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를 찍고 가야 할 길

소설 조회 수 2698 추천 수 1 2015.02.14 10:39:55

마침표를 찍고 가야 할 길

                                                                       제봉주

 

송진우는 교회 사택을 박차고 대책 없이 뛰쳐나와 이곳 싱글룸 아파트로 온 지가 벌써 육 개월 정도 흘러갔다. 그간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자리가 잡혀갔다. 그동안 컴퓨터 학원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틈을 내어 막노동도 하였다. 지금은 마음이 안정되고 다음 학기를 위해서 얼마간의 저축도 하고 있었다. 물론 학교는 휴학계를 낸 상태였다. 졸업이 늦어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의 인생목표 지점이 그만큼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그 지점이란 전공분야인 반도체 생산 제어 기술 연구 논문을 끝마치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그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방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뚜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무심하게 문쪽으로 갔다. 이런 낮에 그를 찾아올 사람이 없는 데 누구일까. 방을 잘못 알았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짧은 머리를 한 미모의 백인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는 응급 결에 하이!” 하고 인사를 했다. 백인 아가씨는 송진우가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대답은 했지만 얼떨떨했다. 그리고 약간 뜸을 들인 다음, 누구냐고 물었다. 그녀는 제인 스미스라고 했다. 그는 제인 이란 당신을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물론 자기를 모를 거라고 했다. 그녀는 할 얘기가 좀 있으니 들어가도 괜찮겠냐고 했다. 그는 약간 당황했다.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그를 보면서

아주 철저하시군요, 공학도다운데요.”라고 했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는 사진을 받아들고 찬찬히 훑어보았다. 늠름하게 생긴 멋진 백인 청년이었다. 그러나 한번 본 것도 같은데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사진을 돌려주면서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모를 수도 있겠지요, 혹시 교회 추녀 밑에서 잠을 잤던 노숙자를.”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그때 비로소 샤워 후에 똑똑히 보았던 그 청년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 청년 그 청년을 어떻게 알지요.”

저의 동생입니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청을 받아 드리기로 했다.

그러나 선득 그럴 수가 없었다. 방은 좁고 누추하고 혼자 사는 남자 방에 미모의 백인 여자를 드릴 수가 없었다.

방은 좁고 누추하고 남자 혼자 사는 방인데 괜찮겠어요.” 하고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웃으면서 물론 이지요 허락하신다면, 사는 모습 그대로 보고 싶군요.”

백인 아가씨는 활달하고 명쾌하게 자기 의사 표시가 명확해서 좋았다.

제인 이라고 소개한 아가씨는 거리낌 없이 신발을 신은 채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백인 미녀를 자기 방에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는 엷은 밤색 바지에 엷은 하늘색 줄무늬 셔츠에 밤색 재킷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굽 낮은 밤색 구두를 신고, 손에는 밤색 네모진 서류가방을 단정히 들고 있었다.

그녀는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접이식 침대가 방 한쪽에 있고 책상 겸 조그마한 식탁 겸용 테이블 앞에는 의자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벽 쪽에는 하도 오래되어 닳아서 빛바랜 2인용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소파 앞 탁자에는 랩 탑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냉장고 그리고 싱크대 난로 그게 전부였다. 한쪽 구석에는 두툼한 책들이 벽을 등지고 높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서서 둘러본 다음 그가 권하는 조그마한 식탁 앞에 앉았다.

좁고 누추해서 미안합니다.” 하고 말했다.

왜 그렇게 말하지요,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한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이해해 준다면 고마워요.”

언제나 누구에나 그렇게 겸손한가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이해 못 하겠다는 몸짓을 했다.

그는 커피 두 잔을 뽑아 그녀 앞에 한잔을 놓고 자기 앞에 한잔을 놓고 앉았다. 그리고 자세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니 그녀의 코끝에서 나오는 온기가 그의 얼굴에 닿는 것 같았다. 이십 육칠 세의 미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오셨는지 이야기해 보세요.” 그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눈가에 웃음을 지어가면서 여유롭게 자기의 감정을 실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연구실이나 강의실에서 상대했던 아가씨들하고는 격이 달랐다. 품위가 있었다. 그리고 진지했다. 직업적인 유연한 몸짓을 섞어 가면서 슬슬 흘러가는 이야기가 달콤하게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은 오스틴 텍사스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 이름은 루이스, 엄마는 크리스틴, 동생은 잔, 성은 스미스라고 했다. 아버지는 반도체 생산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그 회사의 영업부서에서 실무자로 일한다고 했다.

