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영 문학평론가

조회 수 260 추천 수 1 2024.10.01 10:05:54

 

 

                                  인간성 회복 전략으로서의 주제의식 변주

                                        -고동주 수필론

 

                                                                                                     윤지영

                                                                                              수필가.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1988경남신문신춘문예와 동년 한국수필지 등단을 거치면서 고동주 수필쓰기는 본격 시작되었다. 세월 속의 숱한 경험으로 이념 요인의 각진 모를 알맞게 깎아낸, 둥근 정서의 시대, 쉰을 넘긴 나이였다. 수필을 중년의 글이라고 못을 박은 혹자의 견지도 무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근거가 없지도 않는 것이, 수필은 성찰의 과정을 통해 자기 향상을 가져올 수 있으며 또한 그런 내용이 담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우기정, 읽으며 생각하며, 1994, 7월호. p.38)으며 관조의 경지에서 인생의 향기를 더해주고 성찰의 고양을 주는”(같은책, p.43)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인생경영 시스템 구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점에 이르러 쓴 수필이 수필다운 면모에 더욱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중년에 이르러 시작된 작자의 쓰기 작업은 수필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그 효용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말은 수필다운 수필이 현 사회에 미치는 순기능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일컫는 것으로써 다운이란 의제의 성립은 장르 특성의 준거가 됨은 물론이다. 그 으뜸 자리에 내면적 설득력을 놓을 수 있다. 그렇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희로애락이다. 고동주 수필은 독자와의 공감대 구축을 위해 일상에서 발생한 감정의 유로에서 소를 뽑아, 자체의 설득력에 무게를 싣고 있다. 불투명한 사고를 논리화하고 개념화하려고 부러 애쓰지 않는다. 수식어를 동반한 문장기교를 가능한 배제한 내면적 언표로써 자연스레 전달하는 기법이다. 현장에서 찾은 그 길들여진 언어들은 확고한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작자는 등단생활 25년 동안 10여 권의 수필집을 상재하였는데 그것을 1, 2, 3기로 대별1)해 볼 때 시기별로 주제의 특성이 반복되거나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작품의 전반적 의식의 궁극적인 지향성은 순환의 섭리에 따른 인간성 회복으로 응축할 수 있다. 여기에 배면음악 같은 것이 자연(바다)이다. 자연은 각 작품의 영상에 적절한 주석을 달아주기도 하고 그 이미지를 풍부하게는 역할도 하며 때론 프레임 내에 숨겨져 있는 뜻을 해석하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는 동양적인 자연관에 부합하여 보면 이러한 현상은 진부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조실부모한 고립무원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은 거기에 있으니까와 같은 타자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될 육친같은 존재로서 삶의 원천이며 구원의 대상으로 해석된다. 본고는 기존의 평설에서 언급되지 않은, 통시적 관점으로 주제의 추이를 살펴볼 것이다. 체험을 주축으로 하여 씌어지는 수필은 시간적으로 서사적 과정을 통해 전개되며 공간적으로는 사회적 총체성을 통해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세계관 형성 및 통시적 변화

  ⑴ 1기 수필 - 자연관에 기초한 생존의식

  고동주 수필은 자연에 기초한 유년 회상과 과거적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자연은 개개의 물체이자 실체이며 사물의 존재방식이다. 인간 역시 자연 속의 한 구성요소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이 산출하는 모든 예술에는 자연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문학 소재들에 있어 자연이 차지하는 위치가 절대적이었던 이유는 자연을 통해 존재의 자아와 세계관 표출이 가장 적절하기 때문일 게다. 자라온 환경이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변방이거나 섬()일 경우 자연의 저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질서와 인내를 오랜 기간을 거쳐 내공화시킨다. 대개 아름다움으로 미화되지만 때론 비정하거나 혹독한 시련일 수도 있는 자연(),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속에 안겨 살아온 작자의 입장()이고 보면 절로 어떠한 원칙이나 법률에 의지하지 않은 순수자연법을 터득했다고 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자생적으로 만든 천부적인 권리(self-preservation), 작자는 스스로 부여한 자격에서 하등의 거리낌도 없이 일생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았을까. 자연에게서 부여받은 권리를 박차버리면 말살을 자초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인은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조하고 이용하려는 서양의 자연관을 좇아 삶을 과학화시키고 있다. 오늘날의 온갖 병폐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자연에 의지해온 삶이라서인지 자연에 위배되는 소량이라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초기수필에서부터 표출되고 있는데 이런 의지가 삶의 동력원임을 파악하는 데 어렵지 않다.

고동주 수필 초기작은 주로 감수성을 자극하는 정적靜的이면서 서정적 편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물론 자연적 소재가 근간이 된 까닭이다. 화려한 색채의 광휘, 수식어가 아닌 정제된 색채로서 사물의 움직임, 바람소리 하나라도 사실적, 심미적 묘사까지 포착·관찰한다. 그 애상적 공간에 현실적 아픔을 투영시키는데, 이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가 바다이다.

