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문학관 탐방
입춘이 지났으나 봄은 아직 멀리에 있다. 추운 겨울을 녹이려 <해>의 시인 혜산 박두진 선생을 찾아 안성으로 간다. 오늘 저녁부터 또 눈이 쌓인다 하여 길을 서두른다.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산과 들은 하얗게 얼어있다. 겨울은 그리 쉽게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얼음으로 덮여있는 안성천엔 천둥오리들이 떼로 모여 살을 서로 비벼 체온을 보태면서 겨울을 난다.
안성에 들어서자 혜산이 태어난 곳, 지금은 안성여자중학교 운동장이 된 봉남동 360번지를 들려본다. 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하고 꽤 넓은 운동장은 한산하다. 운동장 가에 선 측백나무, 주목나무에는 색깔 있는 예쁜 명찰을 달아 놓았다. 혹시 박두진 시인 생가에 대한 무슨 표식이라도 있을까 싶어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보지만, 시인에 대한 표식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
박두진 소년이 8살 때부터 17세 까지 속고갱이 같은 소년기를 보낸 보개면 동신리(고장치기) 220-17번지를 찾아간다. 멀리 산으로 둘러쌓인 사갑들은 지평선 끝자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 들판 한 가운데 동네가 있고 동네 끝에 혜산이 다녔을 초등학교가 있다. 앞쪽에는 차령산맥의 줄기인 청룡산이 버티고 있다. 이 넓은 들판에 막힘없이 불어오던 바람, 청룡산에 아침마다 솟아오르던 해, 들판 위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은 어린 소년 박두진이 시인으로 성장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 사갑들판
혜산 박두진 시인은 이 고향 마을을 잊지 못해 했다. 시인은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에서 “내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이 동네(고장치기)에서 가장 깊은 인상은 바람이었다. 특히 늦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거의 쉬는 날 없이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그 바람은 세차고 쓸쓸하고 성가시면서도 친근했다. 신비하고 오묘했다. 도대체 바람이란 무엇인가. 그 바람의 감촉, 바람의 인상, 바람의 의미와 바람의 호소, 바람의 쓸쓸함과 바람의 상징을 모르는 사람은 자연과의 대화와 그 비밀한 교감을 모르는 사람이다." 라고 술회했다.
청룡산에서 솟아오르는 해, 한 여름 벌판에 쏟아지는 강열한 햇볕은 혜산의 대표시라 할「해」를 솟게 했고, 시의 배경을 빛으로 채워 놓았다. 혜산도“내 시의 시적 상황의 배경 색깔은 초기시의 99퍼센트가 찬란한 금빛 햇살이며, 그 빛이 빚어내는 밝고 생명에 찬 세계였다, 뿐만 아니라 시의 전 주제를 일관하는 사상이 빛의 사상이다.” 라고 말한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 이글 애뙨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과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에 앉아 애뙤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해」전문
「해」는 1946년 5월『상아탑』잡지에 처음 발표되었으나, 그 후 1949년 그의 처녀시집『해』의 표제가 된 시이며, 이 시의 발표로 해산은 시인의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2001년 6월 프랑스 아비뇽 근처 고대 로마 유적지로 알려진 베종라 로망(Vaison la Romalne)에 이 시의 첫 구절을 앞면은 한글로 뒷면은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세워 놓았다.
사갑들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뒤로 한다. 이처럼 넓고 풍요로운 들판 속에 살면서도 소년 박두진은 얼굴이 거울처럼 비취는 멀건 조당수를 먹으며 자라고, 때론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던 시대적 아픔을 되뇌어본다.
▲ 2004년 정부가 선정한 문화인물 선정비
어느덧 <박두진 자료실>이 마련되어 있는 안성시립도서관(보개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편 동산에「2004년 정부가 선정한 문화인물 선정비」와 커다란 돌에 새겨진 박두진의「고향」시비와 마주한다. 시비는 시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시로 세우는 것이 곤례지만, 고향에 세워지는 시비러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고향」시를 택했나 보다.
고향이란다. 내가 나서 자라난 고향이란다./
그 먼 눈 날려 휩쓸고 별도 얼어 떨던 밤에//
어딘지도 모르며 내가 태어나던 곳/
짚가리에 떨어져 첫소리 치던/
여기가 내가 살던 고향이란다.//
청룡산 옛날같이 둘리어있고/
우러 보던 옛 하늘 푸르렀어라/
구름 피어오르고 송아지 울음 울고/
마을에는 제비 떼들/
막쇠와 복술이랑/
옛날에 놀던 동무 다 어디가고./
둘이만 나룻터럭 거칠어졌네.