오늘 여기 온 것은 가족의 사적인 것 보다는 사업적인 측면이 더 크니까, 그렇게 이해해 주었으면 해요.” 말을 끊은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동생 사진을 들고 왔으면 가족 이야기를 해야지 왜 사업이야기일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러시겠지요.”

미스터 송, 한국에서는 대학 전자공학 전공, 이곳 대학원에서는 반도체 제조에 관한 제어 기술 연구를 하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그런 신상 정보를 어떡해.”

학교에서 알았지요, 그것은 개인 비밀정보가 아닌 공개정보예요, 학교에서는 취업을 위한 홍보용이지요.”

그러면 그 이상도.“

물론이지요. 그리고 학교에 다음 학기 미등록 휴학계 그 정도예요, 그리고 우리 회사 연구 개발비에서 장학금으로 미 등록금 전액 냈습니다.” 그는 놀랐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사업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겠느냐는 뜻일 것이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나는 남의 도움을 받을 만큼 무능한 자가 아닙니다. 즉시 취소하세요.” 그는 그런 보상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고 그런 경제적인 도움으로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강경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정도의 반발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히려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여유로운 대답으로 응수했다.

자존심 상하셨나요, 이것은 개인적인 도움이 아니고 회사 사업적인 거래입니다, 우수 인재 영입이란 회사 이익을 위한 투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회사 이익을 위해서 업무적인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 이해해 주었으면 해요.”

남의 약점을 담보로 잡고 거래하겠다는 발상을 하는 그런 회사라면 댁의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요.” 그는 재차 같은 말을 했다.

지금 학원에 출강하고 있는 줄 압니다, 즉시 사표 내시고 학교로 돌아가시고, 생활비와 기타 필요한 돈은 매월 회사에서 송금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생활비에 대해서는, 연구비가 아니므로 회사 생활비 융자 프로그램에 의해서 서류를 작성하고, 입사 후 오 년간 분할 지불 조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회사에서 요구하는 입사 조건에 사인했을 때 해당합니다, 만일 입사 계약이 성립되지 않을 때도 하등의 불이익은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 일하셔도 분할금만 지급하시면 되니까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놓지 않을 테니까, 내 제의에 동의하시는 게 현명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는 회사입니까. 약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로 보셨네요, 무례하지요, 그 무례가 당신의 행운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 회사나 나한테 감사할 날이 올 거라는 것도 잊지 마세요.”

정말 당돌하고 묘한 아가씨군요.” 그는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상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학교성적 그리고 재정상태 등을 포함한 통상적인 것까지도.

하지만 아가씨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뭔데요.”

물고기는 믿기를 단 낚시만으로는 놓칠 수도 있다는 사실.”

먼저 얘기했지 않아요, 절대로 놓지 지 않을 거라고요, 미끼 이상의 것도 준비되어 있어요.”

어떤 준비물인지 알 수 없을까요.”

낚시 외에 그물도 쳐 두었지요.”

