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흐름
한국 민족은 역사적으로 역경과 고난을 뚫고 살아왔으며, 그만큼 문학에도 그런 시련을 끈질기게 견디고 줄기차게 생존 투쟁을 거듭해 온 민족의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인상이 짙다. 또한 동양적인 윤리관(倫理觀)이 지배하는 전통적인 사회성향(社會性向)으로 한국의 문학에는 동적(動的)이고 전향적(前向的)인 경향보다는 회고주의(懷古主義)나 과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국문학을 개관할 때 원시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장구한 길목마다 독자적인 전통의 바탕과 역사적 현실에 대한 독특한 창조의욕이 고갈되는 일 없이 면면(綿綿)히 이어져 내려옴을 보게 된다.
한편, 한국 민족은 태고적부터 스스로의 사고와 감정을 나타내는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표기하는 고유의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였다. 즉, 조선시대 초기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기까지는 음운(音韻)과 문법체계를 달리하는 중국의 문자인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표현해야만 되었다. 그것이 곧 삼국시대에 이미 이루어진 향찰(鄕札) 또는 이두(吏讀)이지만, 이와는 달리 중국의 전통적인 한문체(漢文體)에 의한 문학활동도 매우 왕성하여 이는 한글이 출현한 후에도 끊이지 않고 대략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문학의 시대구분 방법은 역대 왕조의 변천사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성립하기까지의 문학을 ‘상고시대의 문학’, 그 3국이 정립하던 시대의 문학을 ‘삼국시대의 문학’, 신라가 3국 통일을 이룩하고 그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을 ‘통일신라시대의 문학’, 고려가 창건되고 그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을 ‘고려시대의 문학’, 그리고 조선이 건국된 후 임진왜란기까지의 문학을 ‘조선 전기 문학’, 그 이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을 ‘조선 후기 문학’이라 일컬으며, 이것을 모두 아울러 고전문학이라 한다. 그리고 이들 고전문학과 대조적인 개념을 가지는 새로운 문학, 곧 서구문학의 영향으로 발달한 문학을 신문학(新文學)이라 불러 2가지를 구분하였다.
1. 고전문학
1) 상고시대
한국문학의 여명기(黎明期)는 멀리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민족의 경우이거나 문학은 시가(詩歌)와 무용과 음악이 한데 어울린 종합적인 원시예술의 형태로 발생하였음을 본다. 한국의 경우도 옛 기록에 나타나는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그리고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 삼한(三韓)의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통해 이루어진 가무(歌舞)와 음주(飮酒)의 습속에서 고대가요의 원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대가요는 민족 고유의 신앙이나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어떤 특정한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집단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와 같은 종합예술은 사회적인 통일을 위한 정치적인 기능과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고 악령(惡靈)에 의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기능 및 노동의 피로를 줄이고 식생활에 안정을 누리기 위한 경제적인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형식으로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이 점차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고 생활수단이 분업화되어가면서 예술도 차차 종합적인 형태에서 해체 ·분화되어 표현방법이 다양해지자 시가 ·무용 ·음악 등 개별적인 분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따로 떨어져나온 시가는 구전(口傳)의 형태로 전승되면서 구비문학(口碑文學)을 이루고 문자를 갖게 된 이후 그것이 문헌에 정착됨으로써 신화와 전설 또는 고대가요의 한역가(漢譯歌) 등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와 같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된 옛 문헌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이 있고, 금석문(金石文)인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비문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이들 옛 기록들에는 한국의 국조(國祖) 신화인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 고주몽(高朱蒙) 건국신화, 신라의 시조(始祖) 신화들 및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 신화 등이 실려 있다. 또한 고대가요의 모습을 고문헌에서 찾아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구지가(龜旨歌)》를 비롯하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유리왕조(瑠璃王條)의 《황조가(黃鳥歌)》, 그리고 중국 진(晉)나라 때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는 《공후인(引)》(公無渡河歌라고도 함) 등의 한역가가 그 유래와 함께 실려 전한다. 그 밖에도 이 무렵 신라에는 《도솔가(兜率歌)》라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삼국유사》 <신라본기> 유리왕조(儒理王條)에 실려 있다. 이상의 기록이 모두 한문으로 된 기사로 전해옴은 물론이며 기원후 85년에 세워진 점제현신사비(蟬縣神祠碑)가 평남 용강군(龍岡郡) 해운면(海雲面)에 현존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한자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대개 짐작이 갈 것이다. 이와 같이 한자 문화가 전래된 시기는 매우 오래 되었으나 중요한 것은 한국민족에게 문자가 없던 시대에 그것이 오히려 한국 고유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음운의 체계가 전혀 다른 외국 문자인 한자를 빌려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도 사실이지만 또 그만큼 문학다운 문학을 출현시키는 데 힘이 된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은 일찍부터 대륙문화와의 접촉이 있었다. 특히 지리적인 조건 등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가장 잦았던 고구려에서는 국립교육기관에서 한자와 중국 고전을 가르치는 한편, 일찍이 고구려의 역사를 편찬한 《유기(留記)》가 있었고 그것을 뒤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신집(新集)》으로 개찬(改撰)하였다. 또한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는 한국 최초의 한시로 일컬어지는 우수한 작품이며,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은 고구려의 웅대한 판도와 아울러 그 찬란한 문물을 짐작케 하는 산 증거이다. 