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고 전혜린

조회 수 10867 추천 수 6 2015.01.02 12:15:16

                                                    불멸의 고 전혜린

 

                                                                                                                                    박상미(문화평론가)

         


31살의 나이에 ‘세코날 마흔 알’로 생을 끝내버린 전혜린. 그가 죽은 지 49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한다. 죽음의 유혹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고 싶어 했던, 완벽한 사랑인 모성을 갈망하고 딸을 통해서 신에 이르겠다고 한 그가 왜 죽음을 택해야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를 잊지 못하는가. 죽어도 죽지 않는 전혜린. 무엇이 전혜린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일까.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서의 그리움!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먼 곳에의 그리움 中)

떠나고 싶은 ‘먼 곳’을 머릿속에 그릴 때면, 회색 어둠과 함께 소리 없이 내리는 안개비, 그리고 노란 가스등 아래 젖은 아스팔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은 스무살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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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혜린 글에 자주 등장하는 뮌헨 슈바빙의 영국 정원. 전혜린에게 슈바빙은 낭만과 꿈과 자유가 있는 ‘뮌헨의 몽마르트르’

 

  뮌헨(Munchen). 59년 전 이 땅에 머물렀던 전혜린을 찾아가는 길. 그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가 배낭 속에 있었다. 뮌헨에 머무르는 동안 다시 읽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옷과 노트북 등이 든 트렁크를 잃어버렸다. 낡은 책과 당장 쓸 최소한의 돈 외에 모든 걸 잃은 것이다.

  모르는 얼굴과 언어 사이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환청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만 먹어도 죽지 않더라. 머리를 나부끼며 혼자 걸어!’

  전혜린처럼 최소한의 음식을 먹고 많이 걸어다닐 수밖에 없는 뮌헨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배는 다소 고팠지만 즐거웠다. 나의 머리는 전혜린의 생각으로 가득찼다.

  “돈이 떨어지다. 배는 다소 고프지만 나는 즐겁다. 오늘은 가을 하늘이 멋이 있었고, 나의 머리는 니체와 루 생각으로 가득찼으니까.”(1958년 11월 5일)

 

  최초의 동양여자 유학생
  ‘세코날 마흔 알’로 생을 끝내버린 전혜린. 1965년 1월 11일 일요일 아침, 그는 지상을 떠나 꿈꾸던 자신의 별을 찾아 떠났다. 매순간을 절박하게 살았으니 죽음에도 절박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느닷없는 죽음은 그의 삶을 더 신비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믿고 싶었다. 전혜린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그러하듯 그의 죽음을 미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전혜린은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뮌헨에서 지냈다. 뮌헨대 인문대학교 최초의 동양여자 유학생. 당시 독일 유학을 했던 유학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인들이 아프리카 콩고와 코리아를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막 전쟁이 끝난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한국 학생에 대한 냉대가 심했다고 한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고,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전혜린은 홀몸으로 독일로 건너가 독일 리얼리즘의 선구자 그릴파르처의 문학을 연구하고, 철학자 니체와 그의 연인인 소설가 루 살로메의 작품을 공부했다. 긴 겨울과 뮌헨의 젖은 공기 때문이었을까.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를 한 적도 있고, 돈이 없어서 일주일 동안 물만 마시며 버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자유를 풍족하게 누린 뮌헨.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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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헨의 상징인 시 청사와 마리엔 광장. 전혜린은 뮌헨에서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지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조선총독부의 관리였고, 천재로 불렸던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세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책을 마음껏 읽으며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1952년 전시연합대학교 임시 가교사가 있던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의식의 세계에서 나는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식을 쌓아올렸던 것 같다. 마치 제단 앞에 향불을 갖다 쌓듯.”(목마른 계절) 벗어나기 힘든 전근대적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먼 곳에 대한 그리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시작되었으리라.

  수학을 0점 받은 여학생이 타 과목에서 압도적인 고득점을 받아서 전체 차석으로 입학하면서 그의 천재성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소망대로 법대에 진학했으나 법보다 독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여고시절 단짝 주혜가 다니는 문리대 강의실에서 문학 강의를 들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 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먼 곳에의 그리움)


  뮌헨 슈바빙, 그리고 영국 정원
  전혜린은 1955년 스물한 살 때 독일 뮌헨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인식에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 대학생이 된 후에도 그런 결심을 되풀이했었다.”(홀로 걸어온 길) 뮌헨의 대학가 슈바빙과 영국 정원이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한다. 전혜린에게 ‘슈바빙’은 기계문명 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 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이자 신선한 바닷바람 같은 자유의 냄새로 사람을 매혹하고 마는 ‘뮌헨의 몽마르트르’였다.

