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성 장르로서의 사진시, 시와 사진의 상호텍스트성
송명희
(문학평론가, 국립부경대학교 명예교수)
사진시라는 혼성 장르
한국문인협회 미주 지회장인 강정실 작가는 시, 수필, 문학평론 등 문학의 여러 장르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사진가로도 활동하며 수준 높은 사진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이번에 발간하는 『꼭두각시놀음』은 첫 사진시집 『개썰매』(2021)에 이은 두 번째 사진시집이다. 그는 문학적 감성이 묻어나는 사진들을 직접 찍고, 거기에다 자신이 쓴 시를 붙임으로써 사진시 88편을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사진시(photo poem)는 마치 옛날 선인들이 그림에다 화제(畵題)를 붙여 넣어 문인화를 완성하였던 것에 비교할 만하다. 사진에다 화제처럼 시를 붙여 넣은 사진시는 최근 시도되고 있는 문화예술 간에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탈장르화 또는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맥락으로 이해되는 혼성장르의 일종이다.
혼종성(hybridity), 크로스오버(crossover), 퓨전(fusion), 융합(convergence)은 21세기 문화를 이해하는 핵심적 키워드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시는 현대예술의 최첨단에 서 있는 크로스오버의 예술이다. 경계를 넘나들며 다른 것들끼리 서로 섞인다는 의미의 크로스오버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단지 예술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즉 현대는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학문, 정치, 행정, 사회, 광고와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서 경계를 뛰어넘는 크로스오버가 전략적으로 요청되는 시대이다.
그림에서 화제의 역할은 그림으로는 다 나타낼 수 없는 화의(畵意)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작품의 창작 동기와 기분 등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화제는 그림 작품의 배경뿐 아니라 주제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강정실 시인은 본인이 찍은 사진에다 시를 적어 넣는 순서로 사진시를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시가 문인화의 화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사진시에서 시각예술인 사진은 사진대로, 또 언어예술인 시는 시대로 따로따로 감상하여도 전혀 무방할 만큼 각기 작품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사진과 시가 결합됨으로써 둘은 상호텍스트성을 가지는 동시에 시너지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2. 사진과 시의 상호텍스트성
강 시인은 시인이 되기 전에 사진가가 먼저 되었다. 「사진사」라는 작품은 사진가로서의 그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드러내며, 그가 찍고 싶은 사진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해 뜨고 해 지는 눈 덮인 *마운틴 레이니어 산장을 찾아가면 우렁우렁 찬바람이 불어댄다,
어딜 가도 내 머릿속에는 작은 암실이 하나 있어 습관처럼 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렌즈를 결정하고
조리개를 열고
노출을 설정하고
뷰파인더에 눈을 들이대고
초점을 맞추고
숨을 멈춰가며
산장 주변을 촬영한다,
바인더에 나타난 영상은 형님 댁 베란다 문턱에 넘어져 피 흘리시는 어머니, 구포장터에 다녀와서 뒷머리가 당긴다며 안방에 누워계신 아버지, 바가지 빈 쌀독 박박 긁듯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는데, 나 혼자 타국에서 앉은뱅이처럼 용이나 쓰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형을 업고 해방이 되자마자 일본에서 친척들이 사는 부산에 돌아오셨다, 가지고 온 돈은 고모부에게 사기당하고 큰형은 마마병으로 저승에 가버렸다, 아버지는 석탄덩어리를 배로 운반하며 쉬는 날에는 목침을 베고 천자문 읽다가 일 년에 한 번씩 회색빛 페인트로 기와집 대문을 칠하며 막걸리를 즐겨 마셨고, 어머니는 한술 밥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밤 기러기 끼욱끼욱 울고 아랫배가 등에 붙을세라 목울음 울며 먹이며, 진종일 비손 일손 놓을 겨를 없이 네 자녀 팔자 상팔자 되라, 아무렴 잘 커야지, 우리 새끼, 내일과 모레 윤나게 닦고 닦아라,
찰·칵·찰·칵,
숨 멈추고 다시 버튼을 눌린다, 모니터에 굵은 두 줄기 금이 가 있고 렌즈도 부옇게 김이 서려 있다, 이 기억을 영원히 인화할 수 없어 촬영하는 순간 그 자체를 인화한다,
고개를 숙이고 또다시 촬영한다,
-「사진사」 전문
이 작품의 배경이 된 마운틴 레이니어는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워싱턴주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사진은 안개비가 내리는 흐릿한 배경 속에 화면의 왼쪽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다정하게 서 있고, 오른쪽에는 우산을 쓴 사진사가 화면 밖의 어떤 풍경을 찍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속 인물은 마운틴 레이니어의 소나무와 같은 현실 속의 피사체가 아니라 화면 밖의 보이지 않는 어떤 풍경을 담으려고 하는 듯하다. 시인은 이 사진사에게 감정을 적극적으로 투사하고 있다.
