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 이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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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롤러코스터
이언호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뜬다. 나는 어둠에 익숙해지려는 듯이 한참동안 그대로 누워있다. 고인 물에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듯 하며 에코를 동반한 이 물방울 소리를 수적[水滴]이라고 하던가. 깊은 동굴 속의 소리를 연상시킨다. 한참 후에 파악한 이 소리는 잠을 깨라는 모닝콜이었다. 그건 자명종 소리나 전화벨 보다 효과적이다. 그리고 내 의식 속으로 보내지는 어떤 메시지가 포함 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게 해 준다. 나의 피부 밑으로 정지되었던 생각의 원천이 빠르게 흐름을 느낀다. 내가 몸을 뒤적이자 소리는 곧 멎는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소리. 아내가 날 깨우기 위해 고안해낸 음향과 흡사한 소리다. 그보다 더 고음이다. 무의식까지 뒤흘들어놓는 수적음향이 세뇌고문이란 걸 난 알고 있다. 방이 밝아진다. 할로겐램프가 켜진 것이다. 이 침실은 벽지색이 착시 현상을 준다. 누워서 본 천정은 검붉은 색이고, 나비 문양이 그려진 벽은 짖은 녹색이다. 그런데 일어나서 다시 보면 그 반대로 색이 변화된다. 청록은 검붉은 색이 되고, 검붉은 색은 청록이 된다. 그리고 색이 변화 될 대마다 나비 떼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할로겐램프의 마술이다. 난 붉은색과 청색과 녹색의 빛이 합치면 하얀 조명이 된다는 걸 안다. 미술책 편집을 해 봐서 잘 안다. 그래도 막상 착시를 보면 혼란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나는 눈을 감는다. 내안의 잔영에선 나비 떼가 방안에 가득 날아다닌다. 참 희한한 조명이다.
이 방엔 창이 없다. 방과 방 사이에 끼어 있는 방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방엔 문도 안 보인다. 그래도 난 문이 두개가 있다는 걸 안다. 문 하나는 방 밖의 거실로, 또 다른 하나는 화장실로 가는 문이다. 보통 호텔방은 화장실 안에 욕실이 있게 마련이다. 이 방은 욕실대신 옷장이 있다. 욕실은 체력 단련 실 옆에 있다. 문들은 모두 벽과 같은 색이어서 얼른 보면 안 보인다. 그러나 내가 문이라고 생각되는 벽 앞에 가서 잠시 기다리면 벽에 문이 생겨 스르르 열린다. 무엇대문에 이처럼 혼란스런 디자인을 했을까…?.
엔앤에스(N&S)기업이 날 스토리텔링 작가로 초청해 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라 면서 이런방으로 안내했다. 왜 이런 도깨비 굴속같은 방에 묶게 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들이 내 인식에 착각이라는 자극을 주려 하는가? 알 수가 없다.
심리학책에서 착시 현상의 그림을 여럿 본적이 있다. 그림책 편집을 할 때다. 네덜란드의 그래픽 아티스트인 엠시 에셔(M.C Escher)의 그림 같은 것을 많이 봤다. 살바도 달리의 그림도 그중에 하나다. 시계가 녹아내리고 있는 그림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 천재는 아날로그가 녹아서 디지털이 되리라는 걸 화폭에 예언했다. 인식의 무대. 길이와 거리와 부피가 착시를 주는 루빈의 와인 잔과 신사의 얼굴, 오리와 토끼, 젊은 여인과 노파의 그림들이 대표적인 착시의 그림들이다. 또 빅터 바스리(Victor Vasarely)의 푸른색 바둑무늬의 상자그림, 나란히 뻗은 기찻길이 사다리꼴로 보이는 것들이 대표적인 착시의 그림들이다.
만약 한국인 두 사람에게 미국에 가 봤냐고 묻는다면 그 중 한 사람이 가 봤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제주도 보다 가본 사람이 많다는 얘기겠다. 또 한국인 세 사람에게 미국에 인척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중 두 사람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미국에 가본적도 없고 미국에 사돈의 팔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미국엘 왔느냐. 엔앤에스(N&S)란 회사에 스토리텔링 전속작가로 초대를 받아 온 것이다. 허지만 아직은 완전하게 채용이 된 건 아니다. 사실은 지금 그 회사에 면접을 받으러 와서 대기 중이다.
이야기인 즉은 이렇게 됐다. 요즘 내 명함속의 직업은 프리랜서 편집인 겸 자서전 전기 작가이다. 우리는 가끔 그런 작가들을 고스트라이터라고도 한다. 대필 작가 말이다. 난 말이 좋아 프리랜서 편집인 겸 전기 작가이지 일감이 가물에 콩 나기로 걸려들고, 한번 걸린 일로 다음 수입이 생길 때까지 몇 달이고 아끼고 절약하고 때로는 몇 끼니씩 굶으며 살아가는 가난뱅이다. 한때는 크지는 않았지만 베스트셀러를 펑펑 찍어 내는 출판사 씨이오(CEO)였다. 어느 날 운명이 장난을 해서 날 하등인생으로 강등 시켜버렸다. 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의 머리통이 깨지듯 날 벼락 맞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운명에 저항도 했다. 술도 진탕 마셔보고, 기도회에도 쫓아다녔다. 그 때마다 시간과 돈만 깨져 회사는 망했고 난 가난뱅이가 된 것이다. 가난은 사람을 무기력 하게 만든다. 사실 목을 맨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무기력해진 사람은 죽지도 못한다. 목에 맨 밧줄을 쥐고 「운명아…!」 하면서 떨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떤 운명이기에 그리됐느냐 하면…. 그 사연을 말하자면 비통해져 온 몸에 열이 오른다. 마치 내 자신이 화덕에 올라앉은 오징어처럼 졸아드는 것 같아 그 이야기는 발동이 잘 걸린 다음 한 꼭지씩 해야겠다. 우선 미국에 오게 된 사연부터 풀어내보자.
