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해설
책상 위에 올라선 페미니스트
- 김준호의 시세계 -
임 오 솔 (문학평론가)
세상에나! 신선한 충격이다. 경건하다고 여기는 카톨릭 신자들이 이 시들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이건 성경을 소재로 한 막장 드라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묘하게도 이 드라마에 마음이 끌린다.
김준호 시인은 성경을 새롭게 열린 시각으로 보고 이해하려고 한다. 살아 숨 쉬는 피와 살을 가진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소외되었던 성경 속의 여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조명해 보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이는 시인 자신이 <훌다>라는 시에서 자신은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면서, 이 시집의 시들은 여자들을 좋아해서 나오는 생각들이 시로 나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작품을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밝혀지겠지만, 그러나, 그가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여자’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시 <하느님의 어머니>를 보면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 시에는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부러워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엄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는 엄마가 없는 천국에서 엄마들로 가득 찬 이 땅에 서둘러 내려왔다고 말한다.
성자 하느님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기존의 유대교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새로운 시각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소외되고 연약한 고아와 과부, 여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사랑하신 분이기도 하다.
시인은, 세상과 사물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시각으로 인식해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는 사람이다. 피와 살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에 다가가는 사람이다. 기존의 낯익은 인식을 거부하고 낯설게 하여 진실에 이르려는 사람이다. 하느님, 예수님을 서재에 가두지 않고, 우주 공간에 맘껏 펼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준호 시인은 진정한 시인이요, 예수님의 참 제자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또, 시인과 시 작품은 새로워야 한다. 소재가 새롭든지, 소재가 새롭지 않다면 방법이 새로워야 한다. 그런데, 김준호의 시는 소재가 새롭다. 성경에서 소재를 취했다. 거기서도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여인들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그들을 여신으로 보았다. 방법도 새롭다. 형식도 새롭다. <훌다>, <聖母의 그늘을 벗어나> 같은 시에서는 연극적 형식 - 대사 방식을 차용한 대화체 시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큰 새로움이 아닐 수 없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보면, 키팅 선생님이 나온다. 그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읽고 그 페이지를 찢어 버리라고 말하는가 하면, 자신이 교탁 위에 올라서서는 학생들에게 너희들로 책상 위로 올라가 서보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물과 풍경이 밑에 앉아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김준호 시인은 키팅 선생님이다. 책상 위에 올라선 페미니스트다.
그러면, 책상 위에 올라선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본 성경 속의 여자들을 지금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아름다운 유혹, 유혹하는 여인들
인류 역사의 속내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유혹의 역사이며, 이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속 깊은 내면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뭐라고 말할까. 이러한 시각은 성경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지 않을까.
김준호 시인은 말한다. 인류 최초의 유혹하는 여자는 하와였다고, 그리고 아비가일, 밧세바, 타마르, 라합, 룻 등의 여인도 아름다운 유혹자였다고.
에덴동산은 꿈이었다
깨고 싶지 않은 박하사탕 같은 꿈이었다
하지만 꿈이기에 깨어나야만 했다
하느님은 동산에 생명 나무를 심어
꿈을 깨는 길을 마련하였으나
아담은 행복하게 꿈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男子가 무릉도원에서 나오려고 하랴
꿈속에서도 깨어 있던 하와는
꿈을 벗어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아담의 행복을 질투하던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혹에 넘어갔다
아담과 그녀 자신을 위하여
하와의 말만 듣는 고집통이 男子 아담이
사랑으로 하와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
무위도식하는 낙원을 포기하고
하루를 살기 위하여
피와 땀을 흘려야 하는
현실로 하와를 따라 나왔다
- <에덴동산의 꿈> 부분
꿈속에서도 깨어 있던 하와는 꿈을 벗어나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혹에 넘어갔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 자신은 물론 아담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위도식하는 낙원을 포기하고 피와 땀을 흘려야 하는 현실로 나오는 길을 택했다. 하와의 유혹에 따라 아담은 안개처럼 사라질 판타지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섰다.
