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턴 투 베이스`의 한 장면. 주인공 정지훈(정태훈 역)이 선글라스를 끼고 비행헬멧을 든 채 걸어가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 ‘탑 건’(1986년 작)을 보면 주인공 톰 크루즈(매버릭 역)를 비롯한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은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한다. 운동을 하거나 교육을 받을 때는 물론 파티 장면에서도 선글라스를 낀 조종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장면은 ‘리턴 투 베이스’(2012년 작)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주인공 정지훈(정태훈 역)과 전투기 조종사들은 잠자리 눈을 연상시키는 선글라스를 끼고 한 손에는 헬멧을 든 채 활주로를 누빈다.
사실 선글라스는 길거리를 조금만 걷다보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패션 소품이다. ‘엣지’를 강조한 디자인, 클래식한 느낌의 투박한 선글라스까지 다양한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그럼 공군 조종사들은 왜 선글라스를 낄까. 그저 멋을 내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실용적인 측면이 있어서일까.
◆ 조종사의 필수품이었던 선글라스
선글라스는 본래 조종사들의 비행을 돕는 도구로 개발됐다.
1930년대 말 존 맥글레디 미 육군 항공대 중위는 논스톱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하지만 태양빛과 구름에 반사된 햇빛에 장시간 노출되는 과정에서 시력이 크게 약해졌다.
조종사들의 장거리 비행을 위해서는 눈의 보호가 최우선이라 생각한 존 맥글레디는 렌즈·안경전문업체인 바슈롬에 선글라스 개발을 의뢰한다.
공군 F-15K 조종사들이 비행을 마치고 활주로를 걸어나오고 있다. 일부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착용하지 않은 조종사들도 보인다.
바슈롬은 6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자외선 99%, 적외선 96%를 차단하는 녹색 선글라스의 개발에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이벤’(Ray Ban)이다.
미군에 채택된 레이벤 선글라스는 조종사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필리핀 전투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레이벤을 끼고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모습을 사진기자들이 촬영해 언론에 배포하면서 인기를 부채질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레이벤에 대한 대중의 선호는 계속됐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패션 아이템으로 레이벤을 활용하면서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 ‘탑 건’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가 레이벤 선글라스를 끼고 모터사이클을 운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레이벤이 패션 아이템으로 각광받으면서 기존의 녹색 외에 검은색 등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렌즈가 달린 선글라스가 등장했다. 이에 따라 선글라스를 낀 것을 넘어서 자신의 얼굴모양에 맞는 선글라스를 잘 골라야 스타일을 살릴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 선글라스가 잠자리 눈처럼 생긴 이유
조종사들의 눈 건강을 위해 개발된 선글라스는 잠자리 눈과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이는 멋을 위한 목적이 아닌,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에 의해 디자인됐다.
잠자리 눈 모양은 조종사가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눈동자를 크게 돌렸을 때 그려지는 모양으로 눈의 사각지대를 없앤다.
영화 `리턴 투 베이스`의 한 장면.
1930년대 선글라스가 개발될 당시에는 전투기에 레이더가 없었다. 조종사의 눈으로 적기를 포착해야 했고, 누가 먼저 상대방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곤 했다.
따라서 조종사들이 적기를 잘 발견할 수 있도록 햇빛을 가리는 것은 공중전에서 중요한 요소로 평가됐다.
이를 고려해 바슈롬은 눈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잠자리 눈 모양의 렌즈에 조종사들이 가장 편안해하는 녹색을 결합해 선글라스를 만들었다.
지극히 실용적인 측면만 고려해 개발된 선글라스였지만, 디자인이 독특하다 보니 대중들에게는 패션 소품으로 각광받았다. 엘비스 프레슬리나 맥아더 등 유명인들이 애용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 공군에선 조종사 상징으로 남은 선글라스
선글라스가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반면 공군에서는 본래의 목적인 ‘조종사 눈 보호’라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제트엔진 시대로 접어들면서 전투기 조종사들은 비행헬멧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자외선과 적외선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비행헬멧 덕분에 조종사들은 비행 도중 선글라스를 낄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비행헬멧 착용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러나 선글라스의 기능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비행헬멧의 안면 덮개에 색을 넣어 선글라스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미 공군 조종사들의 비행헬멧.
이 때문에 요즘은 비행 중에 조종사들이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일은 없다. 영화에서 전투기 조종사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비행헬멧을 들고 다니는 장면은 말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다. 공군기지에서 조종사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활주로를 누비는 모습을 찾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공군에서 선글라스가 본래의 군사적 목적을 잃어버렸지만, 선글라스는 여전히 공군 조종사를 상징하는 ‘문화 아이템’의 일부로 통용되고 있다. 공군 조종사들도 비행 외의 대외 활동에 나설 때는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경우도 자주 눈에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