그 밖에도 만주와 한반도에 걸치는 웅대한 판도를 개척하던 고구려인의 기개는 웅혼(雄渾)하고 동적(動的)인 서사문학을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건국 신화 이외에도 《유리왕전설》 《온달(溫達) 설화》 《미천왕(美川王) 설화》 《호동왕자(好童王子) 설화》 등의 여러 전설 ·설화를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가요로서 그 가명(歌名)만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명주가(溟州歌)》 등이 있으나, 당(唐)나라의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그 고도의 문물에 놀라 모든 전적(典籍)을 불살라버려 오늘날 고구려 문학의 전모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백제는 육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는 한편 해상으로도 중국 육조(六朝)의 문물에 자주 접할 수 있어 한문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에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흥(高興)이 375년(근구수왕 1)에 지은 《서기(書記)》라는 역사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왕인(王仁)은 일본에 처음으로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전해주어 그들의 한문학을 일으키는 등 일본 문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잡아 온화한 기후와 풍요한 풍토의 혜택을 누리던 백제에는 주로 서정적인 문학이 융성하여 《선운산(禪雲山)》 《무등산(無等山)》 《방등산(方等山)》 《지리산(智異山)》 등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요를 많이 낳았으며, 오늘날 그 모습을 알 수 있는 노래로는 《정읍사(井邑詞)》 1편이 전한다. 그 밖에 백제의 대표적인 설화로는 《도미전(都彌傳)》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가로막혀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고유문화와 외래문화를 서서히 융합시키는 작용을 하여 3국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신라 역시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한 시기에 한자가 전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거칠부(居柒夫)가 《국사(國史)》를 편찬한 시기는 545년(진흥왕 6)으로 백제보다 거의 2세기나 뒤진 때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지은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은 비록 당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한 굴욕적인 송시(頌詩)이기는 하나 운치가 깃들인 주옥 같은 내용으로 신라 문학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한다. 가악(歌樂)을 숭상하던 화랑의 등장은 후일 향가문학(鄕歌文學)이 성립되는 요람 구실을 하였으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고신라시대에 《서동요(薯童謠)》 《혜성가(彗星歌)》 《풍요(風謠)》 등의 향가 작품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회소곡(會蘇曲)》 《물계자가(勿稽子歌)》 《우식악(憂息樂)》 《달도가(歌)》 《실혜가(實兮歌)》 등 많은 가요와 여러 설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수록되어 전한다. 또, 신라의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강수(强首)와 설총(薛聰) 등의 학자가 등장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2)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민족적인 통일국가를 이룩해 놓았다는 정치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단일(單一)한 고유문화를 처음으로 형성시켰다는 문화적 측면에서도 그 의의는 크다. 그 때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견제하기에 여념이 없던 신라의 국력은 이제 그 힘을 안으로 돌려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때마침 황금기를 맞이하던 당나라의 문학은 신라에 큰 자극을 주어 신라 조정에서는 해마다 많은 견당(遣唐) 유학생을 중국에 파견하여 난숙한 한문화(漢文化)를 흡수 ·수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미 전대(前代)에 전래되었던 불교는 이제 확고한 자리를 굳혀 신라의 귀족층을 형성한 승려나 화랑의 정신생활을 지배하고 예술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무르익은 문화적 환경 속에서 나타난 것이 이두(吏讀)와 그것을 표기수단으로 하는 향가문학이다. 설총이 생존한 시기를 전후하여 정리 ·종합된 것으로 보이는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한국말을 표기하도록 만든 일종의 차자문자(借字文字)로서, 이 이두문자의 창안(創案)으로 한국 고유의 향가문학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한국문학에서 완전한 문학으로 최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신라시대의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려서 전해지는 14수가 전부이지만, 이는 당시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향가가 지어진 최고(最古)의 연대는 진평왕대(眞平王代) 이전이며, 아래로는 헌강왕대(憲康王代)에 이르는 280여 년 간에 걸쳐 작품이 분포되어 있다. 이들 향가 작품 중에서도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祭亡妹歌)》, 충담사(忠談師)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영재(永才)의 《우적가(遇賊歌)》 등에서는 뛰어난 수사(修辭)의 기법과 숭고한 시정신(詩精神)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처용가(處容歌)》는 후대에 윤색 ·첨가되어 조선시대의 궁중가무로 이어졌다. 이들 작품에 공통되는 특징은 현실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정토(淨土)를 희구하는 관념이 그 바탕을 이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진성여왕(眞聖女王) 때에 대구화상(大矩和尙)과 위홍(魏弘)이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엮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었다.
통일신라의 서정문학이 불교문학에서 그 정점(頂點)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서사문학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불사(佛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를 비롯한 수많은 설화문학을 탄생시켰다. 이와 같은 신라의 설화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서 전해지는 것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기록을 다시 옮겨 쓴 고려 때의 기록을 통해서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에는 삼국통일기 이전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설씨녀(薛氏女)》 설화를 비롯하여, 의인법(擬人法)으로 왕을 풍유(諷喩)한 《화왕계(花王戒)》, 인생의 허무함을 묘사한 《조신몽생(調信夢生)》, 김현(金現)이 호랑이를 감화시켰다는 《호원(虎願)》 등 많은 설화문학 작품이 수록되었으며, 특히 《조신몽생》은 불교적인 교훈이 짙게 풍기는 불교설화이지만 압축된 주제와 짜임새 있는 구성이 이미 소설의 경지에 다다랐는가 하면, 《화왕계》는 설총이 그 작자로 밝혀진 작품이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 이전의 설화는 뚜렷한 작자가 없이 다만 전승되던 구비문학(口碑文學)이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개인의 작품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에 성립한 설화 문학은 뒷날 조선 후기에 발달한 고대소설의 근원설화(根源說話)로 되살아나게 되는데, 예컨대 조선시대에 쓰인 《토끼전(傳)》은 김유신(金庾信)의 전기에 나오는 <귀토설화(龜兎說話)>가 그 근원설화이고, 《흥부전(興夫傳)》의 근원설화는 <방이설화(旁說話)>였다. 이 밖에 본격적인 한시를 비롯하여 사륙변려문(四六儷文)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발전을 본 통일신라시대의 한문학은 강수 ·김인문(金仁問) ·설총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등으로 대표된다. 특히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동방 한문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그의 《계원필경(桂苑筆耕)》이 남아 있고 《동문선(東文選)》 등에 그 시문(詩文)이 전한다.
