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원리로 빚은 채움과 비움의 미학
- 이희국 시 세계 -
이 택 화
시인. 문학평론가
우주의 원리는 복잡하고 다양한 질서로 운용된다. 그러나 우주의 질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오묘해 보여도 단순함을 바탕으로 한다. 우주는 채움과 비움의 질서를 바탕색으로 깔고 있다. 채우고 비우는 거대한 캔버스가 우주이다. 하늘에 그리고 지우는 구름처럼 다채로운 삼라만상이 드러나고 숨겨지는 향연이 우주의 모습이다.
이희국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채움과 비움을 중심으로 시 세계를 펼치고 있다. 그의 5편의 시인 「틈새」, 「흙내를 맡으면」, 「아파트」, 「당신은 다녀가고」, 「파랑새는 떠났다」에서는 채움과 비움의 경험이 상반되거나 보완하여 드러난다. 그는 우주의 채우고 비우는 단순한 원리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형상미를 시 속에서 구현해내고 있다.
시인은 우주의 원리가 순행 되는 지점에 서서 사물과 인물의 동정(動靜)을 예리하게 관찰해낸다. 그의 관찰은 사색의 문을 깊게 연 통찰로 이어져 좋은 시라는 결과물을 얻어내었다. 우주의 원리를 체득한 이희국 시인의 시야는 넓고 깊어 시상과 시어가 풍부하다. 이러한 풍부한 시상과 시어는 그를 독창성 높은 시의 경지로 올려놓는 자양분이 되었다.
1. 채움 : 세워지고 부서지는 빛
세상은 삼라만상의 채움으로 아름다워졌다. 인간의 채움에 대한 욕망의 실현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편리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의식주의 해갈에만 집중하지 않고 더 나아가 고차원의 채움을 갈망했다. 이렇게 갈망하여 얻은 채움으로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등은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채움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부터 지성의 실현까지 많은 영향력을 끼쳤고, 놀라울 만한 결과물들을 쏟아내었다. 세계화의 추세가 정보화 사회로 나아가게 하면서 발전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렇게 채움은 지금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채움의 역기능은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인간들은 채움의 욕망에 빠져 충족과 만족을 모르는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 개인과 사회는 욕망의 충돌이 빚어내는 갈등으로 몸부림을 치며 앓고 있다. 그들은 타인이나 사회와의 조화를 잃고 채우는 데만 급급해 삶의 목표와 과정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헤매고 있다.
이희국 시인은 「아파트」에서 채움이 지나쳐 인간의 본성과 가치관을 잃어가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시인은 소중한 가치가 집중된 풍요를 창출해야 아름다운 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이 시에서 제시한다. 그는 이 시를 감상한 독자가 행복의 직결로가 막힌 채움에서 벗어나 건강한 채움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랄 것이다.
채움은 시공간성, 고정성, 드러남, 변화, 상징을 통해 특색이 드러난다. 필자는 「아파트」를 분석하여 이희국 시인의 시 세계에서 채움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저것은 선반
직선으로 올라가 차곡차곡 누웠다
7층에 누워
삐꺼덕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침대 밑에 침대
화장실 아래 화장실
천장과 바닥이 하나로 맞물린 위아래
시루의 시루떡처럼 켜켜이
천층만층구만층
세상의 빛은 LED
우리들의 보금자리는 선반
안색이 다른 문장
곡예를 준비하는 무대
우리들은 자꾸만 허공으로 치솟는다
흙내 없는 저 지평선
- 「아파트」 전문
물질적 채움은 시공간을 차지한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주거의 대표로 생활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또한 아파트는 재산 증식의 수단이어서 정신적 채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인은 아파트값이 비싼 대도시에 살기를 원하고, 아파트 평수를 넓히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나 한중진미(閑中珍味)를 누리는 공간이 아니다.
이희국 시인은 아파트를 ‘직선으로 올라가 차곡차곡 누’운 ‘선반’으로 묘사하고 있다. 선반은 ‘물건을 얹어 두기 위하여 까치발을 받쳐서 벽에 달아 놓은 긴 널빤지’이다. 이는 아파트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공간적 관점의 표출로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부각한다. 그는 아파트의 형상을 ‘침대 밑에 침대 / 화장실 아래 화장실 / 천장과 바닥이 하나로 맞물린 위아래 / 시루의 시루떡처럼 켜켜이 / 천층만층구만층’이라고 표현하면서 아파트를 사람이 살아야 할 시공간으로 적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파트가 ‘흙내 없는 저 지평선’으로 자연과 역행할 때 겪을 수밖에 없는 부정적 집의 구조에 대해 밝히고 있다.