그 날도 어디 일감 하나 없나 해서 여기저기 작은 출판사와 인쇄소에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중 어디에선가 광고문이 하나 들어왔다. 스팸메일이려니 해서 지워버리려다가 슬쩍 열어보니 세계적인 기업 엔앤에스(N&S)가 전속 스토리텔링 작가를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아시다시피 요즘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은 디지털 문화 콘텐츠가 아니어도 약방의 감초로 어느 기업이나 끼어들어 돈을 벌어드리는 주연급으로 등장하지 않았는가. 기업이란 이윤의 획득을 목적으로 운용하는 자본의 조직단위다. 그러니까 기업에서의 스토리텔링은 마치 횃불을 치켜들고 무인도에 우뚝 솟은 여신상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녀 한번 잘 모시면 기업의 돈 줄이 확 풀린다. 타이타닉이나 아바타란 영화 한편이 자동차 수 만대를 수출한 이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드리지 안았는가. 내가 그런 자리에 전속 작가가 된다면…. 그건 꿈같은 얘기겠지만 도전해 볼만 했다. 난 앉은 자리에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설 써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라면박스가 다 비워가도록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엔앤에스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무겁게 조용했다. 나는 그러면 그렇지 스팸메일로 지워 버려도 시원치 않은 걸 써 보냈더니 사람을 놀려…. 잊자, 잊어버리자. 난 잊는 데 도사가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해도 생각이 났다. 누를수록 용수철처럼 튀여 오르는 게 잊으려는 사건들이다. 대기업의 스토리텔링 전속작가. 얼마나 매력적인 직업이냐. 은근히 그 해답을 기다리며 기대했던 순진한 마음을 달래며 파와 계란 없는 마지막 라면 봉을 뜯다말고 다시 멜을 열어보니…. "당신의 이력서를 검토해 본 결과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 했으니 미국본사로 오시오"라는 문자가 올라와 있었다. 어…! 이건 뭐지? 미국으로 오라네. 근데 속 터지네. 지금 끼니가 없어 김치 무시하고 맨 라면으로 디너를 때우는 형편에 무슨 미국행이야. 강도질 하냐? 무슨 수로 비행기 표를 사서 거길 간단 말이냐? 설사 간다 해도 면접결과 찍-싸면 미국 거지귀신 되는 게 아닌가. 나는 고소를 금치 못하고 라면부터 먹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배 실장을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이 반짝 아이디어로 떠오른다. 그 친구는 옛날 내가 출판사 사장으로 있을 때 편집 차장을 하던 이로 어느 작은 출판사의 주간으로 있다. 그는 지금의 내 신세를 긍휼이 여기어 쇠주도 사면서 일감도 얻어주고 쌀 말 값이나 집어 넣어주며 "사장님 낙심 마세요." 하며 날 위로 하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럴 때면 내가 잘 나갈 때 회식도 자주 시켜주고 보너스도 두둑이 줄 껄 하는 생각이 후회막심으로 가슴을 울렸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요즘은 염치가 없어서 전화도 못 걸고 또 그도 연락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 그의 신세를 지는게 미안해서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오란 멜을 받고 그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난 그에게 이야기나 해 보자는 생각으로 이멜을 보냈다. 곧 이어서 그에게서 답신이 왔다. 요즘 해외에 다닐 일이 생겨서 비행기를 몇 번 탔더니 마일레지가 좀 쌓였는데 그것이면 사장님 항공 표는 해결이 될 것이라는 얘기와 더불어 자신은 사장님에게 좋은 일이 꼭 생길 것이란 예감의 말까지 덧 부쳤다. 나는 고마워서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런데 이어서 미국 이멜이 들어왔다. 미국 초청장과 항공권 예약이 되어 있으니 일주일 내로 들어오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서울에서 인천공항까지의 리무진 표만 신세지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헌데이건 또 웬일인가. 비행기에 오르고 보니 비즈니스 석이었다. 일등석 타보신 분을 알겠지만 대우가 엄청 좋다. 환상적인 미녀 스튜어디스들의 친절은 말할 수 없다. 요즘은 다문화 사회가 착실히 되가는 지 동남아 여성들이 한국 비행사에 많이 진출해 있다. 아담하고 까무잡잡한 이국적 여성의 매력은 신선해 보였다.
난 우선 식사부터 주문해 먹었다. 백포도주를 곁들인 랍스터,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에 후식으로 과일 요구르트와 커피로 식사를 끝냈다. 문화영화로 독일의 디자인 연구소인 바우하우스를 봤다. 바우하우스는 디자인과 관련된 건축이며 조형 예술을 교육하는 독일의 유명 학교이자 연구소이다. 아내가 디자인을 전공해서 들은 적이 있어 흥미롭게 봤다. 그녀는 그때 그 바우하우스 연구소의 멤버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잊어버리자. 난 생각을 고쳐먹고 클래식 영화 카사블랑카를 봤다. 조국과 사랑을 위해서 통 큰 결정을 내린 험프리포가트가 너무 멋있었다. 점보제트기는 시간과 공간을 가르며 잘도 날았다. 밤은 깊어갔고 내 머릿속의 상념은 날 긴장시켰다. 낼 맑은 정신으로 인터뷰를 하려면 눈을 좀 부쳐야 했었다. 그런데 긴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조됐다. 잠이 안 왔다. 독한 위스키 한잔 더 시켜 단숨에 마시고 영화를 틀었다. 옛날에 본 작품이었다. 가난한 다섯 명의 자매이야기인데 매우 감동적인 영화였다. 거기엔 얼마 전에 작고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왔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유미애와 유정웅,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 비극적 운명의 장난으로 사별과 이별을 동시에 한 가족들의 영상이 떠올랐다. 순간 가슴이 뛰고 주체할 수 없는 설음이 밀려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 잘못이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나는 발광을 했다. 스튜어디스들이 놀래서 내게 달려왔다. 날 껴안아주며 울음을 달래 주었다. 난 결국 진정제를 먹고 겨우 잠이 들었다.
