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문-
어머니 소천 3주기에 부처
엄마, 어머니 날이지만 어머닐 불러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그리움으로 가슴 깊이 당신을 되새겨 봅니다.
어머니, 올해도 벌써 오월입니다. 어머니께선 제게 늘 말씀하셨지요. ‘50대는 50마일로 달리고, 60대엔 60마일로 달린다’라고. 늦게 결혼하여 아이 또한 늦은 나이에 낳았기에, 세월을 늘 아끼라고 하셨지요. 싱그러운 오월의 향기 속에 그 말씀이 오늘은 특별히 가슴으로 물결쳐 옵니다. 엊그제 핏덩이였던 막내가 6학년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천명 고지에 있네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43세에 막내를 낳았을 때, 금방 50, 60 된다며 “아이들이 클때 까지 기다린다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니”라고 걱정 반 근심 반으로 그리 말씀하셨지요. 어머니의 말씀대로 어느새 십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아이들은 커가고 있지만,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더 할 수 없네요.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더 중요하다 싶어, 몸이 여러 개 있어도 힘에 겨운 것을 느껴봅니다. 어머니께선 그 연약한 몸으로 저희가 탈선 하지 않기 위해 금식으로 기도하시며, 저희를 키우셨던 그 모습!!... 뇌리 속에 파노라마 되어 스쳐 오고 있어. 시 한 편을 기억해 봅니다.
새벽녘 돌담길 옆/희망의 날개 아래/은줄기타고 온/맑은 종소리//
엄마의 기도가/잠 못 이루는/밤 되어질 때//자식은/엄마의 희망 되었고/
엄마는 자식 섬김에/그저 기쁘다//자식이/엄마의 희망 되어/꿀 따 왔을 때//
희망이 샘물가 되어/목축이고/엄마는 조롱박으로/생수 나누네//
=본인의 졸시 엄마의 희망/=
어머니, 올해는 유독 봄에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어머니의 한 많은 세월이 눈물로 대변하듯 그렇게 느껴 지는 빗줄기입니다. 하지만 들판에는 그 봄비로 초록 물결이 봄 햇살 속에 반짝이네요.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로 저희는 무탈하게 자라왔지만, 어머닌 금식의 후유증으로 훗날 미국에 오셔서 위를 늘려야 하는 고통의 대가를 받으셔야 했으니까요.
어머니, 오월의 향그럼이 아파트 앞 가로수에 심어진 나무에서 보랏물결 흩날려 자카란다의 계절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자카란다의 꽃말 ‘화사한 행복’처럼 어머니의 기도로 행복을 주 안에서 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보랏빛 짙은 푸르름이 가슴에 젖어오는 구슬픔은 살아생전 저희 육 남매를 위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이라 싶어 저의 눈썹에 맺혀오는 그리움이라 싶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는 맛볼 수 없기에. 오월의 길섶에 자카란다의 보랏빛 푸름의 물결이 슬픔으로 가슴에 물결쳐 오는 것을 느껴 봅니다.
자카란다의 보랏빛 푸르름의 구슬픔은 아마도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5,000달러 이상을 손해 보면서 두 아파트를 접고,어머니가 사시는 근처를 선택하여 이사 왔는데 2개월도 안 되어 어머니께서는 하늘나라로 소천하셨기 때문이라 싶네요. 하지만 이사 와서 어느 날 아파트 옆 가로수에 피어난 자카란다를 처음 눈이 집어낸 순간, 이민 온 지 15년의 세월 속에 처음 발견한 꽃은 화사한 행복을 선사해주는 선물과도 같았답니다. 그때는 보랏빛 향그러움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어머니께서는 그 후 자카란다꽃이 만발하여 흩날릴 때 소천하셨기에. 지금은 자카란다 꽃 향기가 휘날릴 때면, 어머니의 사랑과 신앙을 기억하며 ‘화사한 행복’을 주안에서 누리길 소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이순을 앞에 두고 있어 곧 60마일로 달린 답니다. 그래서 그런 까닭인지. 그 옛날로 돌아가 어머니 품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응석 부리고 싶고, 투정도 해보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
엄마, 오늘은 옛날로 돌아가 푸념해야겠어요. 살아생전 엄마의 사랑은 늘 막내가 차지했던 기억입니다. 동생과는 6살 차이라서 다행히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었기에 질투한 적은 없었지요. 하지만 제가 셋째 딸이라서 그런지. 샌드위치였던 기억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늘 불만이었지요. 오빠와의 사이에서는 무조건 엄마는 오빠 편이었고, 막내와 저 사이에서는 동생이 어리다고 동생 편이셨기에 엄마가 뿔난 것이 아니라, 제가 뿔나 밥도 안 먹고 이불 뒤집어쓰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기억입니다.
