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하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異哉 非婦人語).” 1590년(선조 23년) 서애 류성룡은 허난설헌(1563~1589)의 시를 읽어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류성룡은 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에게 “집안의 보배로 간직해서 후세에 전하라”고 일러두었다. 허균은 27살에 요절한 누이의 유고를 모아 최초의 여성문집인 <난설헌집>(사진)을 출간했다(1608년).
시집은 중국대륙까지 열광시켰다. “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진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다”(<열조시집>)고 할 정도였다. “당나라 대표시인 이태백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고금야사>)는 극찬까지 이어졌다. 중국의 편집자들이 난설헌의 시를 앞다퉈 실었다. 가히 ‘허난설헌 열풍’이었다.
그런데 1652년 명나라 전겸익이 편찬한 <열조시집>에 심상찮은 평론이 실렸다. 기녀 출신 여류시인인 유여시(1616~1664)가 표절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유여시는 우선 ‘명나라 문사들이 오랑캐 여인(난설헌)의 솜씨에 놀라 표절 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열광하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꼬집었다. 그러면서 “허난설헌의 시 대부분은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표절한 것”이라고 비평했다. 그러자 조선에서도 난리가 났다. 난설헌과 동갑내기인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난설헌의 시 2~3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작”이라고 폄훼했다. “중국인의 글을 산 채로 집어삼킨 것”(홍만종의 <시화총림>)이라는 무시무시한 표현도 나왔다.
허난설헌에게 이 같은 낙인은 억울할 것이다. 아니 누가 시집을 낸다고 했던가. 허난설헌은 “내 저작물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는데 동생인 허균이 사후에 펴낸 것을 어쩌랴. 어렸을 때부터 옛 시를 바탕으로 끄적였던 습작이 허균이 엮은 시집에 섞였을 것이다. 허균의 흔적도 알게 모르게 삽입됐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죽은 몸이라 독자들 앞에서 입장표명을 할 수도 없었다. 당대 표절의 기준도 모호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서거정은 “옛 시를 많이 읽으면 마치 자기의 시처럼 생각되는 게 있으니 표절이라 욕할 수 없다”(<동인시화>)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허난설헌의 명성은 바래지 않았다. 1695년(숙종 21년) 청나라 강희제는 사신을 파견하면서 “조선 고금의 시문들과 <동문선>, <난설헌집>, 그리고 최치원·김생·안평대군의 필적을 가져오라”는 특명을 내렸을 정도다. 혹독한 비평 속에서도 허난설헌의 작품은 살아남아 생명력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