잠을 깨 보니 새벽이었고 비행기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내겐 짐도 단출했다. 등산용 백 팩에 낡은 랩톱이 전부였다. 공항엔 마중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사고무친이라. 어디로부터 방향을 잡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데 유시종이란 한글 팻말을 든 사람이 저 앞에서 어정거렸다. 육척장신에 스킨헤드 그리고 회색수염이 덥수룩한 서양인이었다. 나는 그 앞으로 갔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쟝 두발입니다." 그는 어눌한 한국말을 했다. 나는 얼른 그의 큰 손을 잡았다. "유시종입니다." 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는 내 짐을 빼앗아들고 성큼 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다리를 재게 놀려 전봇대 같은 장 두발인지, 세발인지를 따라가며 종종걸음으로 황새 따라가는 뱁새 생각을 했다. 파킹 장에 들어가서 나는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누른 리모트 앞에서 007의 제임스 본드나 탈 잿빛 스포츠카가 번쩍 거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문을 열어주고 난 다음 운전석에 앉아 쌩하고 차를 몰아나갔다. 뚜껑이 없는 스포츠카는 처음이었다. 열대의 더운 바람이 그의 메뚜기 선글라스를 비켜 갔다. 그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범죄 용의자처럼 입을 꾹 닫고 달렸다. 차는 엄청 스피드를 냈다. 그의 회색수염으로 태양열이 자외선을 뿌리고 빠르게 뒤로 밀려갔다. 그 스피드에 나는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는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따라 한 30분쯤 가자 우측으로 바다가 나타났다. 태평양일 것이었다. 해는 높이 떴고 바다는 청색이 짖었다. 언덕 하나를 돌아가자 바다는 사라지고 서부영화에서 본 마른 넝쿨 같은 것이 바람에 날리며 과거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끼고 조금 더 가자 동그란 만(灣)을 배경으로 오아시스처럼 종려나무가 울창한 숲속에 리조트 군락이 나타났다. 오션 비유 2013뉴포트 비치, 캘리포니아. 나는 그 주소를 외우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단층 건물인데 지붕이 안 보였다. 노란 꽃 넝쿨이 뒤덮여있어서였다. 저, 꽃은 붉은 색이 더 아름다울 테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바라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꽃 넝쿨은 붉은 색으로 변해 보였다. 부채 살 모양의 팜트리(Palm Tree) 잎사귀가 서쪽 지붕을 거쳐 보도 부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꽃들은 그늘 쪽과 햇빛 쪽의 색깔이 달라 보인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래도 순간 착시의 혼란을 느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쟝두발이 안내하는 건물의 문턱에는 3디 카페(3D Cafe)라는 간판이 청색 글씨의 세라믹으로 양각되어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어…!' 하고 멈춰 섰다. 실내 디자인이 희한했다. 카우치들이 모두 허공에 떠 있는 듯 어지러웠다.
"실내 장식이 묘하군요."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나는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선 기분으로 실내분위기를 바라봤다. 음악이 들렸다. 바이오린 협주곡으로 귀에 익은 데 곡명은 알 수가 없었다. 실내는 꽤 넓은 홀이었다. 4인조 둥근 티 테이블이 두 줄로 20여개 정도로 배치되어있었다. 그 사이마다 서가의 책꽂이로 된 칸막이가 마치 잘 차려진 도서관의 내부처럼 꾸며져 있었다. 도서관을 겸한 카페인가? 몇몇 사람은 둥근 테이블 앞에 앉아 티를 마시며 담소를 하고,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랩톱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저들이 모두 스토리텔링 작가들인가? 3D 카페에 스토리텔링 작가들…? 나는 궁금해 하면서 쟝두발을 따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오른 쪽에는 코린트 식 벽난로가, 왼쪽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양각된 분수대가 실내 분위기를 고전적으로 보이게 했다. 이것들은 모조품이겠지…. 하고 생각하는 데, "저것들은 다 오리지널이오." 쟝두발이 말했다. "씨이오(CEO)레이디가 폼페이에서 파낸 것을 엄청난 금액으로 사 들인 것이지요." 그는 거울로 된 벽에 손가락을 대고 옆으로 밀었다. 아이폰의 화면이 열리듯이 거울 벽 한쪽이 스르르 열렸다. 나는 수족관의 유리탱크 속 같이 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고, 흰 거품파도가 해변으로 밀려나오는 게 보였다. 멀리 유람선이 느리게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런 풍경들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여인을 봤다. 방안에는 열대 식물들이 많았다. 나는 온실에서 나는 흙냄새를 맡으며 편안하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를 내려다봤다. 실내가 눈부시게 밝지 않았다. 그런데 그 씨이오(CEO)라는 여인은 창이 크고 진한 선 그라스를 쓰고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릴 정도였다. 앵두색의 립스틱이 검은 선글라스 창 아래 돋보였다. 17년 전에 사라진 아내도 그런 색 립스틱을 즐겨 발랐다. "앉으세요." 그녀가 말 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공명(共鳴)이 가득했다. 연녹색 실크 마후라가 그녀의 목선을 가렸다. 아내는 목선이 특히 아름다웠다.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리듬이 준비 안 된 무방비의 내 의식 속으로 스며들었다. "백내장 수술을 했어요." 그녀가 선글라스 쓴 것을 변명하듯이 말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자기소개서를 읽었습니다."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변변치 않습니다." 나는 겸손하게 말했다. "그 이외에 어떤 특기가 있으신가요?" 그녀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유명인사의 고스트라이터로 써드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육지로 기어오르려다가 실패하고 미끄러져 나가기를 반복하는 거품파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쓰셨나 보지요?" 그녀는 내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주인공이 부르시는 대로 쓰고 나중에 문장을 정리했지요." 나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말 했다. "자기 작품을 쓰시지 왜 고스트 라이터가 되셨나요?" 그녀가 물었다. 난 먹고 살기 위해서죠. 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선글라스에 비친 내 일그러진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흐느끼듯이 숨을 멈췄다. "먼 길을 오셨을 테니 우선 쉬세요." 여인은 내게 시선을 둔 채 공명의 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와 함께 그 CEO 여인은 컴퓨터 화면이 꺼지듯이 사라졌다. 내가 허상과 이야기를 했나 보았다.