 

……나의 유일한 보호자인 숙부께서는 조실부모한 조카가 객지의 자취방에서 얼마나 떨고 있는지 걱정이 되셨던 것. 그래서 군불 지필 땔감을 장만하셨다. 손바닥만 한 조각배에다 그 나무를 싣고 얼어붙은 밤바다를 다섯 시간도 넘게 노를 저어오는 일은 쉽지 않다. 숙부님은 갈바람이 휘몰아치는 파도를 헤치고 손발이 시려도, 가슴이 얼어도 정의 불씨 하나를 다독거리면서 노를 저으셨다.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어우러진 깜깜한 바다에서 노에다 물을 감아 당기고 밀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군불> 일부

 

  보편적으로 바다는 고난의 상징으로 문학에서 이해되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 밤바다는 부성의 메타포다. 그도 그럴 것이, 섬을 떠나 육지의 추위에 홀로 맞서고 있을 조카에게로 전달되는 땔감의 이동로가 밤바다이기 때문이다. 바다의 이미지를 신화의 원형적 관점에서 파악하자면 그것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며 영혼의 신비와 무한정한 사랑의 수혜자이다. 바다의 원형성과 무조건적 내리사랑은 동일성이다. 작가는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어우러진 깜깜한 바다에서 노에다 물을 감아 당기고 밀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라고 하였는데 이때 숙부의 생각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만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린다면 그 답은 물론 거대한 물고기가 된다. “갈바람이 휘몰아치는 파도는 패배에 당면할 때 오히려 패배를 수용하면서 한층 더 성숙해가는 정신력을 극대화시키려는 장치이며 숙부조카사이의 장애물 은 도전과 불굴의 인간 의지를 유도하는 은유로 읽을 수 있다.

  작가의 수필에는 숙부가 자주 등장한다. 특이점은 숙부의 이미지는 ()’이 아닌 행동이다. 조카를 가르치고, 꾸중하여 성공으로 이끈 그것이 바로 묵언효과로 보인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영감이 긴 시간 한바다에서 사투를 벌일 때 바다는 말없이 그의 시련을 실험했다. 부성의 상징성은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조카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다. 훗날 귀가할 조카의 손에 거대한 물고기’(이루어진 꿈)가 들려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숙부의 밤바다는 혹한 속에서도 뜨겁게 출렁이며 땔감을 날라댈 수 있었으리. 문학 언어의 미적 질료는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작자는 글 말미에 나 자신도 그런 세정世情에 물들었음인지 아직도 군불을 지피지 못하여 외롭게 떨고 있는 다른 가슴을 찾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는 표면적으로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으로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평화롭고 따스한 공간에 대한 그리움의 은유이다. 조건없이 주는 사랑, 바다는 작자에게 있어 세파를 헤쳐나갈 수 있는 무한한 원천이며 상상력의 보고寶庫이며 생존의 의미이다. 이렇듯 작자에게 있어 바다는 통영시인 유치환의 시구처럼 저 푸른 해원의 노스텔지어의 손수건과 같은, ·객관적 상관물로 끊임없이 전수필의 지평 아래 수맥으로 흐르고 있다.

  바다에서 생성된 다양한 일화들은 서정적 회감回感에 의해 주제가 된다. 회감이란 기억과 회상·추억 등의 말로 쓰이지만 E. 슈타이거는 이 말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융합을 나타내려 했다. 내면을 행하는 회상의 작용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를 문학적 감성의 고유본성으로 동일화시키려는 것이다. 소재로 취한 객체의 대상과 자아라는 주체의 융합을 의도함으로써 세속성에서 한 발 비낀 여여如如한 삶을 추구하려는 의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양상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동양적 자연관에서 비롯된다.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조하고 이용하려는 서양적 자연관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인위를 가하는 것에 부정적 자세를 취했다. 즉 자연을 이용하기보다는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옳다는 사고이다. 아래 글은 자연을 이용하여 자연이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수술 자국이 아물었어도 조개의 몸 안에 들어온 이물질과의 싸움으로 이상 분비가 생기고 이 분비물이 핵을 서서히 둘러싸게 되면 진주층이 만들어지는데 그런 아픈 시련이 2년을 넘어야 한다.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어야만 하나의 진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진주는 인어의 눈물방울이라고 예부터 전해온다.

시술실로 나와서 뗏목과 부표가 떠 있는 바다를 다시 바라보니 그 밑에 달려 있는 수많은 진주조개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아픈 이야기> 일부

 

  ≪노자老子에 의하면 자연은 스스로 그냥 있음이다. 영어에서의 자연의 기원은 태어나다(nascor)’에서 나온 ‘natura’이다. 그리스에서도 또한 태어나다, 생기다(physis)’로 해석되는 것을 볼 때 자연이란 원래 개념은 스스로 생기는 것을 뜻함으로써 인공적인 규칙이나 습관인 ‘nomos’의 반대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여인들이 좋아하는 오리지널 진주는 담수성 연체동물에 의해 만들어진 보석이다. 외부입자(진주핵)가 외투막 안으로 침투하면 세포는 그 입자에 붙어서 주변에 동심원상의 진주층을 형성하는데 작자는 이 과정(2년 소요)에 따른 생태계의 각 부분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섬세함을 보여준다. 몸 안으로 이물질을 받아들인 조개의 아픔은 물론이고 보석으로 성숙하는 진주핵의 신음소리까지 듣는 마음의 귀를 열고 있다. 이 글은 수술 자국은 아물었어도 조개의 몸 안에 들어온 이물질과의 싸움”(<아침 산책길>), 즉 인고를 조명하고 그 인고의 결실을 주제로 다룬다. 한 알의 진주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바다(모성)라는 서식처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또한 바다의 보석은 생명체의 지난한 고통 뒤에 얻어진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의도이다. 작자는 인위성과 개별성을 거부한다. 인위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자연적 사물·현상의 유기적 성질로써 문제의 답안을 제시한다.

