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과에 급제한 임자년(1792)의 문과 급제자는 59명이었다. 그중에 정승 집과 재상 집 자제들은 발표 뒤에 즉시 규장각과 홍문관의 자리에 제수되었고, 서울 명문가 출신의 젊은이들은 모두 초계문신에 들었다. 초계문신은 최고로 촉망받는 인재들로만 구성되는데, 녹봉 말고도 하사받는 물품이 줄줄이 이어지고 교외로 나갈 때면 가마와 말을 타고 각 고을에서 편의를 제공받는다. 그 밖에 노쇠하고 가세가 없는 사람들, 명경과로 합격한 시골 사람들은 녹봉을 받는 벼슬은 고사하고 삼관에 배치되는 것조차 기약 없이 미루어졌다.’
18세기 문인 윤기(尹愭·1741~1826)의 저서 ‘무명자집’ 문고 제3책 ‘우스갯소리(語合識)’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윤기는 ‘노쇠하고 가세가 없는 사람들’에 속했다. 33세에야 소과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간 후 20년을 유생으로 지내다 52세에야 대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성균관 근처에 살면서 성균관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할 만큼 궁핍하게 살았고 급제 후에도 지방관리를 전전해야 했다.
돈 없고 ‘빽’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었던 시대, 마이너리거의 눈으로 본 부조리와 권력의 횡포, 그 틈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서민의 생활을 윤기는 낱낱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호를 딴 ‘무명자집’의 원본은 27책. 그중 8책은 소실되고 19책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가 다섯 살 때 지은 시를 비롯해 220수의 연작시와 산문 속에는 그 시대의 풍습, 제도는 물론이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그의 내면세계가 숨김없이 담겨 있다. 정사에서는 볼 수 없는 성균관 유생들의 야사 등 그 시대의 미시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명자집 원본은 일부 윤기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일부는 유실된 채 1970년대 우연히 그 존재가 알려지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무명자집’처럼 먼지 뒤집어쓴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현재의 언어로 되살려내느냐는 고전번역가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신진·중진 고전번역가 발굴을 위해 제정한 제1회 방은고전번역상에 ‘무명자집’ 번역자 중 한 명인 강민정(43·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씨를 선정했다. 방은고전번역상은 전문 번역자 양성에 헌신한 한학자 방은 성낙훈 선생(1911~1977)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이다.
강 씨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를 졸업했다. 이과 출신이 고전 번역을 하게 된 경력이 특이했다. 지난 11월 1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강 씨를 만나 고전 번역의 세계를 들어봤다.
강 씨는 이번 ‘무명자집’ 수상에 대해 “작품의 해제가 높이 평가된 덕분”이라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연구 자료를 읽지 않고도 전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해제인 만큼 특별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해제 작업이 본문 번역보다 더 어렵고 시간이 걸렸습니다. 해제를 제대로 쓰려면 작자가 어떤 입장에서 썼는지 당시 상황까지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모두 찾아야 합니다. 그만큼 작품에 자신감이 있어야 해제가 가능합니다. 고전은 논리 전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인이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고전을 번역하는 이유도 소통을 위해서인데, 단지 한문을 한글로 옮기는 차원이 아니라 대중이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석이 필요합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나 영화 ‘왕의 남자’처럼 문화콘텐츠 기획자나 연구자들을 위해 다양한 소통의 창구를 마련하는 것이 번역자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번역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신라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역대 문집을 집대성해 영인출판한 한국문집총간이 500집에 이른다. 500집 중 정편 350집에 문집 663종이, 속편 150집에 596종의 문집이 수록돼 있다. 원서로 따지면 모두 2만여권에 달한다. 영인본은 전부 전산화 작업이 돼 있어 검색어만 잘 잡으면 웬만한 자료는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정부출연기관으로 1965년 세워진 민족문화추진위가 그 뿌리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한국 고전 정리와 번역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번 ‘무명자집’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10년부터 시작한 ‘권역별 거점연구소 협동번역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전국 13개 거점연구소 중 한 곳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성균관과 관련이 깊은 ‘무명자집’을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 대동문화연구원에는 4명의 책임연구원과 2명의 연구원이 있다. ‘무명자집’은 강 씨를 비롯해 김채식, 이상아, 이규필 책임연구원 4명의 공동 작업이다. 무명자집 번역이 무엇보다 뛰어난 것은 전체 연보를 묶어서 별도의 책을 냈다는 것이다. 무명자 개인의 정보만 엮었다면 한 사람의 일대기에 그쳤겠지만 그 시대의 정보를 집적해 묶어놓아 자료적 가치가 뛰어나다.
