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길의 첫걸음, 괌

조회 수 7235 추천 수 0 2015.01.09 14:38:53

   이민 길의 첫걸음, 괌


                                                                                                                                     이 복 자
 
  인생은 나그넷길이라 하던가?
  정든 고향과 조국을, 몸담아 일하던 직장을, 부모·형제와 친지들을 뒤로하고 영하의 칼바람 부는 2월의 김포공항에서 파도에 밀려오듯 이민 길에 올랐다. 기약 없이 떠나는 길, 작별의 아쉬움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아 눈물을 닦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남편과 아들의 부축을 받아 처음으로 타보는 비행기에 탑승하여 옮겨 온 곳이 남태평양의 작은 섬 괌이다. 크기가 제주도의 1/3 정도 되는 태평양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괌은 산호초와 깊은 해협으로 둘러 싸여있다. 해안선 지역은 비취색 아름다운 바다와 모래사장과 바위절벽이다. 상공에서 처음 본 손바닥만 한 저곳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한산하고 작은 공항에 내렸다. 한국시장을 운영하시는 형님이 마중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소매 없는 꽃무늬 파란 원피스에 선글라스를 낀 형님 모습과 코트에 두꺼운 겨울옷을 입은 우리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작렬한 태양 아래 섭씨 34도의 열기가 온몸을 적시고 정신이 아찔했다. 황급히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짐도 풀지 못한 채 일손이 부족한 가게에 나가 일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생소했고 하나씩 배워야 했다. 40고개를 넘어 새 길을 찾으려니 힘들고 바보가 된 듯했다. 꿈에도 생각 못한 적성에 맞지 않았던 일들, 물건을 팔고, 진열하고, 김치와 만두를 만들어 고객의 비위까지 맞춰야 했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고 언어와 풍속이 다른 이 땅에 와서 사는 것이 180도 다른 별천지에 떨어져 외로움과 서러움에 목이 메었다.
  다행히 고객들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우리처럼 같은 처지로 찾아온 동포들이라며 반갑고 친절하게 초년생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아주버님께서는 월남전이 한창일 때 용역 회사를 하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 섬에 오셨다고 한다. 태풍으로 파괴된 곳을 재건하기 위해 한국에서 현대건설을 비롯한 여러 건설회사에서 많은 노무자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피땀 흘려 고생하며 모은 돈은 다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고 있었다. 남편은 그들에게 식품을 납품하는 일과 주 2회 일본에서 날아오는 각종 식료품을 검사하고 정리했다. 가게 일을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했다.
   큰아들은 11학년, 딸은 10학년, 막내아들은 5학년이라 호기심에 배울 일이 많고 창창한 앞길이 구만리다. 막내는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벽을 치고 울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단다. 다행히 큰애들은 우리보다 적응을 잘하여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기회의 나라요, 큰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것에는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 용기를 내고 왔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에게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생존하기에 바빴다.
  휴양지인 보석 같은 이곳에는 빵 공장 하나뿐이고 모든 생필품과 식료품은 본토와 일본에서 공급된다. 물가가 높은 편이며 교육면에서 낙후되고 단과대학으로 농대뿐이다.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졸업생 중 반도 못되니 학구적 분위기가 아니라 싶었다. 큰아들은 결심한 듯 그동안 신문 배달하여 모은 돈으로 본토에 가야겠다며 의욕과 야망이 엿보였다. 대견했다. 자기 길을 찾아가려는 의지가 어른스러워 다행이었다.
  서둘러 LA여동생네로 갔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할게요.” 하며 11월 휘영청 밝은 밤 쓸쓸한 뒷모습을 남기고 홀로 비행기를 타고 훌쩍 떠났다. 몇 달 후에 얼마나 힘든 일을 치르고 있을지 염려하던 차에 소식이 왔다, 잘 지낸다며 동생들도 하루속히 본토로 와서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내 가슴은 종을 울리듯 마음이 움직였다. 1년 동안 열대의 불더위를 견디며 많은 새로운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들과 정들었지만, LA에 가기 위해 서둘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70년대의 고국은 일반에게 외국여행이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하네다공항을 거쳐 올 때 일본 젊은이들은 행복한 모습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괌으로 관광지를 찾아오는 곳은 뼈아픈 사연이 숨 쉬는 <연인의 절벽>과 <요코이 동굴>이 있다. 섬의 원주민 차모로족이 평화스럽게 살던 땅은 1521년부터 스페인의 침략으로 333년간 통치를 받았다. 스페인 장교에게 결혼을 강요받은 원주민 연인이 한을 남기고 천길만길 절벽에서 떨어져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진 사랑의 절벽이다. 찾아와 절벽 위에 서 보니 마음이 찹찹하다. 백제의 멸망으로 당나라의 노리게 되느니 깨끗하게 목숨을 던진 삼천궁녀의 한이 서린 낙화암이 생각났다. 열녀를 넘어 의인이 된 논개의 기억도 떠오른다.
  인간의 야욕과 잔인함이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고 고통과 한을 남겼던가? 2차 세계대전으로 희생된 젊은이들의 원한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펴보지도 못하고 이슬로 사라진 그들을 위해 한국 정부에서 합동 위령제를 가까운 사이판에서 지낸 적도 있다. 이 섬이 그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음을 실감했으며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해변 백사장에 상처로 남아있는 대포가 녹슬고 흉측하여 괴물처럼 보인다.
  <요코이동굴>은 사람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지 상상을 초월한다. 요코이라는 일본군인이 종전된 지도 모르고, 28년의 긴 세월을 동굴에 숨어 살았다. 청춘을 다 넘기고 야생남으로 짐승 같은 세월을 홀로 보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싶다.
  이 섬에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확실한 직장과 계획도 없이 미지의 땅 LA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벌써 35년이 지난 추억의 섬, 괌이 이민생활의 밑거름되어 우리 가족은 LA에서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벌써 중년이 된 자식들과 그때를 회상하며 힘들었던 지난 일들의 이야기에 함께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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