  신춘문예 당선작 <동백의 씨>에서 한 편의 새드 무비를 연상한다. 수필의 궁극적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주어 감화시키는 데 있으며 주제의식의 구현에 있다. 그래서인지 고동주 수필 평설들에서 동백의 씨는 자주 거론되는 텍스트이다. 이때 평자들의 눈은 주로 동백의 씨에 맞춰져 있다. 사촌 누이가 오빠(작자)에게 줄 뱃삯을 마련하는 매개물이 동백씨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에서 바다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기왕의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운 논의를 가로막는 벽이 될 수 없을 터. 휴가를 맞아 온 고향에서 느낀 것은 인정 부재에 따른 외로움·배고픔이었다. 귀대하던 날, 여비도 없이 나룻배에 올랐을 때 열세 살의 어린 사촌 여동생이 뛰어오며 오라비를 부른다. “동백의 씨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팔아 갚겠다는약속하에 이웃에서 빌린 돈이다. 선창으로부터 멀어져가던 뱃머리가 돌려진다. 한 번 떠난 버스는 되돌아오지 않지만 뱃머리는 얼마든지 돌려질 수 있다. 바다의 마음(물결)은 조건 없이 생성·전개되는 일체의 사랑이 아니던가. 자연 조화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체, 곧 인간성을 포함한 천지간天地間의 만물·우주의 마음까지 포함한 바다는 그렇게, 가난하고 외로운 청년의 눈물을 어루만져 주었다. 자연을 몸에 체득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현덕玄德이라 표현하는데 노자는 이것을 지극히 높은 덕은 인위적이 아니므로 덕이 덕같지 않다, 덕 같지 않은 덕이야말로 참다운 덕이다.’라고 하고, 장자는 모든 성인聖人들은 자연의 세계에 합일함으로써 극치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것은 크나큰 긍정의 세계에 의존하는 것으로, 고대 동양인의 자연관에서 보이는 신·인간·자연의 삼자가 내면적으로 결부된 양상이다. 내리사랑에 다름아닌 바다는 인간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한다.

  바다를 모정으로 간주할 때 그것은 작가의 심리적인 소산인 까닭으로 그 분석과 해석에 심리학이 응용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를 흔히 정의 문화라고 일컬어 왔다. 자본주의 사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은 모르지만 예전 우리는 정으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아직도 정의 요소는 일반인의 심리를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 ‘모정’ ‘우정’ ‘인정과 같은 어휘적 표현뿐만 아니라, ‘정든 임’ ‘정 떨어진 놈’ ‘정든 고향등과 같이 정과 관련한 단어의 사용맥락도 다양하다. 고동주 수필 또한 바다의 정은 무시할 수 없는 문학적 언어이다.

 

정을 싣고 저만치 떠나는 배의 확성기는 <목포의 눈물>이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라도 흘러나오면 석별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는다.

<뱃고동 소리> 일부

 

  또한 바다의 도량度量을 언급하거나, 바다의 선물을 끝없이 선사하면서 그것이 부모심과 동일성임을 주지한다.

 

무엇을 던져도 그저 삼킬 뿐 토할 줄도 모른다. 때때로 거센 풍랑을 일으키지만 스스로 잠재우는 도량이 있다.

<만선의 깃발> 일부

 

바닷가 바위언덕이 절벽이고 수심이 깊어 해수욕장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바다 밑에서 해삼이며 해초를 뜯어올리는 소박한 수확의 재미는 신선한 감격이기도 했다.

<고향 빛깔> 일부

 

  “때때로 거센 풍랑을 일으키지만 해삼” “해초등과 같은 먹을거리를 끝없이 제공해 주는 부모의 넓은 도량에 비유되는 바다, 작자에게 있어 그것은 고향회귀를 함의함으로써 초기수필에서부터 강렬한 흡입력을 발산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부대끼고 산 그 갯가의 풍경이 운무에 휩싸인 바다의 모습같은 명상”(정목일,<한려수도에 꽃핀 抒情>, 바다에 실려온 이야기, 해설, p.199) 시간에 펼쳐질 때는 임의 숨결이며 역사이면서 동백꽃의 입술이며 물새와 백로의 어울림”(<내 고향 통영>)으로 다가와 자아와 세계와의 화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자비한 인간에 의하여 중태에 빠져버린 바다”(후기의<그 바다>)와 직면할 때는 격노하는 해일처럼 감정의 출렁거림을 보이는데, 이는 바다를 죽이고 있는 인간의 이기를 객관적 입장에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다.