그런 생각 자체가 당신이 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루한 논쟁은 그만두어요, 결과는 미래만이 증명할 테니까요.” 그녀는 입을 닫았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입으로 가지고 갔다. 그녀도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는 싸늘해서 쓴맛이 혓바닥을 훑으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제는 그녀의 동생에 관해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잔은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당시, 아버지는 공대 전자 공학과를 지원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인문대 철학과를 지원했다고 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내 아버지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는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거기서도 어쩐 일인지 적응치 못하고 중도에서 그만두고 얼마 동안 허송세월하다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알콜 중독자가 되어 방탕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거리를 방황하면서 전국을 떠돌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노숙자 수용소, 어떤 때는 상점 담장 밑, 교회 처마 밑 등을 전전하면서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약 육 개월 전 알코올 중독자 치료소에서 집으로 전화해서 중독 치료를 당분간 받고 퇴원하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방황은 끝났다고 했다. 마침표를 찍었으니 가야 할 길을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회사에서 수습사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가 어느 날 아버지에게 마침표를 자기의 손에 잡혀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무엇을 손에 잡혀 주었는가 하고 물었다. 따뜻한 손길 정말 따뜻한 손길 따끈한 커피 한 잔 그것뿐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들이 돌아온 것,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였다. 동생은 그분을 한번 찾아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회사에도 크게 도움을 주게 될 것이고 자기의 생각으로는 괜찮은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교회 이름과 교회주소와 교회 사찰일 것 같다는 것 이외에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녀를 통해서 내막을 알아보게 했다. 그녀는 교회를 통해서 추적하여 오늘 이 자리에 앉았다고 했다. 아직 모르는 것은 미스터 송과 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어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바통은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지나간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진우는 교회 사찰 겸 사무실 도우미로 봉사해 온 지가 일 년 정도 되었다. 그는 이십 대 후반이다. 이곳 유명공대 유학생으로 대학원에서 반도체 생산 제어에 관한 연구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견실하고 건강한 젊은 과학도로서 패기 만만하였다. 그런 패기와 긍지만으로는 학업을 계속해 가기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대로 공부했으면 벌써 연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재정적인 사정으로 휴학계를 내고 학비조달을 해가면서 공부를 계속했기 때문에 늦어졌다.

학교가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었다. 아파트값을 절약하려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교회에서 편의를 봐주어 부속건물인 사택에 방 하나를 얻어 살아가고 있었다. 우선 아파트 비를 절약할 수 있었으니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아르바이트인 컴퓨터 강사 시간 틈을 내어 교회 정원을 손보며 토요일과 일요일은 교회 컴퓨터를 비롯한 모든 자동화 시스템의 관리 등을 도우며, 잡일을 정리하고, 밤이면 교회를 한 바퀴씩 돌아보기도 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다.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돈독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교회 뒤편 추녀 밑에 밤이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었다. 허름한 노숙자가 늦은 시간에 이곳을 찾아와서는 새우잠을 자고, 아침 새벽 기도 시간이 끝나고 뒤돌아 가보면 어디론가 사라져 가고 없었다. 이런 일은 하루도 빠짐없이 얼마간 계속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밤에도 그는 교회 본관 뒤 모퉁이에 돌아가 보았다. 바람 이 쌩쌩 부는 추운 겨울밤에 노숙자는 골판지 상자를 시멘트 바닥에 깔고 헌 담요를 몸에 감고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일찍 백화점 스포츠 코너에 들려 두툼한 등산용 슬리핑백을 하나 사서 들고 집으로 왔다. 그날 밤 교회 저녁 기도 모임이 끝나고, 모두 돌아간 조용한 시간이 되었다. 그는 슬리핑백을 들고 교회 본관 뒤편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노숙자가 오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는 들고 온 슬리핑백을 펴서 그 자리에 펴놓고 방으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외부전기 블록이 있어 따뜻할 것이었다.

그는 새벽 기도를 준비하기 위해 새벽 다섯 시에는 잠을 깨어 일어나서 꼭 커피 한잔을 마시고 방을 나서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는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추녀 밑에 떨면서 자고 있을 그 노숙자가 생각이 났다. 그는 커피 한잔을 더 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커피잔을 들고 뒤뜰 추녀 밑으로 갔다.

노숙자는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자고 있었다. 그를 툭툭 쳐서 깨우고 따끈한 커피잔을 머리맡에 두고 돌아서 나왔다. 그는 새벽 기도가 끝나고 돌아가 보니,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는 간데없고 빈 컵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런 날은 계속되었다. 얼마 후 그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노숙자는 생리적인 문제를 뒤뜰 잔디밭에서 해결 보게 되였다. 시간이 흘러가니 교인들의 코를 자극하게 되였다. 온 교회 안에 말들이 퍼져 나갔다. 그에게 원성이 돌아왔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교회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가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임시 당회가 소집되었다. 당회장을 비롯해 모든 시무 장로들이 회의장으로 모여 자초지종 내용을 듣기 위해 그를 회의장으로 불렀다. 여러 장로가 곱지 않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잘못 했습니다, 노숙자가 보기 하도 측은해서 행한 것이 본의 아니게 교회에 폐가 되었다면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그는 잘못을 시인 하였다. 장로님들의 입에서는 곱지 않은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어느 장로님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일을 해온 의도가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그는 침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누를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생색을 내기 위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불쌍한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측은한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발동한 동정심이었다고 했다. 이런 마음은 우리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는 본능이라고 했다. 여러 장로님은 그 마음을 억제하였고, 그는 억제하지 못한 차이뿐이라고 했다. 그는 말을 끝내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회에서는 당장 교회 정문에 철문을 시설하고 자물쇠를 채우기로 가결하였다. 노숙자가 계속하여 온다면 월요일 경찰에 연락해서 보호소로 보내기로 당회 결정이 났다.