3) 고려시대
신라시대의 향가는 고려 초기까지 그 명맥이 유지 ·계승되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서 고려 광종(光宗) 때까지 생존한 고승(高僧) 균여(均如)가 불교의 정토사상(淨土思想)을 읊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향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 빛을 더한다. 균여가 지은 이 11수가 예술적으로 비록 높은 경지의 것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불교문학적인 향취와 세련된 수사(修辭)의 기교는 신라 때 향가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균여의 작품으로는 이 밖에도 수십 수의 향가가 있었다고 하나 모두 실전(失傳)되었다.
또한, 예종(睿宗:재위 1105∼1122)이 고려의 개국공신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과 김낙(金樂)을 추도하여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와 정서(鄭敍)가 유배지(流配地)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정과정곡(鄭瓜亭曲)》 등은 그 형식이 다소 변화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향가의 흔적이 남은 고려가요들이다. 이 무렵, 문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시가 형식에 별곡(別曲)이 있다. 이 별곡은 당시 성행하였던 팔관회(八關會)나 연등회(燃燈會)의 가무백희(歌舞百戱) 등에서 연희되기에 알맞도록 만든 분장(分章) 형식의 장가로서 새로이 등장한 시가 형태였다. 그것은 《처용가》의 경우를 보더라도 곧 알 수 있는데, 신라시대의 향가 작품인 《처용가》가 단장(單章) 형식의 짧은 시가였음에 비하여 고려 때의 것은 비교적 장형(長形)으로 변화하였다. 이와 같이 변모 ·발전한 고려의 시가는 고려 중기 이후 더욱 성행하면서 말기까지 이어졌으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서경별곡(西京別曲)》 《청산별곡(靑山別曲)》을 비롯하여 《정석가(鄭石歌)》 《유구곡(維鳩曲)》 《귀호곡(歸乎曲:가시리)》 《상저가(相杵歌)》 《이상곡(履霜曲)》 《만전춘(滿殿春)》 《쌍화점(雙花店)》 등 많은 가요를 들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별곡의 이형(異形)이라 할 수 있는 한문체(漢文體) 가사의 경기체가(景幾體歌)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이 그 효시를 이룸으로써 ‘별곡체’ 또는 ‘한림별곡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이 모두 여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들 고려 중기 이후의 시가 작품은 때마침 몽골의 침략과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전횡 등 불안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그 내용이 퇴영적 ·향락적인 경향으로 흘렀으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척신(戚臣)과 무신의 횡포 및 몽골 세력이 구축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대두한 주자학(朱子學), 곧 유학자(儒學者)들의 손으로 새로운 시조(時調) 시형이 창조되었다. 시조는 초기의 성립단계에는 딱딱한 한문투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나, 이윽고 서정성(抒情性) 넘치는 한국말을 자유로이 구사하게 되면서 간결하고 아름다운 고유의 정형시(定型詩)로 다듬어졌다. 이와 같은 단가형(短歌形)의 시조 이외에 장가형의 율문시(律文詩)인 가사(歌辭) 문학이 대두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렇게 볼 때 고려시대의 문학은 시가문학에 있어 마치 물을 모아두었다가 흘려 보내는 보(洑)와 같은 구실을 한 셈이다. 곧, 그 초기에는 신라 향가의 마지막 등불을 밝혔는가 하면, 다음에는 고려 당대의 문학인 별곡을 만들어냈고, 나아가 조선 시가문학의 꽃이라 할 시조와 가사의 태동을 알렸기 때문이다. 한편, 서사문학(敍事文學)에 있어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설화문학을 계승 ·발전시킨 신화 ·전설 ·민담(民譚)과 불교설화의 자취를 고려 초엽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과 중엽의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서사문학은 그 기록자의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끊임없는 정서(整序) ·통합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점차 창작적인 성격을 뚜렷이 띠어 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고려 중기부터 말기에 걸쳐 유행한 것이 임춘(林椿)의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 이곡(李穀)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이첨(李詹)의 《저생전(楮生傳)》 등 가전체(假傳體) 소설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서사문학의 백미편(白眉篇)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과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이 두 작품이 비록 한시의 오언(五言) 또는 칠언(七言)의 운문체(韻文體)를 빌려 기술되었지만, 그 바닥에는 외적(外敵)에 대한 의연한 항거정신이 맥맥히 흐르는 가운데 장중하고도 웅대한 구성과 묘사로 빼어난 민족의 영웅서사시를 이루어 놓았다.
4) 조선시대
한국의 문학은 크게 고려시대 이전과 조선시대 이후의 2기(期)로 양분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1446년 세종(世宗)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로 한국의 문학이 조선 전기부터 언문일치(言文一致)의 표기수단을 얻음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한국문학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데 연유한다. 신라에 이미 한국 고유의 향가문학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표현수단이었던 이두문자만으로는 한국의 사상과 말을 완전히 나타낼 수 없었고, 고려에 시가문학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미처 문자로 정착되지 못한 하나의 유동문학(流動文學)이었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의 한국문학은 한글의 출현에 의하여 비로소 그 자리를 찾아 정착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조선 건국 초부터 여러 개국공신들이 왕조의 창업을 찬미한 송축가(頌祝歌)로서의 악장(樂章)이 문자로 정착될 수 있었고, 경전(經典)과 고전의 번역 ·편찬 등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먼저 세종은 1446년의 훈민정음 반포에 앞서 그 실용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대표적 악장의 하나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권제(權) 등으로 하여금 짓게 하였다. 한글 반포 이듬해에 간행된 이 악장은 모두 125장(章)으로 이루어진 조선왕조 창업(創業)의 송축가(頌祝歌)로서 한국 최초의 한글 문헌이었다. 이어서 세종은 불교찬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친히 지어서 간행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용비어천가》 다음가는 최고(最古)의 한글 문헌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악장체(樂章體)의 시가 중에는 조선 초에 유행한 한문체의 송축가가 많이 있었으나, 이윽고 그것은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시조(時調)와 가사(歌辭)가 시가문학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시조나 가사가 이처럼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은 수사(修辭)에 있어 이 두 가지 형식이 한국말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형태적 특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즉, 시조는 간결한 가운데에서도 소박한 취향을 존중하는 유학자(儒學者)들의 서정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형태였고, 가사 또한 현실적이면서도 설유적(說諭的)인 유교의 이념을 나타내기에 적당한 형태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려 중기에 이미 싹이 튼 시조는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그 진가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된 시조는 고려 유신(遺臣) 등이 읊은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 길재(吉再) ·원천석(元天錫)의 《회고가(懷古歌)》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사육신(死六臣)의 《충의가(忠義歌)》나 김종서(金宗瑞)의 《전진가(戰陣歌)》, 그리고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등에 이르러서는 그 내용에 크나큰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즉, 그것은 작자 자신의 입장과 생활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개성의 문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발전 단계에 접어든 시조문학은 이윽고 이현보(李賢輔) ·송순(宋純) ·황진이(黃眞伊) 등의 뛰어난 작가를 만나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그 밖에도 2대 성리학자인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가 있으며, 정철(鄭澈)의 여러 시조에 이르러 조선 전기의 시조문학은 절정에 다다랐다.