  그렇다. 바다는 이미 변질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언젠가부터 소득에만 골몰한 고향사람들은”(<자애의 섬>) 바다를 돈으로 환산하게 되었고, “불법인 줄 알면서 불법어로 인구가 자꾸만 늘어나는”(<바다의 불한당>) 상태에서 패류양식이니 어류축양이니 하고 한때 금노다지라도 캐내는듯 하더니 시름시름 앓고”(<스릴있는 꿈>)있는 환자꼴이 되어 갔다. 작자가 동양의 나폴리라는 별칭에 걸맞은 통영만 살리기 대책에 부심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꿈꾸듯 점점이 조화롭게 흩어진 섬들을 감싸주는 청옥靑玉빛 질펀한 바다에서 언제나 자애로움을 느끼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바다의 훼손은 외로움의 깊이만큼 고향이 그리운”(<思鄕>) 원인이며 불안이다. 작자는 우리의 삶의 양태가 조속히 자연이라는 근원적 시공간으로 흡수, 질서화되기를 바라기에 사유의 중심축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그 바람은 바다의 원형보존에 대한 희구로써 표현되고 있다. 표현이 진술과 다른 점은 의미를 구속하거나 결정하지 않기 위하여 먼저 언어에서 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를 고집하여언어를 나의 것이 되게 하려고 구속하는 진술과 달리 를 낮추고 대상을 높이면서 설득력을 의도하고 있다.

 

  ⑵ 2- 옛담화를 통한 방안 제시

  수필의 초기작이 자연(바다)과 모심을 동일시하는 천일합일天一合一 사고를 중시하였다면 2기작은 인간중심의 감성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작가가 처해 있는 환경에 의한 변화로 보아진다. 당시 작가는 민선 시장 직책을 맡아 서민들의 생활터 곳곳을 누비고 다니던 때였다. 공무 수행 중이지만 글쓰기가 습관이던 시장市長의 눈에, 그 모든 현상은 메모지에 기록되고 사유의 시간에 수필화된다. 행복이……≫(1998)의 표제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이 해당 책은 각박한 세파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서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공감대는 문화사회적으로 작자와 독자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도 있으나 작자의 의도에 의해서 형성될 수도 있다. 어떤 사건에 연관된 일화, 사물의 내부적 기질, 사계가 주는 사색, 부조리한 사회 문제를 남망산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시민과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듯, 샛터시장에서 상인들과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듯”(서문) 담아낸 것이다.

2기 수필에는 인간성에 관련한 주제가 많다. 청소년을 상대로 효를 강조하기 위해 작자는 부모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사람이면 다 사람이냐>)으로 간주한다. 기독교 신앙과 사상에 입각한 관점으로 엷어져가는 효의 덕목을 강조하는데, 기실 이 문제의 근원이 기성세대임은 재론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어른의 언행을 답습하며 성장하는 아이들이기에 아이의 문제는 어른의 문제이며 학부모, 학교, 사회가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한 아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만 해도 그렇다. 이 아이는 매일 엄마의 수하에 의존하여 등하교를 했는데 한 날은 아이 생일준비를 하느라 마중을 나가지 못했다. 혼자 하교하던 아이가 변을 당했을 때, 작자의 글은 애도 차원에서 끝내지 못하고, 문제의 근원을 짚어 보는 데 중점을 둔다. “이 아이의 죽음은 과연 누구의 책임입니까? 난폭운전을 한 운전기사입니까? 아니면 과잉보호를 했던 극성 어머니입니까?”(<자가용 속의 아이들>) 좀더 효과적인 납득기법으로 설의법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때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작자는 나름 그 대안으로 예화 한 편을 들고 나온다.

 

그런 소식을 접하자 인공부화로 온상에서 길러진 재두루미가 떠올랐습니다. 재두루미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방생을 했는데 1시간도 못되어 길에서 차를 피할 줄 몰라 달리는 차에 깔려 죽어버린 사건과 무엇이 다릅니까?(같은 글)

 

  곱게 자란 아이와 온상의 재두리미를 비유하여 독자로 하여금, 광야로 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고 온실로 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된다는 진리를 인식시킨다. 독자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수필도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유익한 내용이라도 끝까지 읽기 어렵다. 당시 한국은 IMF 후유증으로 죽지 못해 사는 서민들의 눈물이 흥건하던 때였다. 암행 시찰을 나간 시장市長의 눈에 세 가족이 한꺼번에 실직을 당하고 낭패스런 나날을 보내는”(<어떤 슬기>) 이웃이 보이고, “매일 평균 150여 개의 기업이 도산하고 1만여 명의 실업자가 쏟아지고”(<신선한 충격>)있는 뉴스가 들린다. 작자는 가정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가정의 구심력을 주부로 보고 여성의 지혜를 당부하고 나섰다.

