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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복원된 숭례문. 여기서 시작해서 남산으로 올라가면 편마암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을 볼 수 있다.

 

서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 중 하나다. 명동과 한남동, 가로수길과 청담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종이 모여 북적대고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서울의 장관을 보고 싶으면 서울의 담을 따라 걸어야 한다. 남산, 낙산, 북악산, 인왕산에 걸쳐 이어지는 성곽길 걷기. ‘순성놀이’라고 이름 붙여진 18.6km 둘레길을 걸으며 서울의 맨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편집자 주]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틀만에 두루 돌면서 성 안팎의 꽃과 버들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 거리로 여겼다. 이른 새벽에 오르기 시작하면 해질 무렵에 다 마치게 되는데 산길이 험하여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_유득공이 서울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에서.

2008년 숭례문이 불타서 무너질 때, 나는 폐장을 1 시간 앞둔 서울 시청 앞 광장 스케이트장에서 생애 첫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고즈넉한 서울시청 시계탑과 기와 능선이 아름다운 덕수궁을 스케이트 얼음판으로 빙그르르 돌려 보며, 서울 시민이라는 게 너무 행복했다. 곧이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나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스케이트를 벗고 달려갔을 때 이미 숭례문은 불길 속에 처참하게 스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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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얀트리 호텔 골프장. 성곽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골프장은 모기장으로 지은 21세기 성전같다.

 

2013년 복원된 숭례문. 여기서 시작해서 남산으로 올라가면 편마암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을 볼 수 있다. ▲ 2013년 복원된 숭례문. 여기서 시작해서 남산으로 올라가면 편마암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을 볼 수 있다.
성곽길 18.6km, 순례의 시작은 숭례문이었다. 재건된 숭례문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화상의 기억을 잊은 듯 가늘게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숭례문의 표정은 담담했다. 태조 때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쌓기 시작한 성곽. 숭례문 양 옆으로 날개를 편 돌담은 검거나 희었고, 그 사이사이 시간의 층위는 다양했다.

성곽길을 걷는 목적은 무엇일까? 조선 후기 문인인 유득공은 “새벽부터 해질 녘까지 꽃과 버들을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 거리로 여겼다”고 했다. 2015년 6월, 서울의 성곽길을 걷는다는 것은, 담장 안과 바깥에서 허물어지고 세워지는 건축의 풍경을 목도한다는 것이다.

남산(262m), 낙산(125m), 북악산(342m), 인왕산(338m)의 산세는 낮을만 하면 높아졌고, 높을만하면 낮아진다. 그 산을 타고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성곽길을 걷는다. 남산을 넘어 장충동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에서 반얀트리 호텔을 만났다. 성곽은 불현듯 끊어졌고, 6성급 호텔 건물이 위용을 자랑했다.

반얀트리 호텔(구 타워 호텔)은 자유센터와 함께 성곽을 끼고 도성 안 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을 설계한 사람은 김중업과 함께 대한민국 건축가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김수근이다. 그는 1963년에 남산 타워호텔과 자유센터를 지었다. 68년에 종로에 세운 상가를 세우면서 강북 도심의 획을 그었다. 김수근은 근대 서울의 그랜드 아키텍터였지만, 그 ‘탄탄대로’의 와중에 한양 성곽을 허물고 그 성돌로 두 건물의 담장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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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블럭(일명 보루꾸) 담장을 떠받치고 있는 성돌. 끊어진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반얀트리 호텔 골프장. 성곽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골프장은 모기장으로 지은 21세기 성전같다. ▲ 반얀트리 호텔 골프장. 성곽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골프장은 모기장으로 지은 21세기 성전같다.
남산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이곳 성곽길 언덕에서 가장 압도적인 풍경은 골프장이다. 19층 호텔 건물을 래핑하듯 사각의 홀로그램으로 우뚝 솟은 골프장은, 마치 모기장으로 지은 성전 같다. 모기장 안에 던져진 흰 골프공을 바라보면 문득 임진 왜란 당시, 전투 한 장면이 떠오른다. 행주 산성에서 흰 행주 치마로 돌을 날라 온 몸으로 성벽을 지켜낸 여자들이, 지금은 흰 유니폼을 입고 공을 좇아다니며 21세기의 성전을 지키고 있다.

