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번째 시집 낸 구순 시인 김남조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 변함 없어 시가 솟아나는 한 계속 쓰겠다”


구순(九旬)이라는 생물학적 나이는 그를 비껴갔다. 세월의 그늘은 시에 잠시 머물 뿐, 시인 스스로 썼듯 “만년의 으스름 저문 날을 살면서도, 보고 느끼고 깨닫고 감동하는 바에서는 변함이 없다.” 김남조(90) 시인은 18번째 시집 『충만한 사랑』(열화당)을 내면서 시간 안에서 유한자(有限者)로 살아가는 인간의 길을 묵상한다.


“그대의 나이 구십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시계가 나에게 묻는다/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에서)
 
제목 그대로 시인의 일생은 ‘충만한 사랑’에 바쳐졌다. 1953년 펴낸 첫 시집 『목숨』으로부터 『사랑 초서』 『사랑하리 사랑하라』에 이르기까지 그가 자신에게 내린 지상명령은 ‘사랑과 시’였다. 초기 시편이 생명 사랑에 맞춰졌다면 후기로 갈수록 종교적 구원을 명상하는 희원(希願)의 색채가 짙어진다. 26일 양력 생일에 맞춰 출간된 새 시집을 받아든 김 시인은 “편집과 장정 등 완벽을 넘어선 책 형태에 감동받았다”고 흡족한 마음을 거푸 표현했다.
 
이날 조촐한 생일잔치를 겸한 시집 봉정식에서 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이 소식을 들으면 다른 출판사에서 질투할까 걱정된다”며 “책 만드는 과정 전체가 배움의 기회가 된 우리 식구들 복”이라고 기뻐했다. 이 대표는 “문학은 결국 책으로 완성되는 운명인데 요즘은 책의 가치를 폄훼하고 허비하며 쓰레기로 치부하는 일이 많아 슬프지만 『충만한 사랑』이 그 고귀함을 증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연 숙대 석좌교수는 “김남조 선생님은 순교와 장수가 한 사람에게서 이뤄지는 희귀한 예”라고 축하했다. 김 교수는 “사람의 보물이 사랑임을 되새기게 한 이 시집은 담긴 시 가운데 한 편의 제목처럼 ‘완전범죄’”라고 설명했다. 
 


김 시인은 “90년 살면서 내가 가장 사랑한 이는 예수이지만 순교는 신비의 경지”라며 스스로 고른 시 ‘순교’를 낭송했다. “예수님께서/ 순교현장의 순교자들을 보시다가/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를 모른다고 해라/ 고통을 못 참겠다고 해라/ 살고 싶다고 해라// 나의 고통이 부족했다면/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련다고 전해라.”
 
그는 자작시에 대한 해설을 들려줬다. 나이 구십이 되니 예수의 순교가 어떤 의미인지 눈이 뜨인다고 했다. 만 명이 죽을 때 예수도 그 곁에서 만 번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몇 십 년, 몇 백 년 키운 시의 싹은 인간이 받은 은총을 발굴할수록 더 실하게 꽃핀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한국시인협회장인 최동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시의 사랑, 인간의 사랑, 이성의 사랑은 하나라는 것을 충격적으로 가르쳐준 시인의 믿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십 년 전에는 교만하게도 이제는 남의 좋은 시를 읽는 이로 남아야겠다고 했어요. 근데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더 솟아나면 쓰겠습니다. 삶의 의미심장함과 응답자의 감개무량, 더디게 익어가는 인생관 이 모두 오묘한 축복입니다. 가능하다면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싶어요.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리라 믿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시계가 말한다, 그대 나이 구십이라고 … 내가 답한다, 또 한권 시집 펴낼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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