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길을 아버지의 이미지와 함께 걷은 삶
-<묘현사의 밤> 내면 읽기
강 정 실
1. 들어가기
수필작가 신성철, 그는 평생토록 소망하던 수필문학에의 열정이 마그마가 흘러내리는 활화산처럼 뒤늦게 폭발하고 있다. 그 소망은 우연하게 찾아온 것이 아니고 삶 자체가 수필인가 싶다. 개인의 삶으로 볼 때 어느 시점에서 그가 문학으로 회귀하는 재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2년 전, 모 수필반에서 그를 만났다. 90이 넘은 나이에도 매주 시작하는 수필반에 일 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항상 첫 번째 도착하여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볼펜으로 원고를 작성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컴퓨터를 사용했다. 그만큼 정열적으로 최고 꼭짓점이라 할 수 있는 수필등단을 위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글을 수정하며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꿈꾸지만, 몸에 밴 관념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자는 작품의 구성과 완성도는 서정적 윤기가 부족한 관념적 글쓰기라고 자탄하지만, 평자의 견해로는 90년이라는 긴 세월을 따라 감성도 함께 메말랐으리라 싶다.
이런 상황이니 그의 문력은 그다지 중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글은 지성의 본류에 충실했고 그 자리에다 사진을 하나씩 붙이며 자식들에게 남기려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화자는 그의 수필을 자전적 수필이나 회고적 수필이라 언명하고자 한다.
1922년 5월, 아버지 신현갑과 어머니 안양금 사이에서 전남 광주시에서 태어난다. 담양 금성보통학교 2학년 때 집안은 자작농 60마지기와 양잠 11매를 기르고 있었고, 일꾼은 7~8명이 매일 일하고 있던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있는 논밭과 집까지 다 처분하여 미두(지금의 증권)에 투자한다. 결과는 참담했고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닐 정도로 핍박해졌다. 이 때문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전남 담양으로 다시 이사한 후 그는 1936년에 전남 담양보통학교를 졸업하나 진학은 아예 포기한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광주 전남도청에 근무하는 큰 외삼촌이 그를 데리고 광주 큰외삼촌댁으로 옮긴다. 퇴근하고는 저녁 식사 후부터 그를 직접 개인지도를 한다. 낮에는 내준 숙제와 복습을 위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검정시험과 금융조합사무원 채용시험을 대비한다. 3년 만에 둘 다 합격한다. 사회의 첫 근무지인 장성금융조합에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2년 6개월과 광주금융조합 2년을 근무하는 중 8·15광복을 맞는다.
그러는 와중에 대학에 가야겠다는 향학열로 조합을 사직하고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님의 사망소식에 다섯이나 되는 동생과 어머니의 생계를 위해 신학교 1년을 마치고 자퇴한다. 이후 광주 수피아여중, 광주고등학교, 서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서무과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된다. 미국에 도착하고는 벌써 40여 년이 넘어가고 있다.
먼저 <작가의 말>에서 “나는 몸이 약해서 일찍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오래 살리기 위해 앞길이 평탄하게 열려 있는 처녀를 가난한 집 장남인 나에게……하느님의 선택받은 처녀가 시집와서 받은 고통을 내 나이 90을 넘겨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독자에게 자신의 삶이 그만큼 진실하다는 증거를 말하고 작가 자신에게는 물상과 소통을 위한 몸부림을 말하려는 흔적이 보인다.
44편의 수필은 <그리운 정인들>, <새로운 길을 찾아서>, <첫눈에 반한 사람>, <숨겨준 향기>, <아버지와 민들레>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5부로 나눠 있다.
2.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글
작가의 글을 평하기 전에 밝힐 게 있다. 그것은 한 수필가에 대한 서평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온 노구의 이민자에게 바치는 헌사임을 밝혀둔다. 그가 보여주는 여러 작품은 실제적 경험에서 얻은 순수하고 행복한 웃음과 인정이 있고, 또 다른 인생관의 아픔이 곳곳에 베여 있다. 그리고 작가의 가슴속 전형적 고향체험에는 교회와 아버지가 있다. 가치와 지탱의 중심에 교회는 가장 안전한 쉼터이고, 특정한 장소다. 아버지는 제일의 고향이고 정신적 안락한 근원이며 불변을 보금자리다.
6·25가 발발한 지 2개월이 지난 7월 하순경, 인민군이 전남 광주시를 점령했다. 그 당시 나는 광주에 있는 여자중학교 서무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공산당에서 우리 학교 교장을 박기동 씨를 인명했다.(중략) 그 당시는 일요일에도 전원 출근을 했다. 하지만 나는 출근하지 않고 교회에 갔다. 한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학교 소사가 나를 찾았다. “교장 선생님이 찾고 계십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이내 학교로 갔다.