시인도 하와의 후손인 마누라가 준 생명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을 잊지 않고 꿈을 버리지 않는다.
타마르의 유혹을 받은
유다가 이렇게 황홀했을까
라합을 거쳐 간 男子들의
기분이 이토록 좋았을까
룻이 숨어들었던 보아즈의
품이 이렇게 따스했을까
하얀 나비의 품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男子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넘어간
다윗의 마음이던가
- <아름다운 유혹> 부분
(* 글자 진하게, 밑줄 친 것은 필자 - 이하 동일)
이렇게, 하와의 뒤를 이어 밧세바, 타마르, 라합, 룻 등의 여인들로 유혹했다.
그렇다면, 타마르의 경우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는
성경에 있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요즘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를 능가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야기는 그저 성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다는 핏줄을 지키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男子
타마르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어나가기 위해 몸을 던지는
지혜롭고 용감한 女人이 아니던가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의 진정한 막장성을 훔쳐볼 수 있으니…
유다와 타마르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지만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예수님의 족보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이어져야 하는 것
사랑하지 않는 유다의 아들들과 타마르의 사이의
자식은 성스러운 핏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는 짜고 친 고스톱
탈무드에 의하면
유다와 타마르는 나중에 정식으로 결혼해서 살았다는 것이
이 소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
다행이다
유다가 메시아의 족보에 관심 없는 멍청한 男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 핏줄을 이으려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사랑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며느리를 사랑한 것이 불행이었지만
결국은 그 사랑을 이루어
예수님의 족보에 큰 획을 그었으니
- <짜고 치는 성스러운 막장 고스톱> 부분
유다와 타마르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바로 막장 드라마라고 볼 수 있는 시각이다. 유다는 핏줄을 지키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남자였지만, 타마르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어나가기 위해 몸을 던지는 지혜롭고 용감한 여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족보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수많은 男子가 밟고 지나갔으나
그녀의 마음을 오염시킬 수 없었는지
홍해가 모세 앞에서 갈라졌다는 소문을
여호수아의 군대 앞에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다는 소문을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소문을
이 모든 어른 동화를 믿은 라합
예리코의 성벽에 붙은 그녀의 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죄로 물든 성을 떠날 준비를 한다
하느님의 징벌이 성을 휩쓸 때
예수님이 피 같은 진홍색 실로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했으니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그 몸의 보호를 받은 마음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 같은 순백의 눈밭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으며 살았던 그녀
단 한 번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의 성스러운 족보에 이름을 올렸으니
하느님은 원래 이렇게 불공평한 분인가
나 같은 죄人이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하느님은 공평하지 않으심이 분명하다
나도 마음은 그녀같이 깨끗할지도…
- <순결한 창녀> 전문
수많은 남자들을 유혹하여 동침한 기생 라합은 비록 창녀였지만, 단 한번의 초대에 응하여 하나님의 사람 정탐꾼들을 안전하게 보호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의 성스러운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그의 영혼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 같은 순백의 눈발이었다.
오르파와 룻이 같이 베들레헴에 돌아왔다면
아마도 보아즈를 놓고
삼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막장 드라마를 많이 본 모양이다)
아니면 보아즈가 두 女人을 다 취했을지도
(男子들의 판타지)
하기는 성경보다 더한 막장이 어디 있으랴
이런 오물통에서 일하시는 하느님
내가 어떻게 발에 흙을 안 묻히려 하는가
- <잊혀진 여인> 부분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 룻은 그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으나, 다른 며느리 오르파는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작별을 고했다. 룻이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즈를 유혹하여 결혼을 하고 그 후손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고 룻도 성스러운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만일 오르파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함께 돌아왔다면 두 여인이 보아즈를 두고 서로 유혹하는 막장 드라마가 펼쳐졌을 것이라는 상상을 펼치고 있다.
다음은 다윗을 유혹했던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만나보자.