그렇게 해서 난 고급휴양지처럼 보이는 리조트의 방에서 며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일어나서 화장실부터 간다. 배변은 생각을 해서 동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본능적 생리 현상이다. 변기엔 비데 장치까지 되어있다. 난 따뜻한 의자 같은 비데변기에 앉았다. 비데의 스위치를 누른다. 물줄기가 아래의 괄약근 신경을 자극한다. 그 마사지가 묘한 쾌감을 준다. 나는 성적 생리를 잊은 지 오래됐다. 수도사도 세상에 나오면 그 해결할 곳을 찾는 다는데, 난 치매가 된 기분으로 수도사보다 더 청빈한 생활을 오래 해 왔다. 천정에서 수적음향이 난다. 모닝콜의 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 소리의 메시지는 어디엔가 나를 보는 눈을 감추어 놓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같다. 내가 국가 정보원이었나? 산업스파이? 그사이에 내가 그런 사람들의 일을 해 준적이 있었나? 안타깝게도 난 자신을 잊어버린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의 자기소개서를 읽고 내 신원도 파악했을 것인데 왜 그래? 씨이오. 라는 여인, 그러니까 이 3디 카페의 사장인 듯 한 여인이 아내가 즐겨 바른 핑크빛 립스틱을 발랐고 공명속의 음성이 비슷하다는 나의 생각에 단서가 있는 것 같다. 난 이 착시의 현상들을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 해도 물방울 음향의 메시지에는 불쾌하다. 사람에게 왜 말이 필요한가. 말로하지 무슨 심적 세뇌고문 같은 음향으로 의사를 전달한단 말인가. 말, 말로 하자. 그런데 나도 말로 다 못한 경험이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피가 마른다.
아내가 교통사고를 냈었다. 중앙선을 넘어온 트럭과 정면충돌을 한 것이었다. 순간 따라 오던 승용차가 뒤를 받았다. 차는 샌드위치로 납작해 졌다. 뒷좌석엔 아이들과 어머니가 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난다는 건 기적일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났다. 달포가 지난 후 의식을 회복한 아내가 물었다. "아이들은? 어머니는?" 나는 말을 못했다. "그들은 낙원 공원묘지에서 안식하고 있다." 라는 말을 어찌 하겠나. "운명이 내게 장난을 걸었어." 이런 은유적인 말도 못하겠다. 바보! 그냥 화만 났었다. 울음만 터져 나왔다. "미애와 정웅 남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난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말해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내는 갈비뼈가 부러지며 내장에 손상을 입었다. 정신적인 충격도 대단했을 것이었다. 그런 아내에게 아이들과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차마 알릴 수가 없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 의식은 사실과 비사실 사이에서 방황했다. "아이들은?" "잘들 있어." "병원에 한번 데려오지." "알았어. 어서 일어나기나 해. "애드리 보고 싶어 미치겠다." 이런 대화를 하며 나날을 보내기란 죽기보다 괴로웠다. 세 살과 다섯 살짜리의 재롱둥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말을 어찌 한단 말인가.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미치는 영상이 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아내의 병실을 찾아 그녀와 대화 하는 일은 고통 그 자체였다. 진실과 사실 사이에서 헤매는 불면의 밤이 내게 찾아왔다. 나는 해가 떠오르지 않는 이 회색의 세상에서 아침이슬이 되고만 싶었다. 사라지자. 사라지고 말자. 아내 앞에서, 이 세상에서 꺼져버리고 말자. 이런 비관의 생각이 내 의식을 점령했다.
아내는 우유병을 깨 목의 동맥을 긋는 자살을 시도했다. 병실 안에서 아내의 발광하는 소리와 간호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결국 병원 관계자들에게 아이들과의 사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병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게 내 실수였다. 아내를 부둥켜안고 함께 통곡을 했어야 했다. 공원묘지 관리인이 실신한 나를 발견한건 그 며칠 후였다. 나는 아이들과 어머니가 잠들어있는 그곳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내는 정신과 병동에 이동했다가 어디로인지 사라져 버렸다.17년 전의 이야기이다. 나는 그녀를 백방으로 찾았다. 일 년인가 후에 그녀는 엽서 한 장을 보냈다. 한적한 곳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겠다고…. 연락처가 없는 것을 보니 찾지 말라는 의미이었겠다. 나는 찾지 않았다. 어느 절간이나 기도원 같은 곳에서 마음을 달래고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내 의식과 무의식 속에 가득했다. 그리고 나를 황폐시켰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모습도 나를 따라 다녔다. 얼렐렐레 하면 까르르 웃던 미애. 난 그들과 함께 떠돌이가 됐다. 어느 날은 술집으로, 어느 날은 환락의 공간으로, 도박장으로, 영생교회의 집회장으로, 절간으로 그리고 태종대 같은 절벽위로…. 밧줄을 목에 걸고 한참 떠돌다가 잊자, 잊자, 잊어 버려라를 반복하며 정신 차렸을 때는 회사가 파산 한 뒤였다. 그래서 다시 편집일 파트타임에 간간히 대필 작업을 하며 모진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잊어야지 잊어야해 잊어버리자. 씨이오 여인이 왜 대필 작가가 되었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런 답을 했어야 했다. 난 지옥에서 살고 있으면서 구원을 얻으려고 대필 작가가 되었다고…. 남의 이름으로 남의 인생을 이야기 하다보면 내게 구원이 올까 해서…. 그것도 아니다. 여기엔 답이 없다. 내 인생에 왜라는 질문엔 답이 안 보인다.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나도 내 눈을 찌르고 황야를 헤매면서 그 운명과 싸워 이겨야 한다. 비극은 숭고하다. 연극학의 이론이다. 그런데 내겐 우울증이 먼저 왔었다. 그건 내가 가난뱅이 신세가 된 사연이었다.
