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전당포

조회 수 4079 추천 수 1 2016.07.24 18:38:00
작가 : 이숙이 수필가 

 

인생 전당포

 

  이 숙 이

 

진상이 너, 괜히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지 말어. 그거 다 후회로 남는겨.”

아부지, 그런 말 할 자격이나 돼유?”

그려. 한번 잘못 살면 평생 여기에서 찌르는겨. 내가 잘 아니께 말하는겨.”

그러면서 자신의 가슴팍을 팍팍 친다.

어이구, 부자지간 또 시끄럽기 시작이네.”

저녁밥을 짓느라 부엌에서 있던 순녀는 큰아들 진상이가 나갈 기미가 보이자, 역정을 내고 있는 남편 편도 아들 편도 아닌 입장을 드러낸다. 누구를 탁하기가 싫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편력이 심했던 남편의 옛날 버릇을 닮은 아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지금은 변해 있는 남편에게 무어라 말하기도 그랬다.

순녀는 열여덟 나이에 팔촌 아저씨 소개로 홍역을 알게 되었다. 홍역과 두 번째 만났을 때다. 홍역은 순녀를 만나고 가는 길에 다른 여자를 만나다가 순녀에게 들켰다.

저런 남자는 안 되는디하면서도 순녀는 남자의 인물이 괜찮다는 생각에 세 번, 네 번 만났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는 총알 같이 간단한 식을 치르고 살게 된 것이다. 밥상에다 쌀 한 공기, 닭 한 마리 잡아 놓고 푸른 대나무가지를 꽂고 동네 이장님을 증인으로 세우고 식을 올렸다.

순녀는 아이를 가졌다. 입덧이 심해 누워있다시피 하게 되자 홍역은 멀지도 않은 이웃동네 여자를 건드려 놓았다. 딱따구리 같은 그 여자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지 나 먹여 살려라!”라고 떠들며 동네방네 외고 다녔다. 그러면서 순녀의 신혼집에까지 찾아와서 자신도 애를 가졌다며 순녀 옆에서 같이 누워 밥까지 같이 먹는 일도 생겼다.

순녀는 잘 먹지 못해 임신 일곱 달이 되어도 배가 봉긋봉긋 올라오지 않았다. 아기가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 새벽마다 일어나 정갈하게 옷 입고 뒷산 대나무 숲 커다란 바위에다 물 떠놓고 산 신령님, 제발 아기에게 아무 탈이 없게 해 주셔유. 사지육신 멀쩡하고 건강한 아기 낳게 해 주셔유. 그렇게 해 주시면 서방님이 잘못해도 그냥 살 것이유.”

홍역의 바람기는 점점 심해졌다. 산 신령님에게 복을 빌면 되지, 왜 묻지도 않는 조건을 미리 약조했었나……. 홍역과 살면서 수 없이 후회했다. 첫아들 진상이가 돌이 지나면서 무슨 인연인지 둘째가 들어섰다. 두 번째 임신은 입덧하지 않았다. 순녀는 잘 먹고 씩씩하게 일도 잘했다. 첫 번째와는 달리 이번에는 산 신령에게 빌지도 않았다. 제 버릇 남 줄까, 홍역의 바람기는 끝이 없었다. 몇 마지기 논에서 나오는 곡식과 농사짓는 소마저 끌고 나가 오입질하느라 다 날려 버린 것이다.

둘째는 딸이었다. 진미라는 이름에 걸맞게, 코며 입술이 오뚝하고 예뻤다. 두 아이는 먹여 놓고 돌아서면 또 달라고 울어댔다. 먹성이 좋은지, 먹을 것이 궁한 것을 알고 있는지 뭐라도 종일 먹여야 조용했다. 순녀는 딸을 업고 아들은 걸리고 동네 일거리를 날마다 찾아 나섰다. 홍역은 열흘이나 보름에 한 번씩 들어오긴 했는데, 뭐 들고 나갈 것이 없나 했다. 순녀는 오거나 말고나 상관하지 않았다. 뒤져봐야 가져갈 것이 없으니 마음 쓸 일이 없었다.