채움을 갖춘 물상들은 고정형 물체와 유동형 물체로 나눌 수 있다. 건물 같은 고정형 물체와 동물 같은 유동형 물체 사이에 식물처럼 고정성과 유동성을 가진 물체가 있다. 아파트는 고정적 구조를 가진 건물이다. 아파트의 고정성은 인간의 행동반경을 제약하여 닫힌 삶을 살게 한다. 아파트 생활을 하는 인간들은 층만 다를 뿐 같은 자리에서 자고, 같은 자리에서 먹고, 같은 자리에서 싸는 고정적 행동을 한다. 이러한 인간들은 선반 위에 올린 물건과 다를 바 없다. 시인은 「틈새」, 「흙내를 맡으면」, 「파랑새는 떠났다」에서 보여주는 채움의 아름다움과는 다르게 이 시에서는 채움의 추함을 들춰 우리들에게 지나친 채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채움은 숨기거나 없애는 비움과 반대로 드러내는 특성을 가진다. 시적 화자가 바라본 아파트의 모습은 ‘직선으로 올라가 차곡차곡 누’운 모습 → ‘7층에 누워’ 느끼는 모습 → ‘지평선’처럼 군집을 이루고 있는 아파트들의 모습으로 거리감을 드러낸다. 시적 화자와의 거리는 중거리 → 근거리 → 원거리로 이동을 보여준다. 시인은 ‘안색이 다른 문장’이나 ‘곡예를 준비하는 무대’처럼 ‘우리들은 자꾸만 허공으로 치솟는다’고 표현하여 현대의 아파트 모습을 내면을 채우지 못하는 무질서로 보았다. 그는 근거리에서도 내면의 충족을 채우지 못하고, 원거리에서도 외양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현대의 아파트를 비판하고 있다.
내면이든 외양이든 채움을 가진 삼라만상은 생겨나는 순간부터 사라지는 순간까지 변화를 겪는다. 채움은 빛에 의해 보이고 어둠에 의해 사라지는 사물의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채움은 세워지고 부서지는 빛이다. 빛으로 세웠다가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부수어지다 어둠 속으로 소멸되는 것들이 채움들이다. 채움은 소멸로 가야 하는 운명을 지녔기에 사랑을 하다 사랑을 잃고 우는 소녀처럼 우리들은 채울수록 더 큰 허망함을 느낀다.
시인은 채움에 대한 통찰로 허공으로만 치솟는 ‘선반’ 같은 아파트가 ‘곡예’를 한다고 표현하였고, 인간적 정서가 메마른 ‘지평선’ 같은 아파트들이 ‘삐꺼덕거리는 소리’를 낸다고 묘사하면서 시인의 내면을 표출하고 있다. 그는 낡아지고 있는 아파트의 변화를 포착하여 진정으로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시는 사람들이 부서지고 사라질 채움들을 끌어안고 허무하게 무너질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이 시의 시어들은 채움과 관련해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품고 있다. ‘선반’은 부족한 공간을 가지므로 가난이나 빈곤을 상징한다. 이는 아파트의 풍요나 부를 뒤집어 이면의 문제점을 제시한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불안, 불만, 불행, 갈등, 소란 등을 상징한다. 이는 아파트로 인해 빚어지는 많은 고통을 의미한다. ‘LED’는 태양의 상징인 광명, 생명의 근원, 에너지, 열정, 젊음, 힘과는 반대로 가짜 빛이므로 어둠, 생명의 상실, 빼앗긴 기운, 절망, 늙음, 무기력 등을 상징한다. 이는 진실과 정의가 상실된 개인과 사회를 만드는 부정적 힘이 된다. ‘곡예’는 위험, 무서움, 두려움, 위태로움, 절박함 등을 상징한다. 이는 현재 아파트가 내포하고 있는 불안 요소를 의미한다. ‘허공’은 무(無), 공(空), 허무, 상실, 체념, 비관 등을 상징한다. 이는 사라질 아파트의 미래 모습과 채움의 허기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을 의미한다. ‘흙내’는 자연, 생명의 원천, 모성애, 풍요로움, 안정감, 인간성, 인간미 등을 상징한다. 이는 아파트 문화로 인해 피폐해진 자연과 사람이 회복해야 할 사랑과 정을 의미한다.