-「고향」부분
“시는 모든 것 위에서 최고의 비판이다. 최고의 도덕적 이상 미학이며 가장 높은 단계의 인간성을 실현해야 한다.“
(혜산 박두진 선생님 말씀)
<박두진 자료실>을 들어서자 시인의 대형 초상 사진이 손님을 맞아준다. 근엄하고 강직해 보이면서도, 맑고 밝고 깨끗해 보이는 지성의 향기가 번진다.『청록집』『해』『오도』『박두진 시선』『거미와 星座』『당신의 사랑 앞에서(유고시집)』등 30여권의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 시인이 기고한 시, 산문, 평론등 문예지, 시인의 소년, 청년기를 포함한 사진, 수석, 친필 원고, 시인이 직접 쓴 서예작품, 안경 등 소품, 그리고 시인이 자신의 시를 직접 붓으로 쓴 액자가 결려있다.
별로 넓지 않은 공간이나 평소 시인의 성품처럼 겉치레 없이 군더더기 없이 있을 것만 간결하고 알차게 차려놓았다. 그 많은 상장 한 장도 없다. 최근의 거창하고 화려하게 치장한 문학관에 견주어보면 좀 초라하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어서 혜산 문학관을 지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일지 모르지만, 안성시가 문화정책에 인색하다고 성토할지 모르지만, 박두진 시인의 생애와 철학에 견주어 보면 도서관 한 공간에 마련한 깔끔한 시인의 자료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자료실에 들어서 왼쪽으로 돌면 첫 머리에 시인의 14세 소년 사진과
<문장>지에 추천을 받던 청년기의 사진이 각각 한 장씩 벽에 붙어 있고, 그 아래 박두진 시인의 추천시가 들어 있는 <문장>지가 놓여있다. <문장>지에 정지용 시인의 3회 추천, 이것은 청년 박두진의 생애를 바꿔놓는 한 계기가 되었다. 1939년 박두진은 제1회「향현(香峴)」「묘지송」제2회「낙엽송」제3회「의(蟻)」「들국화」가 추천 되어 문단에 진출했다.
1회 때 정시용 시인은 박두진을 추천하며 “박두진 군 당신의 시를 시우 소운한테 자랑삼어 보이었더니, 소운이 경론(經論)하는 중에 있던 山의 시를 포기하노라고 합디다. 시를 무서워 할 줄 하는 시인을 다시 무서워 할 것입니다. 유유히 펴고 앉은 당신의 시의 자세는 매우 편하여 보입니다” 라고 칭찬했다.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山 너머 큰山 그 넘엇 山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山, 묵중히 엎드린 山, 골골이 長松 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살살이 떡깔나무 억세풀 우거진데, 너구리 ․ 여우 ․ 사슴 ․ 산토끼 오소리 ․ 도마뱀 ․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山. 山, 山들! 累巨萬年 너희들 沈黙이 흠뻑 지리함즉 하매,
山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기리 기다려도 좋으랴?
-「香峴」전문
정지용 시인은 칭찬보다는 매섭게 회초리를 드는 쪽이다. 제2회 추천에서는“제1회적 시는 완전히 조탁(彫琢)을 지닌 것이었으나 이번 것은 그렇지 못 하외이다. 당분간 답보를 계속하시렵니까. 시상(詩想)도 좀 낡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루청풍(高樓淸風)에 유화(流畵)한 변설(辨說) - 당신의 장점을 오래 고집하지 마시오. 이래도 선뜻 째이고 저래도 째이는 시적 재화(才華)가 easy going으로 낙향(落鄕)하기 쉬운 일이니 최종 코-스를 위하여 맹렬히 저항하시요!”
다시, 3회 추천을 완료 하고 나서 정지용 시인은 “박군의 시적 체취는 무슨 삼림(森林)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것입니다. 실상 바로 다옥한 삼림이기도 하니 거기에는 김생이나 뱀이나 개미나 죽음이나 슬픔까지가 무슨 수취(獸臭)를 발산할 수 없이 백일(白日)에 서늘하고 푹은히 젖어 있습니다. 조류의 우름도 기괴한 외래어를 섞지 않고 인류와 친밀하야 자연어가 되고 보니 끝까지 박군의 수림(樹林)에는 폭풍이 아니 와도 좋습니다. 항시, 멀리 해조(海潮)가 울듯이 솨 ―하는 극히 섬세한 송뢰(松籟)를 가졌기에, 시단에 하나 신자연(新自然)을 소개하며 선자(選者)는 만열(滿悅)이상 이외다.”
