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코를 닮았다

소설 조회 수 2423 추천 수 3 2015.01.06 14:20:22

 

                                    아빠 코를 닮았다                                       

     
                                                                                                                                                                                        제봉주

 

 허인철은 머리끝이 희끗희끗한 육십을 넘긴 초로의 남자였다. 그는 이마가 넓고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 아래로 송충이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검고 굵은 눈썹이 붙어 있었다. 눈꺼풀이 움직일 때면 마치 송충이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지긋하고 은근한 빛이 유리구슬처럼 맑았다.
 적당한 키에 어깨가 넓은 다부진 체격에다 항상 입술 언저리에 감도는 웃음이 그를 여유로운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부동산 투자에 의한 소득으로 중산층들이 누리는 편안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성격은 약간은 보수적이고 사교적으로는 개방적인 누가 보아도 호감이 가는 그런 듬직한 남자였다.
 그에게 약 이년 전쯤 본처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불행이 찾아왔다. 그의 일상생활에는 많은 어려움과 외로움 등 정신적 시련이 함께 몰려왔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지루함이었고 밤에 대한 일종의 공포와 같은 고독과 적막이었다.
 그는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갈 것을 결심했다. 얼마 전 그는 새 아내 정진숙을 맞아 재혼했다. 그녀는 사십 대의 젊은 나이로 이혼녀가 된 이민 초년생이었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온몸에서는 풋풋하고 싱싱한 초여름 오월의 향기가 풍기는 농익은 여인 이였다.
 새 가정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변화의 바람이 그 가정에 서서히 불어오고 있었다. 그는 얼굴 면도를 하는 날이 많아져 갔다. 그녀는 화려한 넥타이 색깔을 골라 매어 주기도 했다. 구두를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서 내어놓기도 했다. 그녀는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가정을 이끌어 갈 줄 아는 그런 여자였다.
 “오늘은 머리 염색 좀 합시다.” 그는 느닷없는 아내의 말에 놀랐다.
 “머리 염색은 왜요”
 “반백 머리 염색만 해도 십 년은 젊어 보여요.”
 “꼭 염색해야만 되요?” 그는 희끗희끗한 반백 머리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머리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손기술이 좋은데요.”       
 “미장원에서 어깨너머로 배웠어요.” 그녀는 손을 놀리면서 입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는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문득 다른 생각이 났다.
 “무엇이 좋아서 나하고 결혼하게 되었지 말 좀 해봐요.”
 “결혼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면 그만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참 편리하고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십대 초반인 여자가 육십을 넘긴 남자와 재혼한 참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요, 또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건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부부간에 말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당신 짜릿하게 즐거운 시간 만족하고 있으면 됐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신도 즐겁게 지냈을 터인데요.” 그는 농담조로 받아넘겼다. 그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고 얼굴에는 상냥한 웃음으로 애교를 보내는 것은 새로운 삶의 변화를 미리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까맣게 변해 갈 때마다 그가 평생 쌓아온 하얀 자존심이 까만 여울 물속으로 사라져 가는 안타까움이 쌓여 갔다.
  “ 이젠 다 되었어요, 이십 분쯤 기다리다 샤워하세요.” 샤워하고 나오는 그의 손을 그녀는 잡고 끌었다.
  “뭐 또 할 게 있어요.”
“ 있지요. 너무도 젊어 보여 멋이 넘쳐요, 수고의 값을 기차놀이로.” 그게 뭔데 하고 그는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던 차 안에서 물었지요, 어제저녁 칙칙폭폭 기차놀이 어땠느냐고요.” 그러는 그녀에게 이끌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행실이 야하거나 음란하거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눈꼬리에 야함과 애교가 한데 어울려 묘한 반응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런 것이 늙어가는 그의 부부 생활에 회춘이라는 양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물론 본능적인 유혹이라고 해도 좋았다. 당하지 않으면 당하고 싶고, 당하고 나면 외설적인 여운이 남게 되고, 어쨌거나 쾌락이 넘치는 세상 속으로 빠져드는 기차놀이를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즐기며 살아가야 했다. 그것이 행복했으니까.