조선 전기의 가사문학도 시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글 창제 이후 국자(國字)에 의한 표현수단을 얻게 됨으로써 크게 발전한 자유형의 시가이다. 최초의 가사작품으로는 성종 때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상춘곡(賞春曲)》을 꼽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은 이 작품이 형식과 내용이 잘 다듬어진 초기 가사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까닭이다. 이후 가사문학은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仰亭歌)》를 거쳐 정철의 여러 작품에 이르러 마침내 황금기를 맞고 활짝 개화하였다. 그의 시가집인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실려 전해지는 가사작품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續)미인곡》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모두 4편인데, 한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호탕하고도 비장한 시풍은 가히 가사문학의 절정이라 일컬을 만하다. 그밖에도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가사로서는 유배(流配)가사의 효시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 왜구(倭寇)를 무찌른 내용을 읊은 양사언(楊士彦)의 《남정가(南征歌)》, 정철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준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 자연 속에 한가로이 묻혀 지내는 심정을 읊은 차천로(車天輅)의 《강촌별곡(江村別曲)》, 벼슬 아치의 자세를 머슴에 빗대어 한탄한 허전(許)의 《고공가(雇工歌)》 등 많은작품이 있다. 한편, 산문에서는 조선 전기를 통하여 한문체에 의한 문학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김시습(金時習)이 한국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것을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傭齋叢話)》, 김종직(金宗直)의 《점필재집(畢齋集)》, 조광조(趙光祖)의 《정암집(靜庵集)》 등이 이 시기의 산문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었다.
또한, 번역문학 분야에서는 칠서(七書), 곧 ‘사서(四書)’와 ‘삼경(三經)’ 및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의 언해본(諺解本)이 간행된 것을 비롯하여 《능엄경(楞嚴經)》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의 불경과 《두시언해(杜詩諺解)》 《황산곡시집언해(黃山谷詩集諺解)》 등의 번역문학서가 잇따라 나타났다. 특히 이 시기를 통하여 성현 등이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는 가운데 이 때까지 구전(口傳)에만 의존해오던 《동동(動動)》 《정읍사(井邑詞)》 등 여러 고가(古歌)를 비로소 문헌에 정착시킨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5) 조선후기
한글 창제가 한국문학의 역사를 크게 양분하는 분수령(分水嶺)이었다고 하면,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크게 갈라놓은 분기점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고 난 조선사회에는 큰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물질적 피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신적인 타격과 충격 또한 막심하였다. 전쟁을 통하여 양반 귀족계층의 무력함을 절감한 평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현상(現狀)에 대한 비판의식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평민의 자각은 문학에도 반영되어 이윽고 평민문학의 대두와 융성을 가져오게 된다.
조선 전기의 문학이 주로 귀족적인 시가문학에 기울었던 데 대하여, 후기에는 그것이 평민들 사이에도 확산되어 시조작가의 수가 격증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가사(歌辭)에도 능했던 박인로(朴仁老)의 《오륜가(五倫歌)》 등 70여 수의 시조작품을 비롯하여 장경세(張經世)의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나 이항복(李恒福) ·김상용(金尙容) ·남구만(南九萬) 등의 시조는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내용면으로도 어지러운 당쟁을 통분한 이덕일(李德一)의 《당쟁차탄가(黨爭嗟嘆歌)》, 임진왜란의 용장 이순신(李舜臣)의 시조, 병자호란의 치욕을 비분하고 충의(忠義)를 읊은 봉림대군(鳳林大君) ·김상헌(金尙憲) ·이정환(李廷煥) 등의 시조가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시기의 시조문학을 대표하는 최고봉은 윤선도(尹善道)였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나 《산중신곡(山中新曲)》 같은 작품은 그의 자연시인으로서의 풍모를 뚜렷하게 할 뿐 아니라 시조문학의 가치를 한껏 발휘하였다. 윤선도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 시조문학은 이후 평민작가들이 그 주역을 맡게 되면서 김성기(金聖器) ·김유기(金裕器) ·김천택(金天澤) ·김수장(金壽長) ·박효관(朴孝寬) ·안민영(安玟英) 등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작자인 동시에 창곡가(唱曲家)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서민계층으로 흘러들어간 시조는 사설시조(辭說時調)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조를 낳았는가 하면, 지난날의 시조를 수집 ·정리하는 가집(歌集) 편찬이 평민 가객(歌客)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다. 즉,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을 비롯하여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 박효관 ·안민영이 함께 엮은 《가곡원류(歌曲源流)》가 있으며, 그 밖에도 《고금가곡(古今歌曲)》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동가선(東歌選)》 등 많은 가집이 출현하였다.