물방울 메시지는 음성이 아닌 다른 매체로 내 의식에 직접 명령을 하려는 의도인 것 일까. 내가 이런 상황을 즐겨야 겠다 생각 했지만 그건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난 지금 엄청 혼란스러워 지고 있다. 그래도 적응을 해 봐야지. 다짐하며 잠옷을 벗고 옷장에서 운동복을 꺼내 입는다. 아래위가 붙은 점프 슈트로 된 회색 옷을 이다. 옷을 갈아입자. 방안이, 그러니까 화장실 안이 확, 밝아지며 눈앞에 작은 물체들이 날아다닌다. 이 물체는 꿀벌들이 벌통 근처의 허공에서 윙윙 거리며 날아다니는 모양과 같다. 나는 비데 변기에 주저앉아 허공을 날아다니는 그 놈들을 바라본다. 그것들은 물론 천정에서 떨어진 스크린에서 비춘 3디의 화면에서 나온 영상들이다. 허공을 배회하던 비행물체 하나가 내 정수리를 향해 날아든다. 이건 뭐야! 나는 피 할 새도 없이 그놈에게 맞는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 놈이 내 머리에 충돌해 바닥에 떨어지거나 나를 관통해 내 머리에 구멍을 뚫어놓지 않는다. 정신 차리라는 경고겠지 하고 자세히 보니, 놈들은 화살 통을 맨 아기 주피터들이다. 놈들은 내 양미간을 향해서 화살을 마구 쏘아댄다. 사랑의 화살이다. 그 살을 맞으면 누구든 사랑해야 한다. 난 몸 전신에 열이 오르는 전율을 느낀다. 눈을 감는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쇠뇌도어버닐 난 어느 조직에 이용당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나를 다 써 먹고 제거 해 버릴 것이다. 아니면, 그들의 음모가 변경되어 내가 필요 없어진다면 날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길 도망쳐야 할까. 고민 할 새도 없다. 어차피 살아도 필요 없는 몸….
눈을 뜬다. 영상들은 사라지고 운동복을 입은 내가 변기위에 앉아있다. 뒤돌아 내가 나온 방을 드려다 본다. 내가 빠져나온 침대가 검붉은 벽과 청록의 천정 사이에서 하얀색으로 창백하게 누워있다. 거기에도 착시의 현상을 차려놓은 것이다. 나는 얼른 문 밖으로 나선다. 거긴 식당으로 이어지는 거실이다. 여기도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장난이 깔려있다. 이런 것이 모두 나를 특수 스토리텔링 요원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장치일까. 이방에도 창은 없고 새빨간 문이 거실 쪽 벽 한 가운데 보인다. 청록색 식탁에 검은 의자.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 하얀색 우유병이 준비되어있다. 그리고 시리얼이 담긴 백자 항아리. 오늘 아침식사는 시리얼이다. 얼마만이냐 시리얼을 먹는 게. 젊은 시절 회사를 할 때 우리 가족은 시리얼로 아침 식사를 하곤 했다. 모두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그걸 즐겼다. 그들 생각만 나면가슴이 메고 눈물이 났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내 의식에 동기를 일으킨다. 난 우유만 마신다. 수적음향이 또 난다. 난 빨간 문 앞으로 걸어간다. 가면서 눈에 보이는 사실성에는 신경을 안 쓰기로 마음을 먹는다. 난 에스에프(SF)소설속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나보다. 문이 스르르 열린다. 안으로 들어선다. 체력 단련 실이다. 덤-벨로부터 인클라인 벤치프레스, 트레드밀 같은 운동 기구가 가득하다. 벽이 모두 거울이다. 내 모습을 본다. 운동복 가슴에 불꽃 타는 심장 모양의 로고가 과녁처럼 달려있다.1미77키에 75킬로의 몸무게. 희끗한 머리에 콧날이 서있고 수염이 까칠하게 나있다.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내가 봐도 난 좀 마르긴 했어도 아직 멋있는 중년이다. 그러고 보니 이 조직이 마피아라면 난 큰일을 할 그런 모습으로 생겼다. 그런데 날카로웠던 내 눈매의 흰자에 실핏줄이 서려있다. 어제 잠을 못자서 생긴 충혈이다. 메타포를 유발하는 상상력이 떠오른 많은 영상들 때문에 잠을 못 잤다. 그들은 스토리텔링 작가를 불러놓고 다른 일을 시키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느라고 잠을 못 잔 것이다. 트레드밀에 올라선다. 그리고 뛴다. 디지털 게이지에 뛰는 속도가 나온다. 백 미터에 2분10초다. 눈을 감고 뛴다. 이걸 해내면 넌 씨이오 여인의 연구팀 일급멤버가 되는 거야. 내 의식에 내가 속삭이듯이 말 한다. 씨이오 여인에게 공공칠가방에 가득 달러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특별 휴가로 흑진주 같은 미녀요원들과 요트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구. 내 의식은 또 그런 속삭임 소리를 한다. 이런…? 그녀는 누구지요? 뭐하는 인물이지요하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 이런 착시의 방과 3디 영상을 만드는 걸 보면 스티브 챱스나 빌 게이트의 경쟁자라는 것으로 이해하겠다. 난 숨이 턱에 차도록 뛴다. 물방울 소리가 리듬을 탄다. 나는 다리를 더 빠르게 움직인다. 게이지는 백에 1분50초. 올림픽 기록이 아마 9.9초였지…? 난 그 자리에 멈춘다. 숨이 끊어질듯이 가빠서다. 폐활량을 더 키워야 해. 어디선가 메시지가 내게 입력되는 것 같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 죽는 게 아닐까? 겁이 덜컥 난다. 난 그사이에 영양실조에 걸려 있을 거야. 트레드밀에서 뛰어내렸다.