하느님도 美女를 좋아하시는지
男子도 美女를 좋아하게 만드시고
인류 구원의 음모를
아담의 후손인 어리석은 男子와
하와의 후손인 영악한 女子의
결과가 뻔한 싸움으로 이루려 하신다
살기가 등등한 다윗이
아비가일이 평범한 여자였다면
그녀의 말을 들었겠는가
그 여자도 죽이고
남편 나발과 그 집안을
도륙을 냈을 것은 뻔한 일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에
유난히 女子를 밝히는
王의 체질을 가진 다윗이
어찌 그녀의 말을 안 들을 수 있겠는가
나발이 스스로 죽지 않았다면
다윗은 아비가일을 얻기 위하여
나발을 죽였을 것이다
- <하느님의 美人계> 부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현명한 판단으로 쓸데없는 도륙을 막은 현명한 여인이지만, 사실은 다윗의 위대성을 보고 다윗을 유혹한 영악한 여자였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만일 미모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다윗이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아비가일이 뛰어난 미모를 갖추게 함으로써 미인계를 성공시키셨다.
다음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구해 보자.
이방인 장수의 아내가 무슨 재미로 살겠나
미모와 야망을 갖춘 女人이라면
바로 옆에 있는 왕궁의 主人을 탐내는 것은 당연
모든 것은 그녀의 계획대로 이루어졌던 것
그러나 그녀의 아들 솔로몬이 타락하고
결국 왕국의 분열로 이어진 것을 어찌 예상했으랴
하지만 무슨 관계가 있으랴?
그녀는 살아생전 온갖 영화를 다 누렸으며
솔로몬의 타락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으니
그녀도 별로 통탄하지 않을 듯
( 중략 )
밧세바는 오로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다윗을 유혹했고 남편을 죽였으니
비록 족보에 한몫을 하긴 했으나
그 죄를 벗을 수는 없을 것
왜 하느님은 두 죄인에게서 난 자식을
예수님의 핏줄로 만드셨을까?
( 중략 )
그렇다면, 하느님이 욕심 많은 한 女人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신 것?
하느님의 즐겨 쓰시는 일종의 美人계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도 하느님의 계략에 넘어간 것
그래놓고는 다윗보고 죄인이라고 징벌하시다니…
女子를 좋아하는 男子가 어찌 美女에게 안 넘어갈 수 있으랴
유혹을 한 밧세바 때문에
유혹에 넘어간 다윗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
마치 하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 때문에
인류 구원의 대 서사시가 시작된 것 같이
- <야망을 숨긴 女人> 부분
다윗이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음심이 동하여 간음죄를 짓고 부하를 죽였다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사실은 밧세바가 계획적으로 다윗을 유혹한 것이다. 밧세바는 미모와 야망을 갖춘 여인이었는데 이방 장수의 아내로는 자기의 야망을 펼칠 수 없기에 계획적으로 다윗의 눈에 띄는 장소에서 목욕을 함으로써 그를 유혹하고 왕의 아내가 되고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왜 하느님은 두 죄인 사이에서 난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 예수님의 핏줄로 만들었을까? 스스로 내린 답은 이렇다. 그것은 하느님이 즐겨 쓰시는 일종의 미인계였다. 야망을 가진 여인을 이용해서 다윗이 미녀에게 넘어가게 만들고, 유혹을 한 밧세바 때문에 유혹에 넘어간 다윗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2. 하느님의 어머니
카톨릭 신자들은 성모님을 많이 사랑하고 존경하며 성모님께 기도를 바친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니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준호 시인은 하느님이 당신이 창조한 인간을 부러워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상의 사람들에게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 하느님은 엄마가 없는 천국에서 엄마로 가득 찬 이 땅에 서둘러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강림에 대한 아주 새로운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김준호 시인은 불경스러울 정도의 표현으로 성모님을 규정하고 평가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야무진 꿈을 가진 여인이고, 아주 독한 여인이며, 욕심 많은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은 성모님이니까 당연히 외모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성모님은 예수로 하여금 마마보이로 행동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김준호가 인식한 성모상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人間을 부러워했지요
人間들은 엄마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창조主는 엄마가 없는 天國에서
엄마들로 가득 찬 이 땅에 서둘러 내려왔지요
세상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던 하느님은
거대한 새장 같은 외딴 작은 마을에서
이름이 마리아인 수줍은 소녀를 발견했답니다
나의 엄마가 되어주겠소, 빨간 카나리아?