한편, 가사문학에는 조선 전기에 속하는 정철 같은 대가에 이어 후기에는 그와 쌍벽을 이룰 만한 박인로가 나타났다. 그의 작품으로는 임진왜란 때 읊은 《태평사(太平詞)》와 《선상탄(船上嘆)》을 비롯하여 《누항사(陋巷詞)》 《사제곡(莎堤曲)》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 등 7편의 가사가 전해진다. 그러나 박인로의 특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때 가사문학이 시조에 밀려 그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영조 이전까지는 이원익(李元翼) ·이수광(李光) ·무옥(巫玉) ·임유후(任有後) 등이 가사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숙종 이후 소설의 융성과 더불어 가사는 다시 번성하여 장편가사가 널리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영조 때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정조 때 안조환(安肇煥)의 《만언사(萬言詞)》, 헌종 때 한산거사(漢山居士)의 《한양가(漢陽歌)》, 철종 때 김진형(金鎭衡)의 《북천가(北遷歌)》, 고종 때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燕行歌)》 등이 모두 1,000여 구(句)에서 4,000구에 달하는 장편가사였으며, 그 밖에도 유명 무명의 작가들이 창작한 수많은 가사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영남(嶺南)의 부녀자 사이에서 주로 유행한 내방가사(內房歌辭)가 많이 전해진다.
조선 후기의 특기할 만한 문학양식으로서 판소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판소리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는 형편이지만, 대체로 근원설화(根源說話)가 판소리로 전화(轉化)한 뒤 이윽고 그것이 문자로 정착한 것이 판소리 계통의 고대소설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판소리가 언제부터 불렸는지 확실치 않으나, 기록에 따르면 그 시창자(始唱者)는 숙종 말의 하한담(河漢潭)과 최선달(崔先達)이었다. 《춘향가》를 비롯하여 《심청가》 《흥부가》 《토끼타령》 《장끼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 《화용도(華容道)》 《강릉매화타령》 《무숙(武淑)이타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등 판소리 열두 마당은 고종 때 신재효(申在孝)에 의해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가루지기타령》 《적벽가(화용도)》의 여섯 마당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고대소설의 개화(開花)이다.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가 나타난 이후 발전단계로 접어든 조선의 소설은 광해군 때 허균(許筠)의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출현시켰다. 흔히 최초의 한글 소설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계급사상을 타파하고 사회 개혁을 시사한 사회소설로서 당시의 시대 배경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허균에 이어 조선의 소설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끈 작가는 숙종 때의 김만중(金萬重)이었다. 그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지었다는 《구운몽(九雲夢)》과 임금을 참회시키기 위하여 집필했다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김만중 소설에서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 밖에 작자 미상의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은 김만중의 작품과 같은 시대에 쓰인 회장소설(回章小說)로서 빼어난 작품이다. 이윽고 영 ·정조 시대로 접어들면서 전성기를 맞이한 조선의 소설문학은 실학(實學)의 발흥 및 중국소설의 유입과 함께 대단한 흥성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수백 종의 유명 무명 작가에 의한 고대소설들은 거의가 이 무렵의 소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먼저 박지원(朴趾源)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馬傳)》 등 10여 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는 한문이지만 한국 사실주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엄격한 비판정신에 입각한 박지원 소설은 당시 양반 계층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이 무렵 중국소설의 영향으로 군담소설(軍談小說)과 염정소설(艶情小說)이 많이 등장했는데, 전자가 남성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여성의 문학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었다. 군담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임진록(壬辰錄)》을 비롯하여 《조웅전(趙雄傳)》 《유충렬전(劉忠烈傳)》 《임경업전(林慶業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장인걸전(張人傑傳)》 《곽재우전(郭再祐傳)》 《장익성전(張翼星傳)》 《여장군전(女將軍傳)》 등이 있으며, 염정소설류로는 《춘향전》을 비롯하여 《숙영낭자전》 《옥단춘전(玉丹春傳)》 《운영전(雲英傳)》 《이진사전(李進士傳)》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해지나 그 중의 백미는 《춘향전》이다. 그 밖에도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등의 가정소설, 《심청전》을 비롯한 도덕소설, 《옥루몽(玉樓夢)》 등 일련의 기연소설(奇緣小說), 《흥부전》 등의 우화소설 등 여러 유형의 고대소설이 속출하여 소설문학을 풍성하게 하였는가 하면, 궁정기사체(宮廷記事體)로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도 발달하여 《계축일기(癸丑日記)》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등이 나타났고 이와 같은 궁정문학은 더욱 발달하여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閑中錄)》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등의 여류문학을 형성하였다.
