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변주하는 앰비규티
-신호철의 『바람에 기대어』
미국 시카고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호철은 시인이 되기 전에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미술가다. 미국에 와서도 The School of Art Institude of Chicago(SAIC)를 졸업했고, 미술 관련 일에 종사해 왔다. 2009년 『동방문학』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2019년에 첫 시집 『바람에 기대어』(시와정신)를 발간했으며, 제35대 <시카고 문인회> 회장(2019-2020)을 역임하였다. 그는 『시카고 중앙일보』에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을 매 주 연재해 오고 있다.
신호철 시인은 시집 서문에서 “나의 첫 번째 시집 『바람에 기대어』를 어머니께 드립니다”라는 헌사를 쓰고 있다. 신호철은 어머니와 상관없이 쓴 시들을 그저 수사학상으로 어머니에게 바친다고 말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시집을 읽어 볼 때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니를 의식하고 썼다고 생각되는 시편들이 다수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 앞에서 시집 발간을 하겠다고 약속했고, 첫 시집 발간으로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으며, 어머니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기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거의 본능적이다. 그에게 있어서도 어머니는 시집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동력이 되고 에너지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며, “늘 내 곁에 계실 때에도 불현듯 바람처럼 몰려오는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그의 후기 저서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삶의 욕구와 죽음의 욕구’를 대립시켰다. 삶의 욕구는 자기보존적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 즉 에로스(eros)라고 한다. 반면 공격적인 본능들로 구성되는 죽음 본능은 타나토스(thanatos)라고 칭하는데 프로이트는 이 둘을 이원화했다. 다시 말해 삶의 본능은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며 한 종족의 번창을 가져오게 한다. 반면 죽음 본능은 파괴의 본능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다. 인간에게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본능이 이원화하여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신호철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라는 존재는 프로이트가 규정한 삶의 본능(eros)을 추동하여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는 에너지를 주는 대상이다.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프로이트는 에로스에 대해 생명이 지속되고 더 높은 발전이 이룩되도록 살아있는 실체를 더 큰 실체로 형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고 했는데, 시인에게 어머니는 그로 하여금 더 높은 발전이 이룩할 수 있도록 그의 자아를 더 큰 실체로 형성하도록 말없이 격려해 준 존재였던 것이다.
시집 『바람에 기대어』의 핵심적 키워드는 ‘그리움’이다. 시인은 “그리움은 나를 끌고 여기까지 온 모티브였고, 끊임없이 나를 재촉한 발걸음이었다”라고 말한다. 이때 그리움은 프로이트가 말한 삶의 본능, 즉 에로스와 상통되는 감정이다.
그리움은 나를 끌고 여기까지 온 모티브였고, 끊임없이 나를 재촉한 발걸음이었다. 밤을 밝히는 빛나는 별빛이었고, 지친 나를 만지고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40년을 살아도 문득문득 생소해지는 이방인의 아픔이었다. 내 속엔 그 희로애락의 순간 모두가 그리움으로 각인돼 마음에 새겨져 있다. 기억의 앨범 속에 고스란히 감춰져 있던 시간들을 펼치면 시 한 구절이 노래처럼 입술에 담겨진다. 어머니와의 두 번째 약속을 준비하며 시집 첫 장에 들어갈 문장을 정리하다보니 벌써 그리움이 깊어가고 있다. 그리움이 창가에 앉아 나를 부르고 있다.-<서문>에서
시인에게 ‘그리움’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어머니라는 대상을 넘어 보다 다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의 진술을 살펴보면 그리움이란 그를 끌고 여기까지 온 모티브이자 끊임없이 그를 재촉한 발걸음, 즉 성취욕구이다. 또한 고난의 시간을 밝혀준 별빛 같은 이상이었으며, 지친 그를 어루만져주는 치유의 손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40년을 살아도 문득문득 생소해지는 이방인의 아픔이었다”에서 보면 그리움은 미국사회의 아웃사이더인 디아스포라로서 살아오면서 느낀 소외감과도 연결되어 있다.
한마디로 그리움은 삶의 본능을 추동하는 에너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로 하여금 끝없이 성취욕구를 갖도록 추동하였고, 밤으로 상징화된 고난을 극복하게 만든 별빛 같은 이상이었으며, 삶에 지친 그를 치유하는 바람이 손길이었다. 그리고 이민자로서 느끼는 소외감을 극복하여 오늘의 성취와 안정에 이르도록 이끌었던 것도 궁극적으로 그리움이었다.
