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벽 필 계도
닭은 십이지의 열 번째 동물로, 을유(乙酉), 정유(丁酉), 기유(己酉), 신유(辛酉), 계유(癸酉) 순으로 육십갑자를 순행한다. 그리고 방향으로서는 서, 시간으로는 오후 5~7시, 달로는 음력 8월을 지키는 방위신자 시간신이다.
어둠을 뚫고 아침을 여는 닭은 상서롭고 신통력을 지닌 서조로 여겨왔다. 그래서 닭의 울음소리를 한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으로 비유하기도 했고, 민간에서는 밤을 떠돌던 귀신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사라져버린다고 믿었다.
◇신라와 고구려는 '닭의 나라'였다
'후한서'의 '동이열전'이나 '삼국지'의 '동이전'에 닭에 관한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한반도에서는 고대부터 닭을 길렀던 것 같다. 닭이 한국문화의 상징적 존재로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박혁거세와 김알지 신화이다.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 부인은 계룡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났고 입은 닭의 부리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금빛 찬란한 황금 궤 안에서 나온 김알지는 하얀 닭이 그의 탄생을 알려줬다. 이렇게 닭은 나라의 임금이나 왕후의 탄생을 알리는 상서로운 새였다. 또한 백제 명망의 징조로서 태자궁의 수탉이 작은 참새와 교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와 닭은 서로 끊으려야 끓을 수 없는 관계였다. 박혁거세, 김알지 같은 신라왕의 신화에 등장하는 '계룡'이나, 신라로 국명이 정해지기 전 나라 이름이 '계림'이었다는 점, '신라인은 닭을 숭상하고 그 깃을 꽂아 장식한다'는 천축국 사람들의 말에서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닭을 숭배하는 풍속은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천축국에서는 고구려를 계귀국이라 불렀다 한다. 그리고 무용총 천장에는 닭이 한쌍 그려져 있고, 신라인들이 고구려 군인들을 공격할 때 "수탉을 죽여라"라고 외쳤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 경주 천마총에서는 수십 개의 달걀이 들어 있는 단지가 발견됐고, 그 외 여러 고분에서도 닭 뼈가 발견되었다. 달걀 껍데기가 들어 있는 백제 '고배'(高杯, 다리가 붙은 그릇을 말하며 '굽다리접시'라고도 한다), 가야 지산동 고분에서 발굴된 닭 뼈 등은 모두 제물로써 무덤의 부장품이었다. 이들은 무덤의 주인에게 주는 부장 식량이거나 재생, 부활의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고려 때는 세말에 집 안의 잡귀를 몰아내고 정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축귀 행사의 하나인 '나례'의 공양물로 채택됐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본초강목'에는 "조선 닭이 좋다 하여 중국의 세력가들은 조선에까지 가서 닭을 구해 간다"라고 적혀 있다.
◇닭이 울면 어둠이 걷히고 '빛의 시간'이 온다
'닭아, 닭아,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기는 섧지 않으나/ 의지 없는 우리 부친/ 어찌 잊고 가잔 말가!'
'심청전'의 한 대목이다. 날이 새면 뱃사공에게 팔려 죽음으로 가야 하는 심청에게 닭의 울음소리는 죽음의 소리였다. 새벽을 알리는 시보(時報)인 닭 울음리가 들리지 않기를, 닭이 울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한탄이 들어 있다.
닭은 새벽녘 어둠을 가르고 길게 울음을 토해내면서 새벽을, 빛의 도래를 예고했다. 수탉은 정확한 시간에 울었기 때문에, 그 소리만 들으면 밤이 깊었는지 날이 샜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시계가 없던 시절, 새벽 시간은 닭의 울음소리로, 날씨가 흐린 날이나 밤 시간은 닭이 횃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파악했다.
특히 과거에는 조상을 모시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닭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뫼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닭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보니, 닭이 제때 울지 않거나 울 때가 아닌데 울면 불길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닭이 초저녁에 울면 재수가 없고, 한밤중에 울면 불행한 일이 벌어지며, 해가 진후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했다.