2. 현대문학
한국의 현대 문학은 금세기 초에 전개된 신문학(新文學)운동으로부터 8 ·15광복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성된 문학을 지칭한다. 1894년의 갑오개혁을 경계로 한반도에는 위로는 정치제도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서양의 선진 문화를 뒤따르려는 근대적인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 신기운을 개화기(開化期)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한국의 신문학운동도 이 개화기의 한 산물이다. 개화란 서구화를 의미하는 면이 강했지만 그것이 국적이나 민족을 무시 또는 초월하는 근대의식이 아니었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고취하려는 의지를 근간으로 하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며, 실상 한국의 근대적 민족주의와 민족문학은 이 개화기부터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현대 문학은 민족의식과 근대적 자아의식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의 독립 ·번영에 대한 일체의 도전에 대한 저항과 예술적 창조의 두 국면의 긴밀한 관계를 파악하는 데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1) 개화기
개화기의 문학은 번역 ·창가 ·신소설의 세 가지 형태로 집약할 수 있다. 번역은 성서(聖書)와 찬송가의 번역과 함께 J.버니언의 《천로역정(天路歷程)》 번역(1895)이 있었고 이어 일본을 통한 중역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조중환(趙重桓)의 《장한몽(長恨夢)》, 이상협(李相協)의 《해왕성(海王星)》 등이 나왔는데 이것은 한국 근대문학 발생에 있어 서구문학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들이다. 창가는 1890년대 후반에 《독립신문》의 발간과 함께 나타났는데, 이용우의 《애국가》, 이중원의 《동심가》 등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 중추를 이루었다. 창가는 그 뒤 7 ·5조, 8 ·5조 등의 가사 형태로 발전, 최남선(崔南善)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라는 신체시(新體詩)를 낳았다. 신소설의 첫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인직(李仁稙)의 《혈(血)의 누(淚)》는 1906년에 《만세보(萬歲報)》에 발표되었으며, 이어 같은 작가의 《귀(鬼)의 성(聲)》(1907), 이해조(李海朝)의 《빈상설(上雪)》(1908) 《자유종(自由鐘)》(1910), 최찬식(崔瓚植)의 《추월색(秋月色)》(1912) 등이 나왔는데 이들 작품의 주제는 자주독립, 근대적 민주사상, 신교육사상, 기성인습의 비판, 미신타파 등의 근대적 내용을 담았으나 권선징악, 인물의 정형성(定型性), 인위적인 종말 등의 요소는 고대소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어서 나타난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근대소설의 시초라 할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발표하고 계속해서 《개척자(開拓者)》 등을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은 개화기 소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지만 일상어에 의한 산문문장과 작품 구조의 확립, 장편소설의 가능성 등에서 문제가 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2) 근대문학도입
1920년대는 한국의 신문학운동에 있어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문학 근대화의 한 고비가 되는 셈이다. 물론 문학의 근대화라면 우선 그 환경이 문제가 되고 민족적인 독립국가라는 큰 전제가 필요하지만, 한국 신문학의 경우 10년에 국권피탈로 인하여 근대화의 환경으로서는 불모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신문학운동은 전개되어 19세기의 근대문학 사조인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이 들어와서 문예사조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사조들을 타고 문학지들도 많이 등장하였는데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지상에는 김억(金億) ·황석우(黃錫禹) 등이 자유시를 발표하였고, 문예동인지 《창조(創造)》에서는 일본 낭만파 시의 대량 번역과 함께 주요한(朱耀翰)의 휘트먼적 의지, 전원구가(田園謳歌), 도시통매(都市痛罵) 등 이상적 경향의 시를 볼 수 있었다. 이어 《장미촌(薔薇村)》(21), 그리고 김억 ·남궁 벽(南宮璧) ·나혜석(羅惠錫) ·오상순(吳相淳) ·황석우 ·염상섭(廉想涉) 등을 동인으로 한 《폐허(廢墟)》(1920), 박종화(朴鍾和) ·홍사용(洪思容) ·노자영(盧子泳) ·이상화(李相和) ·박영희(朴英熙) ·나도향(羅稻香) 등이 동인이었던 《백조(白鳥)》(1922), 양주동(梁柱東) ·이장희(李章熙) ·유엽(柳葉) 등을 동인으로 한 《금성(金星)》(1924) 등이 발행되었는데, 이들 동인지에 나타난 대부분의 시는 허무적인 낭만주의를 주조로 하였다. 여기에 김소월(金素月)의 민요적 정한(情恨), 한용운(韓龍雲)의 구도적(求道的) 시정신을 추가할 수 있다. 이광수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김동인(金東仁)을 비롯하여 전영택(田榮澤) ·현진건(玄鎭健) ·염상섭 ·나도향 등은 1920년대 초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이 작가들 가운데 김동인은 문학의 계몽성을 거부하는 순문학을 탄생시켜 근대적인 문학정신을 심어놓은 작가라는 점에서, 또 염상섭은 냉철한 리얼리즘을 보여준 최초의 작가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1920년대에 나타난 문학운동 중 색다른 것은 소위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다. 이 두 개의 문학은 1920년 초부터 밖에서 들어온 사회주의사상과 풍조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다. 신경향파는 시보다도 소설에서 더 활발한 면을 보였는데 그 특색은 하층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극빈적 가난을 그리되 결말에 가서는 지주(地主) 등 상류계급에 대한 반항을 나타내는 것이 상례였다. 그 대표적 작가로는 최서해(崔曙海)를 들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25년에 프로 문학단체인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가 결성되어 약 5 ·6년간 문단의 패권을 쥐다시피 하였는데 이 프로문학의 특징은 마르크스적 이데올로기의 주입과 계급혁명이라는 정치성이 노출되어 문학적인 작품으로서의 성과를 남기지 못하였다. 이에 속하는 대표적 문인은 임화(林和) ·이기영(李箕永) ·김남천(金南天) 등이었다.