하루는 순녀가 초상집 부엌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외동아들이 죽은 집이다. 죽은 아들의 아버지·어머니는 두문불출하고 집안에만 있었다. 아마 인사불성이 되었는지 울지도 못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동네 남자들이 다 모였다. 며칠 있으면 장가가기로 되어있는 최씨네 외아들이라 짠해서 다 모였을 것이다. 외아들의 부모는 아들 몸보신 해 준다며 좋다는 약을 몇 가지 섞어서 달여 먹였는데, 그만 급사한 것이다. 그런데 파출소 순사 몇 명이 동네 남자와의 이야기를 순녀가 들으며 일하던 손이 떨려옴을 느꼈다.

어느 약방에서 지어온 약인지 말해 주시오.”

우리는 모르지유. 아침저녁으로 탕약 냄새는 났는디 어디서 지어온 약인지, 무슨 약인지 모르그먼유.”

최씨 내외가 저렇게 문을 안 열어 주니 알아볼 도리가 없네.”

순사 나으리, 나중에 물어봐도 되니께 차라리 죽은 자를 실어가서 조사하면 더 빨리 알 것 아닌가유?”

그런데 부엌문이 열리며, “저어, 물 한 사발 주~. ! 순녀, 왜 여기 와 있는겨?”

홍역이었다. 순녀가 더 놀랐다. 집에 오지 않는 홍역을 이곳 초상집에서 3년 만에 만났으니 놀라기도 했고 괘씸하기도 했다.

목마른 사람이 떠 먹어유.”

거기 물 항아리에서 물 떠 주는 게 뭣이 어렵다고…….”

…….”

순녀 등에는 진미가 잠들어 있고, 부엌 한 귀퉁이에 앉아 있던 진상이는 아버지를 몰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순녀는 오기가 발동했다. 진상이가 뱃속에 있을 때 산 신령에게 저런 남자랑 그냥 살 것이라 했으니 내가 미쳤지, 당신에게 물 한 사발 떠 줄 수는 없지

~.”하며 부엌문을 닫지도 않고 가 버렸다. 그날 종일 두 아이 때문에 일은 했지만 순녀는 쓰러질 듯 몸은 피곤했다. 힘든 일이라도 마음에 기쁨을 가지면 덜 피곤할 터인데 낮에 홍역과 마주친 후로 온몸의 힘은 다 빠져나간 듯 맥이 풀려 간신히 일해놓고 집에 돌아와 누웠다. 옆에서 쌔근쌔근 잠든 두 아이를 보니 순녀는 자신이 아파 눕게 되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두어 시간 잤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무섭기도 하고 누군지 궁금해서

누구여유?”

나지 누구여.”

홍역이었다. 문을 안 열어 줄 수가 없었다. 애들이 깰까 봐 문을 열어 주었다. 홍역은 들어오자마자

오늘 돈 받은 거 이리 내놔. 급히 쓸 데가 있어서 그려.”

씨도 안 맥히는 소리 말어유. 그 돈으로 내일 쌀 한 되사다 애들 밥해 먹여야 하는 돈이여유.”

글씨, 나부터 써야 하니께, 내놔 봐.”

못해유. 나를 죽이구 가져가유.”

애들은 누가 기르라고 죽이라는겨.”

오늘 죽은 최씨네 아들처럼 죽으면 끝이지 무신 애들 걱정꺼지 헌대유.”

글씨, 나중에 갖다 줄 터니께 줘 봐. 빨리!” 하면서 순녀가 벗어 놓은 행주치마 주머니에서 돈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아침이 밝아 왔다. 순녀는 친정을 떠올리며 친정으로 발길을 터벅터벅 옮겼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있겠지만, 그래도 어린 것을 굶기는 것 보다는 낳을 것이다. 홍역 같은 남자가 있는가 하면 순녀 아버지는 너무 꼬장꼬장해서 사 남매를 키우느라 온갖 노역에 몸이 망가진 것 말고는 누구에게나 일 원 하나 꾸어 쓰는 일 없이 살아가는 부모다.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라는 부모의 신조를 순녀는 어쩔 수 없이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서 무어라 말할까, 서방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친정에 당도했다.

순녀 어머니는 말없이 밥상을 차려오고 아버지는 불편한 몸이지만 건넌방으로 갔다. 순녀는 아이들을 먹이고는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순녀의 횅한 눈을 볼 수 없음인지 밥상을 내갔다.