 그는 아내를 품은 흐뭇한 성취감에 아득한 지난날의 깊은 향수에 빠져들었다. 옛날 그가 살던 시골마을 앞을 지나가는 증기 기관차는 아침이면 하얀 수증기를 품어 내면서 칙칙폭폭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갔다. 오르막길 끝에는 터널이 있었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갈 때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듯이 기적을 길게 울렸다. 그의 목에서도 기적 같은 비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터널에서 빠져나온 기차는 숨을 고르듯이 다시금 기적을 울렸다. 뚜-뚜, 그녀의 입에서도 흐느낌 같은 신음이 기적과 함께 어울려져서 그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이런 기차놀이가 그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랑놀이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매일 밥상이 다채로워져 갔다. 그녀는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양파를 썰고 여러 가지 야생 버섯을 올리브기름에 지글지글 복고 그러면서 음식 하기를 좋아했다. 전복죽에 생굴이 밥상 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식탁에 앉아 맛있게 먹는 것을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런 순간을 즐기고 좋아했다.
 “요즘 밥상 메뉴가 매일매일 다양해져 가는데 웬일이지요.”
 “당신을 위해서요.”
 “나를 위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요.”
 “당신 정력에 좋다는 보양 식단으로 바꿔 가는 중입니다.”
 “내 정력에 좋은 식단으로 바꿔간다, 그러면 결국은 기차놀이 때문이네요.”
 “당신 건강과 정력 기차놀이 그 모든 것을 위해서요.”
 “당신 왜 기차놀이에 그렇게 집착해요, 이유를 좀 압시다.”
 “몰라도 돼요.”
 “알고 싶은데요.”
 “씨를 받을 때까지는 계속 될 거예요.”
 “씨를 받는다.” 그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결혼하면서 아이 생각은 꿈에서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씨받이 생각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이 나이에 무슨 씨를 받는다고 그래요, 이렇게 조촐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는 행복하고 좋아요.”
 “나는 아직 젊어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단둘이 서로 사랑하며 오손도손 살아가면 어때요.”
 “우리 사이에 늦둥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녀의 대답에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완고했고 조금도 그 뜻을 굽힐 것 같지는 않았다. 늦둥이 아이를 가진다. 그 뜻은 갸륵하지만, 그것이 생각대로 뜻이 이루어질까, 꿈같은 이야기였다. 씨를 받아 고추를 따서 혈통의 대를 이어간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정말 그의 평생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딸만 둘 이였는데 다 출가하였으니 그의 대를 이어갈 아들이 없어 항상 허전하고 조상께 죄스러운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 깔렸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었다. 또한, 그는 장 남 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적극 초조하게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 되었다.
 “당신 뜻은 갸륵하지만 이쯤 해서 씨받이 타령은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요.”
 “왜요. 나는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두꺼비 같은 아들 낳아서 당신 딸들 앞에 대를 이어갈 아들 엄마로서 떳떳하게 살아야지요.”
 대를 이어갈 아들 엄마, 그래야만 당신이 내 가정의 주인으로서 상속권을 잡고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가장 안전하고 가장 떳떳한 삶을 살아갈 발판을 마련한다는 것 그에게는 나쁠 것이 없었다. 그가 미처 몰랐지만, 그녀는 그런 꿈을 가지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을 확실히 이루겠다는 확신도 보였다. 나이나 신체적인 조건도, 그런 욕심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여자였다.
 꿈같은 일이지만 그의 혈통을 이어갈 아들이 그녀에게 생긴다면 그것은 경사요, 축복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그럴 수 없는 신체적인 처지에 있었다. 그는 캄캄한 미로를 헤매는 좌절감에 젖어 들어갔다.
 그의 신체적인 비밀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와 죽은 본처와 정관 수술 담당의사 세 사람뿐이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대로 침묵하고 있으면 그의 가정은 매월 같은 방법으로 보양 음식 시험장이 되어 갈 것이고 그녀의 극성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은 실망하고 좌절하게 될 것이었다. 그다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어떠한 방법이든 돌파구를 찾아서 그녀를 설득해야 했다. 뒤탈 없이 이 고비를 넘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항상 일찍 잠자리에 드는 편이어서 그날 밤도 열 시를 조금 지나서 침대로 들어가 일찍 잠이 들었다. 아내는 늦게 이불 속으로 들어와서 잠을 깨웠다.
