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수염 훈장

조회 수 1550 추천 수 0 2015.01.09 14:37:51
               콧수염 훈장
 
                                                                                                           이 복 자
 

  인생은 40부터라고 다짐하며 무작정 조국을 뒤로하고 떠나온 이민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온통 색다른 세상이라 두려웠다. 초기 이민선배들이 미지를 개척할 때 수많은 역경을 넘기지 않았겠는가. 언어 소통을 못 하니 답답해지고 멍청한 바보가 되었다. 미소와 몸짓으로 의사표시를 하던 이민 초기, 생무지 LA에 도착하자마자 전쟁터와 다름없던 험한 흑인지역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기회의 나라고 했던가. 남편은 선장이 되어 우리 가족 5식구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듯 먼 앞날의 꿈을 찾아 앞만 보고 항해했다.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루하루를 무탈하기 바라면서 지냈다.
 
   초조한 마음에 서둘러 Drive-in-Dairy 가게를 인수했다. 우범지역인 줄 알면서도 생계를 유지하는 수입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꾸려갔다. 주위에서 지인들은 위험한 곳에서 나오라며 염려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투쟁하는 전사의 각오로 긴장 속에서 1년을 견디는 동안 권총의 위협과 큰 도둑과 좀도둑은 다반사였다. 세계 최강국 부유한 나라에서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 그들은 빈둥빈둥 놀며 정부에서 주는 월페어를 받아서 살고 있다. 못된 짓을 양심도 없이 저지르며 사회의 독버섯 같은 존재이니, 사회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들려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반갑고 의지가 되었다. 힘들었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딸과 막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녁 식사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서로 격려했다. 자식들은 새 환경에 적응하려 애로상황도 많으련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맡은 일에 충실히 온갖 노력을 하며 노력하는 듯하였다.
  다행히 살벌한 우범지역에도 인정이 살아 있어 착하고 고마운 이웃 ‘제푸리’라는 흑인 가족이 있었다. 직업이 없는 그는 아침부터 가게에 나와 주위를 살펴주었다. 부인은 없는 살림에 먹을 것도 만들어 가지고 왔다. 좋은 만남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음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추억으로 남는다. 우리를 보호하여 주었기에 든든하고 무사히 지내는 듯싶었다.
  미국사회에 무지하고 미숙하여 실수 잦았던 때다. 남의 일처럼 생각하던 사건이 벌어졌다. 흑인 청년 3명이 쏜살같이 달려오기에 달리기 시합을 하는 줄 알고 쳐다만 봤다. 그런데 장승 같은 몸집에 섬뜩한 눈빛은 소름이 끼쳤다. 험상궂은 얼굴로 돈을 요구한다. 1명은 권총을 남편의 머리에 대고, 1명은 계산기에서 동전까지 몽땅 털어 자루에 넣었다. 남편의 주머니 속까지 뒤지며 알뜰하게 다 빼앗아 갔다. 한 명은 망을 보다 달아났다. 다른 한 명은 권총을 내리면서 유리병을 깨서 남편 얼굴에 힘껏 던지고 도망갔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당하고 보니 끔찍한 공포의 순간이 눈 깜박할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 남편 얼굴은 피투성이 되어 옷에는 붉은 핏줄이 흐르며 쓰러졌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온몸이 떨리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으니 아찔하다. 다 가져가라고 포기하고 내어준 것이 다행히 목숨을 건진 것이리라.
  잠시 후 경찰차가 왔다. 떨고 있는 나를 보고 위로하는 듯 안심을 시킨 후, 남편을 치료해야 한다며 데리고 갔다. 어수선하고 무서운데 혼자 남은 시간은 초조하고 길기만 했다. 기다리던 남편은 창백한 얼굴에 이마와 코밑을 여러 바늘 꿰맨 몰골로 돌아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없다 하여 안심이 되었다. 절망의 벽을 넘으려면 강인한 의지와 인내만이 살길임을 알았다. 나도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자! 두렵고 서러운 심정을 감추고 평상심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고객을 맞으며 물건을 팔았다.
  시간이 흘러도 남편의 코밑에 흉터가 남아있어 궁리 끝에 콧수염을 기르기로 했다. 이민 온 지 6년 만에 그리던 모국방문을 했다. 남편은 콧수염 때문에 오해도 받고, 이방인 취급을 당한 황당한 일도 있었다. 하루는 청바지에 자주색 점퍼를 입고 남대문 시장에 갔는데, 달러장수 아줌마가 가까이 다가왔다. “달러 있어요?”하고 남편에게 말을 걸더니 “한국말은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우리 부부는 웃음이 터졌다. 지금은 완전한 콧수염으로 굳어버린 그야말로 외국인 인상으로 기억되는 남편이 되어 있다. 한편 역경의 훈장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이 깊어지고 웃음 짓는 일이 되었다.
  힘들고 고통스럽던 순간에도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용기를 주던 아이들이 있었다. 돌아보면 행복한 추억으로 미안하고 후회되는 일도 많으나 꿈같은 37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험한 파도 풍랑을 힘들게 헤쳐 오면서 굽이굽이 넘어온 고달팠던 삶까지도 지난 것은 모두 그리운 추억들이다.
  수없이 많은 아픔과 슬픈 고통의 나그넷길을 걸어왔음에 황혼의 길목에 서 있는 오늘이리라. 좋은 인연으로 스쳐 간 수많은 사람과 사건들이 아련히 멀어져 보인다. 하지만 내 삶의 길에서 추억으로 남아 지난 것은 모두 감사뿐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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