3) 30년대 문학과 모더니티
30년대의 한국의 문학은 20년대 후반에 성행했던 프로문학에 대한 반발과 파시즘의 대두 및 중 ·일전쟁 발발로 불안의식이 고조되어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객관적 정세가 악화될 때 문학은 위축되고 안이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상례이지만, 이 시기의 문학을 문학사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 그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시나 소설에서 서정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점이다. 시에서 김영랑(金永郞), 소설에서 이태준(李泰俊)의 작품들이 이 범주에 속하며 이효석(李孝石)의 후기 작품도 같은 경향이다. 거기에는 민족주의적인 애상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둘째는 33년을 전후해서 등장한 모더니스트의 일파이다. 이 모더니즘은 시인들이 중심이 된 문학운동으로 서양의 상상파(이미지즘)의 계통을 본떠서 모더니티를 강조한 것이다. 김기림(金起林)이 주동이 되고 김광균(金光均) ·장만영(張萬榮) ·장서언(張瑞彦) 등의 시인들이 뒤를 따랐다. 9인회의 한 사람이었던 정지용(鄭芝溶) 또한 언어의 조탁(彫琢)과 리듬의 추구에 주력하면서 모더니즘의 선행주자의 역할을 했으며, 이 파를 이론적으로 도운 사람은 새클리 등의 주지파(主知派) 문학을 도입 소개한 평론가 최재서(崔載瑞)였다. 한편 이상(李箱)도 이와 같은 경향을 띠고 작품활동을 한 작가이다. 그는 초현실주의 시(詩) 《오감도(烏瞰圖)》(34)와 최초의 심리주의 소설 《날개》(36)를 써서 현대시와 현대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30년대 후반기에는 재능 있는 신인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의 대륙침략전이 한창이던 때였으므로 한국문학의 주경향은 도시의 현실을 도피하여 자연을 가까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역사소설의 대거 등장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김동명(金東鳴) ·김상용(金尙鎔)의 전원시(田園詩), 이무영(李無影)의 농민문학이 그것을 증명하며, 이광수가 《단종애사(端宗哀史)》를, 김동인이 《운현궁의 봄》을, 현진건(玄鎭健)이 《무영탑(無影塔)》을, 박종화(朴鍾和)가 《대춘부(待春賦)》 등 역사소설을 내놓은 것도 그들의 민족주의 사상과 무관하다 할 수는 없으나 앞에서 말한 현실도피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 무렵 심리주의와는 반대로 세태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일군의 세태소설이 등장했다. 채만식(蔡萬植)의 《탁류(濁流)》(38), 박태원(朴泰遠)의 《천변풍경(川邊風景)》(36)이 그것인데, 유진오(兪鎭午)도 《김강사와 T교수》(35)를 거쳐 시정(市井) 세계를 묘사한 《주붕(酒朋)》(40)을 발표하였다. 이 밖에 인상파 작가로 불리는 계용묵(桂鎔默) ·김유정(金裕貞)의 활약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후반기에서 또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은 유능한 신인들의 등장이라 하겠는데 시에서 서정주(徐廷柱), 소설에서 김동리(金東里) ·박영준(朴榮濬) ·정비석(鄭飛石) ·최인욱(崔仁旭) 등 신인이 한국의 토착적 ·풍토적인 데서 제재를 찾아 작품을 형상화함으로써 높은 예술성의 획득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특히 김동리는 《무녀도(巫女圖)》 《바위》 등의 수작들을 발표하여 한국의 문학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4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전쟁 말기로서 한국문학은 암흑기에 처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에 두 개의 문학잡지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존재하여 문학을 지키는 교두보의 역할을 했다. 이 잡지를 통해서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조지훈(趙芝薰) 등 청록파 시인과, 소설에 최태응(崔泰應) ·임옥인(林玉仁)이 등장하였다. 조지훈의 자연적 ·선적(禪的)인 고아한 율조, 박목월의 토속적 민요적 자연친화(自然親和), 박두진의 이상적인 자연승화 등은 특히 괄목할 업적이었다.
4) 조국광복과 민족문학 확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한국 민족과 그 문화를 지난 36년간의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시켰다. 문학도 8 ·15광복의 환희 속에서 민족문학 건설의 기치를 높이 내세우고 새출발을 하였다. 많은 시인 ·작가 ·비평가가 등장하여 《백민(白民)》 《민성(民聲)》 《신천지(新天地)》 《학풍(學風)》 《예술조선(藝術朝鮮)》 《문예(文藝)》 등 여러 지면을 통해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말미암아 쓸 자유를 완전히 빼앗겼던 문학인들은 광복의 감격 속에서 언어를 깎고 다듬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현상은 혼란기를 틈타서 빚어진 좌익 문인들의 책동을 민족진영의 젊은 문인들이 작품과 단체활동으로 분쇄한 사실이다. 좌우익의 논전은 에세이스트에 지나지 않았던 김동석(金東錫)의 <순수문학의 정체>와 순수문학의 기수인 김동리(金東里)의 <독조문학(毒爪文學)의 본질>로써 시작되었다. 이 논전에 좌익계의 김병규(金秉逵)가 가담했고 민족주의 진영의 조연현(趙演鉉) ·이헌구(李軒求) ·조지훈(趙芝薰)이 지원사격을 가하였다. 이 무렵의 논전을 요약하면 ① 계급문학 대 민족문학, ② 물질 대 정신, ③ 사회성 대 인간성, ④ 공식주의 대 다양성, ⑤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가 된다. 그러나 뒤이어 밀어닥친 6 ·25전쟁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고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다시 한 번 체험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문학이 제대로 발전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나 문학잡지, 특히 순문학을 지향하는 《문예(文藝)》가 문단에 큰 활기를 불어넣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이 지면을 통하여 기성작가의 작품도 적지 않게 발표되었지만, 새로운 세대를 짊어질 신인들이 많이 등장하였고 그들은 잇따라 주목할 작품들을 발표하였는데, 소설에 장용학(張龍鶴) ·손창섭(孫昌涉) ·강신재(康信哉), 시에 한성기(韓性祺) ·이수복(李壽福) ·박재삼(朴在森) 등이다. 이보다 약간 앞서지만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청록집(靑鹿集)》과 박인환(朴寅煥) ·김수영(金洙暎) 등 모더니스트들이 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이 시기를 장식한 작품들이다. 50년대 초반은 6 ·25전쟁으로 전선에 종군한 시인 ·작가들의 르포르타주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으나 접전 현장이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은 거의 없다. 작품의 무대는 대체로 전선 아래에 있는 병영이거나 전쟁이 휩쓸고 간 마을 또는 먼 후방의 도시였으며 주요 작품으로 조지훈의 《풍류병영(風流兵營)》, 구상(具常)의 《적군묘지 앞에서》 등의 시작품과 황순원(黃順元)의 《학(鶴)》, 안수길(安壽吉)의 《제3인간형(第三人間型)》,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密茶苑時代)》 등의 단편소설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전후파 기질 및 실존주의가 문단을 풍미한 사실이다. 서구와 일본 사회에서는 전후파적인 풍조가 제2차대전 후에 곧바로 나타났지만 한국에서는 6 ·25전쟁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나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폐허와 허무와 절망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즉 기존의 질서와 도덕을 부정하고 권위를 부정하며 모든 속박으로부터 일단 자유로워지고 싶어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 서기원(徐基源)의 《암사지도(暗射地圖)》, 한말숙(韓末淑)의 《신화의 단애(斷崖)》 등을 들 수 있다.
