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 안혜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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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제목 : 태초에 사랑은 울지 않았다.
안 혜 숙
영업용 택시 서치라이트가 잿빛으로 물들어가던 골목길을 환하게 비추고 지나간다. 나는 차 안에 탄 사람이 훈이란 걸 알자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막다른 골목에서 차를 돌려야 하는 운전기사의 황당한 얼굴과 원리 원칙을 내세워 따지기를 좋아하는 동생의 한바탕 실랑이가 눈으로 안 봐도 훤히 떠올라 걸음이 저절로 늦춰진다.
우리 집으로 가는 이 길목은 일차선 비포장도로에다 약간의 경사로여서 50미터만 지나면 숨이 차올라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허리를 펴고 숨을 고르기 위해 발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초록색 지붕을 올려다본다. 가끔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느끼는 은근한 유혹이 오늘은 발동이 걸린다. 동생의 싸움판에 들어가는 것보다야 남의 집 훔쳐보는 일이 훨씬 흥미롭지, 발을 성큼 떼기도 전에 입놀림이 바쁘다. 윗입술을 깨물고서야 또 미친 짓에 열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놀이터로 몸을 꺾는 나는 집 울타리를 넘어 담벼락을 기어가고 있다.
얼마 전 동생과 함께 산책하다 이곳 놀이터를 발견했다. 잠시 쉬었다 갈 요량으로 나는 그네에 앉고 동생은 백 년은 넘었을 우람한 뽕나무 한 그루를 두 손으로 한 아름 안아보고는 듬직하네, 라며 웃었다. 덩달아 나도 웃긴 했지만 내 눈길은 바로 옆에 있는 외딴 집에 가 있었다. 빛바랜 초록색 슬레이트 지붕이 몇 군데 천막 천으로 덮어져 있고 그 사이로 벽을 타고 올라온 담쟁이넝쿨은 제멋대로 길을 잃고 서로 얽혀 있었다.
“누나는 저 집에 불 켜진 거 봤어?” 동생 말에 나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놀이터 옆 담을 끼고 남의 집을 살펴보게 되었고, 집안을 훔쳐볼 수 있는 뒷담 쪽 창문을 발견했다.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던 동생이 커튼 자락이 중앙으로 맞물린 양쪽 사이에 약간의 틈새가 벌어져 있다고 창문 틈새로 눈을 가져다 댔다. 뭐가 보이냐는 내 귓속말에 동생은 조용히 하라는 시늉으로 입술에 손을 대고는 다시 창문에 눈을 바짝 붙였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동생이 내 손을 잡아끌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그만 가자고 잡아끌었지만 나는 동생의 입가에 번진 이상야릇한 미소를 놓치지 않았었다.
그날 이후 가끔 이 집 앞을 지나칠 때면 동생의 그 묘한 미소 때문인지 초록색 지붕이 그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다 결국 며칠 전에는 창틈으로 방안을 훔쳐보게 됐고, 눈을 갖다 대자마자 환한 불빛에 드러난 수족관 안에는 형형색색의 구피새끼들이 부채질을 하듯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수족관 옆에 놓여 있는 책꽂이에 서너 권의 책들이 반듯하게 꽂혀 있고 책상 앞에 의자는 침대를 향해 있는 걸 보면 혼자 사는 집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침대가 싱글이었고 흐트러져 있는 이불과 베개도 일인용이었다. 바로 그때 마른기침소리가 났다. 흠흠… 분명한 남자 목소리에 나는 겁이 왈칵 나서 그대로 창문 밑으로 몸을 숨겼다가 발소리가 나지 않게 도망을 치고 말았었다.
오늘은 그 기침소리의 남자를 보고 말리라, 도둑고양이처럼 창문에 착 달라붙어 커튼자락 사이를 들여다본다. 헐! 나는 눈을 떼고는 또 입술을 깨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뛰어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당장 돌아서 도망치려 했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호기심은 기어코 창틈 사이로 눈으로 후비듯 훔쳐본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남자는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옆모습으로밖에 볼 수 없는 남자의 오른팔 손놀림이 체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뭔가를 닦거나 문지르는 듯 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나는 좀 더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렸고, 그 순간 남자의 고개가 번쩍 쳐들어 졌는데. 그의 두 눈이 초점을 잃고 멍하니 금방 뒤집힐 것 같았다. 간질병인가? 나는 순간 핸드폰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11까지 눌러 놓고 다시 한 번 창틈을 들여다봤다. 엉덩이를 쳐든 그의 손이 책상 위 사각 티슈통에서 한 움큼의 종이를 뽑아내서 사타구니로 가져가는 게 아닌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핸드폰 뚜껑을 닫으며 9를 안 누르기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왜 금방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괜히 허탈한 생각도 들고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이어서 발길을 놀이터로 돌려 그네에 앉았다. 우두커니 앉아있다 하늘만 멍청히 바라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불쌍한 사람 또 있네! 나도 모르게 튕겨져 나온 말에 어깨를 들썩하다가 오동나무를 보자 동생이 했던 것처럼 두 팔을 활짝 펼치고는 나무를 안아본다. 그러나 내 품은 어림없다는 듯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네로 돌아가 중심을 잡고 앉았다. 두 다리를 쭉 뻗고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어 그네를 굴린다. 내 몸이 허공으로 날았다. 다른 때 같으면 하늘을 나는 기분에 다시 한 번, 구름이라도 뚫을 듯 힘찬 발 돋음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발을 구르지 않았다. 허공으로 솟아야 할 내 몸이 마치 바람인 듯 허공에서 흩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쓸쓸하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낮에 선 본 것도 그렇고, 방금 전에 본 이상한 남자의 마스터베이션 때문인가? 암튼 기분이 더럽다. 이런 기분은 한 방에 날려버려야지….
