로 제 숨 풀어놓는 초저녁

 

도무지 저 인기척 없는 형물

 

하늘 바가지로 꽃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한 생각으로만 하루를 넘기는 은밀한 화음花陰

 

막막이라는 그 수렁에 모든 세간을 수납한다

 

누구나 살면서 피눈물몇 동이쯤 쏟아내지 않았겠는가만, 세상의 창문이 나로부터 열릴 때 일상의 물음이 멍 자국을 증언할 것이다

 

밤의 영혼 속으로 풀벌레 소리는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달은 밝기를 더하며 내 안을 통과하고 있다

-<노을의 뼛속으로 어둠과 달이> 전문

 

하루를 살다 간 해를 상상해본다. 하루가 생애라면 하루살이와 다르지 않다. 쉽지 않은 시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노을의 뼛속으로 어둠과 달이>에서 산을 넘으려는 늙은 해를 바라본다라는 관점을 보자. 아침에 떠오른 일출이 노을을 머금고 산을 넘어가는 늙은 하루가 고달프다. 마지막 비명을 지르듯 역광을 발산하며 서녘의 구멍을 뚫고 있는 열아홉 시는 최후를 마감하는 존엄사적 비장미悲壯美를 더해 장엄하다. 24절기를 건너온 처서마저도 하루라는 말미를 알기에 마음이 바빠진다. 지는 해를 보며 탐욕한 시간의 허무나 무소유를 강요할 의도는 없다. 다만, 붉은 해가 하루 동안의 생애를 어둠에 내주었듯 막막이라는 그 수렁에 모든 세간을 수납한다는 말은 결국 인생살이가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이듯 탈탈 털려 떠나가는 해와 달의 시간도 인생과 같다. 어차피 해가 긴 하루를 지나 서쪽에 당도하듯 사는 것의 하루도 생의 여정으로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는 고통과 상응한다. 해와 달이 낮과 밤을 이루듯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도 안과 바깥으로 나뉘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퍼즐의 방식

 

창문을 오래 한쪽만 열어놓으면 새로울 것도 없는 풍경이 지겨워요

 

뚜벅뚜벅 구름이 걸어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머릿속에서 쑥쑥 불면이 자라나고 외면해도 창문의 자리는 완강하죠

 

암묵적인 서사라는 새로운 인사방식이 습관이 되기 쉬워요

 

지구의 자전처럼 적당히 불친절해 보세요

 

창 밖을 볼 때 슬프다는 감정 따윈, 월식을 피해 달아난 달과 같아요

 

엇갈린 방향으로 다른 피사체가 비친다면 양 눈을 뜨고 외눈으로 보는 착시와 다를 바 없어요

 

바라보고 싶지 않을 때의 마음과 바라보고 싶을 때의 창문이 서로 다르듯이, 매일 도달하는 문장이 너무 낯익을 때는 풍경을 환기시켜 보세요

 

주술 같고 지루한 반복을 이제 그만 끝내는 게 좋아요

 

반대편으로 창문을 열어보세요

-<반대편에서 창문 열기> 전문

 