 

아내는 가정 경영자 역할 외에도 남편 비서, 가정교사, 시부모 자원봉사자, 간호사, 어머니 등 18역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러한 가사노동은 별 생색도 나지 않고 그렇다고 빛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를 기쁘게 살려면> 일부

 

……애정없는 진수성찬보다 김치찌개 하나에 애정을 섞어서 만드는 여인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여인> 일부

 

  따옴문장만으로 공감할 여성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작자는 독자의 심리를 잘 알기에 이쯤에서 구수한 입담(예화)을 발휘한다. “며느리 세 사람에 대해 시험보던이야기 속에 메시지를 감추어 호소력을 높이고 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들을 모아놓고, 볍씨 한 알씩을 나누어 줍니다. 그랬더니 큰며느리는 그 자리에서 버립니다. 작은며느리는 까먹습니다. 셋째는 그 볍씨로 올가미를 놓아서 새를 잡습니다. 그 새로 달걀을 바꿉니다. 달걀은 닭이 되고, 닭은 돼지가 됩니다. 돼지를 불려서 소를 사고, 소를 길러서 농토를 삽니다.

<어떤 슬기> 일부

 

  혹자는 아는 이야기라고 일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재미있지 않은가. 여성들이 속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곧 그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들, 그리고 대상이 되는 공동체 구성원에 따라서 예화를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호소력을 높인다. 이야기의 순기능은 독자 자신도 모르게 글쓴이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기억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마법 같다. 어찌보면 냉엄하게 느껴지는 일상생활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그로인해 발생되는 제반 문제를 푸는 해결책으로 딱딱한 훈시보다는 옛날이야기(신화 및 민담)를 통한 고언이 더 먹힐 수 있다. “어느 부자가 임종 직전에 세 사람의 종을 불러놓고 새끼를 꼬라고 했다.”라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 글은 공직자의 성실함을 언급하기 위한 장치이다.

 

무엇 때문에 새끼를 꼬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던 세 사람은 (……) 한 사람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새끼를 꼬았으며 다른 한 사람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새끼를 꼬는 듯하면서도 시간만 낭비를 해 버렸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짧게 대강 꼬고 말았습니다. 새끼를 다 꼰 뒤에, 주인이 엽전 궤짝을 내어주면서 방금 꼰 새끼줄에 엽전을 꿰어가라고 했답니다.

<성실하게 꼰 새끼와 엽전> 일부

 

  따옴 글의 착실한 일꾼은 반드시 그 보답을 받게 된다는 주제를 낳고 있다. ‘새끼 꼬기라는 친근한 노동을 통해 성실함이라는 삶의 진리를 말하고자 한다. 수필이란 원래 무미건조하거나 복잡하기만 한 인간사에 흥미와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에 의해 불투명한 사고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여 인간 개체간의 상호 의미전달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좋은 수필이란 화려한 수식으로 그럴 듯하게 쓰인 가식으로 포장된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조곤조곤 짚어 독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해야 한다. 이 시기에 쓴 수필 중에는 노인에 관련한 글도 적지 않은데, 주로 건강한 노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도 예외없이 비유법을 쓰고 있다.

 

미꾸라지만 있는 곳은 그 성장이 느리고, 메기가 들어 있는 곳은 우량 품질로 잘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메기가 들어있는 곳에서는 미꾸라지가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운동을 하기 때문에 소화기능이 좋아져 먹이를 많이 먹습니다. 그러니 활동하지 않는 미꾸라지보다 품질이 좋아지기 마련이겠지요.

<미꾸라지 교훈> 일부

 

  백 세 시대에 도래한 오늘날의 6,7십대는 노인도 아니다. 그러나 주민번호만을 수용하여 맥을 놓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따옴글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활력소가 노화를 억제한다는 예화를 들어 활동력과 건강은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예화로써 주장을 역설한 이런 형식에는 두 가지 문학적 충동이 내재해 있다. 하나는 직접화법으로 말하기 곤란한 작가의식(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우회적으로 표출하려는 교술적 충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수필이 지배하는 풍자의 논리처럼 판에 박힌 인과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고자 하는 유희충동이다. 소설에서 쓰일만한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공감대를 자극하는 기법이다. 작가는 여기서 마음의 건강을 간과하지 않는다. “베푼 사람에게는 베푼 액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축복이 돌아”(<남을 돕는 축복>)간다는 견해로써 동년배들에 여유로운 삶을 유도하고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들을 상대로 일생에서 후회되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을 간추려 보니 좀 더 베풀 걸, 좀 더 용서할 걸, 좀 더 즐길 걸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는 기사를 필자도 읽은 적이 있다.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은 넉넉한 마음과 건강한 육신에 기초하는 것으로 본 작가는 여기에 말()조심을 보태고 있다. “험담하는 입으로 칭찬을 하든지 차라리 노래를”(<험담보다는 칭찬>) 부른다면, “이웃끼리 동료끼리 장점을 찾고 그 장점을 칭찬해 주는 분위기”(<장점 찾기>)기가 자연스레 조성될 것이고 가슴속의 욕심을 덜어낼 수만 있다면”(<행복>) 건강한 장수를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병적 노화를 노력으로 최소화하여 노년기의 삶의 질을 극대화시키는 모습을 지척에서 직접 목격하여 해답을 찾은 경우도 있다. 아래 글은 구순의 연세에도 열정을 쏟아내는 고향의 노화백에 관련한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그래서 늙지 않는가 봅니다. 새벽을 걷어낸 찬란한 아침 햇살과 그 햇살이 반짝이는 바다에 감동되어 화폭에 옮기는 순간, 화백의 뇌는 얼마나 유연해지고 탄력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늙지 않는 비결>