“신 선생님. 교회에 가는 것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부터는 출근했다가 교회로 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직원들이 제가 출장을 보낸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교장실을 나오면서 그는 분명히 남로당원인데, 행동은 인도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월요일, 당에서 식량배급이 나왔다. 남로당원 위장교사들이 나만 빼고 다 나누어 가져갔다. 내가 이들에게 협력을 안 하니까 반동으로 낙인찍고 당에 반동분자로 고발된 상태였다.(중략) 당에서는 이미 나에 대해 체포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나는 이게 기회라 생각했다. 사직서를 써서 박 교장에게 내면서 “식량배급에서 저를 제외시켰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 사표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한참 생각하다가 받아주었다.(중략) 9·28이 되었다.
박 교장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친정집 전주에 가야겠는데,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다행히 아내의 여학교 동창생 남편이 헌병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가게 도와주었다.
-<부용산의 노래>에서
화자는 일본강점기 때 금융조합에 근무하다가 8·15해방을 맞는다. 다시 6·25전쟁 당시, 젊은 나이의 눈에 비친 사건들은 이데올로기기에 대한 극명한 사실적 내용이 평자에게는 더 참혹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표현들은 대하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을 읽는 느낌을 들게까지 한다. 무엇보다도 간결한 묘사 속에 공산당에서 임명한 교장 선생을 첫 대면에서 부드러움과 선한 호감을 느끼게 하는 인민군 교장의 캐릭터가 선명하게 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억압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 현장에서 살아왔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측면의 하나를 극명하게 조명해 주고 있다. 화자는 우리 인간을 분단 현실의 극한 상황 속에 놓고 그 운명 앞에 어떤 존재로 남게 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분단의 비극과 모든 상황은 화자가 좋든 싫든 자아 내부에서 보여준 것은 결국 사랑인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해도 누군가에 의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면, 그 인간 존재는 허무라고 비극적이라 싶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우연하게 한 신문을 통해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교장 선생이 호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자는 그를 잊지 못하고 호주로 가는 친지를 통해 찾게 되었다. 박 교장의 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시인인 교장선생이 젊었을 때 요절한 여동생에 대한 시가 지금 부용산에 ‘부용산의 노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의사가 결핵을 앓은 적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시험 준비하느라고 무리해서 결핵 초기를 앓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의사가 그때 앓으면서 낳은 곳에 동공이 생겨서 심한 찬바람의 자극을 받아 오는 통증이니까 따뜻하게 해주면 통증이 없어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병원을 나오면서 걱정이 없어진 나는 하늘을 날아오른 학이 된 기분을 느껴졌다.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은 생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도 모르게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광주로 가는 기차표를 사서 다음날 새벽 광주에 도착했다. 집으로 달려가는 발길이 가벼웠다. 그런데 집 대문에 기중(忌中)이란 흰 종이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털컥 내려앉았다. 방에 들어가니 온 가족은 눈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 시신 앞에 앉으니 어린 동생 다섯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앞으로의 생계와 동생들의 교육이 염려되어 눈물도 안 나왔다. 어제 오후 4시경에 운명하셨다고 했다. 그 시간은 병원에서 내 몸에 이상이 없다고 판정을 받고 밖으로 나온 바로 그 시간이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버지가 나를 불러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버지의 민들레>에서
화자가 보여 주는 여러 작품은 이 같은 실제적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의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듯하다. 죽음과 슬픔 그리고 고독과 거대한 운명 앞에 무릎을 꿇는 바람과 같은 존재에 대한 연민 속에 가족이 있고 아울러 거기서도 생명의 도약을 시도하는 몸짓으로 잘 나타난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앞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라고 했다. 이를 수긍한다면 우리는 이제 그 모든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엄청난 과제 앞에 지레 억눌려 낙심천만한 한숨을 쉬게 될 것이다.
화자는 모든 책임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형제자매와 지식을 위한 답습하는 삶 그대로를 행동으로 옮겨 놓는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역사의 먹이사슬”이 될 뿐이다.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회자된다.
팔월 초순, 어둠이 내려진 초저녁 묘현사를 찾아가는 길은 찹찹한 바람이 불었다.
비구니 묘성 스님의 부축으로 일어나 앉으신 스님께 “오늘, 저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신성철입니다. 예순여덟입니다. 기독<여성중앙>에서 스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께 배우러 왔으니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스님은 “반갑소이다.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밤을 지내보고, 내일 결정하기로 하십시다. 식사하고 편히 쉬십시오.”라고 대답해 주었다.(중략) 지금 불당에 가서 백팔배부터 시작하라고 한다. 내가 부처 앞에서 절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니, 묘성 스님과 함께 가서 하라고 한다. 금강경을 받았다. 공과 무아를 설하는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열흘 동안 오전 내내 질의와 토론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금강경 공부를 마쳤다.