2. 비움 : 감춰진 변화의 그림자
우주의 원리 안에서 비움은 모든 것들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비다’라는 사동사 어간 ‘비우-’에 명사형 어미 ‘-ㅁ’이 붙은 말로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공간에 사람, 사물 따위를 들어 있지 아니하게 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와는 다르게 우주의 비움은 시야에 드러나지 않으나 수많은 드러남을 준비하는 감춰진 변화의 상태이다. 이곳의 비움은 정지된 비움이 아니라 채움의 끝점에서 채움의 시작점 직전까지의 비가시적 상태를 의미한다.
우주의 빈 공간은 지혜로 채워져 있고, 탄생을 준비하는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다. 하늘이라 불리는 허공처럼 욕심과 집착이 사라진 그곳은 무소유의 표본으로 조용하고 쓸쓸하면서 밝고 곱다. 이곳은 채우려는 실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그림자처럼 머무는 장소이다.
실체의 그림자들만이 모양 없이 일렁거리는 비움의 공간은 변화의 모체(母體)이다. 이 변화의 모체는 불교에서의 무(無)와 공(空)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침묵으로 일관한다. 불교에서 무(無)와 공(空)은 삼라만상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형체를 육감으로 인지할 수 없이 감춰지고 가려져 볼 수도, 맡을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느낄 수도, 초감각으로도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무(無)와 공(空)이 삼라만상으로 드러나면 색(色)이 되면서 우리는 육감으로 이들을 의식하고 인식할 수 있다. 비움의 상태는 단순하지만, 일정한 형태를 지니지 않으므로 상반되거나 모호한 다의적 개념들로 해석이 가능하다. 만물의 본성인 공(空)이 연속적으로 인연을 맺으며 다양한 만물로 존재하게 된다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나 색즉시공(色卽是空)처럼 상반된 있음과 없음이 하나로 풀이될 수 있고, 그사이에 다양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
이희국 시인의 「당신은 다녀가고」는 비움의 미학인 시간의 흐름, 확장, 숨김, 변화, 상징 등이 잘 드러나는 시이다. 비움은 속으로 잠겨 있거나 숨어 있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많은 잠재성을 지닌다.
벌겋게 녹슨 못을 빼려다
못대가리가 부서져 뺄 수가 없자
반쯤 튀어나온 못을 두드려
아예 보이지 않게 박는다
그 위에 감쪽같이 스티커를 붙인다
나만 안다
- 「당신이 다녀가고」 전문
이 시에서 시간의 흐름은 ‘당신이 다녀간 흔적’인 ‘못’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 ‘못’의 변화 과정은 (녹슬지 않은 못) → 벌겋게 녹슨 못 → 대가리가 부서져 버린 못 → 반쯤 튀어나온 못 →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못 → 스티커로 감춰진 못으로 나열할 수 있다. 시에서 ‘녹슬지 않은 못’에 대한 표현은 없지만 처음에 박힌 못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은 시의 내용을 통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녹슬지 않은 못’이 ‘스티커로 감춰진 못’이 되기까지의 시간의 흔적과 시공간의 변화는 채움에서 비움으로 가는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
비움의 공간에서는 형체가 없이 텅 비어 있기에 확장되는 비상의 환희를 맛볼 수 있다. 사람들은 깊게 비울수록 더 채울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넓어져 자유롭고 편안해한다. 그들은 한정된 채움의 공간에서 벗어나 올바른 질서를 세운 후 무한한 가능성을 줄 수 있는 상상의 공간으로 만들어 간다. 이희국 시인은 비움의 확장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촉진할 줄 아는 작가이다. 그는 ‘못대가리가 부서져 뺄 수가 없자 / 반쯤 튀어나온 못을 두드려 / 아예 보이지 않게 박는다’는 시구를 통해 ‘당신의 다녀간 자리’가 벽 속으로 더 깊게 확장됨을 보여준다. 이는 비움의 확장이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진정한 자신을 찾아내는 방법임을 알려준다.