 

  감정은 늘 신체에 대해서 반사운동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안다면 긍정적인 사고로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물과의 정신적 교감, 일에 삶의 가치를 부여하려는 정신은 육신의 나이를 밀어낸다. 작가의 긍정적 사고는 걸출한 문화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된 예술의 고장”(<마음의 풍요>)에서 체화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꼭 예술활동이 아니더라도 끝까지 함께할 생산적인 일 한 가지에 매달릴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일회성의 삶이 인생의 바다에서 고장을 일으켜 좌초될 것인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인가. 이 화두를 흥미롭게 풀어나간 2기 수필은 인간성 회복의 지평으로 확대되고 있다.

 

  ⑶ 3- 자연심상을 통한 자아성찰

   민생현안에 관련한 소재로써 다소 교시성을 드러내던 2기 내용이 3기에 접어들면서 자연에 준거한 인간성 회복 실천을 도모하는 양상이다. 생명의 유일성과 삶의 일회성에 관련한 모색으로 점철된 이 시기 수필은 고희라는 연령과 맞물려 천착해야 한다. 경물보다는 자연을 빌어 자기초탈과 속세이탈을 꿈꾸며 마모되고 상실된 인간성 구축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로 돌아가서 소박을 지키다가 자연회귀의 진리를 내세우는 노장老莊사상과 흡사한 이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연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이지만 그 수많은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인간을 돌본다. 작가가 포착해 낸 자연의 언어는 세련성을 요구하지 않는, 자연 상태의 정서나 신앙심의 분출로 해석된다.

  수필집 모두冒頭 글을 보자. ‘가을소묘’, 이 제목만으로도 후기 수필의 주제를 작자의 삶의 궤적과 밀접한 연관성으로 유추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의 색깔을 선호하였을 법하지만 이제 사물의 외양을 좇지 않는 시선이 흙은 오래된 낙엽임을 알아차린다. 낙엽이 흙이 되어 재생을 꿈꾸는 소리를 마음의 귀로 들으면서 ! 환원의 마술사라고 감동을 한다. 이어지는 글들도 다르지 않다. 감동의 강도가 젊은이의 그것과는 확실한 차이를 드러낸다. 통영 산양면 달아 언덕에서 바라본 노을을 이토록 황홀한 줄 미처 몰랐다.”(<저녁놀>)는 것만 해도 그렇다. 통영에서 일생을 보낸 작가가 그 장면을 처음 보았을 리 만무하지만 마치 집나갔던 탕아가 고난의 세월을 견녀내고 귀향한 듯 감격해마지 않는다. 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매사 감각이 둔해진다는데, 노을에 한해서는 더 예민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묻는다.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슬픔 같은 이 자문의 해명을 소설가 박완서의 산문으로 들어본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 없음 때문이다. 인간사의 덧없음과,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아아, 그러나 너무도 지엄한 분부, 그리하여 알아듣고 싶어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산문 <두부>

 

  집착과 이기를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는 노년기에 노을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는 것은 반성성찰의 부재로는 부족한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일생일사一生一死의 철칙이 절감되는 시기, 동년배(이 작품을 썼던 때)의 소설가가 노을을 통해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라는 알게 된 황혼철학처럼 노수필가도 노을 앞에서 내 안의 노을은 지금 바다 너머에서 타고 있는 저 노을처럼 단순하지 않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노을은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과 끝없는 회한을 불러일으키고 바다가 배경일 때 그것은 서정적 비애를 부추겨 심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좁히는 장치가 된다.

노을처럼 펼쳐진 회한장면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단연 숙부이다. 전언했듯이 작가의 수필 모태가 되는 숙부의 존재는 단순히 양육자차원이 아니라 자아형성 시기의 조카에게 훌륭한 인성 교육 수혜자였다. 초기수필에서 장작을 싣고 바다를 오간 숙부가 후기수필에서는 고등학교 때보다 더 과거로 돌아간 모습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철부지 소년은 숙부의 사랑을 감지할 수 없었고, 숙부는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조카를 방치만 할 수 없어 한 날은 작정한 듯 책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타이름이 먹혀들지 않자 극단의 처방을 택한 것이다.

 

종아리를 때리는 매보다 마음을 때리는 매가 그렇게 아플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다시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며칠 후, 숙부께서는 인근 도시로 나가서 불태워버린 것과 똑같은 책을 구해주셨다. 그때부터 게으름을 피우던 습관이 내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팔월이 다 가던 날>

 

