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꾼 김묘선 스님

조회 수 9183 추천 수 3 2015.08.07 12:27:22

<대담프로>

 

                                     ()과 속()의 두 여인 김묘선의 인생

 

김묘선8.jpg


 

 

                          

김묘선 선생 춤꾼을 넘어 명무(名舞)로 불리며 40여 년간 춤을 위해 살아온 승무의 대가다. 그리고 일본에 도쿠시마에 있는 대일사의 주지 스님이기도 하다.

   선생은 195710, 24녀 맏이로 대구에서 출생, 대구 신암초등학교를 졸업, 경상여자중학교를 다니다 아버지의 직장 따라 경북 고령으로 이사한다. 이곳에서 78년 고등학교 졸업한다. 이후 서울에서 김천흥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춤 인생을 시작한다. 다시 이매방 선생의 제자가 되면서 1984년 추계예술대학 국학과에 입학한다. 늦깎이로 입학한 국악인들과 교류하면서 자극받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다시 연세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름을 딴 김진선무용단을 세운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이 특색 없고 그저 착하기만 한 본명 진선(眞善)이란 이름이 마음에 걸린다. 춤에 인생을 건 그녀는 작명가에게 묘선(昴先:새벽별)이라는 예명을 받고 김묘선무용단으로 바꾼다. 이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전수교육조교로 문화훈장 서훈과 대통령상 서훈을 받는다. 작년에는 일본어로인생의 끝에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がまんの には, いいことが っている는 자신의 인생과 춤에 엮인 자서전을 발간한다. 지금은 일본관서지부 예총회장으로 한국의 문화를 위해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약력:

일본 시코쿠 88개소 13번 대일사 주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조교

대한민국 문화훈장 화관 서훈

일본 토쿠시마 문화친선대사

일본 문화공로상

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대상 대통령상수상

미국UCLA 한국음악과 교환교수 역임

()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 일본과서지회 회장

우봉 이매방 전통무용 보존회 남가주지회장

발림무용단 총예술감독

오사카총영사관 한국문화원 전통무용강사

토쿠시마신문사 문화센터 한국무용강사

재단법인 토쿠시마관광협회 이사

 

특별대담

 

가을콘서트 현장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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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한국문화원 공연장에서

                                             

                      

   LA한국문화원 현관에는 <가을콘서트 국악 & 무용의 향연>의 광고지가 붙어 있다. 오늘 승무의 대가 김묘선이 저녁 730분에 3층 아리홀에서 공연이 있는 날이다. 공연 3시간 전 스님이자 명무인 김묘선을 만나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장에는 제자들의 마지막 리허설을 감독하고 있었다. 까만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번뇌를 떨치고 해탈을 위해 애쓰는 승()이 아니었다. 대신 한국에서 온 전통무용단 9명의 제자의 몸맵시와 박자를 까다롭게 지적하는 철저한 속()의 표정과 입술이었다.

 

강정실(이하 ): 올해 선생님을 두 번째 만나 뵈는군요. 공연이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묘선(이하 ): 별말씀을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한국에서 온 중견무용제자 9명과 김동석 한국음악무용예술단장과 함께 공연하신다죠?

이 공연은 LA한국문화원장(원장 김영산)아리 프로젝트 2014’의 다섯 번째 무대입니다.

그렇군요. 아무리 바빠도 약속한 할 일은 변함없이 다 하고 계시네요.

한일수교 50주년인 내년에도 오케스트라와 아시아공연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711일에는 국립국악원의 우면당에서 공연했고,

   오늘 LA문화원 공연 중 이렇게 강 회장님을 다시 만나게 됐네요.

지난번 2, 이 자리에서 제자와 함께한 공연에 자리가 없어 되돌아가는 관객이 많았는데, 분위기를 보니 오늘도 대단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다음 계획은 무엇입니까?

내일, 한국에서 온 제자들과 함께 이곳 LA시내를 관광합니다. 그리고는 모래 한국으로 돌아 갑니다.

정말 바쁘시군요. 빨리 질문하고 끝내겠습니다. 공연이 몇 시간 안 남았으니까요. 먼저 요즈음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데 일본에서의
     활동은 아무런 문제가 없나요?