벽거울 사이가 스르르 열린다. 난 그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방은 어둡다. 몸을 빨리 움직여 손을 바닥에 더듬는다. 차가운 것이 손바닥에 닿는다. 권총이다. 몸을 돌려 과녁을 향해서 쏴! 내 의식 속에서 나오는 명령이다. 몸을 돌린다. 저 멀리 어둠속에 그림자 형상이 나타난다. 방아쇠를 당긴다. 마구 방아쇠를 당긴다. 서부영화의 총잡이가 된 기분으로 쏘아댔다. 시원하다 스트레스가 팍 풀리는 것 같다. 그러나 총알은 과녁에 하나도 맞지 않았다. 대신 내 가슴에 달린 심장표시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엄청난 통증이 뒤 따른다. 네가 상대를 명중시키지 못하면 그가 널 쓰러트린다. 이 말은 진리이다. 또 다른 형상이 나타난다. 운명의 그림자야. 방아쇠를 당긴다. 이번에도 총알이 빗나간다. 가슴은 뛰고 숨이 턱턱 막힌다. 몸에 열이 오르고 물에 빠진 듯이 땀이 흐른다. 떨린다. 오한이 난다. 걱정 마. 넌 성공 할 거야.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뭔가 오해가 있어. 난 스토리텔링 작가로 이 회사에 왔단 말이야. 걱정 마. 넌 성공할 거야. 씨이오 여인의 음성이 이명으로 들린다. 물방울 명령에 따라 옆방으로 이동한다. 거기엔 샤워가 있고 자쿠지(Jacuzzi)가 있다. 물안개 속에서 대리석 타일들이 침묵하고 있다. 난 땀에 젖은 운동복을 벗는다. 고무탄환을 맞은 가슴이 뻘겋게 부어 있다. 내게는 늘 가슴이 메어지는 통증이었다. 고무탄환으로 가슴이 뻘겋게 맞은 후 속이 시원해지는 이유는 뭔가? 자쿠지 안에서는 수증기와 거품이 끓어오른다. 그 속으로 들어선다. 물이 목에 차도록 앉는다. 눈이 감긴다. 몸이 공중 부양되는 환각현상이 일어난다. 난 별짓 다 하네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허공에 화면이 떠오른다. 또 3디의 영상이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이란 글자가 선명한 여객기가 내 양미간으로 날아든다. 난 얼른 고개를 젖혀 그것을 피했다. 여객기는 실상으로 나라들어 허상이 되어 지나간다. 9.11 사건 때 세계 무역센터 타워 벽에 날아든 여객기의 화면을 본 내 의식 속엔 날아가는 비행기가 공포를 일으키게 한다. 3디영상. 그 원리를 알면서도 그 공간 안에서 어떤 물체가 날아들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돌아다보니 나를 통과한 727여객기는 허공을 계속 나른다. 달빛에 출렁이는 밤바다 위를 날던 여객기는 착륙지점을 지나쳐서 바다로 뛰어든다. 수 천 개의 촛불들이 내 정수리를 향해 날아든다. 난 이번엔 피하지 않고 받아드린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 훈련은 시각인식과 빛의 작용을 이기라는 것 일 것이다. 난 바른 손을 들어 얼얼하지만 시원해진 가슴 근육을 문지른다.
지쿠지에서 나왔다. 타월로 몸을 말리고 옷을 입은 후 식당으로 갔다. 식탁에는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와 구운 감자. 부로쿠리와 빨간 사과 한 알이 차려져 있다. 이런 걸 누가, 언제 차려놨는지 모른다. 난 어려서 읽은 동화속의 우렁이 각시가 차렸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음식을 먹었다. 우렁이 각시가 된 여인은 누굴까? 디저트로 얼은 연시감이 나왔다. 나는 연시감을 좋아한다. 잘 익은 감을 냉동고에 넣었다가 꺼내 조금 녹은 다음에 먹는 그 맛은 어느 아이스크림 브랜드도 못 따를 것이다. 아내는 그 연시감 디저트를 좋아했다. 천천히 연시감 디저트를 끝내고 소파에 앉으니 나른해 진다. 눈을 감는다. 그런데 벽 한군데 창문이 열리듯이 뻥 뚫린다. 그리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나의 공간이 눈부시게 밝아진다. 내가 의아해 하고 있는 동안 그 한 가운데로 투명의 물체가 나타난다. 꿈같기도 하고 무의식 상태 같기도 한 환각속의 내 시야에 해파리 같은 투명체가 나타난다. 허공에 둥둥 뜬 그것은 차츰 사람의 형상으로 변한다. 아니, 단세포 해파리가 진화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도 애초엔 단순 세포 이었겠지. 그 형상들은 하얀 알몸의 여인이 된다. 코레지오의 다나에와도 같다. 그녀는 긴 녹색 실크 스카프를 목에 걸었다. 그것은 분광 색으로 그녀의 하얀 가슴을 거쳐 배꼽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배경음악이 감미롭게 이어진다. 여인의 허리선이 꿈틀거린다. 춤을 추는 것이다. 난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녀는 스카프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것은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날았다. 스카프는 기류를 탄 그라인더처럼 그녀의 어깨선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그때 마다 아로마 샴푸향이 피어나는 듯하다. 스카프는 그녀의 긴 목선에서 어깨로 가슴으로 둔부와 다리 사이 숲에서 비단뱀처럼 기어 다닌다. 그녀의 얼굴 모습은 휘날리는 삼단 머리 때문에 전체를 볼 수가 없고 높은 콧날 아래 핑크색 입술 모양만 미소를 띠우고 있다. 살로메의 춤이 그토록 아름다울까. 그토록 황홀할까. 예술이야. 나는 감탄한다. 한참동안 내 정신을 빼 놓던 그녀는 나를 향해 날아온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그녀를 힘껏 껴안는다. 신혼의 밤에 청각과 시각에서 모두 존재하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7년간 그녀와 핑크빛으로 살았다. 그걸 어찌 잊어. 사랑해. 사랑해. 죽도록 사랑해. 내면 깊숙이 가라앉은 의식의 흐름이 깨어났나 보다.