그녀가 무대 위에서 예! 라고 노래하자
하느님은 춤을 추었지요
하느님이 새장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마리아는 날개를 펄럭거리며 나왔답니다
하느님은 천둥 같은 소리를 질렀지요
나도 이제 엄마가 있다!
하느님은 부드러운 몸 안에서 人間이 되고 있었지요
하느님은 女人의 달콤한 젖으로 少年이 되고 있었지요
그는 연약한 女人의 작은 날개 아래에서 男子가 되었지요
그는 가장 우아한 사람의 아들이 되었답니다
하느님은 속삭였지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 중략 )
절대자의 어머니 聖母님
감히 어찌 우리가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나요?
당신의 아들이 고집 센 인간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어찌 당신의 아들을 형제라고 부르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엄마를 가졌습니다
하느님을 키우신 그 작은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하느님을 먹이신 풍성한 젖을 우리에게도 먹이십니다
하느님을 지탱해주신 그 인고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마리아는 줄어들어서 우리의 작은 엄마가 되셨습니다
전능한 자의 어머니가 우리의 평범한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우리 초라한 罪人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녀는 天國에서 하느님과 함께 빛나는 삶을 살고 계시지만
우리를 키우기 위해 나를 키우기 위해 이 세상으로 날아 내려오십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 <하느님의 어머니> 부분
이처럼 김준호 시인은, 하느님이 당신이 창조한 인간을 부러워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상의 사람들에게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 하느님은 엄마가 없는 천국에서 엄마로 가득 찬 이 땅에 서둘러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강림에 대한 아주 새로운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하느님이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엄마를 가지게 되었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먹이신 풍성한 젖을 우리에게도 먹이신다고 고백한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우리의 어머니이며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고 고백한다.
작은 시골 마을의 순박한 少女가
황당한 꿈을 꾼다
몸은 비록 가난한 목수에게
一生을 맡기게 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저 높은 곳을 향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야무진 꿈을 꾼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그녀의 꿈보다
좀 더 황당한 말을 해도
이미 그녀의 영혼육은
하느님을 품고 있었기에
조금 놀라는 척하고
그냥 받아들인다
돌팔매의 두려움이 어찌
그녀의 꿈을 죽일 수 있으랴
불륜의 낙인이 어찌
그녀의 꿈에 상처를 줄 수 있으랴
- <야무진 꿈> 부분
성모 마리아는 작은 시골 마을의 순박한 소녀였지만 황당한 꿈을 꾼 여자였고, 가난한 목수에게 일생을 맡기게 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저 높은 곳을 향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부드럽고 아름다울 것 같은 聖母님이
참으로 독한 女人이라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아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십자가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
이보다 더 독한 엄마가 있을지
男子 없이 아이를 잉태하라는 천사의 황당한 말에
침착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이보다 더 독한 처녀가 있을지
예수님이 어머니의 말에 꼼짝 못 하고
물을 고급 와인으로 변하게 했으니
아들도 무서워 때를 앞당긴 독한 聖母님
하기는 하느님의 아들을 키우는데
어찌 독하지 않을 수 있으랴
- <독한 女人> 부분
이처럼 성모 마리아는 독한 여인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로 다음 몇 가지를 든다. 아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십자가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 남자 없이 아이를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황당한 말에 침착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것, 예수님이 어머니의 말에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고, 어머니의 말에 자기의 때를 앞당기게 했으니 성모님은 독한 여인이라는 것이다. 남다른 새로운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 당신은 복 받으신 분입니다.”