박두진 시인은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1939년 <문장>지의 추천을 거쳐 시단에 소개 됐을 때, 나는 선자 정지용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와 경의를 품고 있었다. 그 만큼 당시의 문단에선 그의 공적이 인정되었었고 권위가 확립되어 있었다. 이제 갓 나오려는 당시의 나는, 문학 청년적인 야심에 차 있기 보다는 감히 내가 시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문학을 하늘만큼 높은 사업으로 알았던 중압감에서 문단적인 처세나 그 방법적인 계략 같은 것을 염두에 두어 본 일도 없었다. 오직 나와 시, 영원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지고한 시의 세계 자체와 어떻게 대결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명제가 있을 뿐이었다.”
위의 사진 옆에는『청록집』출판기념회 사진이 있고, 그 아래는『청록집』이 놓여있다.『청록집』발간은 청년 박두진의 생애를 상승시키는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 시집 한권으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은 그 시세계가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청록파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청록집』발간은 당시 을유문화사에 근무하던 혜산 박두지이 주관하여 발간하였으며, 지은이 대표로 박두진이 명기되어 있다. 합동시집을 내자는 혜산의 연락을 받고 대구에서 부랴부랴 상경하였다고 목월도 기록하고 있다. 시집의 표제는 박목월 시인의 시「청노루」에서 기인하였지만 조지훈 시인의 시에도‘사슴’이 나오고 박두진 시인의 시에도‘사슴’이 있다. 아마 그래서 이 삼인 시인들은 시집의 이름을『청노루』로 쉽게 합의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슴(노루)이 지향하는 이미지는 세분이 각기 다르다. 목월의 사슴이‘자하산 봄눈 녹을 때,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에 서서, 그 맑은 눈동자에 흰 구름이 도는 청 노루’ 라면, 지훈의 사슴은‘꽃이 떨어져도 바람을 원망하지 않으며, 자하산 열 두 봉우리에 싸리나무 새순 뜯으며, 꽃비(낙화)가 슬퍼 순한 눈에서 눈물 글썽이는 그런 사슴’이다. 반면 두진의 사슴은 ‘핏내(피 냄새)를 잊은 여우 이리와 더불으며, 토끼와도 함께 싸리순 칡순을 찾아 즐거이 뛰노는’그런 사슴이다. 같은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목월이 대상을 이미지화 했다면, 두진은 관념을 이미지화 했다. 두진의 관념은 여우 이리 사슴 토끼가 함께 노니는‘자유’와‘사랑’이다.
방 가운데는 수석들이 놓여있고 수석 옆에 시집『수석열전』『(속)수석열전』두 권이 있다. 해산은 강으로 들로 다니며 수석 채취에 열중 하였으며, 이 수석의 형상을 통하여 자연과의 합일, 삶의 탐구, 신앙으로의 승화를 기도 하였다.
비로소 하늘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죽음의 바닥으로 딛고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
빛이 그 가시 끝 뜨거운 장점들에 피로 솟고
비로소 음미하는 아름다운 고독
별들이 뿌려주는 눈부신 축복과
향기로이 끈적이는
패배의 확증 속에
눌러라 눌러라 가중하는 이 황홀
이제는 미련 없이 손을 들 수 있다.
누구도 다시는 기대하지 않게
혼자서도 이제는 개선할 수 있다.
-「가시면류관」전문
누군가 저기를 올라갈까
꿈으로 쌓아올린 하늘 닿은 저 꼭지
터지면 샘물 솟을 융기의 저 내밀
누구가 저기를 올라갈까
손 씻고 발 씻고 넋을 마저 씻고서도
그대 아니 가슴 열면 기웃 조차 할 수 없는
정해라 펄펄 오는 꽃의 사태 그 너머
희디 하얀 저 봉우리를 누구가 올라갈까
-「유방」전문
박두진의 강의 노트(박두진의 생애와 문학. 박영주 저)에서 혜산은 “이 시는 인간 육체의 일부를 대유함으로써 초인간적인 미적 진실을 다룬 작품으로, 인간의 신체구조 중 가장 따뜻함을 갖추고 있는 부분을 환기시키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진 지고지순한 순결과 꿈을 노래하고 있다.”고 했다. 같은 책에서 신대철의 논문을 빌어“수석이 갖고 있는 특정적인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살려 유방을 산으로 비유하고 있으며, 이런 비유는 수석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질감과 거기에서 비롯한 자연미가 아니면 얻기 어려운 것이며, 수석이 아니고서는 시의 소재로 다루어지기조차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방 한편에는 혜산이 직접 쓴 열 폭 병풍이 있다. 그 분의 서예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고 한다. 혜산은 천 여 편이 넘는 시를 쓰면서, 수석을 모으면서, 서예를 하면서, 등산을 하면서 참 바쁘게 살았다. 남들은 하나도 하기 어려운 일을 몇 가지씩 해 냈고, 그것도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는 경지에 도달했다. 자료실을 둘러보면서, 혜산은 허튼 일에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으며, 얼마나 자신에게 충실한 삶의 의지를 실천하였는가가 느껴진다. 사실 혜산의 어느 자료를 보아도 그의 학력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자료실 벽에 붙어있는 사진 어디에도 교모를 쓰거나 교복입고 찍은 사진이 없다.