강 시인이 마운틴 레이니어 산장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그곳에 머물렀던 추억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인에게 그곳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가족들에 대한 기억들을 환기하는 특별한 장소다. 사진사는 카메라를 들고 찰·칵·찰·칵 산장 주위의 어떤 풍경을 촬영하는 듯하지만 시인(사진사)의 내면에선 “형님 댁 베란다 문턱에 넘어져 피 흘리시는 어머니, 구포장터에 다녀와서 뒷머리가 당긴다며 안방에 누워계신 아버지”의 병원을 전전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마마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 큰형, 석탄덩어리를 배로 운반하는 직업을 가졌던 아버지가 휴일에는 목침을 베고 천자문을 읽거나 일 년에 한 번씩 당신께서 살고 있는 기와집 대문에 흰색 페이트를 칠하던 모습, 네 자녀를 굶기지 않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며, 네 자녀의 장래를 빌어주던 어머니의 모습도 연속적으로 떠오른다.
시인은 시의 각 행과 연에서 종결을 나타내는 마침표를 찍지 않고 쉼표를 찍음으로써 가족들에 대한 기억들과 그리움은 결코 종결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그것들은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이 무한히 지속되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사진 속 사진사가 담고 싶은(보이지 않는) 풍경은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과 관련된 그리움이다. 하지만 아무리 카메라의 셔터를 찰·칵·찰·칵 눌러도 그 풍경은 영원히 찍을 수도, 인화할 수도 없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은 「은빛 세상」과 같은 시에서는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온/양동이의 물을 장독에 부어 넣고/아버지는 안방에서/천자문 읽는 소리가 들려 온다”와 같은 모습으로 각인되어 반복적으로 소환된다.
「선착장」과 같은 시에서 어머니 대한 그리움은 그의 고향인 한국 부산 영도의 남항이라는 구체적 장소를 배경으로 표현된다.
내가 서 있는 이곳 선착장에서
당신과 헤어진 날이 햇수로 3년 반
그동안 초승달과 별이 쉬어 가고, 햇빛이 앉았다 가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낚시꾼이 오고 가고, 모시 저고리 입은 해파리가 춤추고
청각과 파래가 한들거리고, 불가사리와 성게가 꿈틀대고
갈치 떼가 오고 가고, 길 잃은 고등어가 쉬어 가고
먼 곳 푸른 섬에 갈까 말까 망설이는 갈매기가
마른 멸치와 앉아 있고
내 눈에는 먼 섬이 아련한 *남항으로 보이고
어머니가 간직했던 빈 뿔소라를 내 귀에 대고
선착장 바닥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홍합처럼
간간이 미아가 된 이 자리
사방천지 넓은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주르륵 눈물 흘리며 속울음같이 흐느끼는 바람은
내게 선한 눈이 되어 다가와서
웬만하게 부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알기나 하는지
‘아직은 괜찮다. 천천히 만나자!’