  뮌헨 슈바빙 지구의 이자르(isar) 강을 따라 펼쳐진 광활한 영국식 정원을 따라 걸으며 전혜린을 생각한다. 이곳의 숲과 개울을 따라 걸으며 그는 자주 사색에 잠겼었다.

  “썰매 타는 아이들로 번잡했던 호수가 오늘은 깨끗이 녹아서 푸르디푸른 물이 출렁인다. 백조는 언제 돌아올까? 바람이 몹시 분다.” (59년 1월 7일)

  “푸른 하늘에 별이 총총, 흰눈이 덮인 거리, 가로등, 차고 신선한 공기… 영국 공원의 실개천이 가로등과 별빛 아래 검게 빛나며 재잘거린다. 자연은 정말 언제나 아름답고 조화에 가득차 있다.”(59년 1월 12일)

  영국 정원은 광활한 자유의 공간이다. 햇빛이 구름을 벗어나는 날이면 남녀 할 것 없이 옷을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곳. 알몸의 청춘들의 눈부신 피부를 눈으로 애무할 수 있는 곳.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벤치에 앉아 전혜린의 글을 소리내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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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1월 11일 일요일 아침, 서른한 살의 나이에 ‘세코날 마흔 알’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 | 경향신문 자료


  별에 닿고 싶었던 여자
  결혼제도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는 이곳에 온 지 6개월 만에 부모님의 뜻에 따라 결혼을 했다. 주부의 안일한 삶의 방식과 나태에 빠지는 것을 경멸하면서도 남편을 챙기는 아내, 아이를 신이 준 축복으로 여기는 여인의 모습으로 보낸 시간이 있었다. 부산에서 만난 철수. 가끔 행복했고 많은 시간, 내면의 일상적 여자와 싸워야 했다.

  “결혼이란 확실히 인간을 좁힌다. 벽난로 앞의 단란과 의·식·주의 안정과 안락 이외에 아무 엠비션도 안 남기고 만 다. 둘만의 평안과 행복,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 남기고 만다… 여자의 생은 모방이지, 참 생은 아니다. 따라서 위대한 사랑조차도 여자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 자신 속에서 발견한 여자가 나를 절망케 한다. 일생에 한 번. 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58년 10월 15일)

  “오늘 철수는 나에게 자그맣고 예쁜 손목시계를 선사했다… 정말 기뻤다. 철수는 그 외에 나에게 값비싼 빨간 장미 한 송이와 예쁘장한 카드를 선물로 주었다. 정말 말할 수 없이 그가 고마웠다. 새해에 내가 바라는 것은, 1.건강, 건강, 건강! 2.좋은 과제와 성공 3.철수의 성공 4.건강하고 영리한 아이 5.약간의 돈.”(59년 1월 1일)

  결혼 후 그는 자기만의 정신세계로 더 깊이 빠져든다.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들은 모두 본질적 자아를 찾기 위한 고통과 아픔이 마치 뮌헨 특유의 젖은 공기처럼 문장에 눅눅하게 배어 있다.

  “모든 평범한 것, 사소한 것, 게으른 것, 목적 없는 것, 무기력한 것, 비굴한 것을 나는 증오한다! 자기 성장에 대해 아무 사고도 지출하지 않는 나무를 나는 증오한다. 경멸한다. 모든 유동하지 않는 것, 정지한 것은 퇴폐다. 저열한 충동으로만 살고 거기에도 만족하지 않는 여자를 나는 증오한다. 나무는 하늘 높이높이 치솟고자 발돋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별에까지 닿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것이 허락되지 않더라도….”(59년 1월 15일)

  그의 감정에 전이되어 통독을 멈춰야 할 때면, 전혜린이 한국어로 번역한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의 독백이 떠올랐다.

  “생이란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모든 것에 파고드는 것이었어.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어.”

본질적 자아를 찾으려는 전혜린의 노력은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헤르만 헤세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로부터 답신을 받기도 했다.

  “오늘 아침 헤르만 헤세의 편지를 받고 즐겁게 놀랐다. 그 속에는 석 장의 그림엽서와 헤세의 축하인사가 들어 있었다.… 난 그것을 무조건 1959년 새해의 길조로 여기고 싶다. 그것은 틀림없이 커다란 기쁨을 내 일에 가져올 것이다.”

