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성찰(省察)과 휴머니즘의 詩學
기 청 (시인 문예비평가)
박정필 시인은 첫 시집 <숨죽여 뛰는 맥박>(1998)이후 총 6권의 시집, 4권의 수필집을 낸 중진 문인이다. 그의 세상경험도 다양하다. 경찰 간부 출신으로 문예창작 분야와 교단 경험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용기와 의지가 이채롭다.
이런 박 시인의 새로운 시집 출간은 지금까지 그의 시업(詩業)에 대한 결산의 의미도 있어 더욱 그러하다.
지금 이 시대, 우리는 지구문명이 겪는 COVID-19 팬데믹의 위기 한 가운데 놓여있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 시는 더욱 오롯이 깨어서 진가를 발휘할 때가 아닌가? 자아에 대한 성찰, 이웃과 사회에 대한 성찰과 연민으로 휴머니즘의 불을 지핀다면 우리는 다시 희망의 새 봄을 준비해도 좋을 것이다. 세상길은 멈추어도 농부는 밭을 갈고 시인은 시를 쓴다.
빛나는 시의 생명력으로 휴머니즘의 꽃을 피우는 작업, 이야말로 시인에게 부여된 사명이 아닌가?
시를 바라보는(감상 해설 비평) 유용한 방법론으로 흔히 미국 코넬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에이브럼즈(M.H.Abrams)의 견해를 원용하기도 한다. 즉 시 자체(시어 운율 이미지 표현법 어조 등)에 충실 하는 내재적 절대론의 입장과 표현론, 반영론, 효용론의 외재적 감상 방법이 그것이다.
표현론의 관점은 주로 작가(시인)의 창작의도 동기와 시적화자의 내면심리, 가치관, 성장과정, 가족관계, 생활환경, 종교나 영향을 받은 사상 등에 주목한다.
반영론적 관점은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시대현실에 중점을 두는 것이지만, 공히 장단점을 가진 게 사실이다.
그러니 종합적인 고찰과 함께 작품의 특성에 따른 세부적 고찰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먼저 이 시집의 작품 전편을 정독(精讀)하면서 느낀 점은 우선 거침없는 표현으로 시의 언어가 명징(明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의 함축성 애매 모호성, 난해와 해체시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런 표현상의 특징인 생동감 있는 ‘리얼리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또한 자아와 사회(확장된 자아)에 대한 성찰과 고난의 이웃에 대한 연민은 종국적으로 휴머니즘의 구현이라는 주제에 어떻게 부합되고 있는가? 그리고 인생의 풍부한 경험에서 비롯된 다양한 제재의 수용은 그의 문학적 성과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이 시집의 주요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정(抒情), 순수와 본질
시의 본령은 아무래도 서정이다. 서정적 자아의 감정과 느낌을 이미지와 비유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세계는 자아화 되어 독창적으로 윤색되기도 한다.
이 시집에서도 서정적자아의 본성에 내재한 과거에 대한 회상, 현재의 자각, 미래에 대한 예견이 어우러져 서정의 나래를 펼친다.
가)
키 낮은 돌담 아래
개나리꽃 노란 향기가
여기저기에/ 봄불을 지핀다
먼저 깨어난 북한강이
석봉* 설화밴 보납산을
흔들어 깨우면/ 금세 초록빛 비늘 털고
가쁜 숨결로 산하山下를 달구는데
겨우내/ 추위를 이겨낸 산새들은
해종일/ 짝을 찾아 헤매인다
-<가평의 봄> 전문
나)
이끼 옷 입은 돌담이
독일병정처럼
굳게 지키고 있는 옛집 앞
아낙네 무명치마 끈 같은
고향 땅 옛길이
눈을 감아도 보인다
날마다 책보자기 동여매고
유년의 여린 뼈 닳도록
오간 정겨운 길
(하략)
-<길 위의 길>에서
다)
이제 명예도 내려놓고
욕심도 다 비우니 한결 가볍다
찰나에 지나지 않는 숨결은
잠시 불어와 스쳐가는 바람인가
요란스럽게 내리다 그친 작달비인가
추녀 끝 바람에 울어대는 풍경소리가
오늘 따라 더 한층 애잔하다
토끼 꼬리만큼 남은 생에 불심을 채우니
불심이 선이고 선이 불심이다
(하략)
-<미황사 가을>에서
가)시 <가평의 봄>은 봄날의 산과 강, 자연의 신비를 이미지로 그려낸다. 마치 풍경화를 보듯, 고즈넉하다. 그것은 그림 이상의, 보다 입체적이다. 시각(개나리)뿐 아니라 후각(노란 향기)과 관념적 심상(봄불)이 어우러져 공감각적 심상을 이룬다.