나는 그네에 두 발을 올리고 일어서서 발을 가지런히 모아 그넷줄을 잡은 뒤, 두 발을 힘껏 굴리며 엉덩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내 몸이 나비처럼 사뿐 차올라 하늘을 향한다. 구름 속에 나부끼지는 않았지만, 참새들은 놀라서 잠을 깨고 나래를 폈을 것이다.
걸음을 떼자 기분은 그대로고 발길은 무거워서 그 이유를 찾는다. 무엇 때문일까? 불현듯 그 남자의 눈빛이 떠오른다. 누구지? 누군가? 누구였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동생을 불렀다.
“그 남자 봤지? 놀이터 옆집 말이야, 그 집 남자 본 적 있지?”
동생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다가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 남자, 그 짓 하는 거 보고 그러는 거야? 그러게 왜 그런 걸 훔쳐 봐? 그리고 놀라긴 뭘 놀래? 포르노 영화도 보면서….”
이게, 동생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선 본 건 어떻게 됐어?”
“말 안 하면 뻔하지, 뭘 기대 해?”
“또 아니야? 이번엔 뭐가 트집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 그런 남자가 다 있니? 글쎄,”
나는 말도 하기 싫어서 방으로 들어갔지만, 동생은 방까지 따라 들어와 의자에 앉는다.
"글쎄, 차만 겨우 마셨는데, 기가 막혀! 호텔에 가서 편히 쉬면서 얘기하잔다. 미친 놈 아니니?"
"난 또 뭐라고. 솔직해서 좋네. 40대 맞선은 섹스부터 챙긴다잖아, 그 남자 괜찮다 후후훗."
"그 웃음은 뭐야?"
"그냥 미친 척하고 따라가지 그랬어. 또 놓친 거야? 그놈의 첫사랑이 또 발목을 잡은 거야?"
나는 티슈를 툭 뽑아 얼굴을 쓱쓱 문질러 화장을 지운다.
"그렇게 빡빡 문지르니까 주름살이 생기지. 가만가만 닦아내, 남자도 가만가만, 부드럽게…."
불쑥 티슈를 한주먹 뽑던 남자의 행동이 떠올라 괜히 얼굴이 화끈해서 동생을 밀쳤다.
"너나 여자들한테 잘하고, 장가도 가고. 엄마도 모셔와. 너 장가가면 요양소에서 나오신다잖아.“
동생이 휭 하니 방을 나가버려서 삐졌나 했는데, 금방 되돌아오더니 비디오 테프를 하나 툭 던져 준다. 나는 그걸 집어서 다시 동생에게 던졌다.
“이상한 거 아니야, 봐봐!”
동생은 내 얼굴을 심각하게 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누나는 중기형 아니면 안 되는 거지?” 나는 동생을 쏘아봤다.
“그거 내 여행 선물이야, 중기 형을 봤거든. 일정이 너무 바빠서 비디오로 대충 훑었는데, 편집하다 보니까 중기형이 찍혔더라. 가이든가봐. ”
“내가 봐서 뭘 어쩌라고?” “어쩌긴, 아직도 가슴이 뛰는 지 확인해 보라고. 가슴이 뛴다면 내가 데려다 줄려구.” 동생은 비디오 박스에 테프를 넣고 전원 스위치를 누르면서 나를 슬쩍 훔쳐본다.
"선 본 건, 잊어버려! 신세 진사람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며? 빚 하나 갚은 거지 뭐…."
영상화면에는 올리브나무가 울창한 계곡 사이로 한줄기 햇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빛이 나를 향해 비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빛 사이로 중기의 음성이 내 귓가에 쟁쟁 울렸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전설은 사람마다 그 해석이 다르다고 했다. 중기는 전공이 역사여서 그런지 그리스 여행 중 전설에 대해 설명하는 걸 좋아했다. 나야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그의 말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이디푸스가 왜 자기의 두 눈을 뽑고 왕좌를 버렸는지 알아?”
“원수라고 죽인 테베 왕의 부인 테베여왕이 자기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여왕과 결혼을 했기 때문 아냐?” “맞아,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야, 테베왕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는 신탁을 받았지. 그래서 왕은 그 비극을 피하기 위해 갓 태어난 아들을 버렸지만, 그 아들은 목동의 손에 구출되었고, 성장하여 테베 왕인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가 되는 여왕과 결혼을 해서 영웅이 되지.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절망하고 자신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왕좌도 버린 채 길을 떠나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어.”
“그 형벌은 누가 내리는 건데?”
“물론 신만이 내릴 수 있지. 인간과 신의 차이가 뭔 줄 알아? 인간이 모르는 비밀을 신은 알고 있다는 거야.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신을 이길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오이디푸스의 형벌은 더 가혹했던 거야. 그의 아들 쌍둥이 폴리니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아버지가 버린 왕좌에 오르기 위해 칼부림을 하다 결국 둘 다 죽게 되고.”
나는 쓸데없는 말만 하는 중기가 얄미워서 그의 말을 가로막고 끼어들었다.
“그다음은 나도 알고 있어. 그들의 여동생 안티고네는 오라비들의 시체만이라도 찾기 위해 테베 성벽을 헤맨다.”
중기는 손뼉을 쳤다.
“훌륭하다는 거야? 그렇다면 인증!” 나는 중기에게 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중기는 딴전을 부렸다.
“인증보다 더 확실한 게 있지. 바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안티고네의 환영.”
“말도 안 돼! 안티고네가 아니고 오빠가 나를 인도한 거잖아, 오빠의 비약은 너무 심해. 역사 전공자들은 뭣이든 의미를 부여해야만 직성이 풀리나 봐. 그래도 난 상관없어. 난 오빠 옆에만 붙어 다닐 수 있으면 되니까.”