聖母님은 나에게 더 가까이 오며 속삭인다,
“하느님이 무슨 복을 주신다 하셨나요?”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한다.
“구세주가 당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聖母님은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제 약혼자 요셉과의 아이가 구세주가 된다고요? 결혼하려면 아직 멀었는데요.”
나는 자세를 가다듬으면 선포하듯 말한다,
“약혼자와의 아이가 아닙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로 성령을 통하여 당신 몸에 오실 것입니다.”
聖母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 말한다.
“그러면 제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다는 말이군요.”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아직 男子를 모르는 女子가 아이를 가지면 잘못하면 죽을 텐데요…”
聖母님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한다.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데, 그런 위험쯤은 감수할 수 있습니다.”
- <욕심 많은 聖母님> 부분
이처럼 성모님은 영적인 욕심으로 또는 성스러운 허영으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메시아를 잉태하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나의 受胎告知> 같은 시에서는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마리아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어찌 목숨에 연연하겠느냐’고 응수하기도 한다.
3. 우물가의 여인들
우물가의 여인은 일차적으로 요한복음서 4장에 나오는 수가라 하는 마을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조금 넓은 뜻으로 본다면 생명의 물인 예수님을 만난 예수님 주변의 여인들은 모두 우물가의 여인인 셈이다.
김준호 시인은 사마리아 여인,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 베드로의 장모, 수로보니게 여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자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물가의 여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 우물가의 여인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마르지 않는 샘물을 찾아
수많은 남자를 거쳤던
우물가의 女人
예수를 또 하나의 男子로
거쳐야 할 우물로 맞았으나
아! 예수가 마지막 男子
마르지 않는 샘물일 줄이야
- <갈망의 역사> 부분
사마리아 女人은 이름도 없이
부정한 여인이 되었다
그녀와 예수와의 깊은 신학적 영적 대화는
그녀의 부정함 뒤에 숨어버리고
그녀가 한 전도는
그저 말만 빠른 女人네의
가벼운 행동이 되어버렸다
이상할 것은 없다
나비는 나비
꽃은 꽃
나비가 어찌 꽃의 고뇌를 이해하랴
꽃이 목소리를 높이는 수밖에
그래서
사마리아의 女人은 사도가 되었다
男子 12사도가 못한 일을 한
진정한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 <진정한 사도> 부분
수가성에서 물 길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여자는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목마른 여자였다. 그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남편 다섯을 바꾸고 지금 다른 남자와 살고 있지만 그 남자도 남편이 아닌 여자, 그 여자는 예수님과의 대화로 부정한 여인으로 드러나버렸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나서 예수님이 마르지 않는 샘물임을 깨닫고 사도가 되었고, 남자 12사도가 하지 못한 일을 함으로써 진정한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여인을 진정한 사도로 인식하는 김준호는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나는
기름이 떨어져 구걸하는 어리석은
또한
야박하게 기름을 나누어 주지 않는
천박하게 슬기로운
들러리가 아니야
나는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등불로
내 발길을 비추어 주는
신랑 예수의 신부
우아하고 아름다운 신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가
등불이
기름이
어찌 필요하랴
열 처녀가
자신들이 들러리가 아니라
신부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리석을 필요도
슬기로울 필요도 없이
예수의 손을 잡고
춤추듯 걷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 <예수의 신부> 부분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 비유에 나오는 얘기다.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따로 준비했고, 다른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 신랑이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게 되었을 때, 기름이 떨어져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이 시는 생각을 뒤집는다.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가 무슨 등불이 필요할 것이냐, 무슨 기름이 어찌 필요할 것이냐고 되묻는다. 처녀들은 자기들 자신이 들러리가 아니라 신부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하며, 그러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등불이요 기름임을 깨달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어리석을 필요도 슬기로울 필요도 없이 신랑이신 예수의 손을 잡고 춤추듯 걷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역시 페미니스트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기적 소문이 들리기는 하는데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믿을 수 없고
나하고 관계없는 기적이 있으면 뭐 하나
나 딸 사위 손주들 걱정에 밤잠 못 이루다
덜컥 열병에 걸렸으니 이를 어쩌나
급한 김에 사람을 보내 사위를 불렀더니
이런 예수라는 사람이 함께 왔네
저 사람이 소문의 그 사람인가?!