스님은 웃으면서 “그동안 우리 불교와 기독교와의 공통점을 많아 동감하였음을 알게 되었소. 내가 생각이 짧아 병신이 되었으니, 신 장로가 이 절을 맡아 주의 일을 해 주시오.”라고 진지하게 부탁한다.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만큼 우리는 동지가 되었다. “스님. 모든 것을 이곳에서 다 견딜 수 있겠으나, 음식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없어 하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부용산의 노래>에서
화자 신성철은 백영흠 목사가 살아온 길을 평생 흠모하고, 기독교 신자로 생활하면서도 여러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 그 좋은 예로, 화자가 사는 미국에서 한 잡지를 읽자마자 한국 전남 장성에 있는 ‘묘현사’라는 절을 아무런 연고나 예약 없이 막무가내 찾아간다. 그리고는 주지 스님에게 불교철학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 싶다고 청한다. 이는 화자의 가슴 속에는 또 다른 이상을 품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천도교와 유교까지 두루 섭렵하며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미래의 세계는 동서철학이 없어지고 하나의 세계철학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면서 수운과 화이트헤드의 이상적인 상호보완을 통해 세계철학을 창출해 낼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표현한다. 동학(東學)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이고 세계적인 사살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도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인생을 배우면서 즐기고 있고 당당히 말한다.
요즈음 화자는 여러 스님과 다른 종교인들과 행복한 마음으로 담소하며 서로의 종교철학을 나누고 있다. 어쩌면 화자의 가슴속에는 종교철학이라는 용암이 바위가 되어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1860년 4월, 수운 최제우가 이른바 경신년 체험을 통해 민족에 대한 자각과 종교적 큰 깨달음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전국위원은 기독교 여학교 교목이었다. 김정무를 지지해서 전국위원이 되었다. 나는 목사들을 믿지 못한다. 간사장이 김 총장 취임환영회를 전국스카우트를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하게 한다는 통지를 했다. 위원과 대장들의 준비회의도 보이스카우트 훈련장에서 한다고 통지했다. 전국에서 대장들이 모였다. 김정무도 도착했다. 내 텐트에 전국 스카우트 대장들이 줄이 이어 찾아왔다.
내 이야기를 듣고 김정무 반대운동을 그날 하자고 결의가 되어갔다. 김정무가 밤에 야영장을 나갔다. 김정무는 화가 나서 간사장을 불러 신성철이 실행위원회에 참석 못할 방법을 찾으라고 간사장에게 엄명했다. 결국, 환영회는 무산되었다. 그 탓에 나는 김정무와 원수가 되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의 불법적인 사항을 하나하나 다 적어 진정서를 만들었다. 전국의 동지들 24명의 연명으로 대통령과 각 정부 기관장과 국회의원들에게 발송했다. 국무총리실에서 경찰국에 조사하라는 통지를 했다. 하루는 경찰국 형사에게서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증빙서류를 가지고 오후 늦게 출두했다. 형사와 나는 밤늦게까지 증빙서와 대조하면서 면밀하게 조사했다.
-<꿈을 부수는 자들>에서
화자는 삶 속에서 주어진 일에 게으름이나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 항상 순응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러다가도 이성에 합당한 행동이 아니라고 싶으면 참지 못하고 불같이 분노한다. 이러한 것은 질곡의 일제 암흑기를 지나고 다시 6·25전쟁을 겪으면서,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강인한 정신이 몸에 밴 듯싶다. 그 분노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몇 년이 지난 것을 정부에 진정서까지 내미는 과격함과 치밀함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새뮤얼 존슨은 “인생은 빈곤과 권태와 부정과 싸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결국, 고령임에도 수필을 써야겠다는 강인한 자의식도 화자의 삶과 유관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가족 앞에서는 함께 먹고살아야 한다는 설득에는 어쩔 수 없이 꺾이게 된다고 한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려고 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몸부림치다가 잡혀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에필로그
신성철의 수필집 <묘현사의 밤>을 읽어보면 묘사나 수식은 거의 없다. 미사여구나 추상적, 관념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딱딱 부러지듯 어렵지 않다. 대화하듯 편하고 과장하지 않은 그대로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고 작위적인 교훈을 강요하거나 현학적이지도 않다. 당연히 자연을 가슴에 와 닿게 하는 서정수필이나 관념수필은 화자에게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몽테뉴도 수필은 삶의 진경(眞景)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신성철은 진실의 통신병이고 참 수필가의 면허증을 받을 자격이 있다.
지금 95이 넘은 수필가 신성철은 소식(小食)과 사색, 독서와 운동으로 하루하루 시계가 돌아가듯 정확하게 생활하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문학을 향한 열정은 활화산처럼 폭발하며 용암이 흘러내릴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모든 기능이 부스러지고 아주 힘겹게 생활하고 있다.
등단작품 ‘아버지와 민들레’의 내용처럼, 땅 깊숙이 뿌리를 박고 민들레의 생리를 닮은 민초(民草)인 나는 노란색을 좋아한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삶처럼 저도, 바람의 방향대로 흔들리지 않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다가 왔습니다. 눈물이 없는 이곳 동산에 피어 있는 민들레 동산에 놀러 가십시다!”
약력:
신성철(미국명: Kenneth Syn)
1922년 5월 광주광역시 출생
1958년 2월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2년 ⌜에세이포레⌟ 등단
2013년 한국문협 및 한국문협 미주지회 회원(현재)
2013년 제25회 서울문예창작 문학상 수상
저서: 묘현사의 밤. 정담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