내 가슴 한복판에 수만 개 박힌 소금 절인 고독 중
한두 개만 빼어 놓고 손 흔들며 돌아간다
-「선착장」전문
사진은 푸른 바다 너머의 한 섬을 향한 듯 쭉 뻗어 있는 선착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착장은 배를 타고 바다를 향해, 섬을 향해 떠나고 싶은 시적 화자의 마음을 표현하는 장소이다. 화자가 가서 닿고 싶은 장소는 사진 속의 멀리 보이는 섬, 아니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고향 남항이다. 그래서 “내 눈에는 먼 섬이 아련한 남항으로 보이고”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즉 섬은 그의 고향인 남항을 표상하는 그리운 장소이다. 선착장에서 그가 유독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가 모국의 항구도시 부산 남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다와 선착장은 그에게 고향과 어머니를 표상하는 그리운 장소이다.
따라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하는 장소, 나아가 그를 고향으로 데려다 줄 수도 있는 장소이다. 만약 시가 없이 사진만 보았더라면 선착장을 통해서 3년 반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급하게 다녀온 이후 다시는 못 볼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선착장에 나와 넓은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되어 “아직은 괜찮다. 천천히 만나자!”라고 억제하는 향수와 그리움을 사진만을 본 독자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이처럼 언어예술인 시는 구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주제를 표현하는 데 다른 예술보다도 더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시각예술인 사진과 상호텍스트성을 가지면서도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킨다. 즉 사진시는 시와 사진이 각기 따로 존재할 때는 가질 수 없는 큰 울림을 독자에게 선사할 수 있다.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은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맺고 있는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텍스트는 둘이나 그 이상일 수도 있다. 하나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텍스트나 현재 진행 중에 있는 텍스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상호텍스트성 이론의 핵심적 요지이다. 사진과 시가 결합한 사진시는 상호텍스트성을 통해서 의미를 보다 풍부하게 만들고, 새롭고 다양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혼성장르로서의 장점이 존재한다. 더욱이 멀티미디어 사회로 변화하면서 활자중심의 인쇄매체가 점점 문화적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현실에서 사진시는 기존의 시가 가졌던 영향력을 사진이라는 시각매체를 통해 보완하고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외출하기 싫어 며칠째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어.
내 주변은 백인들 천지라 그들의 입맛에 맞는 식당엔 안 가게 돼. 그곳에 가면 식당 내 손님 분위기가 울렁거리고 기분이 낯설어져. 생긴 대로 논다고 고리타분하게도 내 입엔 간장 된장 고춧가루로 만든 음식이 딱이라, 내 삶의 ⅔를 낯선 땅에 살면서도 아직 입맛은 못 고치고 있어. 영 글렀는 것 같아.
내가 이곳에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가 있기는 한 거야? 아직은 모르겠어.
한국인들이 모여 있는 식당에 들러 해물이 들어간 짜장면 곱빼기 한 그릇 먹었어. 맛있데. 그리곤 이발소에 들러 머릴 깎아주며 깍사가 이야기하는 한국정치이야기가 귀에 맛있게 들어오데. 한국마켓에도 들렀어. 여기저기 한국어에 비벼져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맛. 오! 매대마다 한국라벨이 인쇄된 상품들 풍성하기도 하데. 막걸리와 소주에 붙어 있는 각종 라벨을 보았어. 막걸리는 아버지 맛, 소주는 형님 맛, 번데기는 동생 맛, 오뎅은 여동생 맛, 청국장은 어머니 맛, 은밀하게 당기는 청국장 몇 덩어리와 깡통에 든 번데기를 사곤 집으로 왔어.
마음과 달리 몸은 모서리 없는 우주를 닮아가고, 베란다 너머 자동차 헤드라잇이 드문드문 달려가는 깊은 밤인데, 앵무새는 책장 머리에 앉아 뭐라고 혼자 중얼대고 있네.