강 씨가 고전번역과 만나게 된 것은 ‘춤’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전공인 지구과학은 던져놓고 탈춤을 시작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보유자인 이애주 서울대 교수 밑에서 전통춤에 빠졌다. “춤을 추다 이론에 대해 파보고 싶었어요. 이론적 깊이가 없다 보니 일단은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동양미학을 공부하게 됐는데 관련 책들이 주로 중국화론이었어요. 원서로 읽어야 하니 한문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처음에 논어와 맹자를 배우면서 나를 성찰하게 하는 공부에 쑥 빠져들었죠.”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한 연수부 과정에 들어가서 연구과정까지 5년을 공부했다. 지금은 연수부 3년, 연구1·2부 각 2년씩 총 7년 과정이 됐다. 연수부에서 연구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몇 번씩 재수를 할 만큼 어렵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배출된 한문번역가가 매년 5명씩이다.
한문번역가 양성 과정은 많지 않다. 그동안 대학 내에는 한문번역 교육과정이 없었다. 몇 년 전부터 고전이 무궁무진한 문화콘텐츠의 보고로 인식되고, 학술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고려대와 성균관대에 한문고전번역협동과정인 대학원이 설립됐다. 강 씨도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밖에 한림대에 있는 태동고전연구소와 성균관대 한림원 정도이다.
강 씨는 정보 활용, 문화콘텐츠 소스 등 독자층이 다양해지면서 고전번역의 저변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 것은 아무리 공부해도 최고가 못 되지만 우리 것은 제대로 하면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고전을 번역하려면 앞으로도 70년이 걸릴 만큼 방대한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문집총간의 경우 번역서가 나온 것은 전체의 13.2%에 불과합니다. 승정원 일기만 해도 완역하려면 앞으로 50년이 필요합니다. 또 고전은 시대가 바뀌면서 재번역이 이뤄져야 합니다. 외국의 경우도 보면 고전을 재해석하면서 계속 새로운 학설이 나옵니다.”
번역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 ‘무명자집’도 교열 과정에서 다른 시도를 했다. 일반적으로는 번역 원고를 교열자에게 보내면 빨간펜으로 교열을 해서 보내고, 교열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도 번역자가 알아서 판단하기 때문에 소통이 제한적이다. 강 씨는 “고전번역으로 모란장을 수상한 원로 한학자 정태현 선생님이 매주 오셔서 대학원 수업하듯 번역한 내용을 읽고 코멘트를 해주셨어요. 현장에서 바로 질문하고 토론을 하면서 소통하는 교열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를 포함해 번역자들이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무명자집’이 주목받는 책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강 씨는 ‘무명자집’의 저자 윤기의 기록정신은 독보적이라고 평했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한 글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고 했다. 강 씨가 번역한 9책의 첫 장은 ‘시장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제목으로 기묘년(1759년·영조 35년)에 기록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저자가 인천 시장에 들렀는데 모여든 장사치가 천 명은 되더라는 것.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도망가자 시장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도망가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었단다. 알고 보니 소동을 일으킨 범인은 노루였다. 글에는 노루라는 것을 알고 도망가지 않은 나무꾼과 노루를 보지 않았으면서도 도망가지 않은 저자와의 선문답 같은 대화가 덧붙여 있고, 소동을 통해 느낀 감회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솝우화 같은 동화를 비롯해서 무한한 콘텐츠가 들어있습니다. 번역을 하면서 위로를 받은 적도 많았습니다. 황당한 의심을 받아 마음고생을 하는 등 우연히 번역하는 내용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돼서 글에서 해답을 구한 적도 있습니다. ‘벼룩’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를 번역할 때는 우리 아이들 머리에 이가 생겨 퇴치하느라 고생했어요. ‘저자의 생각을 옮기기 위해서는 같은 처지가 돼 보란 뜻인가, 내게 무명자집을 번역하라는 사명을 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전번역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묻자 강 씨는 ‘끈기’와 ‘겸손’이라고 답했다. “연구자는 독해가 안 되는 자료는 버리고 다른 자료를 보면 되지만 번역가는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용례 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없는 것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최대한 맥락을 파악해서 최초로 정의를 내려줘야 하는데 끈기가 없으면 할 수 없죠. 또 한 가지 겸손함이 필요한데 아무리 경지에 올라도 남에게 묻기를 꺼리면 안 됩니다. 옛날에는 문과·이과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학문이기 때문에 고전 번역은 집단 지성이 필요합니다.”
▲ 무명자집 원본과 번역서
강 씨는 고전번역의 발전을 위해서는 발전적 논쟁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근 학부 때 전공을 살려 과학기술고전 분야에 도전하고 있는데 새로운 번역방식으로 주목을 받고 있단다. 세종실록 재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천문학자, 항공기계공학 교수, 번역자 3명이 매주 머리를 맞대고 제한 없는 토론을 한다는 것. “시선이 다르고 기본지식이 다르다 보니 아무리 사소한 것도 질문할 수 있고 새로운 주석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스스로도 엄청나게 발전하는 것을 느낍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도 주목하고 있는데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는 만큼 예산 지원이 따라줘야 합니다.”
강 씨는 이제 고전 번역도 양보다는 질적인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번역은 과거와 현재의 소통이며 저자·번역자·독자의 소통인 만큼 속도보다는 정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자의 어려움은 강력합니다.
초등학교때 배우다 말다, 배우다 말다
문교부의 중심에 한자만 보면
눈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