사기꾼같이 보이진 않고
참으로 인자하게 생기긴 했는데
이런 이 사람이 내 손을 잡네
외간 男子가 女人의 손을 함부로
뭔 이런 人間이 다 있나?!
이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꾸짖으니
어머나 갑자기 기운이 나네
열도 다 떨어지고 이게 웬일
이것이 기적인가?
나한테 마귀가 들어있었나?
정말 일 사람이 내 병을 낫게 했나?
이런 기적이 나에게 일어날 줄이야
- <직접 체험한 기적> 부분
베드로의 장모 이야기다. 그 여인은 열병에 걸려 누워 있었다. 사위 베드로와 함께 온 예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열병을 꾸짖으시니 곧 병이 나았고,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 예수님을 대접하였다는 기사이다. 병들고 나이 많은 여성이 은혜를 입고 기적을 체험했다는 이야기로, 여성과 약자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사랑을 강조한 시이다.
딸을 구하기 위하여
강아지가 된 女人
女子는 약하지만(흠 ‧‧‧ 요즈음 아닌 듯하지만 ‧‧‧ )
엄마는 강하니
자식을 위하여 그 무엇이 될 수 없으랴
人間을 구하기 위하여
人間이 된 하느님
피조물을 위하여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전능한 절대자
- <강아지가 된 女人> 부분
마르코 복음 7장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수로보니게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여자는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였으나, 예수는 거절하였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는 그녀를 개로 취급하는 처사였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주여 옳습니다만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러면서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께 자비를 간구하였고, 마침내 은혜를 받아 딸이 고침을 받았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둘 다 여자이다. 어머니와 딸, 여자는 위대하다. 어머니는 더 위대하다. 그런 여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위대하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어찌 인간 여자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랴. 어미가 딸을 위하여 개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처럼,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기꺼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야말로 위대하고 위대하시며, 사랑과 은혜가 이루 형언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김준호 시인은 여기에 주목하고 감격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또 다른 어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소개된다.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는 엄마의 마음
왕후이건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이건
예수님 제자의 엄마이건 다 같은 마음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는 심각한 상황에서
분위가 파악 못 하고 싸가지 없게
자기 자식의 자리를 맡아 놓으려는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를 비난할 수 있다
- <엄마의 마음> 부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한 아들은 주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했다는 이야기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아들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인 것이라고 김준호 시인은 말한다. 역사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왕의 후궁이 자기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라면서 온갖 음모를 꾸미는데, 이것이 어미 된 여자의 본심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어미의 마음을 예수님도 결코 꾸짖지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속으로 경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에는, 가장 귀한 것을 바쳐 예수께 향한 자기의 사랑을 표현한 한 여인을 만나보자.
하얀 눈물로 男子의 흙빛 발을 적시고
치렁치렁한 갈색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오염된 땅의 악취를 도려내고
女人의 향기로 도배된 발에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값비싼 명품 향유를 발에 쏟아 부어
王의 발이 부럽지 않게 만드니
어떤 女子가 이렇게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으랴
어떤 男子가 이런 고백을 안 받아들일 수 있으랴
그 男子가 메시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어떤 죄를 용서하지 못 하겠는가
- <분홍빛 고해성사> 부분
한 이름 없는 女人
허무하게 죽을 한 男子의 더러운 발을
명품 향유로 정성스럽게 바르고
비단 같은 머리카락으로 부드럽게 닦는다
값비싼 향기는 온 방 안을 채우고
물질에 찌든 유다의 분노로
女人은 간음한 女子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돌을 쥐여 준다
- <사랑의 표현> 부분
한 여자가 예수께 와서 값비싼 명품 향유를 그의 발에 쏟아 붓고 비단 같은 머리칼로 정성스럽게 닦아드리고 그 발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유다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였다고 비난하고, 저 여자는 죄 많은 간음한 여자가 아니냐고 돌을 던지려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용서 받은 감격과 감사에 자기의 전 재산인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 자기의 사랑을 표현한 여인의 마음은 얼마나 순결한가. 메시아가 아니라도 그 어떤 남자가 이 여인을, 이 여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이렇게 예수 앞에 나오고,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고,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여자의 위대성이 아니겠느냐고 김준호 시인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4. 예수님이 보이프렌드인 여자
이제 예수님을 사랑한 한 평범한 어느 여자 이야기를 해보자. 그 여자의 이름은 막달레나이다.