닭의 피를 뿌려 귀신을 쫓는다. 사람들은 닭의 울음소리로 어둠과 귀신의 시간, 빛과 인간의 시간을 나눴다. 귀신은 빛을 무서워하며 밤에만 활동하는 존재이고, 닭은 어둠이 걷히고 빛이 지배하는 시간이 다가옴을 알리는 존재다. 그래서 태양을 부르는 빛의 전령인 닭 울음소리만 들리면 도깨비나 귀신들은 일제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닭이 나쁜 정령을 쫓고 귀신을 제압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귀신을 쫓을 때 닭 그림을 걸어놓거나 닭 피를 뿌리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새해에 각 가정에서는 닭이나 호랑이, 용을 그린 세화를 벽에 붙여 액을 쫓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초에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방법 중에 '닭울음점'이 있다. 대보름달 꼭두새벽에 첫닭이 열 번 이상 울면 그해는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닭은 이렇게 축귀나 제액 초복의 존재일 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영험함이나 부활의 기원도 상징했다. 물에 빠진 사람의 시신을 찾지 못했을 때 하는 위령굿에서는 닭을 물에 던져 점을 친다. 닭이 우는 곳에 이의 넋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서 굿을 했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 중복에 걸렸을 때도 수탉을 묶어놓고 단골이나 중이 와서 굿을 하거나 경을 읽었다.
중복에 걸리면 시신이 굳지 않고 산사람처럼 흐물흐물한데, 그 상태로 매장을 하면 중상사 또는 중복사가 난다고 한다. 죽은 망인이 저승으로 갈 때 못 가게 가로막는 귀신이나 장애물을 '복'이라고 한다. 초상집에 사나운 귀신이 달라붙어서 망인도 안 좋고 상주도 안 좋은 재앙이 있는 것을 ‘복에 걸렸다’고 하고, 이 사나운 귀신이 든 재액을 중복살이라고 한다. 중복사는 중복살 때문에 거듭 초상이 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무속 제의에서 닭은 영혼의 소재를 알리고, 벽사의 기능을 했다.
◇닭의 울음은 태초의 소리였다
닭은 '주역'의 팔괘에서 '손'(巽)에 해당하는데, 손의 방위는 남동쪽으로 여명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닭은 새벽을 알려주는 신비한 영물로서 태양의 새였다. 그리고 무속 신화나 건국 신화에서 닭 울음소리는 임금의 탄생이나 천지개벽을 알리는 태초의 소리였다.
제주도 무속 신화 '천지황본풀이' 서두에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 동방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닭의 울음과 함께 천지개벽,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 있다. 또한 새 시대는 새로운 임금이 여는 것이라, 건국 신화나 뛰어난 임금의 탄생에도 닭이 등장한다.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시림에서 밝은 빛이 보였다. 붉은 기운이 하늘에서 땅에 드리워졌고 황금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밝은 빛은 궤에서 나오고 있었고, 하얀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서둘러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이 친히 숲으로 가서 궤를 열어보았다. 궤안에서는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 일어났다. 왕은 그를 태자로 삼았고 이름을 알지, 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김씨로 하였다.사량리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얼굴과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은 닭부리와 같았다. 월성에 있는 북천에 가서 아이를 씻기니 그 부리가 떨어져나갔다.'
'삼국유사'에 실린 김알지와 알영 부인의 신화이다. 나라를 통치할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하얀 닭의 울음소리는 빛의 상징으로, 국가적 체계를 갖춘 나라로 나아갈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 부인은 하늘이 내린 왕비라는 신성성을 계룡을 통해 부여받고 있다.
◇서재에 닭 그림을 걸었던 이유는?
정초에 액을 쫓기 위해 닭 그림을 집 안에 걸기도 하지만 부귀공명과 입신출세,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데도 사용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은 서재에 닭 그림을 걸었다. 닭의 볏이 벼슬을 상징하는 관을 쓴 모양과 같았기 때문이다.
보통 닭 그림에는 맨드라미와 모란을 함께 그렸다. 맨드라미는 닭 볏과 모습이 비슷하여 관 위에 관 하나를 더하는 것으로 최고의 입신출세를 의미했다. 그리고 부위의 상징인 모란을 공명의 상징인 수탉과 함께 그려 부귀공명을 기원했다.