그는 일요일 밤늦게 교회 뒤뜰 추녀 밑으로 갔다. 노숙자가 자고 있었다. 그를 깨웠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우고 손을 잡아끌었다.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고, 희미한 외등이 아늑하게 졸고 있었다.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유성이 밝은 빛을 내며 긴 꼬리를 물고 북쪽 하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의 방으로 그를 다리고 왔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눈만 껌벅거리는 그에게 옷을 벗기고 샤워장으로 밀어 넣으면서 목욕을 시켰다. 샤워장에서 나오는 그에게 따끈한 커피잔을 내밀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빼빼 메마른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랄 대로 자랐지만, 윤곽이 또렷한 백인 청년이었다. 내심 그는 놀랐다. 나이는 자신보다는 몇 살 아래인 것 같았다. 이렇게 헌칠하게 생긴 백인 청년이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신세로 전락하다니, 의심스러워서 묻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그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사연이야 있겠지. 지금 묻는다고 속마음을 말하겠는가. 그는 들고 온 침낭을 자신의 침대 옆 방바닥에 깔아 주었다.

오늘 저녁은 여기서 자세요.” 그를 행해서 처음으로 말을 했다. 그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멍청히 서 있다가 침낭으로 들어갔다. 그는 불을 끄고 자기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저렇게 멀쩡한 백인 젊은이가 거리로 헤매다니 그는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새벽녘에 깜박하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창밖이 훤하게 밝았다.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새벽 기도가 없는 날이기에 늦잠이 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깜박 잊고 있었던 노숙자 젊은 친구의 생각이 났다. 침낭을 보았다. 비어 있었다. 일찍 깨어 어디론가 나갔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는 침낭을 들쳐 훌훌 털었다. 그때 접혀 있는 하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무심코 종이를 주었다. 거기에 연필로 갈겨쓴 글자가 보였다.

감사 합니다, 편안한 잠을 자고 갑니다. 이제 잃었던 길 찾았으니 마침표를 찍고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는 그 젊은 친구가 월요일인 오늘 경찰에게 연락할 것을 알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는 긴 이야기를 담담하게 끝내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해쓱해진 얼굴에 엷은 그늘이 덮여 있었다. 깜박이는 눈에 맞물린 긴 눈썹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다음은요.” 그녀는 물기 어린 눈을 뜨고 그를 보면서 물었다.

그 월요일에 교회 사무실에 쪽지를 남기고 나 역시 교회 사찰 방에서 떠나왔지요.”

그래서 이 적은 싱글 룸 아파트로 옮겨 오셨군요.” 그녀는 동정 어린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된 셈이지요.” 그는 침통하게 말했다.

그런데 왜 학교는 휴학계를 내셨지요.”

그것은 나 개인 사정이니 말할 수 없는데요.“

말할 수 없으면 않으셔도 좋아요.”

그런데 개인 신상을 조사한 의도를 알고 싶은데요.”

악의는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보아하니 상식을 가지신 분 같은데 남의 신상을 함부로 뒷조사하면 안 되는 것 아실 텐데요.” 그는 약간 힐난조로 말했다.

역시 공학도 시니까. 예민하시네요.” 그는 그녀가 자기 밑천은 알 만큼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알 것 다 알았지요.”