게다가 먼저 깨어난 강물이 연쇄적으로 강-> 산->산하-산새를 깨우는, 자연의 신비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나)시 <길 위의 길>에서는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 공간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여기서는 비유를 통한 이미지가 독특하게 부각되고 있다. ‘돌담’을 ‘독일병정’으로, ‘옛길’을 ‘아낙네 무명치마 끈’에 빗댄 것은 재미있고 독특하다, 근엄하면서도 비바람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지키는, 든든한 느낌의 ‘돌담‘이나 무명치마 끈처럼 가냘프면서도 질긴, 우리네 전통의 ‘옛길‘은 한국적 정서의 원형으로 대표적인 것이다.
다)시 <미황사 가을>에서는 시간->가을, 공간->사찰이라는 배경에 어울리는, 자아에 대한 성찰이 전개된다. 그것은 불교적 무상(無常)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명예’나 ‘욕심’을 내려놓으니 그 빈자리가 본성이고 불성이다. 생과 사가 나뉘어지는 분별심을 벗어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여심이고 대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이런 깨달음을 재촉하는 것은 ‘바람’이고 ‘작달비’며 ‘풍경소리’다.
이 밖에도 감각적 묘사가 돋보이는 <무제>와 꽃의 귀족 <능소화> ‘수줍어 타는 하얀 미소/ 늘 설레던 청춘 시절’ 순수 서정이 ‘풀꽃’처럼 베어있는 <첫사랑 추억> 등 서정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작품이 눈에 뛴다.
사랑과 연민, 시정(詩情)의 근원
동서고금을 통해 혈육의 정한(情恨)은 시의 주요 제재가 되었다. 그 만큼 인간정서의 근원이 되고 시의 출발점이 되고 예술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 내재한 모성본능에의 회귀는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가 된다. 때문에 세상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자비와 사랑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가)
하늘이 내린 천륜
한결같은 따스한 맥박
나라님도 부럽지 않고
풍진도 두렵지 않는 사유思惟의 갈피
애오라지 /절절한 바람 하나는
시공을 초월한 가족사랑
만대를 이어갈 행복의 씨앗이다
(하략)
-<가족>에서
나)
까맣게 먹물 든 공간
모정의 손때가 묻은 장독대를
작달비가 힘껏 두들겨 팼다
그 요란한 소리에 깨어보니
은하수 기울어져
삼경을 가리키는데
(하략)
-<죄업>에서
다)
구순 노모의 영혼은
정정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자식의 짐이 되기 싫다며
토끼꼬리만큼 짧게 남은 삶을
요양원서 외롭게 보낸다
주말마다 찾아가면
목 빠지게 기다렸다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말문을 연다
그간 가족이 가장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가 뼈를 때린다
(하략)
-<모정의 슬픈 기억>에서
박시인의 가족에 대한, 육친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각별한가를 보여주는 시편들이다. 가)시 <가족>의 전편을 관통하는 카워드는 ‘절절한 바람’이다. 그것은 ‘천륜’이고 ‘따스한 맥박’이기 때문에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것임을 밝힌다.
가족사랑 앞에는 ‘나랏님’의 부귀영화도 부럽지 않고, 어떤 고난의 ‘풍진’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무한신뢰와 ‘행복’의 원천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나)시 <죄업>은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작품. 비오는 날 밤, ‘작달비‘가 거칠게 두들겨 패는 것은 ’장독대‘(객관적 상관물)지만 정작 아픈 것은 서정적 자아의 가슴(회한)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손 떼가 묻은’ 유산이며 그 사무치는 회한이 ‘죄업’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모정의 슬픈 기억> 또한 노모에 대한 절절한 사모곡이자 우리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요양원에서 혼자 생애의 끝자락을 보내야 하는 노모는 오히려 자식걱정에 더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처지보다 자식의 안녕이 더 소중하다. 모성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의 크나큰 축복 앞에 목이 메인다. ‘뼈를 때리는’ 노모의 말 한마디는 그런 회한으로 저려온다.
성찰(省察), 자아와 시대현실
프로이트(Freud)는 인간 성격 구성의 3요소로 무의식(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를 들고 있다. 무의식은 선험적이며 타고난 기질로 본성과 양심의 영역이며 자아는 후천적인 것으로 주로 교육과 환경에 의한 학습의 결과(인생관 가치관)이다.