그때, 중기는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나를 왜 그곳에 데려간 걸까. 나는 마냥 즐거운데 오빠는 계속 우울해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이별을 준비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전에서 붙잡혀 간 그 해, 나한테는 전화 한 통 없이 결혼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나는 버림을 받은 것이고, 그 악몽 같은 실연의 세월을 지금까지 견디며 살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잠시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눈을 들어 화면을 본다. 눈에 낯설지 않은 성벽들, 미케네 성벽의 암사자 성문이 지나간다. 그 순간 아가멤논과 크리타임네스트의 침실이 떠오른다. 그 침실을 보면서 나는 오빠와 둘이 나란히 눕는 상상으로 가슴이 부풀었는데 오빠의 신화는 친어미를 죽여야 하는 가혹한 운명의 신들을 가여워하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과거로 빠져드는 내 어리석음이 싫어서 리모컨을 들고 전원을 누르려다 멈칫 화면에 집중한다. 페허가 된 미케네 성에서 깃발을 든 남자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암사자 성문이 클로즈업되면서 곧바로 성문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아, 깃발을 보였다. 나는 그 깃발을 따라가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고, 금방 관광객들 사이에서 모자를 벗어 이마에 땀을 닦는 사십 대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년의 얼굴이 잠시 오버랩 되는 순간, 내 심장이 요동을 쳤다. 나는 가슴을 두 손으로 짓누르고 그를 쳐다봤다.
한 손에 깃발을 들고 인원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 성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세우며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돌린다. 바로 그 찰나, 중기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그대로 멈춰 있다. 나는 갑자기 긴장하고 아무 생각이 없다. 어쩌자고 동생은 이 얼굴을 보여준 것일까? 내가 그리스를 자주 가고 그리워하는 걸 중기와의 추억 때문이라고 생각한 건가, 나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지만, 가슴에 한 방의 총을 맞은 듯 심장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잃어버린 것은 완전히 잃어버려야 한다. 무엇인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지독한 통증뿐이다. 그 통증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 나락에 떨어지고 싶지가 않다. 세상에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며칠째, 나는 놀이터에 들러 그네에 앉아 옆집을 자주 흘금거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슬쩍 뒷담으로 돌아가 창문 틈새를 몰래 훔쳐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실은 그 얼굴을 한 번만 더 보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줄기차게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방안에 사람의 기척이 없는 것 같아서 실망하고 돌아섰다. 바로 그때, 내 앞으로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나는 당황하고 섬뜩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분명 아는 얼굴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보통 키에 유난히 콧날이 오뚝하고 살집이 없는 체구, 비슷한 사람이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쳐다봤는데, 그 남자 역시 나를 알아보는 듯 흠질 놀란 눈치였다. 그런데도 그는 슬그머니 나를 피하듯 그냥 힁하니 내 앞을 비켜 대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무안한 생각이 들어 그 자리를 피해 발길을 집으로 향하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그 남자 역시 뒤를 돌아보다 내 눈과 딱 맞닥뜨렸다. 분명 아는 얼굴이라는 확신이 들자 궁금증은 더 확산되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중매든 소개든, 맞선이란 형식으로 마주했던 남자들을 떠올리면서 방금 전에 만났던 남자의 얼굴을 다시 그려봤다. 앞이마를 가려서 이마는 볼 수가 없었고 코는 길었던가? 아니, 뭉툭한 것도 같고, 꾹 다문 입 때문인지 전체적인 인상이 과묵해 보여서 보통은 호감이 가는 얼굴인데, 왜 섬뜩하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왜 그래? 넋 나간 사람처럼, 아직도 비디오 때문에 충격받은 거야?“
“혹시 그 남자 얼굴 자세히 봤니?” “또 그 남자야? 우리 누나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 그 남자 마음에 들어서 그래?”
“그게 아니야,”
“그럼 시집 못 가더니 남자 귀신까지 붙은 거야? 그 남자가 누구야? 무슨 남자? 길바닥에 깔린 게 남자잖아!”
나는 동생 보기가 민망해서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다말고 옷을 훌훌 벗어버린다. 속이 타는 것 같아서 샤워 꼭지를 잡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흠질 놀란다. 눈꼬리 잔주름은 자글자글하고 입가에 팔자 주름은 푹 폐였고 목에는 세로 주름까지 보인다. 내년이면 40이니 당연한 현상이다. 나는 좀 더 아래로 눈길을 주고는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싼다. 살이 빠져서 그런지 탄력이 없다. 내 보금자리! 중기는 내 가슴을 안을 때마다 내 보금자리라고 얼굴을 묻곤 했다. 나는 뜨거워진 눈시울을 샤워기를 틀어 찬물로 식힌다. 주인을 잃은 보금자리, 황폐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중기와 나의 사랑, 그 기원은 언제부터일까, 나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날이라고 기억하고, 중기는 내가 더 어려서 나를 봤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중기는 입학식 날 엄마가 낯선 남자와 인사를 나누다가 교문 옆에 매달려 있는 그네를 가리키며 그곳에 가서 놀고 있으라고 했다. 엄마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네에 올라앉은 나는 엄마가 있는 곳을 봤는데, 아저씨 옆에 있던 남자애가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더니 아는 체했다. 또 보네, 나는 그 말뜻을 몰라서 잠자코 있었고 그 애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오더니, 내 그네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하지 마!”
나는 한 번도 타보지 않은 그네라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지만, 내 몸은 이미 공중으로 날았다. 내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다시 그네를 밀었는데 처음보다 더 높이 날았다. 나는 무서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점점 높이 나는 내 몸이 깃털을 단 듯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그때 아저씨가 그 애를 불렀다. 그 애는 한 번 더 그네를 힘껏 밀어주고는 아저씨한테로 달려갔다. 그 애가 가버리자 높이 날았다 내려오던 내 몸이 갑자기 고무풍선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힘을 잃어서 무서웠다. 마침 엄마가 왔기 때문에 불안했던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학교 복도에서 그 애를 만났는데 자기는 3학년이라고 했다. 난 중기야, 중기는 우리 이모가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를 따라서 병원 영안실에 왔다가 나를 봤다고 했다. 중기는 인형처럼 예쁜 내가 계속 울기만 해서 너무 속이 상했다면서 내 볼을 꼬집었고 나는 볼이 많이 아팠지만 아무 말 안 했다. 그때부터 중기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되었고 우리 집도 드나들었다.