아닙니다. 한일관계가 나빠지면서부터 몇 개월 전부터 밤낮 이상한 전화로 공격받고, 인터넷을 통해 명예를 훼손하는

     사이버테러도 당하고 있습니다. 뭐 저가 재산을 탐하고 일본인 남편을 살해했다, 죽이겠다는 등의 폭언입니다.

그 정도로 심합니까?

. 그것뿐만 아닙니다. 사찰 내에 한글로 된 표식 같은 게 있어서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 사찰에 향을 올리고 싶다. 그런데 왜

     한국인이 주지住持 인가,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 등 이런 내용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아직도 국적을 바꾸지 않고 계시나 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는 대한민국 여권으로 일본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일본인과 결혼하여 아드님이 있기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최초 한국인 여성주지를 표적으로

     반한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협박을 일삼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지난 4, 교토신문에서 에이메현 시코쿠 주오시, 도쿠시마현 내 여러 휴게소 등 시코쿠 3개 현 12곳에서 한국인을

     차별하는 쪽지가 잇따라 발견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본 진언종 창시자 홍법대사(774~835)의 발자취를 밟고

     있는 일본대표 불교 성지인 시코쿠 순례길마저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반한감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걱정이 많겠습니다.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비방한 사이트 내용을 지우기 위해 일본인 변호사 11명이 구성되어 일본 법무성과 공조하면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우익은 우

     익으로 맞서고 있는 셈입니다.

한국의 전통무용을 전파하는 곳에도 우익이 넘실거리나 봅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자신의 남편을 독살하는 그런 주지 스님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기에 한일우호증진을 위해 한일동행 소릿길공연을 더욱더 열심히 해야 했지요. 음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것을 극복하면서 스텝까지 70명이 열흘 동 안 대일사(大日寺·다이니치)에서 숙식하면서 연습하고 623일 토쿠시마, 2

   4일 아마가사키 26일 토쿄까지 하루씩 20주년 오케스트라와 순회공연을 계획대로 다 마쳤지요.

대일사는 진언종眞言宗의 성지라고 합디다.

맞습니다. 1,200년 역사를 간직한 시코쿠 도쿠시마(德島)의 고찰이자 진언종의 성지이지요.

진언종의 불교 중 어디에 속하는 것입니까?

대승불교의 한 종파입니다. 밀교(密敎)를 불교의 최고 진리라 천명하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사상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실천적

     인 면에서 밀교의 방법을 중시합니다. 또 국가의 안정을 수호하고 재앙을 없애고 복을 쌓는 것에 대해 경서를 읽으면서 몸소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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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독경을 드리는 스님

 

밀교라니요?

밀교는 석존의 비밀스러운 깨달음의 경지를 말합니다. 신밀(身密)과 구밀(口密) 의밀(意密)로 이루어진 삼밀(三密)로 나타납니다.

    신밀은 석존의 신체적 비밀로 도상이나 만다라에 나타난 불형(佛形), 장신구, 수인(手印) 등을 가리킵니다. 넓은 의미에서 밀교를

     구성하는 관정(灌頂)이나, 호마(護摩), 범패(梵唄) 등 행위적 의례도 포함됩니다. 구밀은 석존의 언어적 비밀로 진언, 다라니,

    종자(種子) 등을 말하며, 석존의 설법과 언행을 가리킵니다. 의밀은 석존의 마음의 비밀로서 지혜와 삼매(三昧), 중생을     

     구호하려는 자비심 등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밀교는 불교의 진언과 다라니, 기원과 공양의례, 불상과 만다라 등의 종교적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어렵기만 합니다. 종교 본질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십시다. 몇 대 주지입니까?

남편의 뒤를 이어 저가 대일사 16대 주지입니다. 그것도 외국국적의 여성주지로 말입니다. 또한, 스님은 전부 삭발해야 하는데,

    일본불교 역사상 유일하게 삭발하지 않은 외국 국적의 여성 주지입니다.

계속해서 대일사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요.

시코쿠 순례길의 대일사는 핵심사찰로 창건 이후 매년 30만 순례객이 찾고 있는 유명사찰입니다. 일본인들은 어느 종교를 막

    론하고 죽기 전 한 번쯤 꼭 걷고 싶어하는 시코쿠 88개 순례길이 있습니다. 저희 대일사가 13번째 포함됩니다.