 “왜 이래. 잠자는 사람 깨우고.”
 “잠만 자면 어떻게 해요, 지금이 그때란 말 이예요.”
 “때는 무슨 때 밤에 잠을 자야지 그러면 무얼 해.” 짐짓 모르는 척 하는 그의 가슴속으로 그녀는 파고들었다.
 “여보, 당신은 씨를 받을 수가 없어, 나는 씨 없는 수박이란 말이야.” 나는 생각하고 고민하든 말을 했다.
“ 씨 없는 수박이면 어때요, 나는 고추씨만 받으면 되는데요.”
 “여보. 내가 말을 잘 못했구먼. 씨 없는 고추란 말이야.”
 “씨 없는 고추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그는 헛기침하고 그녀를 가슴에 품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죽은 본처의 건강 때문에 정관 수술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가 지난 다음 그의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왜 결혼 전에 그런 이야기는 아니 했어요, 말 좀 해요 왜 말 못 해요.” 그녀는 흐느끼면서 넋두리를 하고 울부짖었다.
 “미안해 여보, 결혼 전에 그런 이야기 할 수 없지 않아,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무엇보다도 이 나이에 자식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이대로 편안하고 좋아, 만일을 위해서 당신 여생을 생각해 생명보험 수취인을 당신 이름으로 되어있으니 여생은 걱정 없을 거야, 여보 미안해.”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순간 기대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탈한 그 심정. 모든 꿈이 심해의 파도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들어 가는 것을 보는 그 마음, 어찌 울부짖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가 지난 후에 그녀는 이불을 둘 둘 말아 몸에 감고는 침대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누웠다.
 “여보 침대 위에서 편히 잠을 자, 정 그럴 수 없으면 내가 다른 방으로 갈 테니까.” 그는 다른 방으로 가서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고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절벽 속에 갇히어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애절한 소원을 뿌리째 뽑아버린 피할 수 없는 수치심과 자책감, 당혹스러움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 오고 있었다.
 몇 날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싸늘하고 참기 어렵고 지겨운 기운만이 집안에 가득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누군들 이런 일 앞에서는 고민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을 위한 위로도 해보았지만, 눈을 감으면 큰 여행용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이대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그를 조여 왔다.
 그가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벌써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접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삶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면서 그동안 살아왔다는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관습에 젖은 세상 인심과 흐름을 외면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와 그녀 생각 사이에는 너무도 높은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재혼이라는 굴레 속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야 당황하고 흥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좀 더 냉정해져야 했다. 그녀의 행동에 저항할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 순간만은 그녀의 뜻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어느 날, 그는 아침 일찍 옛날 본처가 살아 있을 때 다니던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갔다. 운전 중에 웬일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기적이라는 기대 감, 원초적인 종에 대한 본능 같은 것이 그를 들뜨게 했다. 가벼운 흥분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의도가, 불손하다면 불손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는 음모적인 소원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오히려 그로 하여금 새로운 자식에 대한 원초적인 동기를 발견하고 가능성을 자극했다. 어쨌거나 지금 그가 솔선해서 병원을 행해서 들뜬 기분으로 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의사와 마주앉은 그는 재혼한 아내와의 요즘 관계를 이야기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의사는 아주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요즘 젊은 여자들은 아이 가지기를 싫어하는데 임신하기를 원한다면 오히려 행운이라고 말했다. 부인이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동의한다면 확실한 인공수정 임신을 권장하고 싶다고 했다. 정관 재수 술은 오랜 지난 세월과 노령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 는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 식사 후에 착잡하게 가라앉아 비애가 섞인 마음으로 아내와 마주 앉았다.
 “여보. 맥주 생각이 나는데.”하고는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당신 집에서는 맥주 안 마시면서. 오늘은 웬일이세요.” 아내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오늘따라 맥주 생각이 나는데.” 그녀는 맥주병을 따서 술잔에 따랐다.