우리는 대학생이 되면서 방학이 되면 함께 여행할 만큼 가까워졌다. 결혼은 기정사실이었는데 느닷없이 오빠에게 혼처가 나타난 것이다. 그날부터 오빠의 발걸음이 끊어졌지만 나는 중기오빠를 믿었다. 내 믿음처럼 오빠는 졸업기념으로 학교 동아리에서 그리스를 가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그 여행을 나는 오빠가 내게로 완전히 돌아온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번에는 우리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는 부녀관계를 끊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완고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다고 버티다 아버지에게 감금까지 당하게 되었지만 중기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점점 절망감에 빠져 침식도 잃어갔는데 엄마로부터 중기의 소식을 들었다.
“이제 더 이상 버텨봤자 너만 손해야. 우리도 어쩔 수 없다. 그쪽 집에서는 결혼식 날짜도 잡았단다. 나도 어제 아버지한테 들었다. 그러니 이제 포기해라.”
나는 할 말을 잃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나 울었는지 울다 지쳐서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엄마 목소리에 잠이 깼지만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
“이제까지 울다가 금방 잠들었어요.”
“당신 말 듣고 포기한 거야?”
“저라고 무슨 수가 있겠어요? 아무 말 않는 게 포기한 것 같아요.” “잘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말해줄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모든 게 다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모르고 그렇게 된 걸 어떻게 해요.”
“그래도 우리 연이가 빨리 포기를 해 줘서 고맙네.”
아버지의 목소리가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뭘 모르고 한 일이라는 건지,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오빠를 만나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다음 날 엄마가 가져다주는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고 일상으로 돌아간 척 책상에 앉았다. 저녁나절에 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내 등을 토닥이셨다.
“연이야, 고맙다. 이렇게 털고 일어나줘서 정말 고맙다.”
밖으로 나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보, 나도 이제 해방이요. 나 잠깐만 나갔다가 올 테니 저녁은 맛있는 요리 좀 해봐요. 연이 좋아하는 콩국수 할까? 아니지, 그동안 못 먹었으니 갈비찜이 좋겠다.”
아버지의 들뜬 음성과는 달리 엄마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금방 무슨 입맛이 돌겠어요. 그 속이 제대로 된 속이겠어요. 나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저 어린 것이 얼마나 아플지….”
“세월이 해결해 주겠지. 우리 잘못도 아닌데, 당신도 마음 쓸 것 없어. 모든 게 다 운명이야, 그래도 지어미를 닮아서 결단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여보!”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아버지는 아, 실수! 라고 작은 소리를 내고는 나가신 것 같았다. 내가 엄마 성질을 닮아 결단력이 있다고? 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야 매사가 분명하고 똑 부러진 성격이지만 나는 매사가 좋은 게 좋고 남의 말도 잘 듣는다. 나는 싸움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누구와 시비가 될 만한 일이 있으면 피해버리던지 포기해 버린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내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기오빠 없는 내 미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내 성격 파악을 못 하시는 아버지가 서운하긴 해도 다행이다 싶었다. 마침 엄마가 쥬스를 들고 들어와 마시라고 했고, 나는 단숨에 쥬스를 마셨다.
“목이 많이 말랐었구나. 아픈 곳은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엄마가 해 줄게.” “엄마가 해 준 건 뭐든지 맛있어. 뭐든지 좋아.”
“그래? 그럼 우리 저녁에 갈비 먹자. 너 영양보충 해야지, 아버지도 갈비 해 주라고 했어.”
엄마는 서둘러 나가시면서 마트에 좀 다녀오시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나가시는 걸 보고 바로 서둘렀다. 내 소지품은 이미 아버지가 모두 압수를 했기 때문에 내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안방으로 갔지만, 문이 잠겨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중기에게 전화를 해서 무조건 집 근처 초등학교 교문 정문으로 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무조건 지금 당장 나오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내 안중에는 부모에 대한 미안함이나 가책 같은 것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부모님께 잡히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중기는 오래 걸리지 않아서 나타났다. 몹시 놀란 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와락 껴안았다. 그의 눈에서 물기가 비쳤다. 그 순간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오빠도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픈 거야, 그렇다면 나라도 용기를 내야지. 나는 중기에게 당장 도망가자고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란 말은 못하겠다. 널 어떻게 설득시킬 방법도 없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나는 고개가 땅에 떨어질 만큼 깊숙이 숙였다.
“그럼, 여기서 한 시간 정도만 기다리고 있어. 일단 어디든 가서 너를 좀 쉬게 해야겠어. 집에 가서 돈을 좀 마련해 올 테니….”
내 손을 놓고 일어서는 중기의 손을 다시 잡았다.
“몹시, 떠는구나. 걱정 마, 될 수 있으면 빨리 올게.” 중기는 내 어깨를 한 번 더 안아주고 찻집을 나갔다. 나는 가슴이 떨려서 입술을 꼭 다물었다. 갑자기 입술이 아파서 손을 뗐더니 피가 묻어나온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던 것이리라.