5) 60~70년대
6 ·25전쟁으로 한국 민족이 입은 물질적 손실과 정신적 상처는 60년대 초엽에 이르러서도 작가들이 쉽게 잊을 수 없는 체험으로 남아, 오상원(吳相源) ·서기원 ·강용준(姜龍俊) 등이 이 시기에 전쟁의 여러 상흔을 계속 보여주었다. 4 ·19혁명과 5 ·16군사정변을 경험하면서부터는 작가의 정치 ·사회에 대한 시민적 각성 및 비판의식이 높아지면서 김정한(金廷漢)의 《모래톱 이야기》, 이호철(李浩哲)의 《판문점》, 남정현(南廷賢)의 《분지(糞地)》 등이 생산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현실을 고발하고 풍자하며 민중의 정서와 가락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온 시인들의 업적, 즉 김수영(金洙暎) ·신동문(辛東門) ·신동엽(申東曄) ·신경림(申庚林) 등의 작업을 간과할 수 없다. 또 시의 표현기교에 새로운 실험을 끈질기게 시도한 김춘수(金春洙) ·전봉건(全鳳健) ·신동집(申瞳集) ·김구용(金丘庸) ·문덕수(文德守) ·김종삼(金宗三) ·박희진(朴喜璡) 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과 함께 재래적인 정서와 풍속과 윤리와 신앙과 사상의 중시, 회고적이며 소박한 자연에의 도취, 토속어의 애용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시의 전통을 이어온 시인들이 있는데, 이원섭(李元燮) ·김윤성(金潤成) ·이동주(李東柱) ·천상병(千祥炳) ·박용래(朴龍來) ·이형기(李炯基) ·박재삼(朴在森) ·이성교(李姓敎) ·김관식(金冠植) ·구자운(具滋雲)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김소월과 김영랑에서 출발하여 김광섭(金珖燮) ·서정주와 맥을 잇고 청록파 시인에게서 한 봉우리를 이룬 전통적 서정주의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다.
한편, 소설에서는 60년대 이후 내성적 기교주의로 불릴 만한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이청준(李淸俊) ·박태순(朴泰洵) ·전상국(全商國) ·유재용(柳在用)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들의 작품세계에서는 50년대 작품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개인주의적 내성과 새로운 감성의 세계를 섬세한 언어기교로 그려냈다는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소설사에서 볼 때 이 때에 이르러 단편소설 위주에서 벗어나 장편소설 시대로의 전기(轉機)가 마련되었다. 문학 전문지는 물론 종합월간지에서 중편이나 장편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안수길의 《북간도(北間島)》, 박경리(朴景利)의 《토지(土地)》, 최인훈(崔仁勳)의 《광장(廣場)》 등은 이 때의 작품들이다.
6) 80~90년대
1970년대에는 그 동안 문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기성 문인들이 퇴조의 기미를 보이는 한편 젊은 신인들의 눈부신 움직임이 단연 각광을 받게 되었다. 소설분야에서는 최인호(崔仁浩) ·황석영(黃晳暎) ·조해일(趙海一) ·조선작(趙善作) 등 여러 젊은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소위 70년대 작가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가장 많은 독자를 차지하는 신문소설에서도 그 자리를 휩쓸다시피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故鄕)》, 조해일의 《겨울 여자》 등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종의 소설 황금시대를 구가(謳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작품 경향에 대해 그 상업주의(商業主義) 문학으로서의 병폐를 지적하는 비평의 소리가 일각에서는 높아지기도 했다. 한편 산업사회(産業社會)의 도래와 함께 그 병리적인 면을 작품을 통해 표현한 조세희(趙世熙)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의 작품집이 나와 단편집으로서 드물게 많은 독자를 얻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 황석영은 공사판의 노사관계를 다룬 《객지(客地)》라든지 남북분단의 비극을 작품화한 《한씨 연대기(韓氏年代記)》 등을 발표하였다. 70년대의 시단에서는 먼저 유신체제와 어두운 정치상황 아래에서 시인 김지하(金芝河)가 발표한 《오적(五賊)》이 필화사건(筆禍事件)을 몰고 와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밖에도 두드러진 작품활동을 한 시인으로서는 정진규(鄭鎭圭) ·정현종(鄭玄宗) ·박이도(朴利道) ·이승훈(李昇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변모를 가져오는 데 가장 앞장서는 구실을 했다.
1980년대에 와서 소설에서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된 것은 그동안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던 대하소설(大河小說)의 등장이다. 이것이 독자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황석영(黃晳暎)의 역사소설 《장길산(張吉山)》과 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太白山脈)》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이문열(李文烈)의 장편 《영웅시대(英雄時代)》도 문단의 많은 주목을 받고 그 후 그는 90년대에 넘어 오도록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시에 있어서는 이성복(李晟馥) ·황지우(黃芝雨) ·최승자(崔勝子) ·김광규(金光圭) 등이 발랄한 작품활동을 했고, 이 밖에 노동시를 쓴 박노해와 기록적인 시집의 판매 성적을 올린 서정인도 80년대에 빠질 수 없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에 접어들어 많은 상업주의적인 소설이 나타나 독자들을 혼란케 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25년만에 완성된 것은 뜻깊은 일이다. 이 밖에 작가 홍성원(洪盛原)도 60년대에 등단한 이후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먼동》 《달과 칼》 등의 대장편을 발표하고 있다. 또 신경숙 ·공지영 등의 젊은 여류작가들의 활동도 두드러지고 있다. 시에서는 70년대 이후 두드러진 작품 활동을 해온 고은(高銀)이 《만인보(萬人譜)》 《백두산(白頭山)》 등의 장시(長詩)를 완성하고 30년대에 시단에 나온 서정주(徐廷柱)가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 이후 계속해서 작품을 쓰고 있다. 여류시인들도 홍윤숙(洪允淑) ·김남조(金南祚) ·김지향(金芝鄕) ·천양희(千良姬) 등이 50년대 이후부터 시작품의 꾸준한 발표를 이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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