그녀는 그늘진 얼굴로 일어서면서 명함 한 장과 비행기 표를 내밀었다. “이것은 내 아버지 명함이고요, 이것은 오스틴 왕복 비행기 표입니다. 아버지께서 꼭 당신이 한번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명심하시고 뜻을 받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젊은 남녀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코앞에서 숨소리가 들리는 풋풋한 젊은 여자의 향기를 맡으면서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뾰족해서 날이 선 콧날, 초롱초롱한 다갈색 눈동자, 귀밑까지 내려오는 짧게 짤린 윤기 있는 검은 머리, 웃으면 드러나는 빨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하게 드러나는 하얀 이빨, 그리고 빨간 입술이 그의 눈길을 끌고 갔다. 하얀 목덜미로 그리고 불룩한 젖무덤까지 내려가면서 크기가 시<C> 컵 정도는 될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왜 머리를 흔드세요.” 그는 깜짝 놀라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좁고 누추 한방에 숙녀를 맞이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좋은 시간 감사해요. 그리고 시큼시큼 텁텁한 남자냄새도 좋았고요, 나는 그런 남자 냄새 처음 맡아 보았거든요.” 그녀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말했다.

감사해요, 향긋한 여자 향기를 나도 처음 맡아 보았으니까요.”

다음번에 실내로 들어오실 때는 신발을 벗는 것이 예의라는 사실 기억하세요.”

왜 그걸 지금 얘기하지요.”

한번 실수를 기억하는 것은 좋은 추억이 되니까요.”

다음 기회가 또 있을까요.” 그는 그럴 기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입을 닫고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음식 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음식 대접은 회사 업무용 출장비에 포함된 공금이라고 했다. 이번 자기 출장과 비행기 티겟 등 일체 비용은 능력 있는 인재 영입 투자금의 일부라는 뜻있었다. 그는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회사 일에 철저하다면 그 회사는 좋은 회사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일상적인 이런 일로 해서 도움을 받는 것은 사양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식당에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그녀를 행해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에는 필요할 때 찍는 그 마침표가 중요해요, 마침표란 끝인 동시에 시작이니까요, 마침표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회사 관계는 대답할 수가 없군요.”

어떤 회사와 선약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요, 내 인생 문제이니까요. 약간의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을 닫았다.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떠났다.

그는 변함없이 학원에 출근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말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녀의 언행이 결코 모욕을 느낄만한 경계선을 넘지 않는 지혜로움이 숨겨 져 있었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그의 뇌리에 잔영으로 떠올랐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어떤 행운의 메시지를 남기고 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드디어 컴퓨터학원 일을 정리하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일단 학교공부는 끝내기로 했다. 그다음 호의는 호의대로 갚으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예전처럼 학교 공부에 전념했다. 이제 하루속히 연구 과제를 끝내고 졸업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그리고 고생하신 부모님 모셔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부모님을 모신다는 생각에까지 마음이 쏠리니 결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났다. 부모님께서는 마음에 들어 하시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로서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략적인 결혼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회사 사장의 딸을 부모님은 마음에 두고 계셨고, 그쪽에서도 적극 원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아가씨와는 메일을 주고받으며 지금도 관계는 계속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결혼하게 되면 그 아가씨와 결혼을 하게 되겠지 하는 기대도 하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 돌아온 이후에는 정신없이 학업에 매달리다 보니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어느 날 밤 여덟 시경에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제인 이었다. 우선 그녀는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의 뜻을 받아드린 것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당신의 뜻을 완전히 받아드린 것은 아니고 우선 학교는 계속하기로 했어요.”

잘 선택 했어요, 그리고 생활비는 은행 계좌로 직접 송금하겠어요.”

감사해요, 주신 도움에 진심으로.”

우리 아버지 초청은 언제쯤 가능할까요.”

지금은 어렵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는 늦은 가을밤에 싸늘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눈을 감으면 잠들기 전 밀려오는 피로 때문에 금방 잠이 들 것 같기도 하였지만, 웬일인지 정신은 더 맑아지면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져 갔다. 그럴 때면 제인이 남기고 간 향긋한 체취가 코끝에서 살아났다. 혀끝이 말려서 굴러가는 구슬 같은 감칠맛 나는 말꼬리가 상기 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영어 구사능력에서는 혜 끝에서 굴러 나오는 부드러움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어떤 달콤하고 매혹적인 세계로, 그를 끌고 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혼자서 이불을 껴안고 상기된 얼굴로 미소를 지워 볼 때가 많아져 갔다.