이처럼 그리움이란 시어는 다양한 의미망을 가진다. 즉 한 가지 의미로 한정할 수 없는 다의성(ambiguity)을 지닌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윌리엄 엠프슨(William Empson)은 다의성(애매성)이 시의 결정적인 특질이라고 주장했다. 일상 언어에서는 명백한 의미 전달이 중요하지만 문학의 언어는 정서를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문학적 언어는 명확한 의미 전달보다는 애매성이 오히려 중요하게 여겨진다. 특히 시에서 애매성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압축된 언어를 사용하는 시에서 언어의 애매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내용과 의미가 풍부해진다.
신호철의 시에서는 ‘그리움’이란 단어는 풍부한 암시성을 환기할 수 있는 앰비규티의 시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내 속엔 그 희로애락의 순간 모두가 그리움으로 각인돼 마음에 새겨져 있다”라고…….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모두 그리움으로 내면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은 지천명(知天命)을 지나 이순(耳順)의 나이에 접어든 연령과 관계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때의 ‘그리움’은 희로애락의 강렬한 감정의 한복판에서 변주되는 극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발생하는 미학적 감정이다. 그에게 이러한 미학적 거리두기가 가능해진 이유는 무엇보다 나이 덕택일 것이다. 그냥 나이만을 먹은 것이 아니라 욕망하던 것들을 어느 정도 성취하고, 삶의 고난들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상처와 고통들도 어느 정도 치유되었고, 이민자로서의 소외감도 어느 정도 극복하여 미국사회의 일원으로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기에 가능해진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원하던 것들을 어느 정도 성취하는 사이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 볼 때에 이상, 좌절, 상처, 소외감 같은 것들로 점철되었던 젊은 날의 희로애락의 감정들조차 그리움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그리움은 딱히 누구를 향한 것만은 아니어서, 잊을 수 없
는 고향 같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것이어서, 멀리 떠났다가
도 밀려드는 파도처럼 아프게 가슴을 쓸고 가는 것이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는데 다시 살아나는 울림 같아서, 그
래서 다시 가슴 가득 팽팽히 채워져 터져버리는 아픔 같은
것이어서, 신열 후 찾아오는 섬찟 떼어놀 수 없는 나의 분
신 같은 것이어서, 뼈와 살의 부딪치는 소리같이 내 안으로
새벽을 읽어내는 것이어서, 신음도 낼 수 없는 깊은 어둠
같아서, 빛을 잃은 별들이 모여 부르는 노래같이 쓸쓸함이
담겨 내려오는 것이어서, 당신으로부터 내게로 와서 처절
하게 부서져 다시 네게로 향하는 아물지 않은 상처 같은 것
이어서, 한입 베어 먹은 사과 맛같이 달콤한 것이어서, 어
디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손을 뻗어야 할지 거리의 미아
가 되어 버리는 것이어서.
그리하여, 그 그리움은 혼미한 나를 깨워 내 앞에 나를
세우는 것이어서, 벗겨진 나를 내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어서, 멈춘 세상의 문을 열고 한없이 걸어 들어가 만나
는 사람들의 손을 잡는 것이어서, 마침내 내가 네 안에 네
가 내 안에 숨 쉬며 살아가는 것이어서.
-「깊이 숨 쉬는 것이어서」전문
「깊이 숨 쉬는 것이어서」는 산문시이다. 이 긴 시는 단 두 개의 문장으로, 즉 마침표 없는 쉼표의 긴 호흡으로 쓰여졌다. 특히 앞의 제1행(?)이 아주 긴데 그만큼 그리움이 삶의 갈피마다 고비마다 순간순간 떠오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화자는 그리움이란 어떤 특정한 대상을 향해서 또 어떤 특정한 순간에만 떠오르는 감정이 아니라고 시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리움은 아픔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그리움은 신음도 낼 수 없는 깊은 어둠과 같아서 쓸쓸함으로, 처절함으로 아물지 않는 상처와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사과 맛처럼 달콤한 것이다. 상처의 쓰디씀과 사과 맛의 달콤함과 같은 양립할 수 없는 양가적 감정이 바로 그리움이다. 즉 지난날 치열했던 삶의 한복판에서 느꼈던 것이 쓰디씀이라면 그것들을 되돌아보는 현재의 감정은 사과 맛과 같은 달콤함이다. 때로 그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손을 뻗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거리의 미아처럼 지향할 바 없는 그리움이다. 제2행에서 그리움은 혼미한 화자를 깨워 바로 세우는 것이라 규정된다. 또한 벗겨진 나를 내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기성찰의 힘을 지니고, 멈춘 세상의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가 사람들의 손을 잡는 화해의 에너지를 준다고도 말한다. 마침내 그리움과 주체 사이의 거리마저 실종되어 버리는, 바로 그것이 그리움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화자를 숨 쉬며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라고 시인은 진술하는 것이다. 숨 쉬며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니 그것은 분명 삶의 본능인 에로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신음도 낼 수 없는 어둠이나 처절함으로 아물지 않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니 그것은 동시에 타나토스의 얼굴도 하고 있다. 그리움은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양가성, 즉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앰비규티를 지니고 있다.
