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의 나의 종교이자 모든 것"이었다고 말하는 소설가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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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끝끝내 달고 싶었던 '소설가'라는 명찰을 얻은 것은 오십 살 때. <현대문학>을 통해서였다. 20대 초중반에 등단한 작가라면 중견을 넘어 중진의 폼을 잡을 나이. 왜 그렇게 늦었을까? 그는 자신의 문학 입문 스토리를 다룬 산문 <나는 왜 소설가가 되었나>에서 이런 말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나에게는 불치의 병이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빨갛고 노란 꽃이나 단풍을 고운 제 색깔로 느끼지 못하는 병. 하지만, 나는 그 병을 고치려고 애써본 적이 없다. 그 병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병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병은 늘 상식적인 삶을 비틀며 내 문학을 이끌어왔다.

상식을 거부하고, 보편에 저항하는 '불치의 병'을 앓으며 그가 당도한 문학이라는 종교. 1992년 <늰 내 각시더>를 출간한 후 20년 넘는 세월 동안, 아니 의식과 지각이 채 여물지도 않은 유년시절부터 시종여일 지속된 문학과 소설에 관한 김용만의 지독한 애정.

그간 첫 작품집을 필두로 장편소설 <인간의 시간> <칼날과 햇살> <아내가 칼을 들었다>, 산문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과 내 허튼소리> 등의 책을 내며 꾸준한 활동을 지속해 온 김용만. 이젠 일흔 중반에 접어들었으니 조금 느슨해져도 좋으련만, 노장의 집필 의지는 최근까지도 신문 연재소설과 문예잡지의 작가론 연재까지를 넘나들며 꺾일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남보다 늦은 출발이 그에게는 오랜 시간 열정을 불 지필 이유가 되어주는 셈이다. 맞다. 늙음이란 육체가 아닌 마음의 자세에서부터 온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김용만은 여전히 청년, 혹은 소년이다.

어떤 작가보다 문학과 문인을 아끼며, '소설적'으로 살고 있는 일흔셋 문학청년 김용만을 만난 것은 벚꽃이 마른 가지를 간질이며 피던 봄의 초입. 그의 문학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잔아문학박물관과 살림집이 위치한 경기도 양평 문호리였다. 아래는 한 시대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작가들의 사진이 걸린 잔아문학박물관 응접실에서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굴곡이 산맥과 같은 김용만의 삶과 토속적이고도 유장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기에 필자의 재주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더하거나 빼지 않고 옮기는 것이 김용만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작은 단초는 될 수 있으리라.

공부를 하고 싶어 '가출'... 무작정 부산으로, 부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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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아문학박물관에서의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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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게 돼서 반갑다. 아직은 겨울이 한창이지만 곧 봄이 올 것이다. 요사이는 무얼 하며 지내는지 궁금하다.
"나와 관련된 상세한 이야기는 하기가 조금 면구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체를 하나의 소설 주인공으로 해도 될 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긴 했다. 방송 인터뷰를 하던 담당 PD와 작가가 그런 말을 했다. '당신의 삶 자체가 소설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자전소설을 반드시 한 권 남기고 싶다. 60년 가까이 일기를 썼고 그걸 현재도 다 가지고 있다. 손으로 쓴 걸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의 귀한 기록이다."

- 오십의 나이에 문학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왜 문학이 좋았는지. 그리고 문학을 향한 첫사랑은 언제 시작된 것인가.
"인생의 대부분이 그렇듯 문학에 대한 애정이 생긴 이유도 참 묘하다. 소년 시절의 일기를 뒤적일 때가 있다. 그걸 보니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가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을 그렇게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국전쟁을 제대로 겪지 못했다. 충남 부여가 고향이다. 소설가 조정래처럼 온몸으로 전쟁 체험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과는 상관없이 어린 시절부터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꿈이 있었다. 조숙하지만 영생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그 고민과 생각은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지독한 사랑은 종교로 대체할 성격도 아니다.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종교를 만들자. 문학은 내 구원이고 종교다'라는 마음가짐이었다. 지금까지 내 삶은 그 궤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당시 가세는 어떠했고, 부모님은 어떤 분이신지.
"아버지는 학교를 다녀보지 못한 무학자였고, 형편 또한 가난했다. 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지만, 중학교 입학금이 없어 상급학교 진학을 못했다. 나중에 부산으로 가출(?)을 해서야 독지가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이전에 출간된 산문집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다."