그는 이번 마지막 졸업 논문 작성이 끝나면 오스틴 텍사스에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의 운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런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넓은 홀에 가득한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대화의 중심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오늘 낮 비행기로 여기 오스틴에 도착하였다. 반도체 생산 회사 사무실에 들러 사장과의 면담을 끝냈다. 시내 외곽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사장인 루이스 스미스 씨의 저택 넓은 홀까지 안내되어 그 가족과 친척 그리고 회사 간부들 속에 서 있게 된 것이었다.

오스틴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역시 제인이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어깨를 맞대고 웃었다. 그 뒤로 멀쑥하게 차려입은 백인 청년 잔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자기의 손을 힘 있게 잡고 흔들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를 영접 하는 두 사람에게 그는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했다. 이렇게까지 후한 대접을 그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들을 태운 차는 미끄러지듯 달렸다. 그들의 회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에 이 회사 사장이요, 잔과 제인의 아버지 루이스 스미스 씨가 그를 정중하게 사무실에서 맞이했다. 육 척 장신에 반백의 머리에 골격이 건장하고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노신사였다. 그는 관록과 위엄 같은 것이 몸에 밴 전형적인 회사 경영자로서 권위를 지닌 묵직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사무실 소파에 앉은 그는 젊은 방문자에게 앉기를 권했다. 제인이 미스터 송진우라고 소개했다. 인사가 끝난 후에 바로 질문이 들어왔다.

송군 미국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정착할 마음이 없어요.” 그 말소리가 굵게 울려 그의 귀를 울렸다.

그런 생각 없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유가 무엇이지요.”

나는 한국 사람이고 나를 공부시켜준 부모가 계시고 무엇보다는 평생 이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가 싫습니다.”하고 그는 확신 있게 대답했다. 거기에 대해서 스미스 씨로부터 미국식 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나라는 언젠가 조국이 된다고 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이 땅에 처음 왔을 때 당신이 한 말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먼 미래의 어느 날 송 군의 손자의 손자 그때가 되면 오늘 내가 한 말과 같은 말을 송 군의 손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충고 아닌 충고를 하면서 그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장님께서는 경영능력이 돋보이십니다.”

무슨 뜻이지요.” 뜻밖의 던지는 말에 의아한 안색이었다.

미인계를 쓰시고 계시니까요.” 뜻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길을 주었다.

한국 속담인가요?”

맞습니다.”

그러자 그는 입을 벌려 크게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면 송 군은 미남계를 쓰면 될 것 아니냐고 응수를 했다.

미남계를 쓸 겁니다.” 그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잔이나 제인 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좋소, 미인계를 쓰는 나와 미남계를 쓰는 송군 누가 승자가 될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지요.” 계속해서 그는 이곳에는 한국의 대기업이 있는데 그쪽에서도 낚싯줄을 던진 줄 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몸값을 올리기 위한 술수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능력에 따른 몸값은 시간이 해결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대단히 현명한 답변 마음에 들어요, 아마도 모두 승자 게임이 될게요.” 그리고 그는 일어섰다. 회사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늘 밤 집에서 송 군의 환영 파티가 있으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모두 와인잔을 높이 들고 축배를 들었다. 그는 그때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상의 안 호주머니에서 하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약간은 억양이 높은 영어로 정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 계신 여러분께 좋은 선물을 하나 돌려 드립니다. 이 선물은 아마도 스미스 가문에 가보로 물려주어도 손색없는 보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무슨 특별한 보물이 나올 것인가 하는 호기심 어린 눈들이었다. 천천히 그 하얀 종이를 펴서 읽기 시작했다. “감사 합니다. 편한 잠을 자고 갑니다. 이제 잃었던 길을 찾았으니 마침표를 찍고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목청을 높여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잔이 나에게 준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입니다. 이 값진 선물을 보관할 곳을 오늘 밤 찾았으니 돌려 드립니다.

모두 숙연했다. 그때 이 집주인 되신 루이스 스미스 씨가 큰 소리로 외쳤다. 감사해요, 미스터 송 그리고 내 아들 잔에게도 ᅳ. 모두가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소리 높여 외쳤다. 건배 또 건배 그들은 마시고 또 마시고 즐겼다.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인이 그의 가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를 홀 가운데로 끌고 갔다. 팔을 당겨 포즈를 취했다.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오스틴의 늦가을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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