식사는 언제나 산해진미로 좋다. 한식과 양식과 초밥. 그리고 살짝 얼린 연시감의 후식. 최고의 시설인 체력 단련 실과 환상적인 사우나. 시계만 빼놓고 없는 게 없다. 시간은 우리에게 긴장을 준다. 그런 시간 속에서 실체이면서 허상인 3디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게 일과이다. 이런 공간도 있다. 눈을 감았다. 그 공간이 내 의식 안에서 실체의 영상처럼 살아났다. 그날은 내가 들어가 앉아야 할 지쿠지가 사각형 연못이 되었다. 연못가는 하얀색 화석으로 단장 되었고 그 속엔 갓난아이만한 비단잉어들이 수면에 구멍을 뻥 뚫듯 입들을 벌린다. 그 물구멍 속으로 대기의 신선한 산소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잉어들은 하늘로 떠올라서 한 떼의 큐피드 상이 되어 날아온다. 그 상들이 날 이끌고 허공으로 오른다. 그리고 푹신해서 편안한 의자에 앉힌다. 그라운드 제로보다 약간 높은 곳이다. 아마도 어느 극장의 시설 좋은 좌석 정도 되는 듯하다. 무대는 반원형인 아리나 스테이지이다. 난 옛날 바보 임금처럼 그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햇빛이 눈부시게 가득한 연못가. 그 한 곳 벤치에 여인이 앉아 앉아있다. 여인 앞에서 피에로 분장을 한 쟝두발이 서 있다. 주먹만 한 빨간 코를 달았다. 그는 손거울을 들고 있다. 거울을 통해 여인을 보고 있다.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하얗게 센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들은 모두 키가 정상인의 절반정도로 축소된 난장이들이다. 난 거인국의 걸리버가 되어 그 무대를 바라본다. 가만히 보니 그들은 실체가 아니라 모두 허상들이다. 신의 공간이 아닌 인간이 창조한 공간에 허상으로 존재한다. 저런 기술도 있구나. 아, 그러고 보니 독립 기념관의 유리창 안의 공간에서 난장이들로 영상 처리된 인사들을 본 기억이 난다. 그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총을 맞고 쓰러졌다.
여인은 한 소쿠리가득 구슬을 안고 있다. 색색의 구슬이다. 그녀는 그걸 실에 꿰기 전에 허공에 비춰 보곤 한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후드득거린다. 피에로가 대사를 한다. 육성이 아니라 마이크를 통한 녹음이다. 그래서 공명이 들어가 있다. 피에로는 여인을 보고 말한다. 새는 데. 하늘이 새. 구멍이 났나봐. 맞아. 현대의 하늘은 요실금에 걸려있어. 때 없이 싼다구. 난 객석에서 무대를 향해 그렇게 말을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입을 다문다. 여인도 대답이 없다. 그는 여인을 본다. 여인은 노인을 본다. 피에로도 노인을 본다. 노인은 내게 낮이 익다. 그건 아마 17년 후의 나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배경 막에 영상이 비친다. 청록색 담쟁이로 가득 덮인 절벽이 앞으로 달려온다. 붉은 봉선화 꽃잎으로 쓴 낙서 한 줄이 허공에 둥둥 떠서 눈앞에 바짝 와 멈춘다.「내면의 슬픔은 자유를 억압하지만, 창조하는 사람에겐 축복이다.」스프링클러 물방울이 안개로 퍼진다. 느린 동작으로 거대한 물방울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튀어 오르는 물 파문에 맞은 글자가 깨어지며 흩어진다. 그중 「내면의」란 글자와 「자유를 억압하지만, 창조하는 사람에게는」 이 먼저 지워진다. 나머지 글자인 「슬픔은 축복이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슬픔은 축복이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는 또 소리를 치고 싶어진다. 그 영상을 보고 있던 피에로가 중얼거린다. 새나 본데. 하늘이 새. 노인이 하늘을 보며 조용히 말한다. 그건 분수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야. 피에로는 손거울을 통해 여인을 다시 본다. 여인은 그걸 의식한 듯 미소를 보낸다. 극은 경건한 성당 안에서 미사를 보듯이 진행되어 나가다가 격정적 인 전장터로 바뀐다. 바람소리가 난다. 회오리 바람소리다. 포연이 피어오른다. 그 모습에 피에로는 놀란다. 포화바람에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이 마구 굴러다닌다. 피에로의 과장되게 큰 구두가 꽃잎을 뭉개며 배회한다. 뚱뚱 물방울 소리가 단발의 북소리 같다. 놀란 피에로가 숨을 곳을 찾다가 여인의 치마 밑으로 기어든다. 잠시 침묵 후 그는 치마 밑에서 고개를 내밀며 갸웃거려 생각해 보고 말한다. 새가 날아갔어. 분수대위에서 물을 쪼아 먹던 작은 새가 날아갔어. 고놈은 집이 바람결이라 했어. 피에로가 치마 밑에서 기어 나왔다. 어디에서 들었나? 그런 소리를…. 아, 기억난다. 그 노래. 작은 새란 노랫말이 있다. 마리안느 페이드풀(Marianne Faithfull)의 작은 새. 누군가가 보내온 이 작은 새. 바람결에 산 작은 새. 그녀는 하늘 높이 날아 뭇사람들의 시선이 닿을 수 없게 날았단다. 그가 지상에 닿게 되는 유일한 시간은…. 그땐, 그 작은 새가 죽었을 때 이란다. 작은 새가 되어버린 유년의 남매. 미애와 정웅. 그들이 지상에 닿게 되는 유일한 시간은….슬픔이 목에 까지 찬다. 슬픔은 축복이라고? 