-「입맛」 전문
「입맛」이란 시는 “삶의 ⅔를 낯선 땅에 살면서도 아직 입맛은 못 고치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입맛, 음식문화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간장, 된장, 고춧가루로 만든 음식, 짜장면, 라면, 번데기, 청국장, 막걸리, 소주 등은 화자가 영락없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증명해주는 음식들이다.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 한국정치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발소, 한국어에 비벼져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한국마켓……. 아무리 오랜 세월을 미국 땅에서 살면 뭐하겠는가. 그의 마음은 여전히 모국을 그리워하고, 입맛은 모국의 음식에 길들여져 있고, 귀에는 모국어로 말하는 한국정치이야기가 친숙하게 들려오고, 한국 물건들을 사기 위해 한국마켓에 들리는 것을……. 그러한 행위들은 재미한인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무의식적인 민족정체성을 나타내준다. 백인들 천지의 미국 땅에서 생의 ⅔를 살아왔건만 입맛도, 언어도, 정치적 관심도 무의식적으로 모국 지향성을 보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화자는 “내가 이곳에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가 있기는 한 거야? 아직은 모르겠어”라고 자문자답한다.
3. 삶의 회한과 노년의 자화상
25년 전
희망을 품고
찾아온 이 거리에서
불타올랐던 정열과
빛났던 젊음도
외국인에게는
모든 곳이 지뢰밭이라
생활전선에서의 치열한
괄시와 따돌림에
깊은 상흔을 입고
허물어진 비굴한 웃음
한가득 잡히는 회한
지친 내 수고로운 삶은
빈 시선
고독이 가득 담긴
사거리 찻길 중앙에 서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몸에 걸친
모든 비련의 세월을 벗어버리고
아스팔트 위에서
한기의 공허
침을 길게 삼키며
나를 다독인다
-「이 거리에서」 전문
「이 거리에서」는 이민 25년의 수고로운 삶이 회한과 고독과 공허로 남아 있음을 진술한다. 25년 전에 희망을 품고 찾아온 ‘이 거리’(미국 땅)에서 불타올랐던 정열과 빛났던 젊음이 있었음에도 외국인이었던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지뢰밭이요, 괄시와 따돌림에 깊은 상흔과 비굴한 웃음으로 얼룩진 비련의 세월이었음을 회고하며 회한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지치고 수고로운 삶, 허무와 고독과 비련의 세월을 단 하루만이라도 벗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토로한다. 사진 속에는 사거리 찻길 중앙에 서서 나신으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한 사내가 서 있다. 시인은 그 나체의 사내에게 이민자로서의 자신의 회한에 찬 25년의 세월을 벗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투사한다. 나체의 그 사내처럼 단 하루만이라도 모든 비련을 벗어버리고, 한기의 공허도 삼켜버리고, 자유롭고 싶은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사암으로 형성된 돌산
어느 말미 어디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지나간 날의 청춘을 보게 되나니
기가 꺾인 나는
주눅 든 자신을 추스르다가
저물녘 어둑살에
스스로를 뭉개고 신내림 받은
지난 내 역사의 꼭두각시놀음이
커다란 사암에도
고스란히 그림자 되어
비추는 것을 어찌할거나
사는 일은
탐진치로 옹이 맺은 삶
나를 곤죽이게 하는 일
낯선 땅 헐값에 밀려
험로 밟기가 오늘에 이른 것을
-「꼭두각시놀음」전문
「꼭두각시놀음」은 앞잡이를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민속 인형극 <박첨지놀이>에서 인형이 그 자체로 움직이지 못하고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동작을 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어 남의 조종에 놀아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시적 화자는 돌산 빗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지난날의 청춘을 돌이켜본다. 이때 보이는 것은 주눅 들고 옹이 맺힌 삶이며, 남의 조종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주체성을 상실한 삶이다. 탐진치(貪瞋癡)는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뜻하는 불교의 용어로서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세 가지 요소이다. 화자는 낯선 땅으로 이민 와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가슴에 옹이가 맺히고, 또 그로 인해 갈피를 잡기 어려운 삶을 살아왔음을 돌이켜본다.