 “당신도 한잔하지.” 그는 맥주잔을 입으로 가지고 가면서 그녀의 애잔한 눈길을 보았다. 순간 그의 생각 속에는 달갑지 않은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젊디젊은 그녀가 혼자만이 품고 있는 숨겨진 꿈을 안고 나이가 든 그에게 인생도박을 했지만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나 이제 진퇴양난에 몰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보, 실망할 것 없어 뚜드리면 문은 열리는 거야.” 그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을 시작했다.
 “문이 열려요, 어떤 문이 어떻게 열려요.”
 “열쇠가 있으니까.”
 “어떤 열쇠인데요.” 그녀는 되물었다. 그는 빈 맥주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잔을 채우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인공수정이란 이야기 들어 보았어요, 당신만 좋다면 나는 대환영이야, 오늘 산부인과 의사와 의논도 했으니까.” 애원조로 말하고 있는 그는 비참하고 서글픈 마음이 가슴 밑으로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여보. 이것은 당신과 나 사이 그리고 담당의사와 합의되면 비밀도 보장돼.” 그녀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어찌 이 자리에서 즉답할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침묵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아들 없이 딸만 둘 키워서 시집보낸 후에 그 허전했던 세월을 생각했다. 왜 허전하고 인생 헛살아온 것 같은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까. 그 진실 된 속내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설령 임신에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축복을 받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아내를 데리고 산부인과 병원으로 갔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의견에 동조해왔다. 첫날은 의사와의 간단한 상담으로 끝났다. 그들의 의견이 일치되면 정식으로 진찰을 받고 세부적인 계획에 착수하기로 했다. 의사는 부인께서 출산경험이 있고 건강상태가 양호한 편이므로 배란 검사를 통해서 이상이 없으면 모든 순서가 간단하고 비용도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요즘 부엌일은 거의 도맡아 하는 편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불행하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마냥 즐거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아내가 임신 삼 개월째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사 개월 전 산부인과를 계속해서 드나들었고 그 결과 임신에 성공했다. 그리고 사 개월이 지난 얼마 전 건강한 태아의 발육 상태를 확인했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의사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너무 놀라서 잘못들은 것이 아닐까 하고 의사에게 재차 묻기도 했다.
 시술을 끝내고 병원을 드나들 때부터는 일절 부엌일은 그가 도맡아 해오는 중이었다. 그는 임신 후 그녀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다 누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것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헤아려 보았다. 그는 결코 사랑을 과장하거나 형식과 선심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행하는 모든 것이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아이의 생각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 가고 있는 불룩해지는 아내의 배 그 배를 쓰다듬고 앉아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이 모든 것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보. 산책 시간이야.” 아내의 손을 잡고 산책하러 나갔다.
 “여보. 고마워요, 당신 힘들지요.” 그녀는 진정어린 눈길을 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힘들긴, 요즘 힘이 넘쳐.” 그러면서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보, 미안해요.” 그녀 역시 손에 힘을 주면서 응답했다.
 “뭐가, 미안해.” 그가 물었다.
“ 당신 요즘 힘이 넘친다면서요.”
 “그저 해본 소리야, 신경 쓸 것 없어요.”
 “내가 요즘 당신한테 많이 무관심해서요.”