  바람직한 자녀교육에 관련한 이론을 공부했을 리 만무한 촌부이지만 몸에 상처를 내지 않고 마음을 움직여 반성을 유도하고 있다. 이로써 조카의 가슴에 답이 생성된다. 이날 숙부의 묵언 매 덕분에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었고 노령화되면서부터 숙부를 향한 사모의 정이 더 간절해지는 느낌에 젖는다. 슈테판 클라인의 회상효과에 의하면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난 과거보다 어린 시절을 더 많이 기억한다고 한다.(시간의 놀라운 발견, 웅진지식하우스, 2007. p.161) 어린 시절의 두뇌는 더 많은 기억을 입력하고, 이런 초기의 기억들이 세월이 흘러도 전혀 망각에 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작자의 기억 속에서 세월을 딛고 살아난 숙부의 존재는 사고형성의 주요인자가 되었으며 묵언교육 지침은 사람의 도리를 알게 했다. “숙부님이 어둠 속에서 지고 온 장작개비로 지핀 군불, 그 불씨는 나이 들수록 선명해지고 뜨거워지는 느낌”(<아침 산책길>)이기에 50년도 훌쩍 넘은 고교시절의 금전출납부를 간직할 수 있었다. “가난한 숙부로부터 학비가 조달되었으니 한 푼이라도 아껴써야 한다는 결심과 언젠가는 이 채무를 변제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가졌다. 그러나 당신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숙부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후, 나는 애통함과 허전함 때문에 이명耳鳴증이라는 병을 얻기까지 했다.”(<빛바랜 금전출납부>)라는 술회는 우리에게 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제 태울 것 다 태워진 깨끗하고 순수한 노을, 그런 내 삶의 노을을 갖고 싶다.”라고 작자는 말한다. 여기서 내 삶의 노을은 성찰로 해석할 수 있다.

  수필이 자기반성의 문학이듯이 후기 수필에서 자기반성이 자주 드러나고 있다. 이 중 ()’에 관련한 글이 적지 않다.

 

공직을 수행한다는 구실로 쏟아버린 실수의 말은 이미 돌이킬 수가 없다. 초야에 앉으니 그런 헛된 말들이 나를 행해 화살이 되어 날아올 때가 더러 있다. 외면으로, 배신으로, 보복으로까지, 고스란히 회한으로 남는다.

<대우받는 바위>

 

  따지고 보면 주변의 사건 사고는 말이 발단이 된 경우가 많다. 가톨릭에서는 대침묵이라 하여 피정의 방법으로 말조심을 실천하고 불교에서는 묵언수행이라 하여 정진의 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말조심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그의 문화인류학 4부작 가운데 침묵의 언어를 집필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실제로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의한 의사소통은 8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몸짓, 기타 등등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변이 인간관계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 있는 직설화법은 가능한 삼가는 것이 좋다(2장에서 살펴본 예화기법은 설교훈시명령질타 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효과가 높다). 좋은 말도 나쁜 말도 모두 마음이 만든다. 마음밭에 거친 잡초가 많을 경우 그것은 입으로 나와 타자를 해롭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제하에 작가는 마음의 잡초 제거에 신경을 쓴다.

 

조용히 침묵하고 회한에 젖어 있을 때 어디선가 바위 틈새에서 샘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찾아 자리를 옮기니 철부지 때 해수욕을 하고 올라와 몸을 헹구던 올담샘이었다. 반가워 손을 담그자 시원한 촉감과 함께, 홀랑 벗고 같이 첨벙대던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더러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과의 사이에도 일찍부터 잡초가 길을 막아버렸으니 소식을 알 수가 없구나.

<길을 막는 잡초>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은 옛모습이 아니었다. 변모한 것은 산천이 아니라 공간이다. 주민들이 모두 대처로 빠져나가고 두어 가구만이 명맥을 유지하는 섬에 잡초와 바람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잡초를 소재로 수필을 쓸 때 대개는 끈질긴 생명력에 주목한다. 핍박과 천대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생존법칙과 장수의 상징으로 문학적 형상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작자는 보편적인 잡초의 기능을 전복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제거해야 부정적인 부분(탐욕과 이기)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잡초는 걷어냄으로써 옛정의 복구를 희구하고자 하는 매개이다. 인간이 자연을 빌어 성찰하려는 데는 인간과 자연과의 불가분리적 관계성과 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자신의 책임을 묻고 자각하려는 동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 동기를 제대로 읽어야 해법을 찾게 된다. 마음의 잡초는 수양으로써 제거가 가능하며 잡초가 제거된 맑은 정신에 깃드는 것은 감동이다.

  감동은 모든 문학의 시종始終이다. 미시적 요인에서 거시적인 관점으로 나아갈 때 감동의 힘은 배가된다. 작자는 어느 날 병원에서 친절한 간호사를 목격한다. 이 작은 화소는 작자의 잠재된 기억력에 닿아 1970년대 한국의 실상을 보여준다. 2차 대전 후 경제부흥으로 3D업종을 꺼리는 서독에, 우리정부는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는 대신 14천만 마르크를 빌린 적이 있다. 조국을 일으킬 종잣돈이었다. 이때 현장에서 연설을 끝낸 대통령과 근로자가 함께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은 정황을 묘사하면서 이 순간의 분위기, 그 감동이 우리 경제 회생의 시발점이 되었음”(<코리아 엔젤>)을 상기시켜 준다. 동족상잔이란 비극적 국면 후에 참담해진 조국의 슬픈 역사의 서사를 비극적 정서로 고조시켜 감동을 자아내는 기법이다. 크고 작은 생활 주변에 감사한 일”(<어떤 소망>)은 마음에서 비롯되기에 그 어느 것 하나 따지고 보면 감사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견해이다.