그녀는 聖母 마리아같이
거창하게 천사로부터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은 것도 아니다
그녀는 마르타같이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고백한 적이 없다
그녀는 베드로같이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적이 없다
그녀는 열두 제자들같이
예수님의 사도로
선택된 적도 없다
그녀는 그냥 예수라는
한 男子를
한 女子로
있는 그대로 사랑한 것뿐
- <그냥 사랑> 부분
그녀는 聖母 마리아같이 천사로부터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마르타같이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고백한 적이 없다. 그녀는 베드로같이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적도 없고, 열두 제자들같이 예수님의 사도로 선택된 적도 없다. 그녀는 그냥 예수라는 한 男子를 한 女子로 있는 그대로 사랑한 여자였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사랑은 아마도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저 평범하게 생긴 흑人 女子가
마리아 막달레나?
나는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섹시하고 풍만한
예수님이 유혹에 시달렸던
메릴린 먼로같은 백인 美女가 아니던가?
그녀가 저런 정도의 외모라면
그 누가 유혹을 받겠는가?
어떤 전설은 막달레나가 에티오피아의 公主라는데
그러면 흑人이라도
섹시하고 풍만한 美女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저 평범한 흑인 女子가
오히려 더 정감이 가는 것은 뭔 연유인가
- <흑인 마리아 막달레나> 부분
그런데, 혹자는 막달레나가 에티오피아의 공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흑인이란 말인가? 스토리가 그럴 듯하게 엮어지려면 막달레나가 섹시하고 풍만한 미녀이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저 평범한 그런 정도의 외모라면 그 누가 유혹을 받겠는가? 그런데도 난 참 이상하다. 저 평범한 흑인 여자가 오히려 더 정감이 가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그것은 아무런 신학적 의도나 교리의 틀에 갇히지 않고, 평범한 한 여자로서 그냥 예수라는 한 남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 그 순수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막달레나는 예수가 보이프렌드인 그런 여자였던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창女가 아님에도
교황의 한마디로 창女로 낙인찍혀
1500년을 수 많은 男子를 거치면서 살다
마침내 창女의 오명은 공식적으로 벗었으나
막장 드라마를 좋아하는 세상에게는 여전히 창女이며
이 또한 교회의 음모임을 이제야 알았으니
페미들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마리아 복음의 영지주의에 굴복하였는지
교회는 막달레나를 사도로 선포하여
12 사도와 동급으로 올려놓는 업적을 이루었으나
女子는 성적으로 순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아마도 곧 막달레나를 동정女로 선포하지 않을까
- <창녀에서 동정녀로> 부분
이런 막달레나를 창녀가 아님에도 교황은 창녀로 낙인찍어 1500년을 창녀로 만들었다. 이것은 교회의 음모였다. 페미니스트들의 압력에 굴복했는지 교회는 막달레나를 사도로 선포하여 12사도와 동급으로 올려놓고 동정녀로 선포하였다.