혜산이 시를 쓰게 된 계기도 누구에게 특별히 시작을 배운 것이 아니라, 청주 제사공장에 다니던 누나가 삼일 걸이로 편지를 보내왔고, 때로기독교인이 되도록 권면도 하였다. 이 편지 답장을 매일같이 쓰다가, 좀 더 아름답게 신선하게 편지를 쓰려고 노력하다보니 자연스레 시를 쓰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혜산의 생애에 시와 종교를 심어준 누나는 젊고 아름다운 꽃잎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떨어지고 말았다.(혜산은 누나에 대해선 그 어떤 시어로도 그 마음을 표현 할 길이 없어 단 한편의 시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해산은 혼자 공부를 한 것이다. 독학으로 시를 쓰면서 대학의 교수(연세대, 이화여대 등)가 된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삶인가가 피부에 스며든다.
자료실 한쪽 벽에는, 서강대 명예교수인 박철희 문학평론가가 혜산 박두진 시인의 삶과 시세계를 정리해 놓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선생의 시는 자연에 대한 순수한 감각의 기쁨에서 출발하여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신을 동일 시 하는 것으로 귀착했다. 선생의 초기 시는 자연을 도덕적 차원으로 일원화 하여 관조적이기 보다 감각적으로 노래했으며,‘산’과 ‘해’에서 생명과 정열을 노래하고, 절망의 골짜기에서 동트는‘환희’를 노래했다.
선생의 중기 시는 6.25동족상잔의 비극과 4.19 소용돌이 체험에서「거미와 성좌」「인간 밀림」같은 현실시를,「포옹무한」「사도행전」과 같은 신앙시를 그리고 후기 들어「수석열전」「수석연가」와 같이 시원적 생명력인 수석을 상대성으로 노래했다.
말기 들어, 시집 『빙벽을 깨다』『폭양에 무릎을 꿇고』『당신의 사랑 앞에(유고시집)』에서는, 절대적 존재를 찾아 헤매는 이상주의자도, 목소리 높은 지사 시인도 아니고, 자연과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진실에 있으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삶을 사는 우리사이에 있었다.
선생은 단연코 우리시대의 대인이다. 정의로운 실천에 과감하고 불의에 추상같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한국시단의 대표적인 예언자적 지성이다. 선생은 30년대 이래 그 누구보다 가장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정치적 상황에 비판적 반응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러나 그 반응은 정치적이라기보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래서 그 비판적 반응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초기시편부터 선생의 시는 현실정치나 사회상황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해방 2개월 앞둔 일제 말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일제의 패망을 예언한 시가「어서 너는 오라」가 아닌가. 더구나「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등과 같이 60년 이래 독재에의 묵비적 저항은 그 무엇보다도 뜨거웠다. 실제로 선생은‘70년대엔 한․일 협정에 반대해 지식인들이 분연히 일어날 것을 호소했고, 유신치하에 김지하가 구속 되었을 때 법정에서 그 부당함을 설파하기도 하였다.
<박두진 자료실>을 나와 혜산이 때로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가로이 머무르던 안성시 금광면 <박두진 집필실>을 찾아간다. 금광저수지 옆으로 난 포장길을 따라가다 보니, 4백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오흥리 동네가 나온다. 느티나무 옆에 <박두진 집필실>로 올라가는 길 안내판이 있다.