다음날 순녀는 중학교 친구. 남주를 찾아갔다. 아직 시집 안 간 친구는 남주 뿐이다. 남주가 다니는 방직공장에 어렵게 입사하게 된 순녀는 아예 두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공장기숙사에서 기거하기로 했다. 남주는 기숙사 사감 겸 현장의 반장 일을 하는 알짜배기 직원이었다. 순녀는 남주가 부러웠다. 아마 적금도 꽤 많이 해 두었을 것이라 싶었다.

순녀는 결혼 전의 자신을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한가한 시간이면 옛날 생각이 났다. 순녀는 중학교 졸업 후 옷가게에서 점원 일을 했다. 사춘기가 온 열일곱에 순녀는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많았다. 가슴은 터질 듯 커지고 아랫도리는 공연히 쑤셔왔다. 고통스러웠다. 옷가게 여주인은 농담 삼아 순녀야. 일찍 결혼해야겠다.” 점원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 왕래조차 없었던 팔촌 아저씨가 갑자기 찾아와서 순녀에게 중매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바로 홍역이다.

 

이제 순녀에게, 사춘기는 증오스러운 시기였고 남자라는 존재를 열망하여 그렇게 일찍 만나야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후회스러움에 괴로움만 커갈 뿐이었다. 그런 괴로움을 잊어버리려 일에 더 전념했다. 일종의 자학행위일 수도 있다. 다행히 순녀의 어머니는 손자·손녀를 극진히 사랑하며 키워주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는 할머니와 집 마당에서 놀 때, 돌담 밖에서 잠시 보고 가는 것으로 아이들에 대한 정을 달랬다. 두 아이가 엄마를 보면 안 떨어지려고 하고, 괜히 엄마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하루는 잔업일까지 마치고는 퇴근했다. 평소에는 씻기부터 하는데 너무 피곤하여 옷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라 할 때였다. 연락원이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면회실에 나갔다. 친정집 옆에 사는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표정이 어두웠다. 뭔가 있구나 싶어 순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저씨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다.

순녀야. 맴 단단히 먹거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말이다.”

…….”

니 어머니가 오늘 낮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금 나랑 집에 가야 한다.”

순녀는 그만 의자가 아닌 시멘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저씨가 손을 잡아 일으켜 줄 때 정신이 들었고 그때서야 와락 울음이 터져 나왔다.

택시로 집에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얼굴은 조용히 잠자는 얼굴이었다. 마르고 조그마한 어머니는 편안히 누워 자는 듯했다. 평소 어머니는 약해 보였어도 병은 없는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돌아가신 걸까. 두 아이는 건넛방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놀고 있었다. 순녀를 본척만척했다. 의사와 염하는 사람이 왔다. 자연사라고 했다. 염이 끝나는 아침 상여차가 오고 장지로 모실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장지에 안 가고 손자·손녀가 노는 방에서 미동도 않고 있었다.

순녀의 생각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앞으로 더 현실적이 되어야 했다. 자신의 삶을 빨리 그려 놓아야 하고 또 다른 계획을 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공장에 사표를 내고 집에 돌아오니 홍역이가 와 있었다. 그게 5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장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러 왔을 것이다. 순녀는 다정하게도 그렇다고 냉정하게도 대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대했다.

그런데 홍역과 순녀 두 사람은 부부라고 하기에는 잘못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순녀 아버지는 사 남매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다 크면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 낳고 살아야 완성된 인간인겨.”라고. 그리고 어머니가 잘하던 말은 밥을 하거나 고구마를 찔 때 기둘러! 뭐든 때가 있는 거여. 설익으면 못 먹는 거여.”라고 했다.

부부의 연을 맺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늘 설익은 열매였다. 준비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미완성품이었다. 사춘기가 왔을 때 이성에 눈뜨면 어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때에 순녀가 더 남자를 갈망했고, 준비 없이 결혼하였다. 때를 기다리지 못한 것은 순녀의 잘못이었다. 그랬다. 홍역은 부부가 된 후 남자가 해야 할 책임이 무언지 알 바 아닌 남자였다. 신혼의 여자를 팽개치고 다른 여자를 찾아다닌 무뢰한 사람, 먹고 살아야 하는 생명의 기본조차 나 몰라라 한 최악의 남자였다. 그랬지만 순녀는 그런 사람 사이에 아이를 낳았고 지금 두 아이가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순녀의 현실이고 순녀를 괴롭히는 당면 문제였다.