 

  다시 서울로 - 권태와 광기 그리고 절망
  1959년, 4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전혜린은 남자만 대학 강단에 서는 전통을 깨고 ‘한국에서 1세기에 한 번쯤 나올 희귀한 천재’라는 찬사를 받으며 25세에 서울대학 강단에 선다. 공부를 끝내지 못한 남편을 남겨두고 혼자 귀국한 전혜린은 딸 정화를 키우면서 서울대·성균관대·이화여대 등에서 강의하며 수많은 에세이를 발표했고, 주옥 같은 독일 문학을 번역해서 한국에 알렸다. 그리고 서른한 살에 성균관대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 시절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그의 글과 말에는 늘 권태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 수면제와 커피 없이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심신이 예민해져 있었다. 숨 쉬는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느끼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외로워했던 여자 전혜린.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지만 1964년에 그들은 이혼했다.

  “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서울대 명예교수 김철수 인터뷰, 2013년 5월 13일자 서울신문 참조)

  이혼 후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년 뒤에 김철수 교수는 재혼을 했지만, 지금의 아내가 전혜린의 제사를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고 한다. 김 교수에게도 전혜린은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인연 이상의 존재이리라.

 

  뜨겁게 미친 듯이 생을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
  성균관대학교 전임교수가 되었지만,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의 삶을 지속적으로 쫓아다녔다. 5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곱 살 정화를 남겨놓은 채.

  전혜린과 같은 전후 젊은 지식인들은 불안과 강박을 지병처럼 다스리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일생에 한 번, 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갈망과 자아실현의 욕망이 강했던 사람. 그녀의 문체는 번역체이고 자기중심적 독백체이지만 절실함과 진정성이 있다.

서울문리대 근처 학림다방, 명동의 술집 은성에서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검은 옷, 검은 스카프를 두른 유난히 눈빛이 깊은 여자는 끝없이 담배를 피우고 웃고 이야기했다. 4·19혁명, 5·16 쿠데타, 6·3사태를 지나오며 이념과 현실, 그리고 자아 사이에서 고뇌할 때 학림다방과 은성은 권태와 광기를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뮌헨에서 정신적 자유를 맘껏 누리다 온 전혜린은 하루하루가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학교도 그에겐 해방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순수한 영혼으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의식을 매순간마다 지키고 깨어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인간에게 적합하고 당연한 생과제인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정신에 의해서 빛나게 된 것이 아니라면 무가치하다. 우리가 뜨겁게 미친 듯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순수한 의식의 상태에서뿐이다.”(1961년 1월 17일)

  순수한 영혼의 대화를 나누었던 스무 살 제자와 사랑이라는 탈출구를 찾았을 때, 그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아들을 놓아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독수리’처럼 날아왔던 사랑은 ‘참새’처럼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장 아제베도’에게 쓴 편지엔 이렇게 적었다.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나를 살게 해줘.” 아제베도는 참새처럼 떠나버린 청년이었을까.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는 그가 죽은 뒤에 발견되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전혜린
  그가 죽은 지 49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는 전혜린과 뮌헨 슈바빙을 잊지 못한다. 죽음의 유혹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고 싶어했던, 완벽한 사랑인 모성을 갈망하고 딸 정화를 통해서 신에 이르겠다고 한 그가 정화를 두고 왜 죽음을 택해야 했을까. 그리고 그가 죽은 지 49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하는가. 죽어도 죽지 않는 전혜린. 무엇이 전혜린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일까.

“죽음은 누구의 죽음이나 엄숙한 사실이다. 더구나 그것이 의식적으로 선택되고 논리적으로 사유된 결과인 경우 무엇이 죽음에 던져 넣었는가를 알고 싶어해도 마땅할 것이다.”(죽음에 대하여) 무엇이 그를 죽음에 던져 넣었는가. 그는 심장으로 사랑하는 것들로 인생의 매순간이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인생은 늘 공허하고 만족스럽지 못했으리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거듭 밝혔던 동생 채린과 모든 것을 초월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나눈 친구 주혜, 그리고 딸 정화조차도 그의 죽음을 막진 못했다.

  소녀 시절부터 “절대 평범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던 전혜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세코날 마흔 알’로 인한 사고사였는지 우리는 오늘도 알지 못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순간 사랑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끝내 행복에 이르지 못한 자신의 존재론적 삶에 대한 저항이었으리라, 살아남은 우리들끼리 서로 위로할 수밖에.

당신이 사랑한 슈바빙의 영국 정원.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온통 흰 융단으로 덮인다.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눈 덮인 거리, 노란 가스등, 차고 신선한 공기… 영국 공원의 실개천이 가로등과 별빛 아래 검게 빛난다. 이곳은 당신이 거닐던 59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아름답다. 죽지 않는 그대여, 오늘 밤 우리 이곳을 함께 걷자.

                                                                                                                                                                 < 글·사진 박상미> 
 
 
 
 

 


정순옥

2015.01.12 16:21:36
*.51.4.165

데미안을 읽고 한참 생각이 깊어졌던 처녀때의 생각이

불쑥 납니다.

저도 영국 정원에 한 번 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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