그렇군요. 어떻게 스님이 되셨나요?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저는 춤꾼이지 불교 승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누구나 다 승려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결혼도 허용되고요. 게다가 사찰의 모든 재산과 주지 자리도 자녀가 스님이면 물려 줄 수가

    있지요.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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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 내부

 

나의 남편의 이름은 오구리 고에이(大栗弘營)’이고 이곳의 주지 스님이었습니다. 1996년 결혼하고 11년째인 2007, 남편인

     오구리 스님이 뇌 경색으로 쓰러지고 한 달여 만에 타계했습니다. 대일사는 진언종의 성지이지만 개인 사찰입니다. 1998년 태어난

      아들이 열 살 때였습니다. 18세가 넘어야 스님이 될 수 있고, 당장 절을 운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친척 중 절의    

     운영을 넘보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절을 친척들에게 넘긴다는 것은 남편의 유업이자, 남편과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공간을

     내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렇겠네요.

그런데 저의 걱정을 눈치챈 열 살밖에 안 된 아들이 하루는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까. “엄마, 저가 커서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고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는 나이가 찰 때까지, 저가 대일사를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 그래서 불교 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군요.

. 춤에 대한 열정은 잠시 접었습니다. 대신 일본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남편이 득도했던 교토의 대각사(大覺寺)

     찾아가 스님이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해 2007년 말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그러면 당장 머리를 깎아야 스님이 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머리를 깎아야 했지요. 가발을 쓰고 한국 전통춤을 출 각오를 했었지요. 그런데 저의 명성을 알고 있던 대각사 스님들이

     갑론을박한 결과, 저에게만은 예외적으로 머리를 깎지 않기로 결정했습니 다. 법명도 묘선을 그대로 사용하게 해 주었습니다.

큰 힘이 되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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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드님과 함

 

그랬습니다. 이게 큰 힘이 되어 주지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런데 불교용어와 또 다른 삶을 위한 모든 것이 엄청 힘들었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여러 경전을 외우고 손으로 하는 수행언어인 작법(作法)을 익힌 끝에 20085, 주지시험도 통과했습니다.

    보통 2년 이상 걸린다는 주지 시험을 1년 만에 해낸 것이지요.

아드님도 반가워했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저부터 먼저 감개무량했습니다. 이는 일본 불교 역사상 여자가, 그것도 외국 국적자가 머리도 깎지 않고 일본 절의

     주지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 이제 일본인 스님 남편을 만나 결혼한 러브스토리를 들어야겠습니다. (웃음)

1995년 이곳 도쿠시마에서 활동하는 한국문화연구회 초청으로 이 고장 전통춤인 아와 오도리에 저의 무용단이 참석했습니다.

    이 아와 오도리 행사에 금전적으로 많이 후원했다는 건장한 중년 남자(당시 56)와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빡빡민 머리에

     양복차림을 보며 저는 말로만 듣던 야쿠자가 후원한 줄 알았습니다.(웃음) 놀랍게도 스님이었고 저의 남편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통역을 통해 한국 전통춤을 세계화하려면 일본에서 하는 게 나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요?

그 당시 저는 일본말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장차 한국정부가 당신을 모셔가게 할 정도로 내가 춤을 지원하겠다!”라며

     정식으로 청혼해왔습니다. 엄청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게 큰 힘이 되었는지 1996, 저가 한국전통예술경연대회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이게 인연이 되어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이 해 나이 차이가 열여덟 살이나 나는 승속僧俗

     국제결혼을 했습니다.

인연은 정말 알 수 없다는 게 맞나 봅니다. 보통 결혼하면 남편 나라의 국적으로 바꾸는 게 보편적인데 왜 바꾸지 않았습니까?

    특히 아이들도 태어날 터인데 말입니다.

남편은 당신은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되고, 나는 일본 스님계의 인간문화재가 되겠다.”라고 말하며 저와 약속했습니다. 그 탓에

     저는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었기에 한국국적을 그대로 가지면서 우봉 이매방 선생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참 솔직하십니다.(웃음) 은사이신 이매방 선생님은 결혼한 남편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하십디까?