비워지는 모든 것들은 형체에서 벗어나 통합의 장소에서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모습으로 숨게 된다. 자연 속 비움의 공간은 수많은 형체가 녹고, 부서지고, 갈아지고, 썩고, 분해된 것들이 섞인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비운 것들의 공간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공간이며 통합의 장소이다. 에너지들은 숨겨진 곳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지도 시기하지도 싸우지도 않는다. 그들은 순리대로 놓인 자리에서 멈추고, 풀린 자리에서 흐를 뿐이다. 이 시에서 ‘아예 보이지 않게 박힌 못’은 ‘스티커’ 뒤에 숨겨진다. ‘숨겨진 못’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썩어져 형태를 잃을 것이고, 벽을 이루는 물질과 혼합되었다가 사라질 것이다.
비움의 장소는 변화가 잠시도 멈추지 않는 침묵의 공간이다. 침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잠하여 정적(靜寂)이 흐르는 상태인데,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움의 상태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이다. 소리가 멈춰진 고요의 상태에서 인지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그 경지를 말하기에는 인간의 언어도 불편하고 인간이 지닌 이해의 용량도 부족하다. 다만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상상력으로 이해와 수용의 맛을 살짝 맛볼 뿐이다. 이 시에서는 못이 변해가는 과정이나 못의 자리가 스티커의 자리로 바뀌는 장면에서 비움과 채움의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변화미를 읽어낼 수 있다.
비움의 의미를 담은 시어들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녀간 당신’은 시적 자아인 ‘나’만 아는 대상이다. ‘당신’은 시간 따라 퇴색되어 가는 추억 속의 인물일지라도 잊히지 않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한때 벽에 박힌 못처럼 가슴 속에 각인된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사랑하는 신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욕망으로 대체될 수도 있으며, 사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못’은 ‘당신’과의 추억이나 흔적이다. 이 시에서 추억이나 흔적은 남에게 드러낼 수도 없고, 드러내서도 안 되는 숨기거나 감춰야 할 과거의 사랑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바라본 사랑은 불편해서 제거하고 싶은 과거의 발자취이다. 스티커는 과거의 행적을 가릴 수 있는 새로운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희국 시인은 ‘나만 안다’고 밝히는 시적 자아처럼 이어져 있어 아름다운 세계의 고리를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시로 엮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시인의 안목이 높은 만큼 새로움을 찾아 시를 쓰므로 독자에게 감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는 비움의 세계를 허무와 탄식으로 장식해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독자를 체념과 무기력을 바탕으로 한 허무와 비판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3. 우주적 채움과 비움의 미학
우주(宇宙, space, universe, cosmos)는 시간과 공간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나무위키>의 설명에 의하면, 상앙의 스승이었던 시교(尸佼, BC 390 ∼ BC 330)가 저술한 시자(尸子)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상하사방왈우, 왕고래금왈주(上下四方曰宇, 往古來今曰宙).’로 위아래와 사방은 ‘우(宇)’로 공간을 의미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는 ‘주(宙)’로 시간을 의미한다. 스페이스(space)는 좁은 의미의 우주로 지구 대기권 바깥인 우주 경계선인 상공 118㎞의 검은 공간을 일컫는다. 유니버스(universe)는 넓은 의미의 우주로 세상 전체나 삼라만상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말한다. 코스모스(cosmos)는 우주의 본질로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지식백과에 따르면, 우주란 행성, 별, 은하계 그리고 모든 형태의 물질과 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시공간과 그 내용물 모두를 통틀어 이른다. 현재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지름이 930억 광년으로 추정된다. 우주의 나이는 대폭발 이후 약 137억 년이 지난 것으로 본다. 우주가 시작된 이후 우주는 팽창하였으며, 현재도 증가 추세로 팽창하고 있다.
우주는 채움과 비움으로 존재하며 채우고 비우면서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채움과 비움은 양과 음의 균형에 맞춰 우주의 섭리로 작용한다. 이러한 우주의 원리에 따라 이희국의 시들을 살펴보면,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진행성, 반복성, 순환성과 관련된 미적 성취가 드러난다.