관습이나 습관이나 다를 바 없다. 고정관념을 따른다는 궤에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관행처럼 따라 하던 것을 반대로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처음엔 혼란스럽겠지만, 어느덧 익숙해지고 말 것이다. 익숙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생각해낸 것이 익숙하지 않은 정반대의 행동을 해보자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지루한 시적 발상의 고통을 이색적인 방법으로 시도했을 때 사유의 파격으로 변별성을 강화시켜줄 것이다. 반복된 시어가 중첩성을 초래해 피로를 가중시킨다는 시론적 발상이 시작되는 지점은 유사성의 남발에서 오는 식상함의 다른 말이다. “창문을 오래 한쪽만 열어놓으면 새로울 것도 없는 풍경이 지겨워요/ 뚜벅뚜벅 구름이 걸어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머릿속에서 쑥쑥 불면이 자라나고 외면해도 창문의 자리는 완강하죠/ 암묵적인 서사라는 새로운 인사방식이 습관이 되기 쉬워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술 같고 지루한 반복을 이제 그만 끝내는 게 좋아요/ 반대편으로 창문을 열어보세요를 따라 해 보자. 매번 그런다면 따르는 혼란은 상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간혹 기존의 방식을 일탈해보자는 시 <반대편에서 창문 열기>는 신선하고 흥미롭다. 만약에 반대 방향으로 창문을 열어본다면 지금껏 볼 수 없던 풍경이 촉발한 사유와 맞닥뜨릴 것이다.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한 반성을 통해 다른 방식의 시도를 해보겠다는 의지의 피력으로 조선의 시인만의 시적 지향이다. 사실 이 시 전반은 시 창작의 언어적 한계에서 오는 고통이 만만치 않다는 자기 고백인 셈이다. “바라보고 싶지 않을 때의 마음과 바라보고 싶을 때의 창문이 서로 다르듯이, 매일 도달하는 문장이 너무 낯익을 때는 풍경을 환기시켜 보세요란 문장은 결국 한 편의 시를 위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보자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 창작되는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강박과 고통을 감당하는 작업이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포악한 바람에 한 시대가 쓸려가고 빗나간 맹세는 붉음을 개입시켰다

 

꾸다 만 꿈은 아주 선명하게 까치밥이 되어 달려있다

 

눈시울 뜨거운 저 생혈이 사무치듯 엉킨 것은

 

인생의 막후를 자백하는 감정

 

야윈 감정만 남아 입 없는 말들이 경계 밖을 떠돈다

 

여태 헛것과 바람둥지에 세 들어 살았던가

 

이미 멀리 와 버린 것들이 뒤척이는 가지 끝

 

쓸쓸한 그리움이 흑백 스냅사진으로매달려있다

-<문득 오래전, 까치밥> 부분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시적 화자는 현실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를 하고 싶어도 인기척이 사라진 골목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말해준다. 사람들의 관계가 개인주의적 단절을 유발한 현실을 핑계 삼고 부차적이라고 말해보자. 동일한 시, 공간에 살고 있지만, 공동체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없다. 개인주의적인 삶이 되레 편안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은 사라져야 할 불편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 가슴에 각인된 모든 것들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다행스럽게 멀지 않은 과거 아름다운 동행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나눔이라는 인정머리가 구들방의 온돌처럼 따뜻하게 데워주던 시절을 기억한다. “숨겨야 할 그 무엇도 없이 추위를 건너온 사람들이/ 일어서려고 몸부림치다 주저앉을 때 삐걱거리는 관절마저도 퇴행을 어쩌지 못했다는 자기 인식은 우리가 그토록 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쉽게 버려지지 않은 인정온정에 대한 사회 관계론적 사유의 또 다른 모습이다. 화자는 변질된 사회 현상을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원인을 악습에 갇힌 번민에서 찾고 있다. 지금껏 살아온 날의 반성과 전환점은 포악한 바람에 한 시대가 쓸려가고 빗나간 맹세는 붉음이라는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는 것으로 인식한다. ‘붉음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본성을 가리킨다. 자신이 살아온 날의 기억에 대한 복원을 의미하면서 우리가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들을 환기시킨다. 가슴에서 사라진 배려가 갖는 기억을 상기한다. 그것의 중심은 사람에 있었고 사랑을 실천하는 까치밥을 꿈을 통해 보면서다. 그 작은 배려가 삭막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이다. 감나무에 매달린 몇 개의 홍시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까치의 구휼미였다. ‘까치밥의 의미 속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는가를 자문해본다. 누구라고 특정하지 않은 우리라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과거를 낡은 것으로만 치부해선 안된다는 각성이 곧 인생의 막후를 자백하는 감정을 충동한다. 언젠가 끝이 나고 말 생의 치열함도 살자고 하는 일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아 있다면 헛것처럼 흘러가버린 바람둥지의 허망한 시간과 쓸쓸한 그리움이거나 흑백 스냅사진으로 언제든지 빛이 바래 사라질 것들이 전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라는 시간에서 사라져선 안될 것 중 하나가 이기적 탐욕이 아닌 까치밥같은 온정적인 사회의 가치임을 환기하고 있다.