 “별소릴, 나야 괜찮아요, 당신 건강이나 챙겨요.” 그들은 손을 잡고 계속 걸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벌써 낮잠 잘 시간이야.”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는 불러 오는 아내의 배를 만져 보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솟아났다. 그는 아내가 앉아있는 옆에 가서 앉았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배를 만지면서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길에는 아늑한 아침 안개가 걷힌 뒤 비치는 아침 햇살 같은 맑은 웃음이 깃들고 있었다. 그는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도톰한 뱃살 위에 머물 때 뜨거운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아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뜨거운 입술을 받아 드렸다. 그들은 즐거운 꿈속으로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한 쌍의 백조가 되어 새로운 여행길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배속에 있는 새 생명을 생각한다면 그가 행하고 있는 이 정도의 사랑과 희생은 그녀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본처와 결혼 후 첫아이를 가졌을 때보다 오히려 더 흥분되고 들뜬 기분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아들이라니 그의 혈통을 이어갈 아들이라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는 지금 수많은 자손을 만대로 이어가면서 번식하도록 선택받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와는 어디인가 닮은 데가 있을 거야, 아마 코가 닮지 않을까. 귀가 닮을 수도 있을 거야. 아이의 삶 속에는 그의 천성이 어떤 모양이든지 잠재되어 진화되어 갈 것으로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여보, 오늘 저녁은 무엇으로 해야지. 임신 사 개월째 음식이 무엇이 좋은지, 병원에서 알려준 메뉴를 한번 봐요.” 그는 소파에 앉아 육아 책을 들고 음악을 듣고 있는 아내를 보고 물었다. 이렇게 매일 먹을 음식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는 문득 얼마 전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그의 정력을 위해서 보양 음식을 챙기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지금은 그가 그녀의 임신 중 음식을 묻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은 살 아가는 삶의 모양마저 변화시켜 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날이 갈수록 아내의 배는 점점 불러갔다. 태아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수심이랄 수 있는 엷은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웬일일까. 배속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가고 있고 그것도 그렇게 원하던 아들이라는데 마냥 기쁘고 행복에 겨워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 후유증이 늦게 찾아왔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웬일일까에 대해 의문의 날개가 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으로 생각했다. 표정은 마음의 거울이 아닌가. 그 마음속에 어두운 그늘이 있다면 아이의 정서가 영글어 가는 이때에 저런 그림자가 드리워 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마주앉았다.
 “요즘 당신 무엇인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이야기 좀 해 봅시다, 당신 그런 기분으로 있으면 태아에게도 해로워요.” 하고 말을 시작했다.
 “해로우면 어때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녀의 말은 쌀쌀했다. 그는 멈칫했다. 그녀가 말하기를 꺼린다면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말하니 그가 물러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분명 무엇인가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기는 한데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당신은 내가 이야기해도 진정한 내 마음은 몰라 줄 거요 그러니 다시는 묻지 마세요.” 그녀는 쌀쌀하게 말했다.
“여보, 나는 당신 남편이야, 그리고 아이 아빠야, 당신의 마음을 알아야겠어, 진지하게 들을 용의가 되어있어, 그러니 모든 것 털어놓고 이야기해요.”
 “당신 뭐라고 했어요, 아이 아빠라고요, 당신이 아이 아빠라고요, 어째서 당신이 아이 아빠가 될 수 있어요, 나는 지금 그 일 때문에 이렇게 마음에 고통을 참고 살 아 가고 있어요, 배가 불러오는 것만큼 내 고통도 커진다는 말이에요.”
 “ 여보. 내가 아이 아빠가 아니라니, 당신은 엄연히 법적인 내 아내요 아이는 나와 당신의 자식이란 것을 몰라요.”
 “그것은 법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단 말 이예요, 아이를 키워 가면서 평생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겪어야 할 마음의 고통을 당신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러면 아이 아빠가 누구란 말이요.”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것을 왜 나한테 물어요.” 그녀는 말을 이어가고 그는 듣고만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 막말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말이 나올 때까지 그는 행복에 겨워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게 후해 되였다.
 “여보, 그런 막말이 어디 있어요.” 그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하고 큰 소리가 나왔다. 참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흥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이성을 되찾게 했다. 그는 심호흡을 깊숙이 들이마시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밤만 되면 나쁜 생각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혹시 정자를 제공한 사람이 학비에 쪼들려 정자를 팔아 학비를 조달했을까, 또는 노름꾼은 아닐까, 술주정꾼은 아닐까, 전과자는 아닐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고 했다. 앞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젖꼭지를 물릴 때마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보아야 하는 그 고통을 그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 마음을 당신은 모를 것이라고 했다. 꿈속에서도 어떤 사람이 불쑥 찾아와서 내 자식 내놓으라고 아이를 빼앗아 가는 악몽 속에 시달린다고 했다. 아이가 자라서 제 핏줄을 찾겠다고 한다면-.