지나가는 女子를 보고 이상한 생각만 해도
간음한 것이라는 살벌한 말씀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쳐다보며
女子들의 #MeToo 운동에 동참하신 듯하여
같은 男子로써 섭한 기분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고뇌를 알 것도 같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하게 해석한다면
너희들도 같은 男子가 아니냐
바람피우고 성추행하다가 결렸다고 해서
경멸하거나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말라는
너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 뿐이니
또한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죄는 죄이니
그러나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예수님도 #MeToo 에 걸려 당하고 있는 거
마리아 막달레나와의 비밀 로맨스가
사실이든 페미들의 모함이든
이렇게 적니라하게 드러날 줄 알았겠는가
페미니스트들의 미사일이 될 줄이야
그러나 예수님을 단죄하거나 매도하지 않고
막달레나를 사도로 새로운 그리스도교
여성 중심의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하니
정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
주님 막달레나와의 사랑이 사실입니까?
사실이든 아니든 男子로 이 세상에 왔으니
나도 죄인이다
언제나 명료하게 애매모호한 예수님의 대답
- <#Me Too> 전문
김준호은 참 발칙하다. 예수님을 향해 막달레나와의 비밀 로맨스가 사실이냐고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언제나 명료하게 애매모호하다. ‘사실이든 아니든 남자로 이 세상에 왔으니 나도 죄인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와의 로맨스가 사실이든 페미들의 모함이든 예수님도 #MeToo에 걸려 당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미사일이 되었다. 그런데도 단죄하거나 매도하지 않고 막달레나를 사도로 새로운 그리스도교 - 여성 중심의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하니 정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하다는 것이 페미니스트다운 김준호의 생각이다.
이제 우리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결론을 대신하여 김준호의 한 주장을 살펴보려 한다. 그 주장은 성서 요한복음은 여자가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이름이 요한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요한인지는 모른다 밤하늘의 별같이 많은 요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꼭 男子이어야 하나 女子가 썼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 그렇다면 저자의 이름은 요한나가 될 것이다 그 당시 女子가 어떻게 이렇게 깊은 영성적인 복음을 쓸 수 있을까 하면 말도 안 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시하고 교회에서는 이단이라고 매도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 영성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사실 女子인 것이 사실 男子들이 점령한 교회가 그 사실을 덮어두었을 뿐 男女를 불문하고 가장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 아빌라의 데레사라는 것은 교회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 (물론 나는 인정 안 하지만)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女人들이 영성의 삶을 살았으며 요즘 그녀들이 영성이 점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요한복음을 女子가 썼다는 가설이 물론 사실이 아닐지 몰라도 이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女人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복음이 요한복음인 것이(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련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 <女子가 쓴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썼다고 말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요한복음에는 중요한 여인들이 가장 많이 나온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게 한 성모 마리아, 최초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마리아 女人, 용서받은 간음한 女人,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게 한 마리아와 마르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섹시한 마리아, 십자가 밑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된 성모 마리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 등 참으로 많다.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쓴 사람은 아마도 여자였을 것이다. 그 이름은 아마 요한나였을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섬세하고 감정의 결이 고우며 영성이 뛰어나다.
또 하나 요한복음의 저자가 여자였을 것이라는 증거는 만찬에서 한 예수님의 지루하기조차 한 긴 기도다. 이런 긴 기도는 다른 복음에는 전혀 없다. 이는 女子들만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요한복음을 女子가 썼다는 가정 하에 해석한다면 아마도 감추어진 진리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준호는 여성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려고 하는 시인이다. 아니 여성으로 하여금 복음서를 쓰도록 촉구하는 남자다. 전복적 사고다. 새로운 시각이다. 페미니즘 혁명이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기존의 성경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시각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더 완전하게 더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리라. 성서적인 정답, 정답, 정답이 아니라 이야기의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찾아내려고 기도하는 관상가 자칭 영성가 시인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시각과 창의적인 생각으로 더욱 흥미롭고 새로운 진경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건필을 기원한다.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1949년 충남 당진 출생
1983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외딴 별에서’, ‘이 땅에 집 한 채 짓기 위하여’, ‘가평에서는 모두 손을 흔든다’
연구서: ‘한국 현대 문학과 전통’, ‘한국현대시와 설화’, ‘한용운 시 은유의 특질’
현 재: 짚신문학회 수석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