한 시간이면 온다던 중기는 세 시간이 넘어서야 나타났다. 우리 집에서 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중기까지 감시를 받았던 듯,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집에는 못 들어가고 친구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서둘러 나를 데리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간 그는 대전으로 가자고 했고 나야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버스가 출발하고도 한동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중기의 손을 굳게 잡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차들을 바라보다가 흑, 소리를 내고 말았다. 중기는 내 어깨를 와락 껴안아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우리가 목적지 대전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다 되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우리 둘 다 이미 지쳐있었기 때문인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손만 잡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눈을 뜨고서야 내 옆에 중기가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실감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있는 오빠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이 남자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았다. 순간 그의 가슴에 안기고 싶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기댔고 그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나를 껴안아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내 숨결은 이미 그의 입술에 끌려들어 가면서 심장에서는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북소리에 내 몸이 출렁거렸다. 그의 숨결이 내 숨결을 삼키려는 찰나였다. 그는 나를 밀어내고 넋이 나간 듯 우두커니 앉아있었고, 나는 무안하고 부끄럽고 당혹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는데 그만 울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는 나를 다시 품안에 보듬어 안고 어린애 달래듯 내 등을 한 손으로 토닥거렸다.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던 거야, 미안해, 더 이상 너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어.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나는 너무 큰 충격에 잠자코 있었다. 상처라니? 우리가 처음도 아닌데. 우리의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그의 희열을 내 몸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차마 결혼 날짜를 잡았느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내 전화 한 통에 바로 뛰어나오지 않았는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어둠밖에 깔리지 않은 세상이지만 밤하늘은 찬란하게 빛났다. 그 속에서 별들만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별처럼 붉게 타오르던 내 몸이 바싹 말라비틀어지는 듯 움츠러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동차의 소음이 밤 부두에서 들려오는 고동소리처럼 구슬프게 들렸다.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 남자, 나는 침대에 넋 놓고 앉아 있는 중기를 돌아봤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옆에 와 앉으라는 시늉을 했는데 그 순간 내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어쩌면 저 남자는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 그의 앞에서 입은 옷들을 하나하나 벗었다.
“연이야! 제발… 이러지 마!”
중기는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그대로 화석이 된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눈물을 흘렸던가? 아니,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던 것 같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으리라.
중기는 한 시간도 안 돼서 모텔로 돌아왔다. 손에는 햄버거와 우유가 들려있었다. 나는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냥 가버린 줄 알았다는 내 말에 배고프겠다고, 우선 먹고 생각하자고 했다.
“친구가 이곳 교외에서 농장을 한다고 했어. 며칠만이라도 그곳에 가서 좀 쉬자. 그리고 생각하자. 친구를 만나보고 올 테니 꼼짝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어린애 달래듯 내 몸을 침대에 눕혔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고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숨이 가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연이야, 걱정 마, 오빠가 꼭 돌아올 테니, 내 손을 가만히 놓는 오빠의 손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래, 입술에 피 나지 않니. 오빠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에 피를 닦아주고는 일어났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오빠의 눈과 마주쳤다. 오빠는 얼른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입맞춤은 내 가슴을 열어주는 순한 바람처럼 나를 포근한 잠 속으로 이끌었다.
밤새 중기는 돌아오지 않았고 밤을 지킨 나는 절망감에 빠져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열자, 우뚝 서 있는 경찰관이 대뜸 김중기 씨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경찰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어디 있어요?”
“그 사람 회사 공금횡령으로 수배된 인물인 줄 몰랐어요? 어젯밤 검문에 걸려 서울로 이송되었습니다.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하겠답니다.”
경찰관은 경례하고 돌아서 가버렸다. 나는 울음을 참아야 했다. 입술을 깨물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그가 다닌 회사는 그의 아버지 회사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지명수배 내릴 정도로 나를 싫어하는 줄은 몰랐다. 잘 사는 사람들은 못사는 사람들을 벌레 보듯 한다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사업에 실패하고 부도만은 막아보겠다고 잘 나가는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와서 하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부도수표 남발 죄로 2년의 구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마쳤지만 심한 우울증으로 집 밖 출입을 삼가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이번 일로 얼마나 상처가 크실까, 다급해지니 부모 생각이 난 건지 엄마와 동생 얼굴도 스쳤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 들어가는 일은 너무나 뻔뻔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 쉬고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똑똑히 인식했다. 명문가의 딸과 결혼이 정해져 있는 현실 앞에 오빠라고 별다른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아버지의 말에 늘 복종하는 스타일이었고, 어머니의 사랑은 늘 자애롭다고 자랑했다. 그런 아들이 어떻게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내가 바보였다. 나는 우리의 사랑만 생각했지 현실에는 어두웠다.
모텔을 빠져나오는데 길가에 앉아 몇 가지 채소들을 놓고 파는 5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나에게 손짓을 한다. 하나만 팔아주고 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수중에 땡 전 한 푼 없는 설움보다는 저깟 야채 한 줌 사줄 수 없는 내 처지가 슬펐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만은 졸업시키겠다고 아버지는 요즘 경비일 자리까지 알아보고 계신다고 들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부도만 나지 않았어도 이렇게 심한 반대에는 부딪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방 머리를 흔들었다. 마침 가로등 가판대에 꽂혀 있는 벼룩시장 광고지가 눈에 띄었다. 우선은 숙식제공이 된 곳부터 찾아갔다. 낮에는 차를 팔고 밤에는 술도 판다고 했다. 찻집은 몰라도 술까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돌아서려는데 주인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럼 카운터를 보면 어떻겠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경리라고 했다. 돈만 잘 받으면 된다고 해서 그대로 그 집에 눌러 있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내 일자리는 말이 경리지 급할 땐 안주 접시를 날라야 했고 손님이 옆에 앉으라고 하면 앉아야 했다. 겨우 이틀이었지만 손님들은 막무가내로 술을 권했고 싫다고 거절하면 욕부터 퍼부었다. 그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주인에게 그만두겠다고 했다.
“당장 나가면 오늘 밤 장사는 어떻게 해. 오늘 밤만이라도 봐주고 가야지.” 그날 따라 손님이 많아서 테이블까지 도와줘야 했다. 손님 테이블에 안주접시를 내려놓는 순간, 내 허벅지로 들어오는 손에 기급하고 옆자리 손님 얼굴을 봤다. 그 손님이 씨익 웃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지만 입술만 깨물고, 접시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는데 그 손이 또 다시 허벅지를 더듬는 게 아닌가.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접시를 들어 남자의 면상에 쳤다. 악, 소리와 함께 얼굴에서 피가 튕겨 나왔다. 나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가렸고, 홀 안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어 시끄러웠다. 누군가 112에 전화를 했는지 경찰관이 오더니 나를 백차에 태워 경찰서로 데려갔다. 신분증도 없는 처지이다 보니 바로 유치장에 수감되어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불렀다. 그 이후 중기오빠는 아직까지 한 번도 내게 연락한 적이 없다. 그때만 해도 나는 순진해서 세상 이치를 몰랐었다. 사랑 같은 건 찰나에 느끼는 한 순간의 희열일 뿐이라는 걸.
