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함께 사회활동 재개
광복이 되자 지훈은 잠시 영양군으로 가서 초등학교 교재를 엮어서 등사판을 밀고 주실마을 청년들과 함께 신사를 붙태웠다.
이후 1945년 10월, 다시 서울로 울라와서 조선어학회의 「중등국어교본」편찬원으로 위촉받고, 같은 해 11월에는 진단학회의 「국사교본」편찬원이 되었다. 조선문화건설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중앙문화협의회의 일을 도우며, 반탁운동을 비롯하여 모든 민중운동ㆍ문화운동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하였다.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시인으로서 창작도 활발히 해 나갔고 교육자로서의 삶도 시작하였다. 경기여고 교사, 서울여의대 교수를 거쳐 평생의 직장인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청록집 출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하여 등단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은 광복 후 함께 합동 시집 「청록집」을 냈다. 1946년 일이다. 이를 계기로 이들 세 사람을 '청록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합동 시집의 간행을 을유문화사로 부터 요청을 받은 세 시인은 어느 눈 오는 날 밤 지훈의 성북동 집에서 시집에 실릴 원고를 서로 골랐고, 목월이 「청록집」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출판된 「청록집」은 현대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즉, 청록파의 시풍은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과는 달리,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 세계로 요약할 수 있다.
조지훈ㆍ박목월ㆍ박두진의 서로 다른 모습
청록파 시인 셋이 걸어 갈 때면 항상 지훈이 가운데서 걷고 두진과 목월이 양 옆에서 걷곤 했는데, 지훈은 성큼성큼 걸어 앞섰으며, 두진은 매번 뒤쳐졌고 그 둘 사이엔 목월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걸을 때 모습을 보면, 지훈은 항상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걷고, 두진은 직선적인 자세로 정면을 응시한 채 걸었으며, 목월은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고 한다. 이렇듯 걷는 모습이 다르듯이 이들의 성격이나 시세계 또한 달았다. 지훈은 고전미와 선미(禪味)를 드러냈고, 두진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으며, 목월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민요풍으로 노래하였다.
청록파의 활동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한 좌파들이 문단을 주도해 가자, 청록파는 이에 맞서 우익계의 전국문필가 협회에 참여했고, 특히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청년문학가협회에 적극 가담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하였다. 일제 암흑기에 저명한 문인이라면 대부분 일제의 강요나 사상 전향으로 '친일문학'을 할 수 밖에 없었을 때 청록파 시인들은 붓을 꺾고 낙향했었다. 그들은 신예들이어서 일제의 강요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도 있었지만, 그 바탕에는 시의 순수성과 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굳건한 의식이 내재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광복 후에 청록파는 어떠한 정신적인 부담감도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존경하는 박목월 시인!
세 분 다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