미애야. 정웅아…! 아내는 왜 마리안느의 작은 새를 좋아했을까? 우연의 일치겠지. 어디서 떨어지지? 어디로 떨어지지. 실체는 보이지 않네. 넌 보여?" 피에로는 조금 큰 소리로 말 했다. 여인은 미소로 그를 바라만 본다. 조용해 봐…!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르고 싶었던 고함이다. 겁내지 마라라. 노인이 또 소리를 질렀다. 슬픔 때문이에요. 난 기어들어가는 마음의 소리를 내본다. 천정에서 찬바람이 불었다. 무대에선 배우들의 대사가 계속된다. 그놈을 죽여야 해. 누구? 운명. 그놈 불사신이다. 그럼 함께 가야지. 대사가 엇갈려 누가 한 말인지 파악을 못하겠다. 피에로가 여인의 소쿠리에서 구슬 한 개를 들어 이리저리 비춰 본다. 텅 비었어. 이걸 뭣 하러 들여다보고 또 보지. 그는 구슬을 야구선수처럼 던져버린다. 구슬은 분수대 벽에 부딪쳐 터지면서 주르르 액체가 흐른다. 피에로가 소리친다. 아니, 저건 알맹이가 있는 거였잖아. 왜 진작 그 얘길 안 했지? 피에로는 분노에 찬 듯이 소쿠리의 구슬을 마구 던진다. 프리즘 속에서 식칼이 튀어나와 벽에 꽂힌다. 권총이 날아다닌다. 기관 단총이, 대포와 탱크, 제트기, 아파치 헬기, 잠수함. 항공모함의 장난감들이 마구 날아가 벽에 부딪쳐 떨어져 쌓인다. 승용차가, 버스가, 기차가, 트럭이, 고속도로에서, 기차선로에서 충돌사고를 일으킨다. 뒤에서 달려와 들이 받는다. 박살이 난 그것들이 허공에 날아다니다가 빨간 단풍잎, 노란 은행잎이 되어 낙원공원 묘비위에 쌓인다. 난 세상에 모든 장난감들을 그들의 묘비위에 쌓았었다. 선글라스의 여인이 나타나서 피에로를 가시나무 가지에 매단다. 피에로가 그 나무에 십자가 형태로 매달린다. 가시가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낸다. 피에로는 피투성이가 된다. 그 핏방울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음향으로 바뀐다. 한줄기 빛이 피에로에게 떨어지며 부활의 메시아 곡 같은 장엄한 배경음악이 퍼진다. 여인이 다 궨 구슬목걸이를 피에로의 목에 걸어준다. 음악은 계속되고 구슬 하나하나에서 벌레 같은 것들이 꼼지락 거리며 껍질을 깨고 나타난다. 그것들 중 하나가 허공에 클로즈업된다. 그것은 날개달린 천마가 된다. 또 다른 구슬에서 나온 벌레들은 귀여운 날개를 단 큐피드들로 변화되어 천마위에 날아오른다. 그들은 이 땅으로 큐피드의 화살을 쏘면서 하늘로 날아오른다.
조명이 꺼지고 여인이 스포트라이트 안에 서 있다. 그 녀는 미소의 가면을 벗어든다. 여인은 노부인이 됐다. 그 옆에 내 모습의 노인이 다가와 선다. 피에로가 그 녀 옆에서 빨간 코를 때어 노인에게 준다. 노인이 그 코를 자기 코에 붙인다. 노인은 노부인을 본다. 노부인도 노인을 본다. 둘은 포옹을 한다. 물방울 음향이 유쾌하게 튄다. 무대와 객석이 환해진다. 난장이배우들은 손을 잡고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다. 난 박수를 치다 만다. 내 주변에서 다른 박수치는 소리를 못 들었기 때문이다. 암전이 되고 무대는 사라졌다. 이런 혼란스러운 연극을 왜 내게 보여주었을까. 난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린다. 어느 때부터 난 깊이 생각하는 기능을 잃었다. 대신 생각할 일이 생기면 입을 딱 벌린다. 문이 열리고 쟝두발이 피에로의 옷을 입은 채 들어온다. 난 의아해서 그를 본다. 그는 손짓으로 날 부른다. 우리는 어두워진 밖으로 나왔다. 많은 별들이 검은 바다위에 떴다. 바닷바람이 서늘하고 찝찔하게 느껴진다. 그는 성큼 앞서간다. 횃불 디자인의 보안등이 촘촘히 켜진 바닷가 오솔길을 돌고 돌아 처음에 도착한 3디 카페에 다 달았다. 황금 달빛이 3디 카페의 간판인 세라믹 글자에 가득 내린다.
나는 맨 처음 안내되었던 수족관 같은 방 안으로 들어선다. 거기엔 씨이오 여인이 날 기다리고 있다. 거리를 좀 두고 떨어진 의자 앞엔 랩톱 컴퓨터가 켜져 있다. 녹음기도 준비되어 있다. "앉으세요." 여인이 공명의 음성이 아닌 라이브 목소리로 말한다. 난 편안한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삭인다. 장 두발이 커피를 날아온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쟝두발이 고개숙여 인사하고 나가자 그 방엔 씨이오 여인과 나 단 둘 뿐이다. 한참 침묵 후다. "시작하실까요?" 여인이 흐느끼듯이 말했다. "네.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죠." 나는 녹음기를 켠다. 그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알면서 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온 교통사고 후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랩톱에 주어 담는다. 3디지털 카페에서 아날로그 스토리텔링이 시작 됐다. 그때에 갑자기 내 의자가 흔들린다. 벽이며 천정이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굉장한 속도로 달려간다. 롤로코스트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난 벼랑으로 떨어지는 느낌에 빠져든다. 그때 내 손을 잡아주는 손을 느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