 

소금쟁이가 남긴 파문이 자꾸만 따끔거린다

 

저지대를 탐색 중인 신호는 젖은 지층에 걸려 주파수를 이탈했다

 

잴 수 없는 수심은 거짓말처럼 얕았으나

웅덩이는 하늘과 바다를 임시로 연결하는 환승역이 되었다

 

두려울 때마다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달이 뜨면 나를 어떻게 할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래도 몇 개의 비밀만은 간직하고 싶었다

 

버드나무 허기진 그림자가 수면에 누워 화석처럼 굳어갔다

번지거나 스며드는 언어만 있을 뿐

흐르지 못하는

유속은 나를 휘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물고기들이 먼바다를 향해 헤엄치고 하늘로 떠나는 표는 이미 매진됐다

시나브로 웅덩이가 마를 무렵

길을 확장하는 포크레인 소리가 가까워졌다

-<웅덩이에 관한 소고> 전문

 

우리는 매일 달라진 환경을 접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겨우 한다는 것은 몇 년 전 풍경을 소환하며 추억담이라는 담론의 시간을 메꿀 뿐이다.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꼭 있어야 할 자연 상태의 환경마저 밀어버리고 인위적인 구조물을 장치해 기존과는 판이한 도시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닌 것들에 대한 경시는 오랫동안 적응하며 살고 있는 생명체들을 제거하는 수단이 된다. ‘소금쟁이도 그중 하나다.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 총총 하늘을 날 듯 뜀뛰기를 하는 모양새가 특별해 순수한 아이들 눈에 그만한 게 없었다. 수면 위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과 간간이 하늘로 날아 공간 이동하는 소금쟁이는 아이들에게 신비 자체였다. 거기다 작은 깨금발로 물을 딛고 서서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는 초능력까지 겸비했다. 위태롭게 물살에 떠내려가다 훌쩍 제자리로 돌아와 총총거리던 소금쟁이가 눈에 들어온 것도 어릴 적 추억 때문이다. 그 소금쟁이가 말라 가는 웅덩이에 갇혀 탈출을 시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더는 벗어날 수 없는 서식 환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년의 낭만을 상기시켜주던 소금쟁이의 위기를 통해 난 개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진전된다. 소금쟁이가 갇힌 웅덩이는 예전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던 두려움 가득한 물길이 있었다. 물가에서 녹음 짙은 버드나무도 무참히 뽑혀 누워버린 그곳은 생명체가 더는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포크레인에 의해 웅덩이가 사라지고 나면 번듯한 차량들이 도로를 질주할 것이다. 미물에 불과한 생명체가 환경에 대한 파문을 소요하고 있다. 화자가 갖는 환경적 인식은 그리운 추억에 대한 안타까움만은 아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목록들을 짚어가는 환경의식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의 실천행위이다.

 

낡은 벽지를 뜯어내니 여기저기 못 자국이다

헐거워져 빠져나간 것들과 아직 그대로 박혀 있는 멈춤의 시간이

비장한 연대를 이루며 통점으로 남아 있다

벽에 귀를 대자, 쾅쾅 아버지의 망치 소리가 들린다

 

충격에 저항한 것은 몸이 뒤틀리고

힘의 방향으로 뚫고 들어간 것은 콘크리트 벽 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옆집에서 쾅쾅 못 박는 소리조차

은밀하고 신비한 내 슬픔을 관통하고

불모의 터 같은 벽에선 암각화 냄새가 났다

왠지 불안했던 휘어짐의 각도들이 장도리에 꿰어 나오고

예전에 피었던 꽃들은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누름꽃이 되었다

세월을 마중 나온 상형문자 같은 목숨

 

허름한 옷과 중절모가 수직의 힘에 의지한 채

어떤 소문도 발끝의 힘을 빼는 동안 아버지의 곧은 등뼈는 차츰 휘어

유통기한이라는 녹물에 꺾이곤 하였다

 