  늙어갈 수록 자연에 대하여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자기가 가서 살아야 할 집에 점점 친숙감을 갖는 징후라고 프로이드도 말했다. 고동주 수필의 후기작은 생애의 유일성을 직시하고 순환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세에다 방점을 찍고 있다.

 

  4. 나오며

  주지한 바와 같이 고동주 수필은 1, 2, 3기를 통틀어2) 자연이 인간에게 수여하는 혜택과 은총을 바다=()의 동일성으로 그려냈다. 자아를 인식하고 사회를 인식하고 조국을 인식하게 하는 노스텔지어로써 고독과 결핍을 치유하고 그러면서 인간미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려는 의도이다. 수필은 누구나 접근 가능한 문학장르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듯 나름 신념을 갖고 현장에서 얻은 소재로써 의미있는 주제를 뽑아냈다. 소재와 맞닥뜨렸을 때 당장 쓰기작업을 시도하지 않았다. 한 편의 수필을 써야겠다.’는 생각에서 붓을 들지 않고 이 소재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붓을 들었다는 것이다. ‘써야겠다.’는 의무항과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절대항은 차원이 다르다.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절박한 몸부림만이 관습화와 자동화를 파괴할 수 있다.

  통시적 접근과정에서 드러난 주제의식 변화는 가장 자연스러운 떠남돌아옴의 여로형旅路型 구조를 보였으며 이는 신화형성과정을 닮은 모태귀환 양상이다. 신화학자 조지캠벨(Joseph Campbell)은 신화적 모험과정을 통과제의의 절차에 대응하는 떠남 통과 회귀, 형태로 나타내는데 이를 빌어 고동주 수필세계를 도형화하면 다음과 같다.

 

1; 고향()에서 보낸 유소년기

2; 공무公務 수행으로 바쁜, 육지에서의 중년기

3; 다시 고향 회귀를 준비하는 노년기

  ⓐ→ⓑ→ⓒ의 움직임 과정은 계절 제의가 자연의 로고스에 참여함으로써 실재實在에 이르려는 의도적 행위이다. 거대한 자연계의 순환체계를 이루는 우주 속에서 인간은 소우주이며 이 같은 순환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 이는 인생의 보편적 행로이지만 고동주의 수필은 특히 이 점에 주목하고 있었기에 연만해지면서 인간미 쪽으로 더 무게가 쏠린 것으로 파악된다. 노경에 이른 분의 가슴에 내일에 대한 포부로 가득하다면 무릇 수복壽福에 대한 욕심으로 비칠 수 있다. 시간의 이치로 따지자면 희망이란 것을 품기에는 가장 부조리한 시기가 황혼기다. 작자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깊이 인지하였기에 근년에 오랫동안 입던 옷을 벗을 수 있었다. 몇십 년 이용한 검정색 염모제를 걷어내고 원형으로 돌아간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동안 자타에 의해 현상된 많은 사진, 상패 등을 꼭 필요한 몇 장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염색이란 인위를 벗고 백발을 수용하고, 훗날 유품이 될 물건들을 스스로 정리함으로써 과거 공과功過의 흔적들로부터, 실타래처럼 얽힌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윤오영이 말했던가. “수필은 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으로 쓰는 글이라고. 바로 이 점이다. 고동주 수필은 허위나 가식이 묻은 이론을 배제하고 자신만의 진솔한 육성으로 사람살이의 문제를 서와 정으로 풀어내는 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삶에 대한 악착같은 집념보다 비워내기라는 공통분모 하에 인간성회복이란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이 점은 서론에서 밝힌 바 있는 수필의 본령이 아닌가 한다.

  1) 1(초기)라 함은 첫 수필집 파도에 실려온 이야기, 하얀 침묵 푸른 미소, 사랑바라기가 이에 해당된다. 2(중기)라 함은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동백의 씨, 그래도 외롭지 않았다를 말하고, 3(후기)라 함은 겨울 열매, 행복이 꽃피는 바다, 밀물과 썰물을 말한다. 본고는 이들 수필집에서 일부가 중복 게재된 점을 감안하여 각 분기마다 상재한 수필집 한 권씩을 취하였다.

  2) 초기 65편이 수록된 사랑바라기는 등단 전, 일간지나 문예지 등에 게재한 것과 등단 후 발표작을 묶은 것으로써 자연과 함께하는 서정적 공간에 현실적 아픔을 투영하고 있다. 행복이…≫2기 수필집에는 민선 시장 직책을 맡고 있을 당시의 체험이 주류를 이루는데 공무수행시에 건진 소재이니만큼 각박한 세파에 휘말린 서민들의 애환 및 행복찾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후기의 겨울 열매에는 세기말적인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 파괴되어가는 자연 속에서의 근원적이면서 존재론적 삶의 숙고를 나타내고 있다.

 

 윤지영 수필가-es.jpg

약력:

문학예술수필 등단, 국립 경상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수료, 대학강사, 국제펜한국본부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등, 평론저서: 조연현 수필연구, 칼럼집: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수필집: 찻잔 속의 반란, 함께 생각해봐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어(3인 공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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