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봉하마을 ‘봉순이’의 ‘조카’뻘… 먹이 경쟁서 밀려 왔을 가능성
ㆍ바닷물고기 먹는 건 드문 풍경… 외국서 유입 황새 점점 늘어나
“어, 저 녀석 입에 문 거 뭐예요. 광어네요, 광어!”
“세상에, 저 넓적한 걸 먹네.”
지난 11일 제주 한경면의 바닷가를 거닐던 황새는 광어 한 마리를 부리로 물고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3시간째 자동차 안에서 숨 죽이고 지켜보던 사람들과는 채 20m도 안되는 거리였다. 황새는 광어를 물에 던졌다가 물기를 반복하면서 자세를 고쳐잡더니 정가운데를 물고부터 광어를 삼키기 시작했다. 좁은 부리로 어떻게 저 넓적한 물고기를 넘길까 궁금했다. 황새는 마치 펠리컨(사다새)처럼 목이 쭈욱 늘어났고, 광어를 삼킨 후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바닷가를 유유자적 걷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리에 ‘J0092’라고 적힌 가락지를 달고 일본에서 800㎞를 날아와 지난 11일 제주도 한경면 바닷가를 거닐던 황새가 물속에서 광어를 잡아 방향을 돌린 뒤 꿀꺽 삼키고 있다. 세계적 희귀종 황새 연구가 활발한 일본에서도 바다생선 광어를 잡아먹는다는 사실은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J0092’. 황새의 다리 가락지에 쓰인 숫자다. 제주도에 ‘진객’처럼 찾아온 황새는 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시에서 지난해 6월 방사한 수컷 유조(어린 새)이다. 이 황새는 지난해 12월12~14일 사이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마지막으로 관찰된 후 자취를 감췄다가 지난 8일 제주에서 포착됐다. 다리 인식표에 새겨진 글자 덕분에 일본에서 800㎞를 날아온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에서 방사한 황새가 한국으로 건너온 것은 두 번째다. 지난해 3월 경남 김해 화포천과 인근 봉하마을에서 발견된 ‘J0051’ 가락지의 황새에게는 봉하마을에 온 암컷이라는 뜻으로 ‘봉순이’라는 애칭이 붙여진 바 있다. 제주에서 함께 황새를 관찰한 조류연구가 도연 스님이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황새 전문기자에게 사진을 보내자 “놀랍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황새가 바다에서 물고기를 먹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했다. 2005년부터 방사를 시작해 85마리가 전국에 퍼져나간 일본에서도 황새가 광어를 잡아먹는 것은 신기한 광경인 셈이다. 도연 스님은 제주도에 온 수컷이란 뜻으로 이 황새에게 ‘제동이’라 이름을 붙였다. 제동이는 봉순이의 ‘조카’뻘인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에서 야생 황새가 거의 사라진 1971년 효고현 북쪽 후쿠이현에서 부리가 잘린 암컷 황새가 한 마리 포획됐다. ‘다케후(武生)’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황새가 중국 출신 황새와 짝짓기를 해 낳은 알 중에서는 단 한 마리만 부화했다. 제동이와 봉순이는 모두 그 부화한 황새의 자손이다. 봉순이가 ‘다케후’의 손녀이고, 제동이는 증손이니, 제동이가 봉순이의 조카인 셈이다.
일본에서 방사한 황새들이 잇따라 한국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먹이가 풍부한 곳을 찾아 800여㎞를 날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황새들과의 먹이 경쟁이 치열한 도요오카시에서 밀려나 새 영역을 찾다가 강풍에 밀려 한국까지 넘어왔을 수 있는 것이다. 제동이나 봉순이가 넓은 바다를 건너 한국에서 발견된 것을 두고 도요오카시로선 경탄과 안타까움이 교차할 일인 셈이다. 실제 제동이가 먹이활동을 하던 곳은 양식장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이는 광어나 다른 먹잇감이 풍부한 장소였다. 10~11일 이틀 동안 이곳에서는 황새뿐 아니라 가마우지·논병아리·갈매기·청둥오리·고방오리·왜가리 등 다양한 새들이 관찰됐다.
천수만을 찾은 황새를 포함해 현재 한국에선 17마리의 황새가 겨울을 나고 있다. 외국에서 유입된 야생 황새의 수가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은 충남 예산에 있는 한국교원대 황새복원센터에서 올해 9월 실시할 예정인 첫 황새 방사에도 청신호가 될 수 있다. 한국의 산과 강, 바다에 황새가 서식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도연 스님은 “일본에 비하면 아직 한국의 황새 연구와 방사 준비는 걸음마 단계”라며 “먹이활동부터 중금속 오염, 수면 습성까지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관찰과 연구가 시급한 상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