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중앙일보 발행 2021/02/05 미주판 17면 입력 2021/02/04 19:00
숲속의 하루
김혜자 (오리건문인협회 회장.한국문협 미주지회 이사)
“이름 모를 새들이 찾아와
지친 몸을 추스른다
또 한번 소나무 숲은
청명한 소리로 잠을 깬다
새들이 잠시 쉬다
푸르듯 조용한 공기를 가른다”
마른 나뭇가지에 비늘 같은 새순이 돋고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우거진 산길이 손짓한다. 동행은 없지만 튼튼한 다리, 쭉쭉 뻗어 오른 사계절 푸른 소나무, 싱그러운 새들의 노래, 하늘, 구름이 나의 친구가 되어 아름다운 길을 함께 걷는다.
숲은 사계절의 모습을 안고 천천히 굴러가는 열차 같다. 숲 열차는 언제나 느긋하게 나를 기다려준다. 시간이란 표를 끊어 숲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 떠난다. 봄이 무르익는다. 활처럼 구부러진 가지 이끼 사이로 돋아나는 연둣빛 어린 순은 또 얼마나 반가운지. 눈을 들어 바라보는 숲은 새롭고 철마다 아름답다.
그리움은 갇혀있던 봉투 열고 햇살에 녹아 아름다운 향기로 퍼진다. 하늘나라에 있는 여동생이 휴가를 온다면 아니 5분만 내려온다면 나는 원이 없겠다. 소리 내 불러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엉엉 울어보고 싶다.
어린 시절 우리는 매일 밤 장롱 속 가지런히 개켜 있던 요와 이불을 꺼내 방바닥에 깔고 잠을 잤다. 요즘처럼 난방이 잘 안 되어 방안은 냉기로 가득했고 몹시 추웠다. 이불 속에 서로의 체취와 체온을 느끼며 우리는 잠에 빠져들곤 했다. 따스했던 그때. 푸르게 자라던 우리의 향기. 그 향기가 그립다.
그리운 것이 향기뿐인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주신 두 대의 자전거를 각기 타고 넘어진 무릎 상처 아픔도 잊고 웃던 그때. 남학생 놀림에 넘어진 나를 부추기던 내 동생. 혹시 넘어질까 내 뒤를 따르던 수호신 같은 언니 같은 동생. 우리의 웃음소리는 알록달록한 오색 빛깔로 골목 안을 가득 채웠지!
동생은 학교 성적, 운동도 미모도 나보다 월등했다. 아버지가 맏딸인 나에게 베푸는 각별한 배려에도 한 번도 반항하지 않은 순종파 동생. 아버지의 일편단심 나를 위하시는 버릇대로 성장한 후 나는 받는 것에 능숙했고 주는 것에 숙달된 마음씨 고운 여동생. 손으로 하는 일은 동생은 나보다 더 잘했다. 늦게 배운 골프도 멀고 정확한 거리로 날렸고, 남자처럼 치는 나의 모양새에 비해 우아한 몸놀림은 나의 부러움이었다.
나의 정년 퇴직 후, 긴 여행을 약속한 동생은 어느 날 질 파리해질 정도로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암세포는 위는 물론 소장, 간까지 전이된 상태, 얼마나 아팠을까. 항상 예쁜 미소의 내 동생은 발병 후 10개월만에 조용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떠났다. 세상에는 뒤늦게 깨닫는 것이 참 많은 것 같다.
우리가 익숙한 것에 감사하지 않고 그것을 행복이라 여기지 않는 때가 많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잃고 나서야 깨달으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 자매 같은 친구가 어디에 있나? 자매는 보석과 같은 존재라는 것. 그녀는 나의 머리와 팔과 다리였기에 더 애달프고 애달프다.
길을 걷다가 잠시 걸음을 내려놓는다. 주머니 속에서 길게 잘라 풀어놓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한 소절을 사뿐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빈 가슴에 철없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꿈이 알알이 채워지고 있다.
코로나로 일상생활이 힘들다. 자락자족(自樂自足), 자숙자계(自肅自戒). 요즈음 지루한 시간의 함정에 빠져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삶을 스스로 즐기며 만족한 줄도 알고(自樂自足), 스스로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갈 줄도 알아야(自肅自戒) 어려울 때를 이기고 삶이 풍요해진다고 스스로 말을 해 본다.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견디어내는 인내심의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 연록의 숲이 진초록으로 변해 가면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은 먹이고 훈련하느라 새들은 바쁘게 날아다니고 꿀을 나르는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윙윙거리는 가운데 숲은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계절은 천천히 물들어 간다.
숲속은 이름 모를 새들이 찾아와 지친 몸을 추스른다. 또 한 차례 소나무 숲은 청명한 소리로 잠을 깬다. 새들이 잠시 쉬다 푸르듯 조용한 공기를 가르고 나른다. 은가루 뿌린 듯 빛나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시원한 봄바람이 분다. 숲속은 각종 꽃과 산뜻하게 봄의 새 옷을 갈아입은 향기가 진동한다. 내 안에서도 이렇게 향기로운 그릇을 빚어낼 수 있을까.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에서 만난 옛추억이 행복으로 가득하네요
다가오는 새 봄이 날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