걷다 보면 자주 예측불허의 건축 풍경과 마주친다. 장충동은 웅장한 고급 주택가와 구들장에 엉덩이 디밀듯 붙어 앉은 다세대 주택이 공존한다. 고급 저택의 주차장 문이 열리면 다세대 주택 한 채 값의 외제차가 나온다. 특히 장충동 성곽길의 명소인 고이병철 회장 저택(대지 2,760,3m2, 약 836평)은 성벽을 연상시키는 듯한 오래된 담장, 담장 위에 박힌 뾰족한 철침, 거대한 회색 철문으로 위압적이다.

크거나 작거나 새 집은 들어설 때마다 성곽을 깔고 앉았다. 성곽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이어지는 좁은 골목에서 낡은 집 한 채를 떠받치고 있는 600년 전의 때묻은 성돌을 다시 만났다. 이산가족 만난듯 눈물나게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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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에서 동대문으로 가다가 마주친 구 서산부인과의원. 1965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로, 둥근 모태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낡은 블럭(일명 보루꾸) 담장을 떠받치고 있는 성돌. 끊어진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 낡은 블럭(일명 보루꾸) 담장을 떠받치고 있는 성돌. 끊어진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광희문에서 동대문으로 가는 길목에는 놓치기 쉬운 건축물 하나와 놓칠 수 없는 건축물 하나가 있다. 전자는 프랑스 모더니즘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였던 건축가 김중업이 1965년 설계한 구 서산부인과 건물이고 후자는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2014년 설계한 동대문 DDP다.

50년의 시차, 시멘트와 알류미늄이라는 재료가 지닌 물성, 규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 서산부인과 건물과 DDP는 묘하게 닮았다. 두 개의 건축물은 당대의 시선으로 볼 때, 한참 앞으로 나간 미래적인 조형물이며, 둘 다 곡선과 원형의 기하학적 디자인을 역동적으로 표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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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의 돌담. 과거와 현재의 돌이 제각각 옹골차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광희문에서 동대문으로 가다가 마주친 구 서산부인과의원. 1965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로, 둥근 모태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 광희문에서 동대문으로 가다가 마주친 구 서산부인과의원. 1965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로, 둥근 모태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지금은 상업공간으로 변형됐지만, 건축가 김중업이 서산부인과를 완성했을 1965년에, 이 건물이 안겨 준 파격은 DDP 못지 않아서 임산부들은 둥근 모태를 연상시키는 이 아름다운 건물에서 출산하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지금보아도 저런 시적인 건물에서라면 마음 편히 순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DDP도 마찬가지다. 마치 액체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 비정형 건축물은 DDP를 가로지르는 한양 도성 성곽과 남산에서 흐르는 물을 청계천까지 보내기 위한 이간수문까지 그대로 복원했다. 칼 라거펠트를 비롯한 해외의 패션 피들들이 한국에서의 첫 쇼를 DDP에서 열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겠다.

성경에는 구약 시대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신과 같아지기 위해 인간은 하늘로 하늘로 돌탑을 쌓으며 진격한다. 신의 권위에 대항한 인간들은 다른 언어로 제각각 흩어지는 벌을 받는다. 더이상 협력하여 오만해 질 수 없도록. 그만큼 건축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강하다.


성곽의 돌담. 과거와 현재의 돌이 제각각 옹골차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성곽의 돌담. 과거와 현재의 돌이 제각각 옹골차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숭례문에서 동대문까지, 성곽길에서 만난 건축물은 제 각자의 존재감으로 아름답고, 쓸쓸했으며, 허풍스럽고, 고귀해보였다. 가끔 돌에 손을 대보면 어떤 것은 차갑고 어떤 것은 따스했다. 돌마다 지나온 삶을 시위하듯 표정도 체온도 달랐다.


임문자

2015.07.13 09:57:59
*.208.232.242

어려서는 꼬마 친구들과 함께 동대문에서 벋어나간 성곽에 놀기 위해 올라갔다.

다시 가 보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곳일 망정, 잘 손질이 되어있으리라고 상상한다.

전에는 그냥  방치되어 있었으나, 제법 많은 부분의 성벽이 남아있었다.

아이들이 가끔 가보기도 했던 그곳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어, 옛이야기를 들려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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