 “여보, 제발 나 좀 살려줘요,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요.” 그녀는 부르짖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검은 망령 앞에 마주 서서 정면 승부로 칼자루에 손을 대야 했다.
 “당신, 요즘 임신 후유증으로 신경과민인 것 같은데 안정되면 좋아질 거요, 편안한 마음 가지도록 노력해요, 그리고 의사 정신치료도 받아봅시다.”
 “아니 예요, 내가 나쁜 생각으로 당신을 유혹한 탓으로 벌을 받는 것 같아요, 이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당신 재산에 대한 욕심이 탐욕이 나를 이 고통 속으로 끌어들였나 봐요. 제발 나를 살려 주세요, 그리고 나를 용서 하시고, 우리 아이 없었던 것으로 하고 정리하게 해주세요, 평생 고통 속에서 살 수는 없어요.”
“여보, 그런 막말이 어디 있어. 뱃속에 아이가 다 듣고 있단 말이오. 말조심 못해요, 엄마와 자식이라는 천륜을 생각한다면 근원은 어찌 되였건 이것은 축복이요, 행운이야, 이 모정을 이 축복을 거부할 권리가 당신에게는 없어, 뱃속의 아이는 내 씨란 말이요, 내 씨란 말 안 들려요.”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 당신 씨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내가 잘못들은 것은 아니지요.”
 “맞아요. 잘못들은 것이 아니요. 그 아이는 틀림없는 내 씨가 맞아요.”
 아내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러갔다. 그리고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잊은 것 같았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 십몇 년 전에 본처가 몸이 쇠약해서 임신하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충고를 받았다. 아내가 약한 몸에 계속해서 피임약을 복용할 수도 없고 해서 정관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신 이 알고 있는 그대로 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 의사가 혹시 사람의 경우란 알 수 없기에 건강한 정자를 받아 정자 보관소에 맡겨 냉동 보관해 두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의사는 필요시에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 또는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하는 것도 선한 일일 수 있다는 것, 뜻이 어떠냐고 물어왔기에 그는 별 뜻 없이 그 의견에 동의하고 그의 정자를 보관해 두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그녀의 배 속에 그의 씨가 잉태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가 하는 감사한 마음에서 매일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이라고 했다.
 그녀는 멍청하게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혼란스럽고 믿기지 않고 할 말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허탈한 상태인 것 같았다.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갑자기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왜 미리 말 못 했어요, 왜요-왜요.” 하고 울부짖으면서 그의 가슴에 안겨 와서 흐느끼고 몸부림쳤다. 적막에 잠긴 집안에 차디찬 침묵이 무겁게 깔려 감싸고 있는 그들에게 밝고 환한 한줄기 달빛이 창문 사이로 은은히 비쳐들기 시작했다.
 “미안해 여보, 기회가 되면 말을 할 생각이었지만, 당신 그렇게까지 심각한 고민 속에 있는 줄 몰라서 정말 미안해.”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뱃속으로부터 아이의 꿈틀거리는 생명의 호흡이 그의 가슴속으로 전해오는 울림을 느꼈다. 말할 수 없는 희열에 젖어들었다. 그것은 새 생명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새롭게 자라나는 신호였다.
 “여보, 아이도 기뻐서 꿈틀거리고 있어요.”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댔다.
 “여보, 세상에서 제일 큰 복을 나한테 물려주어 고마워요.”라고 하는 그녀의 눈물 어린 눈을 눈꺼풀이 덮었다.
  “아이는 우리의 재산 나와 당신의 재산이야.” 그는 감격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잔잔하고 편안함이 머물고 있었다. 그 얼굴 위에 깃들고 있는 모정이라는 따뜻한 온기를 느낄 때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그 순간 그는 생생하고 확실한 환상을 보고 있었다. 아내는 풍만한 젖가슴을 보란 듯이 드러내 놓고 젖꼭지를 토실토실한 아이 입에 물리고 손으로 코를 만지면서 ‘어쩌면 아빠 코를 이렇게 쏙 빼닮았지요.’ 하면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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