엄마, 하지만 그것이 한번은 아니었다 싶어 얼마나 그런 행동이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아이들을 키우면서 깨닫습니다. 그 당시에는 편애 한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해 갑니다. 동생은 고집이 세! 별명이 왕초였으니까요. 제 아들 막내도 동생하고 비슷해 왕초가 따로 없다 싶어, 지금도 고민하고 있네요. 큰아들은 막내와 달리 자기 앞가림 잘하고 순종 잘해. 늘 감사한 마음으로 자연히 뭐든 잘 하는 큰아들만 시키고 의지했는데, 사춘기가 되더니 어느 날 동생과 비교하며 절규하는 모습에 비로소 이해되었네요.
“왜 내게만! 왜 내게만! 그리하냐.”라고 갑자기 폭발하는 큰 아들의 절규로, 그제서야 오해에서 삼해를 빼며, 어린시절의 제 모습이 발견되면서 엄마가 저에게 행하신 것들에 대해 ‘아하 엄마도 이런 마음 이셨겠구나.’ 제가 큰 아들을 의지했던 것처럼요. 엄마, 하지만 그후 엄마를 이해했으나 혹여 저처럼 아직 아들이 어리기에 깨닫지 못할까봐 큰 아들편에 서서 “너를 믿으니 그런거야”라고 다독입니다.
엄마, 요즈음 큰 아이가 커가면서 시기가 사춘기라서인지 빗나가는 모습에. 엄마는 육남매를 어찌 기르셨는지요. 엄마가 위대 하다 싶어 다시 생각해 보며, 어머니께서 소천하시기 일 년 전 제가 아이들로 힘들었을 때 “네가 뿌린 것이니, 네가 잘 거둬라. 그것이 네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그 뜻을 생각해 보며, 그 옛날 제게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신 모습을 기억해 보며 반성해 봅니다.
엄마, 언제부턴가 제 아이들의 아침을 학교에서 해결하게 했던 것 같아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닌 제가 늘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섬기셨습니다. 하물며 회사에 다닐 때도 친구 만나 밤늦게 와도 늘 저녁상을 상전 받들 듯 차려주시며 섬기시던 기억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그 정성에 한 번도 거절 못 하고 저녁을 거르지 않고 먹었던 기억입니다. 결국, 저녁을 두 번씩 먹게 된 셈이었지요.
어머니, 나의 어머니! 김소월의 시 [초혼]처럼 다시는 이생에서 불러보지 못할 나의 어머니, 이 시간 가슴으로 어머니의 사랑 깊이 느껴봅니다. 또한, 살아생전 어머니의 사랑과 섬김을 생각해 보는 오월의 길섶에서 다시 한번 불러봅니다. 이다음에 이생을 마감한 후 내 아이들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엄마인 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사랑과 섬김의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하렵니다. 큰아들이 벌써 고등학교를 입학할 나이가 되었고, 막내가 중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그래서 그런지 한여름 날의 소낙비가 산줄기를 따라 강물이 되어 떠내려가던 물살처럼 세월의 빠름을 다시 느끼고 있네요. 이제 저도 내일 모래이면 60마일로 달리는 이순의 문턱. 어머니 말씀대로 다행히 지천명 고지에서 하늘의 뜻 바라보며, 세월 아끼어 아직은 벅차지만, 하늘빛에 따르려는 마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젊은 시절 곁길로 가지 않도록 늘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신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기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살아생전 내 어머니가 되어 주셨기에 감사하며, 오월의 파란 하늘 속에 뭉게구름처럼 웃음꽃 피웁니다. 살아생전에는 한 번도 사랑한다고 드리지 못한 말! 다시 한번 가슴으로 엄마 품 안에 안겨 응석 부리며 “엄마, 사랑해요.” 라고 불러봅니다. 이다음에 하늘나라에서 엄마 만날 때 엄마 딸이어서 결코 부끄러운 인생을 살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엄마! 제 아이들도 신앙으로 잘키우겠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가 내 어머니여서 정말 감사해요.
소천 3주기에 부처
2017년 5월 8일
세쨋딸 영랑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