홍역은 뭔가 좀 달라진 듯해 보였다. 진지해 보이는 이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아이들하고 집으로 가자고 왔지.”

왜일까? 홍역의 말에 순녀는 갑자기 불에 얼음이 녹듯 마음이 훈훈해져 왔다.

또다시 다른 곳에 가려면 돌아가유. 난 안 가유.”

아니, 다시는 안 그럴 것이여. 남자로서 약속할게.”

남자라는 명예를 걸고 순녀에게 약속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 한 마디에 결심했다. 순녀의 아버지는 손자·손녀의 팔에 아이들의 소지품, 학용품 등을 넣은 가방을 들려 방 밖으로 내 보낸다. 두 아이 모두 홍역이가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홍역이는 두 팔을 벌리며 이리와 봐.” 해도 아이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니들 아버지여, 이리와.” 그 소리가 처량하기 짝이 없다. 순녀가 아버지여, 가봐.” 하니까 그때서야 두 아이는 느릿느릿 홍역에게 걸어갔다.

많은 세월을 무슨 해괴한 짓이었나 말이어유.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았어유?”

순녀의 퉁퉁 부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홍역이도 두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순녀의 가족이 기쁨의 눈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한 맺힌 생을 살뻔한 순녀는, 어머니가 북망산천으로 간 귀한 선물이 된 셈이 되었다.

홍역의 집에 돌아온 순녀와 아이들은 한동안 서먹서먹했다. 남의 집 같았지만, 아버지가 있으니 든든하고 좋았다. 홍역은 그동안 동네에서 손가락질당하고 있었다. 남정네들 틈에 끼이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순녀가 조촐하게 안주상을 차려 놓고 몇 명 이웃집에 다니며 막걸리 한잔하러 오라고 초대해도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순정 어린 순녀의 내조에 차가운 마음들이 조금씩 풀어진 것이다. 세 식구는 한 지붕 아래서 다 모여 평범하게 살아가는 행복에 젖어들었다. 이런 행복은 누구라도 찢어 놓을 수 없다. 인륜은 하늘과 땅의 법이기도 하다.

또 한 애가 생겼다. 이제 진상이, 진미, 진혁이까지 삼 남매를 위해 홍역과 순녀는 능력껏 일하러 다녔다. 몇 년의 고생 끝에 동네의 잡화점을 인수했다. 장사가 잘되어 옆의 인쇄소까지 샀다.

큰아들 진상이는 배움의 욕심이 없었는지, 공부 실력미달이어서 그런지 대학을 가지 않았다. 말로는 어머니를 돕겠다고 했다. 인쇄소를 운영했지만 기실 가지고 들어오는 돈은 없었다. 나이가 열아홉이니 여자를 사귈 때이긴 했다. 한 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 듯, 진상이 책상 위에는 여러 명의 여자와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순녀는 진상이가 아버지의 나쁜 버릇을 닮았으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이 생겼다. 순녀의 마음이 심란스러워 졌다. 혹시 그럴지라도 결혼 후에는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인쇄소 문을 닫기가 바쁘게 외출하는 아들을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날마다 잔소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은 것이다.

순녀의 동네는 참 많이 변했다. 납작하던 집들이 양옥 아니면 주상복합 빌딩으로 바뀌면서 동네가 부유해 보였다. 고등학교가 인근에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전문대학교가 들어섰다. 그 전문대학의 어느 교수 아들과 진미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게 알게 되었다. 청년이 어느 날 순녀에게 인사하러 왔을 때 보니, 가정교육을 잘 받은 듯 보였다.

처음 뵙습니다. 진미 어머님, 한총우입니다.” 진미와 동급생이며 대학진로의 문제로 진미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쁘게 만나고 있습니다. 저희를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십시오.”

참으로 예의 바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진미는 내년이면 대학에 가겠다고 부풀어 있다. 진미는 키도 크고 인물이 훤하기도 하지만 말을 참 잘했다. 똑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야망이 큰아이다. 순녀는 진미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 졌다. 상처 있는 젊은 시절을 산 자신을 닮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잘하고 있는 딸을 보면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순녀는 틈틈이 써 놓은 일기장이 제법 되었다. 사실 일기장도 아니다. 생각날 때마다 한자 두자 적은 글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바람으로 많이 쓰였던 것이다. 철없던 자신의 인생의 봉오리가 된서리 탓에 꽃 한 번 피워 보지 못했기에, 아이들은 그런 무지한 인생을 살지 않기를 얼마나 마음으로 절절히 기원했었나 말이다. 천만다행이었다. 꽃봉오리가 죽지 않으니 순녀가 염원한 가정이라는 줄기가 남편의 회심으로 소생되었고, 그 줄기에서 가지가 자라 귀엽고도 귀한 삼 남매가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에 말이다.