이매방 선생님은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편을 진짜 잡놈!”이라며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표현을 저렇게 하시지라고

    생각했지만, 진국을 그렇게 표현합디다.(웃음) 그리고 여자는 아이를 낳아봐야 춤꾼이 된다는 스승의 말씀을 놓치지 않았기에,

   일본 스님이었지만 결혼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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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매방 선생

 

그렇다면 이매방 선생은 어떤 분이셨나요?

우봉 이매방 선생님은  한국 춤에 대해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시죠. 1988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화훈도 수상했는데, 중요무형

     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을 보유하고, 전통춤을 전승한 20세기의 마지막 춤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20세기와

     21세기의 전통춤을 잇는 가교역할을 했던 분입니다.

그래요. 승무와 살풀이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

먼저 승무는, 조선 중엽 포교수단으로 승무를 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하려고 춤을 춘 것에서 비롯되

     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춤사위가 다양하고 춤이 독특하며 춤의 구성 또한 체계적인 품위와 격조가 높은 예술형식을 지니고 있는

     승무는 절에서 추는 의식무가 아니라, 살풀이와 함께 민속춤으로 분류됩니다. 장삼에다 어깨에 붉은 가사를 두르고 고깔을 눌러

     쓴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승무의 세찬 장삼놀음과 빼어난 발 디딤새, 장관을 이루는 북의 울림이 가히 한국 춤의 정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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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무의 한 장면

  승무는 흔히 중춤이라고도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을 말하는 것이 아닌 민간 연향(民間宴享)에서 무원(舞員)이 흰 장삼을 입고 흰 한삼을 끼고 붉은 띠 모양의 가사를 매고 흰 고깔을 쓰고 추는 춤을 가리킵니다. ()와 같은 큰 불교의식에는 승려들이 법고 춤, 바라춤, 나비춤 등을 추는데 이것은 승무라고 하지 않고 작법(作法) 또는 법무(法舞)라고 부릅니다. 현행 작법은 승무와 춤이 다릅니다.

  또한, 승무는 탈춤에서의 노장춤, 상좌(上佐), 목중춤, 법고춤과 같은 중춤과 한량무(閑 良舞)에서의 중춤과 농악에서의 조리중춤과 같은 여러 민속적인 중춤을 토대로 하여, 민간연 향에서 판놀음을 벌이던 창우(倡優)들 가운데 뛰어난 무원들이 판놀음의 중춤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또한, 승무는 창우들의 판놀음에서 발전하여 민간연향에서 두루 연행되었는데 말기에는 신갑두(申甲斗), 백설채(白雪彩), 한성준(韓成俊)과 같은 승무 명인들이 나왔습 니다. 1900년대에는 협률사(協律社), 광무대(光武臺), 원각사(圓覺社)와 같은 극장무대에서 승무가 공연되었습니다. 특히 승무의 무대공연에는 한성준의 활약이 컸습니다.

  승무는 지역마다 약간씩 특징이 다르게 전승됐는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한성준에 의하여 발전된 경기, 충청 승무와 이대조(李大祚)에 의해 발전된 호남지방의 승무입니다. 한성준의 춤은 한영숙에게, 이대조의 춤은 이매방에게 전승되었는데 두 분 다 작고했지요. 그리고 살풀이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풀이춤은 중요무형 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된 춤입니다. 살풀이는 무속 의식(巫俗儀式)에서 액()을 풀어낸다는 뜻인 곧, ()을 푸는 춤으로 일명 도살풀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그 해의 액을 풀기 위하여 굿 판을 벌이고 살 푸는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무속(巫俗)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나, 무속의 형식이나 동작은 보이지 않습니다. 음악 중 살풀이장단이라는 독특한 무악(巫樂) 장단이 있습니다. 이 춤은 남도(南 道) 무무(巫舞) 계통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 일설에는 처음에 무당들이 살풀이 가락에 맞추어 신()을 접하기 위한 수단으로 춤을 추었으나, 뒷날 이들이 관기(官妓)가 되거나 사당패(社堂牌)로 그 신분을 달리했습니다. 다시 사당패가 분화되어 기녀(妓女)로 탈바꿈하는 동안 변화되면서 점차 멋을 부려 아름다움을 보이는 기법으로 변천하여 기방무용(妓房舞踊)으로 계승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천 과정에서 살풀이춤은 기방인(妓房人)들에 의해 그 호칭이 입춤즉흥무수건춤 등으로 불리면서 보편화한 춤사위가 생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춤이 어느 시기에 살풀이춤으로 개칭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문헌상으로는 1934년에 한성준(韓成俊)<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창립하고 1936년에 부민관에서 제1회 한성준무용발표회를 하면서 방안춤을 극장무대에 올려 최초 로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점차 대중 사이에서 본격적인 살풀이춤이 등장하였으며, 살풀이춤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춤으로서 그 예술성을 인정하여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춤을 전문적으로 연희해 온 사람으로는 이동안(李東安), 김숙자(金淑子), 이매방(李梅芳), 한영숙(韓英淑)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전공에 대한 설명은 막히지도 않고 잘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관서지주 예총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그 일까지 하십니까?