넓은 사갑들에 논물을 채워주는 저 큰 저수지의 조망이 좋아서였는지, 4백년 된 느티나무 그늘이 좋아서였는지 혜산은 이곳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 맨 끝에 글 쓰는 쉼터를 마련했다.집필실 입구에는 까만 대리석바탕에 흰 글씨로 새겨진 조그마한 표석이 있다.《시인 혜산 박두진/ 1916-1998/ 안성 출생/ 대표작 : 청록집, 해, 오도, 거미와 성좌, 일간 밀림, 수석열전 등 50여 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표석에 적혀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은 대부분의 박두진 시인 자료 속에는 빠져있으며 일부 자료에만 포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박두진 교수의 제자며, 댁을 스스럼없이 드나들던 사진계의 거장 육명심 교수는 사진집『문인의 초상』에서“박두진 시인의 집을 찾아간 그날, 예술원장인 박종화 소설가로부터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하였다는 전화가 걸려왔는데, 시인은 즉석에서 이를 거절했다.”고, 또 “청와대 육영수 여사가 박두진 시인에게 문학수업을 받고 싶다고 여비서를 통해 연락해 왔으나 시인은 정면으로 거절했다.” 며,“박두진 시인은 세상 명리에 이처럼 깨끗하고 올곧게 세상을 살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꽤 넓은 마당에는 크고 작은 수석들이 즐비하고, 울타리엔 좀 마른 듯 한 시누대가 바람에 서걱서걱 소리를 낸다. 방 두 칸, 부엌 한 칸 정도의 작고 아담한 규모다. 발코니에는 혜산이 앉아 쉬던 것일 수도 있는 낡은 등가구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살지 않은 빈집이다.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간은 녹 쓸고, 추녀에는 고드름이 하얗게 달려있다. 특히 겨울철이라 을씨년스럽기가 더 하다. 유리 창문을 통하여 안을 들어다 보니 자료가 도서관에 있는 <박두진 자료실>로 옮겨진 탓인지 안에도 허전하기는 매 한가지다.
혜산 집필실을 둘러보고 나오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얼마나 허허로운지를 느끼게 한다. 좋든 나쁘던 집도 사람도 사람과 비벼대며 살아가야 한다. 빈 집을 개인이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적어도 우리 시사(詩史)에 영원히 기록될 청록파의 한 사람인 박두진 시인이 손수 집을 짓고 글을 쓰던 곳이라면, 안성시에서는 원형이 상하지 않도록 보존 관리하여야 할 것이다. 문학관을 새로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집을 잘 관리해 달라는 당부를 하고 싶은 것이다.
끝으로 혜산의 묘소를 찾아보고 싶었다. 보개 도서관의 시비「고향」에는‘엷은 가을 볕 아래 산딸기 빨갛게 피어있는 그러나 푸른 새 한 마리도 와서 울지 않는 외로운 아버지 묘 앞에, 석죽이랑 산꽃 한 묶음 꺾어다 놓고 반나절을 목 메이며, 어쩌면 자신도 와서 묻힐 기슭에서 뜬구름 바라보며 마음 호젓해 한다.’는 시 구절이 있다. 혜산은 지금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안성 문인협회에 박두진 시인의 묘를 전화로 물었다. 향교 쪽에서는 한 시간 산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중간 중간 '박두진 묘' 안내표지가 있고, 기좌리 쪽에서는 30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묘가 나오는데 안내표지가 없다고 한다. 시간도 넉넉하지 않고, 기좌리에 가서 동네 사람에게 물으면 올라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겠지 생각하면서 기좌리 쪽을 택했다. 그러나 막상 동네에 도착하니 집은 있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다. 한참 만에 겨우 한 사람을 만나 물었더니 동네 뒤에 전봇대 선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고 한다.
카메라만 메고 산길을 오른다. 높이 오를수록 눈은 더 많이 쌓여있고 나중에는 사람 발자국이 아이에 없다, 30분만 오르면 묘가 있다 하더니 40분이 지났는데도 그냥 눈 산을 해맬 뿐이다. 산길을 잘못 들어 선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오후 4시가 지났다. 산 중턱에 조그만 암자 같은 집 한 체가 눈에 들어온다. 산속에서 집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가까이 가 보니 인기척이 없다. 문고리는 밖으로 걸려있어 잡아당기면 문이 열릴 것 같다.문을 열면 무언가가 확 튀어나올 것 같은 생각이 스쳐 머리끝이 선듯하다.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고적한 산속에, 하얀 산과 빈 암자와 묘를 찾으려는 나만이 대면하고 있다.
이쯤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것도, 산을 더 오르는 것도 접는다. 암자 마당에 서서 박두진 시인의 시 <묘지송>을 낭송하는 것으로 성묘를 대신한다. 할미꽃이 피면 우리 문우 일행과 함께 다시 찾기로 하고…….
북망 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살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 <묘지송> 전문
글/사진 이 규 봉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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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시인하면, 박두진 선생이라는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가사와 유투브 화면을 넣었습니다.
한 번 들어보면서 박두진 시인의 내용을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