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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전작(前作)의 아쉬움은 다음 작품 집필의욕을 높이는 촉매제다. 극작가 이강백씨는 “성공여부를 떠나 공연이 끝날 때면 아쉬움에 언제나 죽고 싶은 심정”이라면서도 “목구멍까지 차 오른 절박한 말들을 신작으로 빨리 쏟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시극단 제공 >

 

 

“제가 희곡을 40편 넘게 썼지만 돈 주고 제 작품 공연을 본 적은 없어요. 이번에는 꼭 티겟을 사서 볼 겁니다. 그 만큼 재미있을 거예요, 하하.”

원로 극작가 이강백(68)씨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시극단의 연극 ‘여우인간’ 제작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수십 개의 에피소드를 엮은 옴니버스 형식이라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연출이 잘 엮었다”고 새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표했다. 연극 ‘봄날’ ‘북어대가리’ ‘파수꾼’ 등을 통해 당대 한국사회를 우화와 비유로 담아온 이씨는 신작 ‘여우인간’에서 스펙터클한 우리 시대 풍경을 풍자적인 시선으로 풀어낸다. 알레고리극의 대가와 단순함의 미학으로 사랑 받는 김광보(51) 연출가의 만남으로 작품은 공연 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있다.

 

이씨는 “요즘 몇 년간 내가 무언가에 홀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 저지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선 미래로 갈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지게 됐다”고 집필계기를 소개했다. 도심 한 가운데 싱크홀이 생겨 사람들이 빠지는 사고 뉴스를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실수의 반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주 읽는 중국전설집 7권 중 5권이 여우가 사람 홀리는 이야기에요. 역으로 여우를 등장시켜 여우 시선으로 우리 시대를 바라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했죠.”

작품은 사냥꾼이 놓은 덫 때문에 꼬리를 자르게 된 월악산 여우 네 마리가 고속도로를 지나는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 오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각각 정보요원, 사회변혁운동연합 대표의 비서, 오토바이 퍽치기, 비정규직 청소부로 인간사회에 들어가 살면서 다양한 사건, 사고, 인간군상들을 접하게 된다. 사냥꾼들은 교활한 여우들이 인간사회로 들어가 혼란을 일으킨다며 이들을 잡는 데 혈안이 되고, 다른 인간들도 사고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이 여우에 홀린 탓이라 여긴다.

주특기인 알레고리(상징) 형식을 사용한 데 대해 그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서 ‘작가는 의식하든 하지 않든 불멸을 추구한다’는 구절을 인용했다. “작가는 그 시대를 형상화하면서 한편으로 시대가 지나더라도 자기 작품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적절한 시의성을 겨누면서도 상징성을 고민하게 되죠.”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여우들이 경험한 한국사회는 과거에서 현재로 왔다가,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뫼비우스 띠 속에서 미쳐 돌아가는 세계다. 여우들이 겪은 사건들은 우화, 놀이, 그림책 해설, 영상, 노래 등 다양한 형식의 옴니버스로 구성된다. 이씨는 “소설가가 디테일하게 모든 장면의 상황과 정서를 묘사한다면, 극작가는 스케치하듯 아이디어만 던지고 연출가와 배우가 그 틈을 메운다”며 “(김광보 연출가에게) 처음부터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다 싶었고, 놀이로 풀어가는 연출이 마음에 든다”며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여우인간’ 희곡은 추후 한국문학번역원의 영역(英譯)을 거쳐 해외에 소개될 예정이다. 공연 3월27일∼4월12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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