가끔 불꽃 같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반대방향으로 균형을 잃고

어머니 가슴에 대못이 박힐 때면

벽지에 난무하는 꽃잎의 시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마다 죽은 새를 날려 보냈다

 

못 서너 개 빼내고 그 위에 새로운 벽지를 바른다

모란꽃 발등 아래 구름의 얼굴 씻기는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연장통에 들어있는 구부러진 못을 주춧돌에 반듯하게 펴

당신의 등고선에 어머니의 웃음을 걸어둘

추억을 못질하고 있다

-<아버지의 못> 전문

 

아버지의 못질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방편이다. 반듯하게 발라진 방안의 벽에서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못질이다. 차차 시간이 흘러 집 바깥에서도 못질이 잦아지셨다. 화자는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가족 구성원의 근엄한 존재까지였다. 하지만, “낡은 벽지를 뜯어내니 여기저기 못 자국이다/ 헐거워져 빠져나간 것들과 아직 그대로 박혀 있는 멈춤의 시간이/ 비장한 연대를 이루며 통점으로 남아 있다/ 벽에 귀를 대자, 쾅쾅 아버지의 망치 소리가 들린다는 지점은 아버지의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준다. 낡은 벽지를 뜯어낸 순간 감춰진 아버지의 본모습을 발견한다. 수없이 당신만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못을 박아야 했지만, 빈번히 실패하고 말았을 아픈 흔적이다. 아직도 못다 이룬 못질은 진행 중이다. 쉽게 박힌 못은 쉽게 빠지듯 강한 힘에 부딪혀 휘고 마는 못은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폐기되곤 했다. 그럴수록 감정을 더한 힘으로 밀어부쳤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었다. 까칠한 기분처럼 튕겨 나온 못은 애꿎은 장도리가 도맡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옆집에서 쾅쾅 못 박는 소리조차/ 은밀하고 신비한 내 슬픔을 관통하고/ 불모의 터 같은 벽에선 암각화 냄새가 났다는 이웃과의 분쟁을 기억하고 있다. 집의 경계를 뚫어버릴 기세로 가해지던 이웃의 못질마저 또렷하게 각인된 흔적은 유별한 시간에 대한 상형 문장이다. 그 안을 관통하고 있는 맥락 속 중심어는 목숨이다. 힘에 부친 생존을 연장하기 위한 치열한 아버지의 못질은 긴박한 삶에 대한 유서이다. 화자는 유서 같은 상형문자를 옮겨적고 있다. 거기에는 잘못 박은 못질이 어머니를 향해 가해질 때도 있었다는 통증 깊은 삶의 서사를 가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통증마저도 이제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무모한 아버지의 못질도 알고 보면 모란꽃 발등 아래 구름의 얼굴 씻기는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연장통에 들어있는 구부러진 못을 주춧돌에 반듯하게 펴/ 당신의 등고선에 어머니의 웃음을 걸어둘요량이었지만, 작은 소망마저 이루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의 추억을 관통하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월이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

 

조선의 시인의 시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잊고 살던 삶의 주어가 무엇이어야 하는 가를 생각해보았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누구나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사어가 되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진화론적 관점으로 사회 제반 현상을 바라보려 한 인식들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지만, 놓쳐서는 안될 사랑의 가치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나와 너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는 노정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다는 사회 가치의 중심에는 온정의 근본인 사랑이 존재해야 한다는 시적 담론이다. 시가 추구하는 이상은 형용한 문자의 현란한 부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도 소통의 수단이기에 담론적 가치는 현실에 부합하는 문장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조선의 시인이 추구하는 생명이 깃든 삶은 곧 시의 한 전형이란 것도 말하고 싶다.

 

 

박철영.jpg

 

박철영 시인

1961년 전북 남원 식정리에서 태어났고 한국방송대학교 국문과 졸. 2002현대시문학시 등단, 2016인간과 문학평론 등단. 시집으로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월선리의 달,꽃을 전정하다. 산문집으로 식정리 1961.평론집으로 해체와 순응의 시학, 더좋은 문학상 수상.시와사람편집위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숲속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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