(1) 진행되는 채움과 비움
우주는 생겨난 이래 잠시도 멈추지 않고 팽창하며 사방으로 퍼지고 있다. 우주의 앞을 향해 나아가는 진행성은 같은 모습을 한 삼라만상이 없음을 시사한다. 모든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으로 삼라만상을 볼 수 있다면. 똑같은 모습을 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꽃봉오리가 열려 꽃송이가 되는 순간들을 촬영한 영상을 감상하면서 한 송이의 꽃이 모양을 달리하며 피는 모습에 감탄한 적이 있다. 한 송이의 꽃은 정지된 화면으로 보면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시공간을 채우고 비우면서 진행되는 꽃의 개화는 한 세계를 새롭게 하였다. 우주의 진행성은 잠시의 틈도 없이 채움과 비움으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삼라만상은 우주의 자식들로 유전자가 동일해 우주의 원리를 품고 있다. 이들은 시공간 속에서 쉬지 않고 진행하는 열차에 몸을 싣고 변화미를 창출해낸다. 「틈새」는 우주의 원리인 진행성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이희국 시인은 우주의 원리와 교감하여 봄을 맞이하는 감격을 이 시에서 내밀하게 표출하고 있다.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말
단단해 보이는 벽도 천천히 녹아들다 보면
온통 적실 수 있다는 말
봄이 온다는 것은
한 줌의 입김들이 모여
두터운 얼음벽을 녹였다는 것
세상이 온통 어둡고
숨이 막힐 듯 바람이 세차면
바위를 뚫고 피어난 저 가냘픈 잡풀을 보리라
바위 밑에 깔린 풀 하나
돌멩이를 치우니
허리 휜 잡초가 튀어나왔다
틈새가 사라지니
이제 막 봄이 도착했다
- 「틈새」 전문
이 시에서는 ‘틈새’라는 비움의 상태에서 ‘잡초(잡풀)’가 튀어나와 채움의 상태로 전환되자 새로운 세계인 ‘봄’이 시작된다. 시인은 전체적으로 비움에서 채움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우주의 신비한 원리를 체감하게 한다.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새’는 비움의 시공간이다. 이러한 ‘틈새’를 ‘한 줌의 입김들이 모여 / 두터운 얼음벽을 녹’이고, ‘천천히 녹아들다 보면 / 온통 적실 수 있는’ 새로운 채움의 시공간이 마련된다. 새로운 채움의 시공간인 봄은 ‘단단해 보이는’ ‘얼음벽’이고, 봄의 길을 막아서고 있는 ‘바위(돌멩이)’이며, ‘세상이 온통 어둡고 / 숨이 막힐 듯 바람이 세’찬 겨울과 대조를 이루어 생명력이 넘치고 환희로 빛난다.
‘기회’는 진행성을 내포하는 말이다. ‘한 줌의 입김’은 ‘얼음벽’이라는 부정적 채움에서 봄을 알리는 ‘바위를 뚫고 피어난 저 가냘픈 잡풀’이라는 긍정적 채움을 열어가는 힘이다. ‘잡풀’은 ‘틈새’에서조차 생명력을 키워나가는 강인한 이미지를 가진 존재로 우주의 진행성을 표출하기에 적절한 소재이다.
(2) 반복되는 채움과 비움
꽃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한다.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반복한다. 식물도 동물도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성은 채우고 비우는 일의 연속으로 우주를 지탱하는 기본 축이 되고 있다. 우주는 반복적 채움과 비움의 원리가 있어 지탱될 수 있다.
우주의 축소판인 인간도 간결한 배치인 채움과 비움의 반복성 안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반복적으로 음식을 먹어 위장을 채우고 소화하여 위장을 비운다. 또한 인간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쉬기를 반복한다. 반복적인 행동은 인간을 단순하게 만들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로 작용한다.
요즘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는 복잡다단한 사회구조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우주의 원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은 가장 단순하고 간결함을 추구하여 단순성, 반복성, 물성 등을 특성으로 절제된 형태 미학과 본질을 추구하는 콘셉트라고 지식백과는 설명하고 있다. 콘셉트(concept)는 ‘어떤 작품이나 제품, 공연, 행사 따위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주된 생각’인데, 미니멀리즘의 콘셉트는 단순하면서 편리하고 안정감을 주면서 편안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니멀리즘은 반복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복잡한 형태의 삶을 반복한다면 지쳐서 병이 들거나 기력이 쇠진하여 죽음을 맞게 된다.