예총회장은 20077월 인준을 받았습니다. 저가 200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전 수교육조교로 지정받자, 오사카를

    중심으로 관서지역의 뜻이 있는 재일교포 무용가와 국악인들이 모여 우수한 한국전통예술의 자긍심을 갖고 전승과 보존을 위해서

    였습니다. 또한, 한 일 양국의 문화교류를 위해 예총의 인준을 받게 되었습니다.

~ 이제는 아드님에 대해 말씀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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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복을 입고 있는  김묘선 스님
 

 1988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때 만 59세의 남편은 아이를 끔찍이도 사랑했습니다. 이곳 플러턴(Fullerton)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시간이 많은 겨울에는 항상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네요. 지금 아드님을 잘 계시죠?

그렇습니다. 10살 나이에 이곳 이모에게 아들을 맡겼는데 지금 잘 크고 있습니다.

몇 년이 되었습니까?

7년 되었습니다. 지금 17살입니다.

한국말은 어느 정도입니까?

한국말과 일본어는 기본이고 지금은 영어와 스페인어까지 구사합니다. 이제는 중국어만 공부하면 된다고 너스레까지 뜹니다.

    (웃음)

아드님만 생각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힘을 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과 함께 있으면 힘이 솟고, 삶의 원동력이 되어줍니다.

내년이면 아드님 나이도 18세가 되는데, 아버지의 유업을 잇겠다고 합니까?

당장은 아니겠지만 약속한 말은 지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아이가 한 말을 철석같이 믿을 수는

    없습니다. 남편도 30대 때 가업을 이으라는 부친의 바 람을 뿌리치고 오사카로 나가 무역업을 크게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부도로 막을 내리자 호기를 꺾고 대일사로 돌아와 승려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아들도 나이가 들어 가면서 뭐라 대답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승려 자격을 받을 때까지, 멀리는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말할 때까지 저가 대일사를 지켜나가야지요.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소망은 가족이 건강해야죠. 우리의 전통춤인 승무와 살풀이춤이 판소리처럼 유네스코에 등재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저는 절의 주지가 맞지만 임시직입니다. 그러나 저, 묘선(昴先)스님이란 주지는 영원한 한류라 생각합니다. 양국으로부터 버림받

     은 이방인이 아니라 양국 모두가 지켜주어야 할 보물이라 생각합니다. (웃음) 그러면서 이매방 선생님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욱더 증진해야지요.

그렇군요. 선생님은 오늘의 일본 속에 살아있는 진정한 한류입니다. 그렇기에 일본인들의 사이버 테러나 밤낮 걸려오는 괴전화에

     도 당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5천 년의 뿌리 깊은 한 국의 역사와 함께 전승되는 전통문화 예술을 함께 호흡하므로 그럴 것입니다.

    그렇기에 1,200년의 역사를 가진 지금의 대일사(大日寺)가 세월이 흐를수록, ‘묘선 스님이라는 한국 여성의 호흡과 춤 그리고

     당당했음이 유구한 역사로 재조명되어 있을 것입니다. 건강하시고 항상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별도의 장소를 정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귀한 한미문단에 저가 대담프로에 초대되어 영광

    으로 생각합니다. 한국문협 미주지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끝)

 

 

추신: 2015년 <한미문단>의 특별대담을 위해 6월 공연에 앞서 2시간 인터뷰했으며, 강정실 회장이 원고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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