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든 수박도 맛있던 시절의 이야기

조회 수 4471 추천 수 2 2015.08.09 11: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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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기억하는 수박 맛은 좀 뜨뜻하다. 수박을 먹은 최초의 기억은 국민학교 4학년 때쯤이다.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아마 그 전에도 나는 여러 번 수박을 먹지 않았을까.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내가 내 얼굴보다 커 보이는 수박 한 조각을 양손으로 들고 있는 흑백사진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 먹은 수박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어쩌면 사진만 찍고 수박은 먹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비합리적 의심이 든다.

  “따고 배짱”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도박과 관련된 말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니까 아직 판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돈을 가장 많이 딴 사람이 무슨 급한 일을 핑계대면서 갑자기 그만하겠다고 할 때 그 판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돈을 딴 사람에게 느끼는 당혹감과 배신감의 표현이 바로 “따고 배짱이냐?”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기원을 생각해본다. 그 말은 어쩌면 수박과 관련된 말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수박을 팔 때 수박장수가 수박에 삼각형으로 솜씨 좋게 칼집을 낸 다음 칼끝으로 쿡 찍어 삼각뿔 모양의 수박 조각을 들어 올리며 맛보기를 권하곤 했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맛만 한번 보라면서. 수박장수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 수박 한 조각이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지만 한 입 먹고 나면 안 사고는 못 배길 정도로 맛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따버린 수박은 다시 팔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안 사고 그냥 가는 사람이 있다면 수박 장수로부터 “따고 배짱이냐”라는 소리를 뒤통수로 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부산 하단에 살 때 일이다. 늦여름 토요일 오후로 기억하는데 아버지는 어디선가 낮술을 마시고 취해 오셨다. 한 손에 내 머리통보다 더 큰 수박 한 덩이를 들고. 아마 술집 근처에 리어카를 두고 수박을 파는 수박장수에게 샀을 것이다. 어쩌면 수박에 삼각형으로 솜씨 좋게 칼집을 낸 다음 칼끝으로 쿡 찍어 삼각뿔 모양의 수박 조각을 들어 올리며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맛만 한번 보라”는 수박장수의 권유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술기운에 식구들 생각이 울컥 났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버스에 타고 오는 내내 수박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식구들 먹일 생각에 별로 무거운 줄도 몰랐을까. 그래도 수박은 무거웠겠지. 수박을 들고 오는 동안 아버지는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 걸어갔고 버스를 타고 내리고 정류장에서 집까지 한참을, 공터를 지나 또 한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수박은 어디에선가 부딪쳐 멍이 들었다. 아내와 새끼들 먹이려고 들고 온 수박은.

스무 살 무렵에 나는 ‘낮달’이란 시를 한 편 썼다. 부끄럽지만 옮겨본다.

 

아직 볕살이 더운
늦여름 오후 거나한 아버지의 귀가는
오른손에 단단히 쥐고 계신
부끄러운 수박 한 덩이로
어디쯤서 멍이 들고
공터를 지나 휘영청
가누기 겨운 불혹
더딘 발걸음으로
휘 영 청 청
집으로 다가올수록 자꾸
움츠러드는 아버지 야윈
어깨

 

 

  그날 우리 식구는 여기저기 멍이 든 수박을 뜨뜻한 채로 먹어야 했다. 수박은 차게 해서 먹어야 맛있는데 아버지가 하도 재촉해서 바로 먹었다. 맛은 온도가 중요하다. 아무래도 뜨뜻한 수박은 맛이 없다. 그래도 우리 식구는 그 뜨뜻한 수박을 먹었다. 겉은 여기저기 멍이 들었지만 속은 붉었고 까만 씨가 빼곡히 박혀 있었다. 수박은 먹으면 배가 부르다. 수박 한 덩이에는 얼마나 많은 물이 들어있을까? 그걸 먹고 난 식구들은 배가 올챙이처럼 튀어 나왔다. 다들 뱃속에 수박 한 덩이씩 품은 것 같았다. 그때는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수박 속은 지금 내 나이보다 열 살쯤 더 젊은 아버지의 붉고 검은 속 같다. 부모를 모시고, 아내와 네 자식을 건사하느라 여기저기 멍이 든 가장의 뜨뜻한 속 같다.


 수박 생각을 하면 그날 먹었던 뜨뜻함이 떠오른다. 올챙이처럼 튀어나왔던 배도. 오늘 집에 가면서 내 머리통만한 수박 한 덩이 사가야겠다. 그 전에 우선 낮술부터 한잔 마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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