초자아는 보다 확장된 자아이며 자기실현의 욕구로 대변된다.
이를 적용해보면 시인의 창작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가)
나는 헤픈 눈물을 쉽게 흘리고
값싼 인정 넘쳐난다
성깔이 쬐끔 급한 나머지
가끔 말싸움한 뒤에
먼저 손을 내민다
길거리 생면부지의 노숙자가
소주 한 병 사달라고 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몇 푼이라도 적선해야
마음이 평온해 진다
이웃의 슬픈 사연에도
나의 오지랖에 눈물 적신다
(하략)
-<자화상>에서
나)
요즘 사람들은
양심을 사고팔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일까
모든 존재 가치에 대해
분별력이 떨어져가고
자아행위에 잘잘못의
지혜로운 판단이 흐려지고
도덕성이 마비되어
철면피로 둔갑해간다
지식 있고 양심 없으면
비난과 증오의 대상이 되고
지식 없어도 양심적이면
믿음과 존경을 받게 된다
(하략)
-<양심론>에서
다)
언제부턴가/ 단군 후예는 제각기
촛불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촛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
정의의 불씨이고
민주의 씨앗이다
촛불은/ 작은 바람에 흔들린
풀꽃이 아니라/ 나와 너
영혼이 하나 되면
슈퍼태풍도 이겨낼 수 있는
신비한 마력이다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전문
가)시를 보면 시인(시적 자아)의 인성이 드러난다. 표현은 솔직 담백하고 명징하다.
‘해픈 눈물’은 인정이 많고, ‘성깔’(성격)은 급하지만 마음이 여려서 ‘먼저’화해를 청한다. ‘노숙자’와 ‘눈물‘은 불우한 이웃에 대한 연민이다. ’적선‘은 작은 선행이지만 ’평온‘은 축복이다.
그런가 하면 나)시 <양심론>에서는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오늘 날의 세태, 양심이 마비된 현실에 대해 개탄한다.
특히 지도층의 ’내로남불‘이 일상화되고 윤리가 마비된 ’철면피‘의 현실에 대해 실망과 우려를 보내는 것이다.
다)시는 ’촛불‘의 상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에 대해 각성을 촉구한다. 그것은 정의 민주 양심에 대한 신뢰이며 지향의 가치이다.
‘영혼이 하나 되면’에서 통합과 공생의 정신이야말로 가치를 실현하는 전제가 되는 것임을 역설한다.
자아성찰을 통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고 확장된 자아를 통해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나아가 자아실현을 통해 소속된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아파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에필로그-마무리
지금까지 박정필 시인의 이번 시집을 텍스트로 중점적인 부분을 살펴보았다.
서정계열의 작품은 시 자체의 요소에 집중하는 내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 다음 가족 혹은 혈육의 정한, 자아와 사회현실의 성찰 부분은 표현론과 반영론의 입장에서 고찰해본 것이다.
이처럼 표현론적 관점에서 보면, 시인의 창작 의도 동기와 시인의 가치관. 가족 간의 유대와 신뢰가 시작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영론적 입장에서 보면, 시작 배경이 되는 생활상, 시대상, 사회상이 창작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서두에서 제기한 몇 가지 유의점을 살펴보면, 표현상의 생동감 있는 리얼리티, 즉 거침없는 표현과 언어의 명징성에 대해서는 시인의 확고한 가치관, 세계관이 바탕이 되어 주변 사회와 시대상에 대해 우려와 경고의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아와 사회에 대한 성찰과 불우한 이웃에 대한 연민은 공존 공생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덕목으로 휴머니즘이 강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박시인의 삶의 풍부한 경험에서 비롯된 다채로운 제재의 수용은 결과적으로 그의 시 세계의 폭을 넓혀주고 깊이를 더해주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박정필 시인의 새 시집이 어려운 우리 사회에 희망의 불빛이 되고, 길을 잃은 독자들에게 길잡이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마지않는다.
청사靑史;
온라인 필명(아호) 기청氣淸; 문단 필명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1977) / 전 대학강사 / 시사교양지 편집장/ 현대시문학 편집고문(현) 시집 시론집 외 다수
*다양한 수신인/ 국내 주요 문인 예술인 예술기관 언론미디어 대학 등과 해외(미주 독일 중국 등)
*주요 블로그/ 운영중인 네이버, 다음, 카카오 브런치, 미주 중앙일보 외 동시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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