진미는 어느 날 어머니 방에서 몇 권의 공책을 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공책은 진미가 태어나기 전의 순녀의 일기다. 진미가 엉엉 울면서 보느라고 몇 장은 글씨가 뭉개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로 순녀의 공책은 하나씩 늘어났던 것이다. 많은 양의 이야기는 순녀의 인생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잘 다듬어서 책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을 딸, 진미는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진미 아버지, 오늘 진미 남자친구를 보았는디 괜찮더구먼유. 대학교수 아들이래유. 그 집 레벨에 우리가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차 진미 짝으로 욕심이 생기네유.”

순녀, 당신 말투가 많이 변했구려.”

그게 아녀유. 세상이 변하거구먼유. 나가서 이야기 좀 하려면 영어 한두 마리 들어가야 들어 주드먼유.”

그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들어 보라구. 전부 꼬부라진 말로 부르는 노래 밖에 없으니께.”

우리도 레벨을 높여서 살아 볼까유?”

저녁 식사가 끝난 두세 시간이 부부의 정, 가족의 정이 쌓이는 시간이라 정의해도 그리 엉뚱한 소리는 아닐 것이다. 피곤이 녹고, 풀어야 할 가족의 문제를 펼쳐놓고 해결책을 찾는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루는 홍역이가 낮은 소리로 말을 꺼낸다.

순녀, 당신 같은 좋은 여자를 몰라본 나의 젊은 한 때를 떠올리면 참 염치없고 면목이 없어서 부끄러워 지는겨. 나는 사랑이 그렇게 가벼운 새털처럼 포삭스레 나는 줄 몰랐지.”

진미 아버지는 지금도 그것이 사랑인 줄 알어유?”

아니여. 그건 사랑도 개뿔도 아닌겨. 난 지금도 당신한테서 진짜 사랑을 보고 있는 것이여.”

 

막내 진혁은 하는 짓이 맹랑하다. 형보다 누이를 많이 따랐다. 열 살이나 나이 많은 형을 가까이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성격상으로도 맞지 않는 점도 있다. 진혁은 당돌하기도 하고 고집이 보통 아니었다. 한 마디로 줏대가 센 아이였다. 중학교 다닐 때 벌써 상위권 영어 클래스에 다니며 회화며 문장 쓰기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누이랑 영어로 곧잘 대화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 나가면 아예 밤에 들어온다. 누이랑 어머니 순녀의 글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어머니, 순녀 글을 영문 소설로 만들고 싶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의 글은 가정의 소중함, 부부의 사랑, 가족의 연합을 쓴 글이다. 그리고 가족사랑은 사막에서도 살아남게 하는 힘이라는 내용인데, 진혁은 왜 그토록 가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는지 진미도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진혁은 고등학교에서 우수 학생으로 뽑혔다. 진혁은 어느 날 외국인을 데려와서 어머니에게 소개했다.

어머니, 이분 이름은 샨(Shan)이라고 해요. 어머니가 쓴 글을 저랑 이분이랑 영어 소설로 만들어 보려고 해요. 승낙만 해주시면 돼요.”

아니 갑자기 책은 뭐여. 내 글이 무슨 소설감이나 된다고 이 난리여.”

어머니,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리가 할 일이어요. 글 쓰신 것 빌려 주시면 돼요.”

아니여.”

이를 듣고 있던 샨도 거들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스토리를 책을 만들고 싶다고 진혁 군이 2년 동안 저를 삶았습니다.”

어이구, 그렇게 삶아서 얼굴이 허연가유?”

어머니, 그냥 옛스만 해 주세요.“

노여

어머니, 영어 잘하십니다. Why don't you changed to say 'YES' Please."

…….”

--

"어이구, 난 모르것다. 그래. ‘옛스.”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 Thank you very much."

