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린 한 편의 시--- 정지용 - '향수(鄕愁)'

 

 

 

눈물 나게 만든 시라기보다 문학이라는 숙명 속으로 저를 이끈 한 편의 시에 대한 사연은 이렇습니다.
제 고향은 충청도 청원, 대청댐 수몰지구로 지정되어 오래도록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오지마을. 지금이야 대통령 전용별장인 '청담대'가 일반에 개방되어 있고 민속마을 등 명소가 되었지만 그 때는 새마을 운동도 피해가는 발전하고는 먼 곳이었지요. 중학교를 다니려면 버스도 없는 논길과 산길로 이어진 십리 길입니다. 따분하기만 했던 소년시절, 일대 사건이 생긴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국어 교생 선생님이 제 반에 오셨는데 그 여선생님 미모에 반해 맛있는 것을 먹어도 아무 맛이 없고, 아무생각도 없어 누가 이름을 불러도 엉뚱한 생각만 하다 얼 빠져 있다는 소리를 듣기일쑤였지요. 조숙했나요? 학교가 파해도 괜히 운동장에 머물던 시간이 많아졌고 여선생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요. 우연을 빙자한 필연으로 학교가 파한 시간 교실에서 단 둘이 만나게 되었지요. 여선생님은 제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꽤 오래 대화를 나눴습니다. 문득 제게 들려준 한 편의 시는 정지용의 '향수'였습니다.



향수(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한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줏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그 때 받은 충격은 눈물 나는 감동을 넘어 경악이었습니다. 마치 내가 사는 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시가 주는 풍경은 천상으로 미화되었습니다. 그 동안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흐르는 시냇물이며 풀벌레 소리조차 심드렁했었고, 화롯불에 된장찌개 끓이던 냄새도 싫었는데 졸지에 지상 낙원이 되었습니다. 한 편의 시를 통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데 놀랐고, 제가 시골에서 사는 것이 운명이구나 싶었지요. 여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와 매혹적인 눈, 저를 좋아한다는 착각까지 했었어요. 시가 먼저인지 여선생님이 먼저인지 그때는 솔직히 몰랐습니다. 그냥 다 좋았습니다. 어느 토요일, 학교 가면 여선생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연 듯 들자 염소 풀 먹이러 들판에 나가는 것도, 토끼 밥 주는 것도 마다하고 공부하러 간다고 가방 메고 학교에 들렀지만 안경 낀 당직 선생님만 계셨습니다. 혹 여선생님이 산다는 청주에 가면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인연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무작정 떠난 적이 있었어요. 읍내로 나와 청주까지 버스를 타고 도심 한복판에 내려 두리번거리다 무심천까지 걸었던 일, 해가 저물어서야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었지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도 그 때는 성스러운 고행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일요일 내내 퍼지게 자면서 여선생님 꿈을 꾸었을 겁니다.


무심한 시간은 누군가 열병을 앓는지 마는지 열차를 타고 떠났고 한쪽 심장이 멍들어도 성장은 멈추지 않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친구들은 열심히 공부할 때 공부는 안 하고 시상에 잠겨가며 온갖 폼 다 잡고 저물어 가는 석양녘을 옮겨와 칠판에 곱게 물들여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며 보냈어요. 고 2 때 습작시를 《학원》지에 투고, 연거푸 발표되면서 금방 문사가 되는 것으로 착각했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급변하는 한국에서 남들과 같이 보냈으며 많은 미련들을 뒤로 한 채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떠납니다. 언제나 삶은 고달픈 연속의 길이라고 생각했고 미국 와서 멈추지 않는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너무 멀리 있어 다가오지 않을 것 같던 밀레니엄 시대가 지나가듯 점차 이곳 생활에 익숙하며 동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여럿이었는데 뭐 한 가지 끝까지 한 것이 없었어요. 시골에 찾아온 사냥꾼의 옷차림과 총 쏘는 것이 멋있어 보여 사격선수로 활동 했었고,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에 미대 간다고 화실에서 '아그리파'상만 죽어라 그렸고, 미국 와서는 골프 학교까지 다녔지만 어느 하나 결실 맺지 못했지요. 그런데 문학만큼은 예외였습니다. 등단하고 마흔이 넘어 식지 않은 열정으로 사이버 대학 문예창작학과 4년을 다녀 졸업했습니다. 새삼 문학의 깊이가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문학의 길 걷는 것이 제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년 시절의 한 편의 시가 더 커지고 이제는 아무리 떨쳐 내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는 문학은 제 몸의 일부로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중학교 때 그 여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제 삶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이 글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빈터> 이벤트 홀에 올렸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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