나 어느 날 그대를 만나게 되리
반갑게 그대를 만나게 되리
나 종일토록 그대를 찾아 헤매도
내 입술의 노래 마르지 않음은
날 사랑하기 때문에
나 가장 좋은 것으로
그대에게 드리고 싶네
내 눈의 눈물 마르지 않네
허물과 실패 두렵지 않음은
날 사랑하기 때문에
나 그대를 그리워하네
나의 삶을 다 드려
그대의 집에 머물고 싶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심은
날 사랑하기 때문에
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만나게 되리」 전문
‘나’는 입술이 마르지 않도록, 눈의 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대의 집에 머물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나의 이처럼 간절한 소망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그대는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주신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날 사랑하기 때문에”를 두 번 반복한 것은 그만큼 그대의 나에 대한 사랑이 깊고 견고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는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는 길이 없는 곳에서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길을 내어 인도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그대에 대한 그리움은 어머니의 사랑, 기독교적 사랑,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확신이며, 신에 대한 절대적 귀의를 나타내는 다의성으로 해석된다.
한없는 기다림의 들길에서
마주하는 한 얼굴이 있습니다
언덕 위 노을 타오르면
달려가 안기고 싶은 날들도 지고
뒤돌아도 보이는 한 얼굴이 있습니다
노을 길게 퍼지는 언덕
내게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주는 사람
굽이 내리는 마을까지 환한 별빛이 되어
끝내 시린 손 비벼주는 한 얼굴이 있습니다
하루가 지는 창가에 걸터앉아
그리운 손끝, 바람으로 다가와
휑한 내 볼을 쓰다듬는 한 얼굴이 있습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잊혀지지 않는
내겐 그리운 한 얼굴이 있습니다
-「한 얼굴이 있습니다」 전문
「한 얼굴이 있습니다」에서 기다림은 그리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기다림의 들길에서/마주하는 한 얼굴”을 향해 “달려가 안기고 싶은” 젊은 날의 얼굴은 이젠 뒤돌아보는 추억 속의 얼굴이 되었다. 젊은 날의 기다림의 들길이 아니라 노년의 “노을 길게 퍼지는 언덕”에서 바라보는 그 얼굴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버팀목이 되어 주는 존재로 변화했다. 그 나무는 천상적 세계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다. 아니 이미 천상적 존재가 되어 있다. 따라서 환한 별빛으로 화자가 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시린 손을 비벼주는 사랑을 베푼다. 때로는 바람으로 다가와서 그리운 손끝은 나의 휑한 볼을 쓰다듬는다. 따라서 그리운 그 얼굴은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잊히지 않는다. 이 시에서 ‘어머니’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시집의 서문과 연관지어 볼 때에 젊은 날부터 노년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인 어머니로 해석된다. 이 시는 ‘안기다, 비비다, 쓰다듬다’와 같은 포근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촉각 이미지를 동원함으로써 그리움과 사랑을 보다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인간과 세계의 접촉은 감각에서 시작된다. 화자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안기다, 비비다, 쓰다듬다’와 같은 촉각적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안기다, 비비다, 쓰다듬다’와 같은 피부감각에 의한 행위는 따뜻함, 포근함, 사랑, 안정감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이가 엄마와 피부를 접촉하는 행위는 촉각의 만족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도 발달시킨다고 한다. 엄마는 아이가 울면 안아 주고 달래어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인간은 스킨십을 통해 타인과 유대를 쌓고,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행위는 강한 애정을 동반한다. 촉각의 발달 과정에서 적당한 스킨십이 결핍되면 사춘기 이후 충동성, 공격성, 자폐적인 성향 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처럼 어머니와의 접촉을 ‘안기다, 비비다, 쓰다듬다’와 같은 스킨십으로 시작한 화자는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세계를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삶을 타나토스가 아닌 에로스를 갖고 긍정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의 이미지는 표현상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고 시적 상황을 암시하여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미지는 과거 지각체험의 정신적 재현이고 기억이다. 브룩스(C Brooks)와 워렌(R. P. Warren)은 이미지는 단순히 마음의 그림(mental pictures)을 그리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독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힘을 지녔다고 강조했다. 즉 이미지는 시인의 감각을 동원하여 결국 독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방식이다.