진혁과 샨은 어머니를 꼭 끌어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순녀는 무안해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진혁의 준비작전은 끝났다. 도와줄 만한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려고 2년 동안 대학가의 서점, 커피점, 빵집 등을 다니며 영어를 사용하면서 일했다.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일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확한 영문법과 대화로 책을 만드는 과정과 출판비용까지 두 가지를 성취한 것이다. 샨은 대학 영문학 강사이다. 샨은 책이 되기까지의 수고비는 안 받기로 했다. 책 영어 번역자로 이름만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책이 나오면 두 권만 달라고 하면서, 한 권은 자신이 소장하고 한 권은 귀국하여 자기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진혁은 저런 사람과의 관계는 오래가리라.’고 생각했다.

2년 전, 진혁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커피점에서 외국손님이 한국말로 커피를 주문했다. 발음이 서툴렀다. 진혁은 영어로 대꾸하며 주문을 받았다. 잠깐이지만 커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손님이 바로 샨이다. 샨은 진혁에게 영문법이 상당히 정확하다고 칭찬했다. 진혁은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솔질하게 말했다. 다음날 또 샨이 찾아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진혁의 일이 끝난 후에 어딘가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거의 밤에 샨은 진혁을 만나 영어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 진혁은 순녀의 인생에 대한 것을 소설로 만들기 위해 서로 의논한 결과였다.

순녀는 그날 밤, 거울 앞에 앉아서 희끗희끗한 머릿결을 빗질하면서 거울 속으로 홍역을 보고 있다.

머리 다 빗었으면 어서 와요.” 오늘따라 홍역의 얼굴이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행복이 이런 것이여유. 내 아들 진혁이가 입은 옷색이 베이지색이었는데, 오늘 밤 내 사랑도 행복도 베이지색이구먼유. 그리고 당신이 어서 오라는 말에 행복이 들어 있구먼유.

그려, 사랑이 뭔지, 행복이 뭔지, 말로 나도 점점 더 깊게 알겠구먼.”

순녀는 15권의 공책들을 상자에 담았다. 막내아들 진혁이에게 전해질 것이다. 다시 손에 잡히는 데로 후두두 과거의 잔상들을 펼쳐 본다.

 

1965320

당신은 건너야 하는 강가에서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나를 떠났습니다. 나룻배에 남겨진 채 노 저어줄 당신은 가 버린 것입니다. 숙명의 사랑이었나 봅니다. 공포스런 밤이 올 때마다 뱃속의 아가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무 감흥도 리듬도 없이 중얼중얼 부르고 나면 가슴에 강이 흐르더군요. 떠난 당신의 의중은 알 수 없지만 기다려 할 책임은 없지만……. 언젠 나에게 돌아올는지 모르지만, 아가와 나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1966120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 밤은, 흡사 이 밤이 내 가슴을 조각내고, 찢어 놓았다고 슬퍼하며 고통스러워 한다. 남편이 나타나면 죽일 수 있을 만큼 마음 한쪽에 독을 품고 비수를 갈고, 원망하면서 나의 밤은 그런 무시무시한 상태로 몰고 가는 있는 나를 보면 얼마나 놀랐는지.

 

196843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꽃샘바람 타고 오셔서 뜰에 핀 벚꽃이라도 보시지요. 그럼 나는 숨어 꽃 빛 머플러로 가리우고 당신의 숨결이나마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구름 흘러가는 소리가 님 기다리는 가슴에 자갈돌 밟고 오시는 그대 소리로 들려 옵니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해질녘에 오시면 저의 손이 행복에 떨다가 그대에게 바치는 잔을 떨어뜨릴 거예요. 이 밤에 달 그림자가 그대 몸 덮을 때쯤 고동치는 그대 안에 있고 싶습니다. 이제 한 걸음씩 이곳을 떠났지만 저는 떠나간 그대만큼 먼 곳은 아니랍니다.

석 달일지 삼 년일지 눈물 고인 뜰에 그리움의 세월이 흘러가겠지요. 그래도 기다립니다. 그대 오신다는 소식 듣기를 날마다 기다릴 것입니다.

 

196946

아침나절 부슬부슬 내린 비로 땅이 촉촉해져 있다. 엉겨붙은 채송화를 떼어 심어 보려고 땅을 파 놓으니 지렁이가 나오고, 이름 모를 작은 벌레가 놀라 달아난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살만한 곳으로, 나은 곳으로 가는 것이리라.