「꼭두각시놀음」의 시적 주체는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서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라고 애정과 증오의 양가감정을 반복하는 시적 주체와 닮아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에서는 맑은 우물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애중의 양가감정을 느꼈다면, 강 시인의 시에서는 돌산의 빗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주체성을 상실한 삶, 마치 꼭두각시놀음을 해온 듯한 삶, 이민자로서 주눅 들어 살아온 삶, 탐진치의 욕망으로 갈피를 잡기 어려웠던 옹이 맺힌 삶에 대한 깊은 회한의 감정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 차이이다. 윤동주의 젊은 날의 자화상과는 다른 노년의 강 시인이 마주친 자화상은 지난 삶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춰줄 거울이 필요하다. 「꼭두각시놀음」이란 시에서 그 거울은 하필 돌산의 빗물이 고인 웅덩이와 커다란 사암에 비치는 인생의 그림자다. 이때 웅덩이는 외적인 형상을 비춰주는 도구라기보다는 화자의 회한에 찬 지난날의 청춘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자아성찰의 거울이다. 거울은 유리거울만이 아니라 우물이나 고여 있는 물 또는 냇물이나 강물처럼 뭔가 비춰줄 수 있는 자연 등 다양한 형태가 가능하다. 다양한 형태의 자연의 거울도 자기 자신을 비춰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거울의 기능을 동일하게 수행한다. 화자는 웅덩이의 고인 물에 자신을 비춰봄으로써 지난날 자신의 삶이 한낱 꼭두각시놀음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자아인식으로 나아간다. 거울을 매개로 자아를 비추어보고, 또 비추어진 자아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지난 생애를 인식하게 만드는 웅덩이와 커다란 사암에 나타난 인생의 그림자, 즉 거울은 화자로 하여금 반영적 자기성찰로 나아가게 만든다.
ㅇ늘도 너는 나를 보고 있다
살굿빛 산성에 보관했던 이상은 다 허물어져 버렸고
지금껏 푸른 하늘 덧칠한 성곽 밖에 서성대며
칠순인 나를, 너는 ㅈ롱하며 보고 있다
화려한 듯 보이는 과거는 ㄴ리막길만 걸었다
젊음을 무기로 매일 계획한 후 따라가다 보면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어느 연속극 내용처럼 발길은 깊은 ㄱ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매사
알아주길 ㅂ랐지만 내 머리에 든 빈 깡통은
한 가지도 완.성.된 것 없는
치기였다고
ㅇ롯이
치러야 할 순리를 ㅂ려두고 떠날 철새는 분명 아닌데도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온당치 ㅁ한 험상궂던 지각(遲刻)을 후회하는
ㅍ치 못한 내 젊은 날의 초상이고 귀태(鬼胎)였다
-「자화상」전문
「자화상」이란 시는 우선 고의로 첫음절의 중성(모음)을 누락시킨 점이 주목된다. ‘ㅇ늘도’, ‘ㅈ롱하며’, ‘ㄴ리막길’, ‘ㄱ렁텅이’, ‘ㅂ랐지만’, ‘ㅇ롯이’, ㅂ려두고’, ‘ㅁ한’, ‘ㅍ치 못한’ 등은 한마디로 화자가 자신의 ‘귀태(鬼胎)’의 자화상, 즉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태어난 것이라는 극도의 자기 부정의 감정으로 귀결된다. 칠순의 연령에 도달하여 돌이켜본 자신의 젊은 날이 마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처럼 음소의 고의적 탈자를 통한 기형의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다. “매사/ 알아주길 ㅂ랐지만 내 머리에 든 빈 깡통은/ 한 가지도 완.성.된 것 없는/ 치기였다고”에서 ‘완.성.된’처럼 한 단어의 음절 사이사이에 마침표를 찍어 분절시킨 것도 완성되지 못한, 즉 이상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삶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의도일 것이다.