시인이 ‘안기다, 비비다, 쓰다듬다’와 같은 촉각적인 이미지를 동원한 이유는 어머니가 지각체험의 정신적 재현인 촉각적 감각으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시인 자신의 존재 방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를 제공한다. 즉 어머니는 늘 시인을 안아주고, 손을 비벼주고, 볼을 쓰다듬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그 사랑 속에서 시인은 세상을 긍정적 태도로 살 수 있었고, 지금도 시인의 기억 속에 그 구체적 감각은 살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하고 있다.
흔들린다고
단단하지 않은 건 아니다
흔들린 만큼 단단해지는 것이다
꽃도 흔들리며 피고
갈대도 목까지 누워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청청한 소나무도 처음
여린 순 내밀고 흔들린 만큼
뿌리 깊이 내리는 것이다
내 어머니도 흔들리며 날 키우셨다
아픈 만큼 사랑하며 보듬으셨다
흔들리는 모든 것은 아프고 또 아프다
지나보면 그 아픔으로
꺾이지 않고 자라는 것이다
그러며 푸르러지는 것이다
다만 견딜만한 시간이 필요할 뿐
처음은 누구나 다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며 꽃 피는 것이다
-「그러며 꽃 피는 것이다」 전문
「그러며 꽃 피는 것이다」에서 시인은 세상의 모든 꽃들이 흔들리면서 피고, 갈대도, 소나무도, 그리고 “내 어머니도 흔들리며 날 키우셨다”라고 진술한다. 화자는 흔들려야 단단해지고, 흔들린 만큼 깊게 뿌리를 내린다며 세상에서 화자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어머니조차도 흔들리며 자신을 키우셨다고 회고한다. 흔들림은 아픔이고, 그 아픔이 있기에 나무는 꺾이지 않고 자라며 푸르러진다. 다만 그 흔들림과 아픔이 단단해지고 깊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인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즉 흔들림과 아픔을 인내하며 견딜 때에 나무는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푸르러지고 꽃은 아름답게 필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이 인생을 살아온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흔들림과 아픔을 인내하고 극복하여야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으며, 그것이 어머니가 나를 키우는 방식이었으며,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시카고문학』13호(2021)의 「시카고 시문학의 어제와 오늘」에서 일부 발췌함.
동방문학 시부문 등단. 한양문학 수필부문 문학상. 홍익대 미술대학/SAIC( The School of Art Institute of Chicago) / Truman College 개인전 및 다수 그룹 전 참여. 시카고문인회 회장 역임(2019-2020). 시집: 『바람에 기대어』 시카고 중앙일보 필진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매주 기고 현재: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원. 시카고 문인회 이사. 시카고디카시 회장.
작가: 송명희
송명희는 1980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이래 50여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다시 살아나라, 김명순』(2020년 세종 우수학술도서 선정),『트랜스내셔널리즘과 재외한인문학』(2018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인문학자, 노년을 성찰하다』(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페미니즘 비평』(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미주지역한인문학의 어제와 오늘』(2011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젠더와 권력 그리고 몸』(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타자의 서사학』(2004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선정) 등 7권의 저서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2001년에 산문집 『트렌드를 읽으면 세상이 보인다』, 2000년에 사진시집 『카프카를 읽는 아침』를 발간하였다.
현재 부경대학교 명예교수와 <문학예술치료학회> 회장으로 있으며,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회장과 <한국언어문학교육학회>, <해운대포럼> 회장을 역임했다. 마르퀴즈 후즈후 세계인명사전(2010)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