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진화 / 이정모

조회 수 1886 추천 수 0 2017.10.28 17:31:20


생체시계 관장하는 멜라토닌, 뉴런 만나면 스르르 꿈나라로 
기사입력 2017-10-29 01:10 기사원문 중앙SUNDAY
 
                        밤낮 있는 지구의 모든 동물 잠자
                       에너지 보존과 위험 방지 위해
                       잠이 우연히 등장했을 가능성
                       기억통합과 쓰레기정보 청소도

                       자는 패턴과 시간은 각기 달라
                       작은 동물은 에너지 효율 낮아
                       짧게 자고 자주 깨어 있어야 해


                                         잠은 언제 진화했을까?


어떤 동물들이 잠을 자는지 알면 잠이 진화한 시점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잠은 포유류가 출현하기 훨씬 전에 지구에 등장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생기는 낮과 밤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삶을 지배한다. 원시적인 생명체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물들에게 24시간으로 구성된 생물학적 주기(circadian rhythm)가 있다. 즉 생체시계가 있어서 쉬는 시간과 활동하는 시간이 나뉘는 것이다.

수면 사진.png



해가 저물면 우리 눈에서 시작된 일련의 분자 반응이 뇌의 솔방울샘(松科腺)에 전달되어 멜라토닌(melatonin)을 분비시킨다. 멜라토닌은 인간의 생체시계를 관장하는 호르몬이다. 멜라토닌이 뉴런에 결합하면 전기신호의 리듬이 바뀌면서 뇌가 점차 잠에 빠져들게 된다. 새벽이 되어 태양 빛이 멜라토닌을 파괴하면 뇌는 다시 서서히 깨어난다. 한밤중에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보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다음 날까지 영향을 받는 것도 멜라토닌의 역할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대륙 사이를 이동하는 경우에는 우리의 생체시계도 거기에 맞추어야 하지만 멜라토닌에 의해 유도된 잠의 주기는 아직 거기에 따라 오지 못하기 때문에 시차적응에 애를 먹는 것이다.

 

멜라토닌은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 갯지렁이의 행동도 통제한다. 독일에 있는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참갯지렁이(Platynereis dumerilii)의 유생에서 멜라토닌을 비롯한 잠 관련 분자들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의 활성을 여러 해 동안 조사했다. 태어난 지 2일 된 참갯지렁이 유생은 공 모양이다. 이것들은 밤에는 바다표면에서 조류를 먹이로 섭취하고, 낮에는 포식자와 햇빛의 자외선을 피해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보낸다.


시간에 따른 갯지렁이 유생의 움직임은 어떻게 유발된 것일까? 참개지렁이 유생에는 가느다란 털이 달려 있는데 이것을 앞뒤로 저어서 움직인다. 단지 빛의 유무로 움직임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낮 시간에 유생을 캄캄한 곳에 두어도 유생은 낮 시간의 활동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유생의 털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멜라토닌이다. 유생의 등 쪽에 있는 일부 세포에는 빛을 포획하는 단백질이 있다. 이 단백질이 멜라토닌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유전자 스위치를 끈다. 우리 눈에도 같은 단백질이 있어서 멜라토닌 생성 스위치를 켜고 끄는 역할을 한다. 참갯지렁이 유생은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멜라토닌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참갯지렁이 유생에서 멜라토닌 형성 유전자의 활성을 24시간 내내 감시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멜라토닌은 밤에만 분비되었다. 그 결과 참갯지렁이 유생은 오로지 밤에만 바다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참갯지렁이 유생과 사람의 멜라토닌 작용이 똑같다는 것은 두 생명체의 멜라토닌이 같은 조상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실은 잠의 진화는 적어도 갯지렁이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척추동물의 조상은 복잡한 뇌가 진화될 때 멜라토닌 유전자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빛을 받아들이고 낮-밤 사이클에 따라서 멜라토닌을 분비하는 어떤 다목적 세포가 있었다. 그 후 이 기능이 어떤 특정한 세포에 분산되었다. 눈 세포는 빛을 받아들이고 솔방울샘은 멜라토닌을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해파리는 갯지렁이보다 더 하등한 동물이다. 해파리에는 뉴런은 있지만 중추신경은 없다. 과연 해파리도 잠을 잘까?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과학자들은 카시오페아 해파리를 선택했다. 카시오페아 해파리는 갓을 아래로 한 채 촉수를 흔드는 뒤집힌 해파리다. 이 해파리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갓을 움직일 뿐이다. 낮에는 1분에 60번 정도 움직이는데 밤에는 39번으로 줄어든다. 바닥에 가라앉은 해파리를 뜰채로 퍼 올려 수면 위에 놓으면 바닥으로 헤엄쳐 내려가는 속도가 굼뜨지만, 30초 후에 다시 떠올리면 바닥으로 부리나케 내려간다. 잠을 자다 깨어난 것이다. 또 물을 계속 첨벙대서 잠자지 못하게 하면 다음날 비실비실했다. 하지만 숙면을 취하게 하면 다시 컨디션을 회복했다.


해파리 실험은 뇌만 자는 것이 아니라 뉴런도 잠을 자야 하며, 지구에 태어난 동물이라면 누구나 잠을 잔다는 것을 말한다. 잠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와 그리 다르지 않다.


캄캄해도 바빠 잠 못 드는 현대인,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잠에 관한 연구에 돌아갔다. 미국 의학자 세 명은 초파리에서 낮과 밤이라는 생물학적 리듬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유전자를 찾아내서 생체시계 작동 원리를 밝혀냈다. 이들 연구에 따르면 세포 활동은 낮과 밤이 다르다. 밤에는 생체활동에 필요한 단백질을 세포 안에 쌓아 놓고, 낮에는 이것들을 분해하여 사용하는 일을 반복한다. 세포는 하루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이며, 세포가 모인 생명체 역시 생체 시계 활동에 따라 작동한다.


물론 잠, 혈압, 체온과 같은 신진대사를 통합적으로 조절하는 주체는 빛에 의해 유발되는 호르몬이다. 수억 년에 걸쳐서 햇빛 주기에 적응한 인체가 요즘은 해의 운행과는 다른 현대인의 생활양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캄캄해져도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고 침대에서도 스마트폰의 밝은 화면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생체시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햇볕을 쬐고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잠이 들어야 한다.  ( 본문에서 발췌)


이정모 서울 시립과학관장
연세대 생화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안양대 교수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역임. 『달력과 권력』『공생 멸종 진화』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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