사진은 허물어진 성곽 밖에서 무너져 내린 산성을 찍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칠순에 이른 시의 화자는 허물어져 내린 산성의 성곽 밖을 서성이며 자신의 젊은 날, 젊은 날에 꿈꾸었던 이상과 꿈이 내리막길을 걷고,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심각한 자기부정에 다다른다. 허물어져 내린 산성의 이미지는 화자의 젊은 날의 허물어져 내린 이상의 기표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젊은 날의 자화상을 태어나지 말아야 할 귀태였다고 부정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나는 매일 지워진다
거리가 나를 지우고
계절이 나를 지우고
젊은 날의 초상들이 나를 지운다
억장가슴 토해내는 헛 시선에서 지워지고
절망의 넋두리에서 나를 지우고
제 아픔 서러움에 나를 지우고
자꾸 지워지는 나를 보며
내가 나를 지운다
철마다
목대를 내미는 나
늪에 빠져 모가지만 내고 허우적대는 짐승처럼
내 몸뚱어리마저 토막을 쳐 요리되는 먹잇감처럼
나머지 삶도 법고수가 되어 덩더쿵 춤을 추며
나를 지우고 있다
-「나를 지운다」전문
「나를 지운다」에서도 시적 주체는 「꼭두각시놀음」이나 「자화상」에서처럼 부정적인 자아의식을 보이며 지워지고 지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 역시 노년의 연령에서 오는 삶의 허무주의와 연결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노년정체성은 ‘지워진다’란 단어 속에 정확히 포착되어 있다. 지워진다는 것은 마치 우리 사회가 투명인간처럼 노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 사회가 가진 부정적인 노년 정체성은 노인들로 하여금 처절한 자기부정에 빠지도록, 즉 스스로 자기를 지우도록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자꾸 지워지는 나를 보며/ 내가 나를 지운다”와 같이 타인과 사회로부터 내가 지워지면 나도 나를 스스로 지울 수밖에 없는 자기부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시적 주체를 존재의 허무와 고독과 삶의 소외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타자화시킨다.
에릭슨(Erik Erikson)에 의하면 정체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형성된다. 노인이 긍정적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도 긍정적 자아인식을 확립해야 하지만 사회도 노인에 대한 부정적 낙인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즉 사회는 노인 스스로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 프리츠 파펜하임(Fritz Pappenheim)은 소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소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의 소외라는 세 가지 형태가 있으며, 이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강 시인의 시에서 보이는 삶의 허무주의와 소외의식은 개인적으로 노년의 연령에서 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가진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정체성과 상호 연관된 것으로 파악된다. 즉 세계로부터의 소외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소외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야기한다는 노년의 보편성에 대해 화자는 진술하고 있는 듯하다. 소외된 노년은 마치 수려했던 연꽃과 연잎으로 뒤덮였던 여름날의 연밭이 겨울철이 되자 메마르고 간결한 선으로 남아 있는 사진 속의 모습과 닮아 있다.
「아이야 들어 보아라」와 같은 시는 최근 그의 시가 나타내고 있는 회한, 고독, 허무주의, 그리움의 정서가 삶을 알 수 있는 연령, 나이 듦의 성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잘 해명해주고 있다.
아이야 들어 보아라
이꼴저꼴 살아 봐야 삶꼴을 알게 된단다. 삶이란 통증의 불행이 행복이라는 밑밥이란 것을 알 때쯤 너희가 이곳 바닷가를 다시 찾아왔을 때 어릴 때의 그리움을 토하게 된단다. 이때사 나를 놓고 길러준 부모님과 가버린 내 젊음과 추억은 이승을 떠나 저승에 있고, 추억 중 잘못한 것들만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터져 회한과 그리움이 밀려온단다.
-「아이야 들어 보아라」부분
오스트리아 작가 장 아메리(Jean Améry)는 그의 저서 『늙어감에 대하여』에서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라고 했다. “이꼴저꼴 살아 봐야 삶꼴을 알게 된단다”는 시인의 삶에 대한 통찰, “추억 중 잘못한 것들만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터져 회한과 그리움이 밀려온단다”와 같은 회한과 그리움도 결국 오랜 세월의 삶을 살아낸 노년의 나이 듦의 통찰 또는 지혜와 연관된 것이다. 그리고 노년에 획득한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역할을 하는 것도 노년세대이다.