조선 후기 화가 변상벽의 '암탉과 병아리'와 조선시대 목가구의 경첩장식 문양에는 어미 닭이 많은 병아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오복의 하나인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많은 아들딸을 낳아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수복강령의 소망이었다.
◇닭이 더위를 이기는 음식이 된 이유는?
제주도에서는 음력 6월20일이 닭을 잡아먹는 날인데 여자는 수탉을, 남자는 암탉을 잡아먹어야 좋다고 한다. 제주도에 이런 풍속이 생긴 이유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전해온다.
옛날 어느 고을에 늙은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노부모는 더위가 닥쳐오면 입맛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노쇠한 데다 식사마저 제대로 못해 날로 여위어가는 부모를 보자 효자는 애간장이 탔다. 그래서 어찌하면 부모님이 무더운 여름을 잘 견딜까 고민하다가, 삭풍이 몰아치는 바위 위에 앉아 겨울 신에게 여름의 더위를 몰아내달라고 기도를 했다.
어느 날 밤, 효자의 효성에 산신이 감동한 것인지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한 쌍의 새를 주면서 "이 새를 집에 가지고 가서 잘 기르되, 알을 낳거든 모아두었다가 춘분과 청명한 날을 사이하여 어미 새에게 안기거라. 그리고 그 새끼들이 자라서 새벽녘에 우는 새가 있거든 그날 아침 곧 잡아서 어머니께 드리고, 그렇지 않은 놈은 아버지께 드리면 여름철에 더위에 쫓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백발노인은 "늙은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나 내 힘으로는 여름의 더위를 몰아낼 수가 없으니 이 새를 잘 기르도록 하여라"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새는 다름 아닌 닭 한 쌍이었다. 닭 한 쌍을 받은 효자는 노인의 말대로 닭이 낳은 달걀을 모아두었다가 춘분이 되자, 모아두었던 알을 꺼내 어미 닭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 새끼가 자라 새벽녘에 소리 높여 울자, 그놈을 잡아서 어머니께 드리고 그렇지 않은 놈은 아버지께 드렸다. 그랬더니 그 여름은 아주 몸성히 지낼 수가 있었다 한다. 이때부터 여름철이면 더위를 이기기 위해 닭을 잡아먹고 몸을 보신하는 한여름 풍속이 시작됐다.
◇장모는 왜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주었을까
예로부터 반가운 손님이 오면 닭을 잡는 것이 최고의 손님 대접이었다. 특히 농촌에서는 대부분 닭을 기르고 있어서 언제든지 필요하면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백년손님이라는 사위가 처가에 가면 꼭 먹는 것이 씨암탉이었다. 장모에게 가장 귀한 손님은 사위였고, 딸을 잘 부탁한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아낌없이 씨암탉을 잡아 대접했다. 씨암탉을 잡는다는 것은 병아리를 깔 수 있는 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고, 이것은 집안의 중요한 재원 하나를 버린다는 의미다. 그래서 손님으로 가서 그 집의 씨암탉을 얻어먹었다면 최고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씨암탉이 낳은 계란도 귀하게 여겨서 친척의 생일이나 결혼, 환갑때 짚으로 달걀 꾸러미를 싸서 부조를 했다. 닭은 알을 하루에 하나밖에 낳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모아두었다가 10개가 되면 한 꾸러미를 만들었으니, 모으는 마음의 정성 또한 대단했다.
결혼식 초례상에는 반드시 닭이 필요했다. 신랑 신부가 초례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서서 백년가약을 맺을 때, 닭을 청홍 보자기로 싸서 상 위에 놓거나 동자가 안고 옆에 서 있었다. 즉, 닭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는 것이다.
옛날 나라의 임금들이 서로 서약을 맺을 때 말피로 맹서했다고 하는데, 부부 인연의 서약은 닭으로 맹서를 했다. 혼인 의례가 끝나고 신부가 시댁 쪽에 폐백례를 드릴 때도 닭고기(鶏肉脯)를 놓고 절을 한다. 이처럼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중요한 평생 의례인 혼인에 닭이 등장하는 것은 닭을 길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저자의 책 '운명을 읽는 코드 열두 동물'(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의 내용 일부이며, 지난 21일 국립민속박물관의 '정유년 새해를 맞다' 특별전 학술강연회에서도 발표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