인간의 사랑은 멀리서 바라보면 미니멀리즘처럼 단순하다. 사람은 사랑의 열정에 흔들리다가도 안정되고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 사랑을 파랑새처럼 놓아준다. 「파랑새는 떠났다」는 중첩 구조로 파랑새의 모습을 극명하게 조명하고 있다. 이러한 중첩 구조는 우주의 반복성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 이희국 시인의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때는 좋아하던 가수였다
그녀는 내 마음의 파랑새였다
청춘의 험산을 넘을 때 위로를 주던
마음의 원두막이었다
그녀의 노래를 따라 장미가 붉은 언덕길을 오르면
뭉게구름이 따라오곤 했다
어느 날부터 TV에서 사라진 그녀 목소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그녀를
어느 여행지 주점에서 만났다
표정은 변함없이 간절했지만
그녀의 노래는 예전처럼 가슴을 뛰게 하지 않았다
미소에도 향기가 없었다
눈을 감으니 예전의 그녀가 떠오른다
광야의 바람처럼, 슬픈 소녀의 기도처럼
때로는 사나운 짐승의 밤 울음처럼
영혼의 경계를 넘나들며 환호를 삼키던
목소리 늙고 깃털조차 뽑혀
날아갈 하늘, 반짝이던 무대가 쓸쓸하다
이제 나의 파랑새는 떠났다
- 「파랑새는 떠났다」 전문
파랑새는 희망, 행복, 기쁨, 믿음을 상징하는 새이다. 희망, 행복, 기쁨, 믿음은 사랑을 해야 얻을 수 있다. 채움은 사랑의 소유를 중심으로 하고, 비움은 사랑의 상실을 중심으로 한다. 단순한 시각으로 살피면, 사랑의 유무가 채우고 비우는 힘이다. 「파랑새는 떠났다」는 사랑의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의 구조는 사랑했을 때의 모습(1연) → 사랑이 사라졌을 때의 모습(2연) → 사랑했을 때의 모습(3연) → 사랑이 사라졌을 때의 모습(4, 5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마음의 파랑새’이었고, ‘청춘의 험산을 넘을 때 위로를 주던 / 마음의 원두막’이었으며, ‘그녀의 노래를 따라 장미가 붉은 언덕길을 오르면 / 뭉게구름이 따라오곤 했’던 ‘가수’를 ‘한때는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부터 TV에서 사라진 그녀 목소리 /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그녀를 / 어느 여행지 주점에서 만났’으나 ‘그녀의 노래는 예전처럼 가슴을 뛰게 하지 않았다’고 상기한다. 다시 시적 화자는 ‘광야의 바람처럼, 슬픈 소녀의 기도처럼 / 때로는 사나운 짐승의 밤 울음처럼 / 영혼의 경계를 넘나들며 환호를 삼키던’ ‘예전의 그녀’를 ‘눈을 감’고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목소리 늙고 깃털조차 뽑혀’ 있는 그녀를 쓸쓸한 무대에서 떠나보낸다.
이희국 시인은 사랑의 성쇠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반복성을 시에서 드러냄으로써 인간 삶의 반복적 구조를 밝히고 있다. 시인은 상반되는 사랑의 채움과 비움이 우주나 인간의 단순한 특성임을 시의 반복적 구조로 보여준다. 그는 사랑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임을 깨닫게 해 사랑의 효용성과 가능성을 통찰할 수 있게 한다.
(3) 순환되는 채움과 비움
자연의 순환은 우주를 유지하는 원칙이다. 자연의 순환은 삼라만상의 채움과 비움이 연계되어 지속해 돌아갈 때 유지된다. 우주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놀라울 정도로 돌고 도는 순환으로 숨을 쉬는 거대 동물과 같다.
흙은 우리의 주변에서 우주의 순환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지구의 유기물과 무기물은 흙으로 빚어졌다가 흙으로 흡수된다. 인간도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흙의 순환 속에서 인간도 순환한다. 인간은 흙의 입자로 흙의 지문을 가졌기에 살아 있을 때도 흙을 보면 정답고, 죽어 있어도 흙 안에서 편안하다.
「흙내를 맡으면」은 흙의 순환을 보여줌으로써 만물의 연속성과 정체성(identity)을 파악하게 한다. 이희국 시인은 흙이 관계 연결을 시키는 매개체임을 상기시키면서 인간관계를 회복시키는 계기를 갖게 한다.