며칠 간 다녀오겠다고 훌쩍 떠난 동생이 공항이라고 하면서 어디냐고 묻는다. 마침 휴일이라 엄마 요양소에 가려고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 나도 같이 가게.”
동생과 통화를 끝내고 엄마에게 가져갈 물건들을 챙겨놓고 소파에 길게 누워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동생이 온 줄 알았는데 의외의 남자가 서 있어서 흠질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놀이터에 그 집 남자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다 누구시냐고 물었다.
“날 보고 누구냐고?”
“아, 봤어요? 나는 그냥 호기심에….”
나는 말하기도 부끄러운 장면을 설명하는 것 같아서 입을 닫아버렸다.
“남의 신세를 망쳐 놓고도 뻔뻔스럽게 내가 누구냐고? 그래놓고는 호기심이라고? 너 정말 잘 만났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렇게 같은 동네 사는 줄은 몰랐네,” 다짜고짜 잡아먹을 듯 대드는 바람에 나는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문 안 열어? 문 열고 내 얼굴을 똑똑히 보라고, 내가 너 때문에 십 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
전혀 알아듣지도 못한 말에 나는 문을 열었다.
“나는 빈 집인 줄 알았단 말에요, 그리고 누가 그런 짓 하고 있는 줄 알았나? 그래서 날 어쩌라고? 훔쳐봤다고 고소라도 할 거야? 그리고 누구한테 반말이야?” “어디서 둘러대기는? 시치미 딱 떼겠다 이거지? 기가 차네, 설마… 아,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비너스, 맞다 비너스 카페. 이래도 발 뺌 할 거야?”
나는 심장이 딱 멎는 줄 알았다. 대전의 카페 이름이 비너스였다.
그렇다면… 나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때 얼굴이 아니었다. 잠깐, 코가 부러졌다는 말은 경찰서에서 들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코를 성형해서 몰라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디서 본 듯했는지도. 나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화를 벌컥 냈다.
“당신이 그 뻔뻔하고 음흉한 그 치한이란 말이지요? 나 같으면 창피해서도 아는 채 않겠다. 뭐가 큰 자랑거리라고 이렇게 달려와 다짜고짜 행패에요? 당장 나가세요. 불결해!”
그때 동생이 대문으로 들어오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별 미친놈이 다 있어, 글쎄 그때, 대전서 내 허벅지에 손 밀어 넣던 그놈이란다. 난 못 알아봤는데 지입으로 말해주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다니 웃기는 일 아니니?”
그 사이 남자는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동생은 남자를 달래며 함께 나갔다가 30분이 지나서 돌아왔다.
“아, 피곤해서 오늘은 엄마한테 못 가겠다. 너무 늦기도 했고. 아, 전화해야겠네.”
동생은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형, 내일 갑시다. 너무 늦어서 안 되겠어. 내일 호텔로 모시러 갈게요. 네? 혼자 다녀오겠다고요? 왜요? 그래요, 그럼. 내일 연락주세요.” “누군데?”
동생은 난처한 듯 말을 못하다가, 그냥 아는 형인데 그 형도 그곳 요양소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가기로 했는데, 내일은 시간이 없다고 혼자 다녀온다고 했다며 얼버무린다.
“사실은 나도 지금 다녀오고 싶은데, 내일은 시간이 없을 것 같거든. 많이 피곤하구나?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 어차피 준비도 했고. 넌 좀 쉬어. 아, 밥은 밥통에 있으니까 알아서 먹고. 참, 그 미친놈 얘기는 다녀와서 듣자.”
“잠깐, 나도 갈래. 그 대신 운전은 누나가 하기다.”
나는 운전대에 앉자마자 그 남자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동생은 그 남자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며 나를 놀리더니, 그 남자도 불쌍한 인생이라고 했다.
“누나 앞길이 왜 그렇게 꼬이는가 했더니 바로 그 남자 때문이었던 가봐. 누나한테 얻어맞고 콧대 부러져 성형하고 그 바람에 직장까지 잃었다나 봐. 더구나 성추행하다 코뼈 부러졌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마누라한테 이혼까지 당했단다. 이유야 핑계고 직장 잃고 백수로 오래 살다 보면 마누라가 붙어있겠어? 요즘 여자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그러고 보면 누나는 영악하지도 못하면서, 그깟 첫사랑이 뭐라고 자기 인생을 패대기치듯 내던져 버려? 그래도 그 남자는 살아보려고 안 해 본 일 없이 다 해 봤다더라. 그나마 어머니가 저 집에 살다가 가셔서 자기 몫이 됐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없어서 사는 게 아무 희망이 없다나. 아마 누나가 그 남자 만났던 날인가 봐 그 남자는 한눈에 딱 알아봤대. 처음엔 창피해서 피했는데 집에 들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가 피할 일이 아니더래.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더니 청산유수로 늘어놓더군. 술 취한 사람 얘기 들어주는 것도 보시라는 엄마 말, 우리 귀가 닳도록 들었지.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 사람 얘기 좀 들어주고 오느라 이제 왔어. 누나 만나려고 매일 집 앞에서 망보다가 우리 집을 알아냈나 봐.
“그래서 날 보고 어쩌라고?” “자기 인생 책임지라고 하면 어쩔래?”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재수 없는 소리 할래?”