미물 지렁이, 그것들이 기어가는 방향이, 어쩌다 그쪽으로 가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5년 만에 홍역이란 남자를 다시 만나서 이 집에 와 있는 나도 미물처럼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일까? 남자가 가자고 해서 따라왔다. 감지하지 못하는 내 안의 의지가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5년 동안 일해 모은 돈은 지금 이런 집을 3채는 살 것이다. 혼자 아이들하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살아가면 된다.

철없는 두 사람은 무턱대고 결혼했다. 그리고 세 아이를 낳았다. 그러한 사실을 없는 듯이 덮어 둘 수도, 무마할 수도, 부숴버릴 수도 없다. 그 사실 하나를 인정하여 온 것인가 보다. 철없던 두 사람이 만들어 놓은 사건이지만, 깨부수어 버릴 수 없도록 인증 찍은 두 아이가 증거로 턱하니 버티고 있다. 그 사실을 누가, 어떻게 부인한단 말인가.

그 남자에게 진상이와 진미를 함께 놀아 달라고 부탁해도, 어렵거나 미안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집안일도 분담하자고 했다. 채소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려 키워놓은 일은 그 사람이 한다. 나는 뜯어다 반찬을 만든다. 그런 것이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사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 신뢰가 비중을 많이 차지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 해도 진심이라며, 죽도록 사랑한다며 행위와 물질로 그리고 재주로 헌신으로 수고해도 신뢰하기까지는 사랑할 수 없었다.

 

1969815

우주 속의 것 중 내 소유는 아무것도 없다. 내 남편, 내 자식도 실은 정해진 시간만큼 가까이 있으므로 서로 돕고, 서로를 위해 위로해 줄 책임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1969910

사막에는 전갈이 다니고 들쥐가 파놓은 굴을 무심코 밟으며 놀라기도 한다. 낮은 따갑도록 덥고 밤엔 암흑과 추위에 아무도 머물지 않으려 한다. 그런 두려운 사막에 던져진다 해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있으면 충분히 머물 수 있다. 반짝이는 몇 개의 눈동자가 등불이 되고 서로 잡은 손과 손이 언 몸과 언 마음을 녹여줄 것이다.

 

19691111

환호를 지르는 행복이 있는가 하면 재채기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도 소소한 행복이 전해져옴을 느낀다. 일상의 모든 것에서 의미를 붙이는 것은 나만의 세계에서는 오직 내 자유이다.

 

19691220

불같은 사랑, 이 말이 참 좋다. 난로에 장작불을 지폈다. 집안이 훈훈해진다. 발갛게 붙은 불 속에 종잇조각을 던져 넣으니 순식간에 타서 흔적이 없다. 그 광경에서 그이가 느낀 바를 이야기한다.

불에 안 녹는 것이 없다고, 수천 도의 뜨거운 불로 대장간의 쇠를 녹여서 쇠 연장, 쇠 도구 등을 만든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순녀, 당신의 사랑이 불같은 사랑이오. 나의 엄청난 잘못을 덮어주고 나를 받아 준 것은 저런 사랑의 불 속에 못난 내 존재를 태워 없애고 새롭게 보아주니, 당신의 사랑이야말로 불같은 사랑이라 말하고 싶소.”

그날 이후 나의 사랑이 불같은 사랑이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불같은 사랑 안에 과거, 현재, 심지어 다가올 미래까지의 잘못된 모두를 태우고 서로 좋은 점을 보며 사랑했으면 하고 기원했다.

 

1976415

낮에 비빔국수를 만들었다. 남편이 무척 좋아하는 메뉴라 점심에 자주 해먹는다. 양은 얼마나? “적당히.”라고 말한다. 듣기에 편안한 말이다. 맵게 할까요? “적당하게.” 다른 것이 필요한가 물어도 알아서 적당히.” 차려 오란다.

원만한 성격의 사람이 잘하는 말이다. 듣기 좋고 편하다. 그러나 나는 적당히!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만큼을 자주 사용한다. 적당히 보아 오히려 좀 더 애매하게 들리기도 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만큼, 만큼을 사용하다 보면 좀 더 잘해보고 싶은 의욕과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더 매진해 보고 싶은 욕심이랄까, 희망적인 단어라는 나름대로 정이 가는 단어이다.