흙은 따스한 자궁이다
어둠의 젖줄을 물고
봄기운에 머리를 내미는 새싹들
틈을 비집고 흙을 이고 나온다
세상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흙은 그들의 여린 다리를 잡아준다
생애 첫 문을 열어주는 땅
봄 햇살에 좁은 산도가 열리고 있다
나는 숲의 진통을 알지 못하는데
산과 들이 연둣빛으로 꿈틀거린다
보이지 않는 허공의 계단을 딛고
우뚝 일어서는 소나무, 잣나무, 메타세쿼이아
사계절 맥박이 뜨거운 저것들도 모두
산통을 겪으며 키가 자랐다
소리 없는 실금이 번져가는 10월이 오면
한해살이 키 작은 잡초들은
잘 여문 씨를 슬며시 땅의 자궁에 묻어두고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흙의 살을 먹고 자라 다시 흙으로 회귀하는
흙의 부스러기들
숲의 이별식이 시작될 것이다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내 몸에도
흙내가 난다
- 「흙내를 맡으면」 전문
「흙내를 맡으면」에서는 봄부터 10월까지 흙에서 일어나는 생산과 소멸을 다루고 있다. 이 시는 흙과 연관시켜 채움과 비움의 순환성을 보여준다. 흙은 만물을 소생시키고 이를 거둬 다시 소생시키고 거두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대지의 순환이 흙을 기름지게 하고 새로 태어나는 만물을 생기 나게 한다.
‘흙은 따스한 자궁’을 가진 대지의 어머니이다. 이 시는 대지의 어머니인 흙이 봄을 맞아 새싹들의 머리를 내밀게 하고, ‘그들의 여린 다리를 잡아’주어 ‘생애 첫 문을 열어’주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땅은 따뜻한 사랑으로 ‘봄 햇살에 좁은 산도’를 열고 ‘산과 들이 연둣빛으로 꿈틀거’리게 한다. 또한 흙은 ‘사계절 맥박이 뜨거운’ ‘소나무, 잣나무, 메타세쿼이아’도 ‘산통을 겪으며 키’를 키운다. 이러한 흙의 채움들은 생산을 위한 거룩한 행위이다.
‘소리 없는 실금이 번져가는 10월이 오면 / 한해살이 키 작은 잡초들은’ 땅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이때부터 ‘흙의 살을 먹고 자라 다시 흙으로 회귀하는 / 흙의 부스러기들’인 ‘숲의 이별식이 시작될 것이다.’ 이러한 흙의 비움들은 소멸을 위한 기름진 행위이다.
‘잡초들은 / 잘 여문 씨를 슬며시 땅의 자궁에 묻어’둔다는 표현 속에서는 땅의 순환을 읽어낼 수 있다.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내 몸’에서도 우주의 순환성이 표출된다. 우주가 순환하는 것은 순리를 찾아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시인은 ‘흙내가 난다’는 제목을 통해 자연성을 인식하고. 순환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시키려는 의식을 보여준다. 그는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는 에리카 라인의 저서명을 상기시킬 만큼 순하게 살다 순하게 흙으로 돌아가고 싶게 한다. 필자도 흙을 오염시키는 채움의 버러지가 아니라 흙을 순화하는 ‘흙의 부스러기’가 되어 제대로 채움과 비움을 실천하고 싶어진다.
이희국 시인은 채움과 비움의 중앙에 서서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 시인은 채움과 비움의 희극도 채움과 비움의 비극도 사유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시를 읽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그는 양쪽에 시선을 넓게 두고 얻어낸 폭넓은 생각을 시에서 펼쳐내고 있어 이를 감상하는 자를 즐겁게 한다.
시인은 고정된 시선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필자는 이희국 시인을 더 나은 거주지를 찾는 여행자의 예리한 눈빛을 가진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너무나 짧아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가 시의 비행을 더 넓게, 훨씬 더 깊게 하여 좋은 시를 파랑새로 날려주기를 바란다.
뜨거운 시의 심장으로 달구어진 시인은 배고프지 않다. 그런 시인은 비우고 비워 더 많은 것을 담아내기에 몸은 말라도 마음은 풍요롭다. 이렇게 채워진 시인의 마음은 채움과 비움의 미덕을 생의 해답으로 삼아 실천하는 에너지가 된다.
시인의 깊은 비움은 자유로운 공간의 채움이다. 이곳에서는 새 질서가 세워지고 새로운 꿈들이 봄꽃처럼 피어난다. 오묘한 우주의 원리를 품은 이희국 시인은 물욕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 시달려 향기를 잃은 자에게 흙내 나는 봄 향기로 다가갈 것이다.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 1년 수료.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석사과정 수료. 충북대, 충북과학대 출강 역임. 중등교사 33년 역임. 새한국문학회 운영위원장 역임. 한국미래예술총연합회장, 미래시학작가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 펜클럽 회원. 출판사 <아름다운 만남> 대표. 미래시학대상, 새한국문학상, 탐미문학상, 포장, 국무총리상(봉사 부문) 등. 저서: 시집 6권, 소설집 2권, 수필집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