그리고 강 시인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허무주의와 우울의 정서는 2020년 이후 전 세계를 감염병의 재앙에 빠뜨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펜데믹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코로나블루로 명명된 우울증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꽃샘바람에 고독이 베이는 날
도시의 겨울나무들이 절망만큼 웅성거리며 창문을 흔들어대고 있다, 홀로 잠 못 이루는 시간, 벽장에 넣어둔 사진첩 을 끄집어낸다, 탁상용 전등불에 돋보기로 옛 기억을 한 장씩 더듬어 봐도 나의 해마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 구석구석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겨울 사슬을 끊어내는 아침나절, 햇볕이 새어든 창가에 간이의자를 옮겨놓고 시집을 읽는다, 불현듯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듯 사진첩에는 없었던 나의 첫사랑 기억이 떠오르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게 한다.
깨지 말아라 깨지말아라 깨지말아라
지금은 쪼그랑 할망구가 되어 있을
첫사랑 단발머리 소녀,
소복소복 눈 내리는 저녁거리에서
G현의 낭만을 교감하다가
카바이드 불 밝히고
연탄불에 구워놓은 군밤장수한테
군밤 사 먹던 까까머리 소년에 대해
옛 기억은 있기나 할까?
문득 충혈된 종다리가 종달종달
토막쳐 노랠 부른다.
-「G현의 낭만」 전문
이 작품은 탁자 위에 안경을 쓰고 독서를 하다가 책을 괴고 G현의 음악을 감상하며 오수를 즐기고 있는 사진 속 견공처럼 모처럼 첫사랑의 달콤한 추억에 빠져 한때를 한가롭고 낭만적으로 즐기고 있는 순간을 그려낸다. 꽃샘바람이 부는 봄이 왔건만 마음은 겨울나무들이 절망만큼 웅성거리며 창문을 흔들고 있는 한겨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던 중 사진첩에도 없는 첫사랑의 기억이 떠오르며 한순간 달콤한 추억에 빠져든다. 그래서 부디 그 꿈이 “깨지 말아라 깨지말아라 깨지말아라”라고 세 차례나 반복하는 것이다. 첫사랑의 추억은 노년의 허무주의와 우울증에 빠져 있는 화자에게 찰나의 위로와 행복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 달콤한 꿈으로부터 부디 깨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 기쁨의 순간들이 자주 소환될 때 노년은 고독과 우울증에서 벗어나 더욱 풍요롭고 안정되고 행복해질 것이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론에 의하면 노년은 마지막 8단계에 해당된다. 제8단계는 ‘자아통합 대 절망(ego integrity vs. despair)’의 시기다. 자기완성을 향해 갈 수 있는 삶의 절정의 시기이며, 성숙의 시기이다. 젊은이는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깊은 지혜와 영성으로 충만해지는 행복과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인생을 정리하고 돌아보면서 삶의 의미에 대해 음미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단계를 잘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통찰과 지혜를 얻는다. 강 시인은 이 8단계의 통찰과 지혜를 향한 노력을 최근에 집중적으로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송명희는 1980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이래 50여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다시 살아나라, 김명순』(2020년 세종 우수학술도서 선정),『트랜스내셔널리즘과 재외한인문학』(2018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인문학자, 노년을 성찰하다』(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페미니즘 비평』(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미주지역한인문학의 어제와 오늘』(2011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젠더와 권력 그리고 몸』(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타자의 서사학』(2004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선정) 등 7권의 저서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2001년에 산문집 『트렌드를 읽으면 세상이 보인다』, 2000년에 사진시집 『카프카를 읽는 아침』를 발간하였다.
현재 부경대학교 명예교수와 <문학예술치료학회> 회장으로 있으며,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회장과 <한국언어문학교육학회>, <해운대포럼> 회장을 역임했다. 마르퀴즈 후즈후 세계인명사전(2010)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