- 부산으로의 가출 이유와 당시 상황을 조금 더 부연해준다면.
"공부를 하고 싶어 무작정 부산으로 가던 때가 어제 일인양 또렷하게 기억난다. 대전역에서 기차를 탔다. 차비가 없었으니 개구멍을 통해 역으로 들어갔다. 차장이 도깨비보다 무서웠다. 그때 도착한 첫 기차가 부산행이었다. 만약 상행 열차가 먼저 왔다면 유년을 서울에서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마운 분의 도움을 받아 부산중학교 입학했다. 그때가 내 나이 15살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아버지가 지게 지고 산에 올라 나무를 했고, 그걸 팔아 내 학비를 댔다. 다른 애들이 중학교에 갔을 때 나는 아버지 따라 산에 가서 나무를 했다.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너무 컸다.

충청도 산골 천막학교를 함께 졸업한 친구들이 대전중학교 교모를 쓰고 있는 걸 볼 때면 부러움을 넘어 어떤 절망감까지 느꼈다. 부산으로의 가출은 그런 감정을 견딜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부산 초량역에 내리니 배가 너무 고팠다. 김밥과 어묵 따위를 파는 구멍가게 앞에서 서성대던 내가 측은해 보였던지 주인아줌마가 공짜로 먹을 걸 줬다.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고마운 제안도 했다.

그 아줌마의 집안 동생이 한국에서 측량기사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독도를 가장 먼저 측량한 그분이 내 공부를 돌봐줬다.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즈음이다. 중학교를 마친 이후엔 서울로 가서 용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소설가 윤후명, 전 국무총리 이해찬 등이 나온 학교다."

"죽으려고 태종대에... 그러나 죽을 자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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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만의 문학 사랑을 보여주는 공간 잔아문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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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 때문에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종교인의 태도로 문학에 매달렸다. 당시 읽은 책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는지.
"하이네의 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떠오른다. 유년시절의 나는 죽음의식에 매달렸다. 허무의식도 강했다. '인류의 역사가 몇 백만 년이 되었다고 해도 인간에겐 다시 태어난다는 희망이 있다. 내가 죽으면 언제 다시 태어날까'라는 다소 허황된 생각들을 했다.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늘상 그렇다. 밤낮 그런 고민을 했다. 죽음과 영혼, 불멸과 부활 등의 단어가 나를 사로잡았다. 나무꾼 아버지와는 하늘과 별 등의 낭만적인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내게 꿈을 심어줬다. 윤회사상도 모르면서도 윤회를 생각했고, 내가 죽더라도 '질량 불변의 법칙'에 의해 세상 어딘가에 또 다른 존재로 내가 머물 것이라 믿었다.

소설가 이문열을 만났을 때 그가 말한 생사관이 나와 너무도 유사해 놀랐던 기억이 난다. 먼지와 같은 무언가가 우주공간에 존재한고, 그것이 어떤 작용에 의해 형상이 되며, 형상이 되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생각.

뒤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다닐 때 젊은 교수, 시인, 평론가들과 현대문학그룹이라는 소모임을 했다. 그들은 학습을 통해 체계화된 문학과 삶의 이론을 세우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체험을 통해 알았다. 그 경험을 존중해서인지 늙은이의 말이지만, 그 친구들이 내 의견에 귀를 세우곤 했던 것 같다.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어떤 삶을 살았나. 형편상 대학엔 못 갔을 것 같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군대까지 마쳐야 제대로 된 사회인이 돼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시절이었다. 사실,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때는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 부모를 무시해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릴 땐 부모의 가난과 무능력이 문학에 대한 내 꿈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부모를 잘 모시고 싶었다.

고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했다. 훈련을 마쳤을 때 다른 훈련병들의 부모는 다 면회를 왔는데, 내겐 아무도 오지 않았다. 부친의 친구만이 찾아와 '네 아버지는 마곡사 불목하니로 가고, 너희 엄마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했다.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김구의 아들 김신 장군을 찾아갔다. 고맙게도 내 딱한 사정을 들어줬고, 군종감에게 지시해 나를 제대시켜줬다. 내 부모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국민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게 부모님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 패기를 높이 샀던 것 같다. 병역법상 안 되는 게 명약관화한 데도 제대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작대기 하나의 졸병이 별을 서너 개나 단 장군을 찾아가 제 할 말을 다 했으니.

생각해보면 가난 때문에 서러운 젊은 날이었다. 제대 후 부산으로 가서 외판원 생활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래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부모님을 모시기가 힘들었다. 열패감에 죽어버리려고 태종대에 갔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부모님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내겐 죽을 자유조차 없었다.

앙드레 지드가 그랬나? '네겐 죽을 자유도 없다'고. 마음을 바꾸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경찰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했다. 문학을 향한 꿈이 있으니까 경찰 생활을 오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험을 볼 때 일화 하나가 생각난다.

경찰 신체검사에 합격하려면 몸무게가 55kg이 넘어야 했다. 그런데 영양실조 등으로 내 몸무게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검사관이 그게 딱했던지 '나가서 물을 마시고 오라'고 배려했다. 한꺼번에 0.8kg만큼의 물을 먹고 기절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60년대 초반 경찰이 됐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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