동생은 혼자 웃더니, 솔직히 그 남자 괜찮았어. 사람이 순수한 데가 있더라고, 나 같으면 누나 만나자마자 한 방 갈겨버렸을 텐데. 누나가 무슨 죄냐고 하더라. 자기가 처신을 잘못해서 당한 망신이라고, 그날은 회사 회식자리였는데 과장이 다음 달 승진에 자기 이름이 올라있다는 말을 해 주는 바람에 술잔이 모두 자기한테로 왔단다. 그래서 그냥 받아 마시다 보니 자기 정신이 아니었다고, 그날 누나 얼굴이 천사처럼 이쁘드래, 피부가 하얗고 볼이 복숭앗빛이었다나, 그래서 그 피부를 한번 만져보고 싶었대. 나도 술 먹는 사람이라 그 정도는 약과라고 했지. 따지고 보면 자기 잘못이지 누구 탓을 하겠느냐고 한숨만 푹푹 쉬는 데 좀 안됐더라고. 그래도 부모님이 물려준 시골 땅이 있어서 시골로 내려가 베트남 여자라도 얻어서 살림을 차릴까 싶다고 하는 걸 보면 착한 사람 같지 않아? 그 소릴 들으니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처지가 한심하더라고, 어떻게 보면 첫사랑을 먹고 사는 누나가 제일 행복한 사람 같기도 하고. 난 그동안 뭐했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아까 내일 가자고 했던 거야. 갑자기 만사 귀찮더라고.
“그랬었구나. 너도 좋은 여잘 만나야 될 텐데.”
동생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도 생각이 깊어졌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인데도 나로 인해 한 사람 인생이 그렇게 무너졌다니, 운명이란 게 있기나 한 건지, 신의 형벌이 공평한 건지 의심스러워져 마음이 무거웠다.
요양소에 도착하자 동생은 담당 의사부터 만나보고 오겠다고 이 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엄마 병실로 갔는데 엄마 침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알아본 옆 침대 보호자가 조금 전에 손님이 와서 함께 밖으로 나가신 것 같다고 해서, 접견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 반쯤 올려진 엄마침대를 발견하고 서둘러 가는데 침대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틀림없는 중기였다. 그는 엄마와 나란히 창밖을 보고 있어서 내가 다가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점점 걸음은 느려지는데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럼 아직도 재혼을 안 했단 말이야?” “결혼이야 아버지 사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거죠, 저 같은 죄인이 어떻게 재혼씩이나 합니까? 연이가 아직도 혼자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훈이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전 평생 모르고 지낼 뻔했습니다. 그래서 훈이를 따라왔어요. 저는 연이가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저는 저보다는 어머님께서 이야길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제가 할까요?”
“자네는 왜 그때 이야길 안 했나? 그 애가 도망치자고 했으면 말을 했어야지. 함께 왜 도망은 쳐? 무슨 속셈이었어?” “속셈은 없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번에는 제가 꼭 말을 하겠습니다. 이제는 알아도 무슨 큰 상처가 되겠나 싶군요. 그때는 연이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봐, 혹시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나 않을까 싶어 차마 입도 벙긋 못했던 겁니다. 이렇게 된 건 모두 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자내 탓인가? 이 일은 누구의 죄도 아니네. 내 동생이 그렇게 비명횡사만 당하지 않았어도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겠는가. 모두가 하늘의 뜻이었네. 오히려 내 죄가 더 크지. 그 애를 내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생목숨을 끊었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거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아까 의사선생님 만났는데 많이 좋아지시고 있답니다. 요즘은 암은 병도 아니랍니다. 더구나 위암치료는 대한민국이 최고라지 않습니까? 걱정 마세요. 수술경과도 좋다고 하던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나야 죽어도 여한이 있겠나, 우리 연이가 저렇게 있으니, 차마 눈도 감을 수가 없네.”
“이번에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지 전혀 연결되질 않았다.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지? 혹시 나와 다시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제 와서…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내 어깨가 저절로 들썩 한다. 그때 뒤에서 동생이 누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동시에 중기와 엄마도 나를 돌아다봤다.
엄마는 당황하면서도 나를 반겼고 중기 역시 당혹스런 얼굴로 나를 대했다. 동생이 다가와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동생이 자연스럽게 엄마 침대를 잡아 밀면서 두 사람은 밖이 더 시원하다며 회포라도 풀고 오라고 했다.
중기와 나는 정원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중기가 먼저 잘 있었느냐고 묻고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중기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입을 뗐다.
“복도에서 엄마와 하는 얘기 다 들었어. 놀라지 않을 테니까 다 말해봐, 무슨 말이야? 그리고 나 안 죽어, 무슨 말을 해도 상처도 안 받어.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말해. 어서, 빨리!”
중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충 들은 것 같으니까 돌려서 말하지 않겠다. 우리 아버지의 결혼 반대는 나한테도 충격이었어. 너하고 내가 남매라는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쇠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아득한 초원에서 말 한 마리가 달려오는 듯 말발굽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 나는 귀를 감쌌다. 중기는 내 어깨를 한 팔로 감싸고 내 얼굴을 본다. 괜찮아? 그는 잠시 말을 잊고 있다가 나를 다시 쳐다보고는 흑흑 소리를 삼키는 것 같더니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괜찮다고 중기의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중기도 마음을 가라앉힌 듯 다시 말을 잇는다.
“내가 널 처음 만났던 곳이 병원 영안실이라고 했지? 이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날을 기억하니? 넌 아무 영문도 모르고 울기만 했다더구나. 그 이모가 바로 네 엄마였어.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하다가 돌아가셨단다. 우리 아버지 회사 경리부에 근무했다가 감사받는 일로 가까워지셨대. 그래서 널 갖게 됐고, 우리 어머니가 알게 되고, 이모가 사는 너희 집을 찾아간 바람에 이모가 집을 나갔다가 그렇게 되셨나 봐. 그동안은 왜 몰랐냐고? 장례식 날 너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한테 연이와의 인연은 끊어달라고 하셨다구나. 당신 딸로 잘 키울 테니까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자고. 그래서 아버지는 비밀을 지켰는데, 내가 너 아니면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니까, 널 한 번 만나보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로부터 우리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넌 짐작도 못 할 거야, 정말 죽고 싶었다. 그래도 널 생각하면 그렇게 죽는 건 아닌 것 같았어. 그래서 궁리 끝에 널 그리스여행에 데려간 거야. 너에게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지. 아니면 같이 죽던지….