나의 말과 행동은 분명 나만큼 나올 것이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어진다. 그이가 찐고구마를 먹고 있는 아이들에게 적당히 먹어라. 짜구 나겠다.”라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나는 이런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만큼 먹었으면 됐다.”

 

15권의 공책을 하나씩 채색한다면 순녀의 생애 한 부분은 먹을 갈아 적어 놓은 페이지다. 먹칠한 종이는 물로 닦아내어도 자국은 남을 것이고 만지면 금방 찢어질 것이다. 순녀는 뒤뜰 한쪽에 삽으로 땅을 파고 시커먼 과거를 파묻어 버렸다. 물론 환상 속의 행동이지만 참으로 후련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비 오고 눈 오고 흙의 열기로 시커먼 과거는 녹아 흔적도 없을 것이다. 없어진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 한다. 남편에게 과거의 잘못됨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한다. 평온하게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행복을 만끽하기에도 바쁘다.

저녁 시간 TV 앞에 앉은 홍역과 순녀는, 화면에 나온 아나운스가 된 나의 딸, 진미를 보면서 행복에 젖어 있다. 텃밭에 따온 풋 콩깍지를 깐다. 두 사람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들고 있던 풋 콩깍지를 서로 눈에 대고 콩깍지가 덮여 당신을 만났나?”

요즈음 홍역은 서재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었다. 한때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책을 가까이하며 많이 읽기도 했다. 홍역과 순녀가 읽은 책이 벽 한 편에 가득 채워져 있다. 그 중엔 순녀의 책 <만큼>도 몇 권 꽂혀 있다. 홍역은 <만큼>을 쳐다보는 표정을 무어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멋쩍은 표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밝다고 할까. 일자로 다문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움직임이 생겨난다. 수긍한다는 표현 대신 미소로 답할 때보다 그 미소보다 좀 더 진한 웃음기가 어린다. 마치 부리부리한 눈은 황홀한 것에 취할 때의 감동이 담겨 있는 눈빛이다. 홍역은 그런 표정으로 순녀의 <만큼>을 마음에 이미 수십 번을 끌어안아 주었으리라.

, 진미 아부지. 이번 주말에는 진상이네를 오라 했어유. 진혁이는 곧 샨이 있는 미국대학으로 떠나는데, 식구들 다 모여서 파티하려구유.”

그럼 총우도 부르지 그려.”

그렇군요. 아예 총우 부모님두 오시라 할까 봐유.”

그러면 더 좋지. 우리 진미랑 사귀는 총우 부모님께서 더 좋아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 총우네가 결혼을 서두르고 있는 걸유.”

이번에 만나게 되면 진미 결혼이야기도 하게 되겠구먼.”

아이들이 원하면 미룰 것 없이 빨리 성사시키지유.”

, 총우 부모님에게 당신 책도 드리구려.”

대학 총장댁에 책이 없어서 내 책을 드려유. 명함도 못 내밀 시시콜콜한 책을.”

세상에는 훌륭하고 근사하게 쓴 책도 있고 당신처럼 못난 남자 만나 견디기 힘든 세월을 지나면서, 자신의 의식 속에 담긴 내용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글도 있는겨. 우리 막내 진혁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이니께 더 소중한 것이여. 제목도 독특하고 말이여. 벌써 세 번째 인쇄에 들어갔다고 안 하든가?”

어이구, 알았어유. 책 두 권 내면 진미 아버지는 수다꾼이 되겠네유.”

내가 정신 빼놓고 살 때 당신이 내 정신을 저당 잡아 놓고 기다렸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때까정 잘 뒸으니께, 지금 이렇게 당신과 살 수 있는 거여.”

잘 두진 않았는디유. 내 인생 전당포 한구석에 먼지 쌓인 채 있었는디유. 그 정신 임자가 찾으러 온 거지유.”

그려. 먼지 쌓인 그 자리가 명당자리였으니께.”

어이구, 첫 아이 임신 때 뒷산 신령에게 약조한 것 때문에 산 것이여유.”

당신 책에서 읽어 알고 있어. 그려서 신령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어이구 참.”

순녀, 이리 가까이 와 봐요. 당신 같은 여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여. 정신 나간 남편 잘 참아 주고, 세 아이 잘 길러 놓고, 책도 썼으니 그보다 더 훌륭하고 장한 여자는 없을 것이여. 순녀 당신을 만난 것이 내게 복 중의 복이여. 사랑혀. 아주 많이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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