나는 중기의 손을 꼭 쥐었다. 중기는 잠시 말을 잃고 구둣발로 땅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중기의 발을 가만히 잡았다. 미안해, 중기가 입을 다시 열었다. 정말 미안해. 나는 가슴이 울렁거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중기 손만 붙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만 해, 그러다 입술 깨물면 피나잖아, 아직도 그 버릇 못 버렸구나.”
중기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너한테 좋은 오빠가 돼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입술만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우는 거야?” 나는 입술을 한 번 악물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오빠가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미안해하지 마. 우리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었나 봐. 그래서 그 죗값을 받았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해 주니 내가 고맙다. 어쩌면 그날 내가 검문에만 걸리지 않았어도 친구 농장으로 가서 기회를 만들었을 거야, 나는 그날 붙잡혀 가서 바로 미국으로 추방되다시피 비행기에 탔다. 그리고 미국에서 결혼하고 일 년도 못 살고 헤어졌지만 나는 한국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어. 그랬는데 며칠 전 훈이가 찾아온 거야. 아직도 날 기다린 것 같다는 말에 훈이를 따라온 거야.”
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중기를 만나기 위해 도망치기 하루 전인가, 세월은 모든 걸 잊게 한다고. 정말 아버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나도 우리 엄마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담담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중기의 어깨를 툭 치면서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역시 오라버니 자격이 있네. 이제부터 동생한테 잘하세요.”
하지만 병실로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나는 엄마부터 껴안고 한참 동안을 그대로 있었다. 덥다, 왜 이러니?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한 번 더 엄마를 껴안았다. 이제 다들 가봐야지? 중기가 먼저 렌트카를 돌려줘야 한다고 나가고, 우리도 뒤따라 나오다 나는 다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가슴에 안겼다. 엄마 고마워요, 엄마는 내 등을 가만가만 다독여주면서 고개를 돌리시는데 눈가에 번지는 엄마의 눈물이 메마른 내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복잡해? 엄마는 왜 누나만 보면 말도 잘 못하고, 오늘은 눈물까지 보이던데, 엄마 속 작작 썩이고 제발 시집 좀 가라.”
동생은 운전석 쪽으로 가는 나를 밀어내고 자기가 하겠다고 손을 내민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키를 내주고 옆 좌석에 앉으려고 문을 열었다.
“뒤에 타시지. 오늘은 머리도 복잡할 텐데 푹 쉬셔. 졸리면 자고.”
나는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등을 깊게 등받이에 묻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연이, 우리 연이 하시던 아버지의 환한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눈을 떴다. 돌아가시기 전 일주일 동안 병원에 계셨는데 나만 보면 미안하시다고 했다.
“널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내 욕심이 널 고생시킨 거야. 미안하다. 대학이라도 졸업시켰으면 내가 이렇게 미안하지는 않는데… 하긴, 지금이라도 마음만 바꿔먹으면 너 하나만은 호강시켜 줄 수도 있는데, 이제는 틀렸어. 너무 멀리 와 버린 거야. 널 보냈어야 했는데….”
“괜찮아 아버지, 이젠 다 잊었어. 아버지 말대로 다 운명이지 뭐. 미안해하지 마, 아버지 때문 아니잖아요.”
“아니야, 좀 더 일찍 그 집에 너를 보내줬다면….”
“여보, 다 지난 얘기를 왜 끄집어내려고 해요. 이제 와서 어쩌려고,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는 그때 엄마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었다. 아버지의 사랑, 엄마의 사랑, 중기오빠의 사랑, 앞 운전대에 앉아 백미러로 나를 훔쳐보는 동생의 사랑, 나는 갑자기 동생이라도 껴안아 주고 싶었다.
“훈아!”
“동생이 뒤를 돌아본다. 한숨 자지 그래, 잠이 안 와?”
“그 남자 있잖아? 나, 그 남자한테 시집갈까?” “헛소리 말고 잠이나 자지!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 봐. 중기형이 누나 혼자라는 말 듣고 나 앞세워 온 거야.”
“넌 괜한 짓 한 거야,”
“무슨 말 듣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난 중기형을 믿어 봐. 집까지 가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가야 해. 그냥 푹 자라고.”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눈도 감아버렸지만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은 막지 못했다. 이제는 아무 희망이 없을 것 같았다. 기다림은 고통스러웠지만 늘 긴장과 생동감을 줬다. 우리의 사랑은 아득한 태초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내가 죽는 날까지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의 변증법을 그때 짐작이라도 했다면 사랑의 고통을 짐작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 사랑이 찰나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사랑의 도피는 원래 시작은 황홀하고 끝은 절망이라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삶의 근원에는 질서가 있다. 절박한 문제일수록 더 반듯한 질서가 필요하다. 나는 그 질서를 지키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할 것이다. 중기 역시 그 질서를 위해 또 다시 그곳으로 가리라.
“누나 자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비스듬히 눕혀 차창 밖 하늘을 본다. 어둔 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무수한 별들이 나를 사랑했던 그리운 얼굴들로 변해서 눈앞을 어지럽게 한다. 항상 짓누르고 있었던 이상한 괴리감, 그 괴리감으로 늘 가슴이 아리고 시린 그 축축함이 바로 그 이유였단 말이지. 나는 깊은 늪과도 같은 구렁텅이에서 금방 빠져나온 것 같은 후련함을 맛본다. 문득 영화 ‘out of africa’ 첫 장면에 메릴 스트립의 대사가 떠오른다. 신은 아프리카를 창조하셨고 그는 나에게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