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수화를 그리는 동양화가들이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그렇다. 몇몇 작가들에 의해 겨우 명맥은 유지되고 있지만 197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의 전성기에 비하면 산수화 실종시대라 할 수 있다. 산수화가 현대라는 급물살에 휩쓸려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김종우(54) 작가도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한동안은 산수화를 외면하고 살았다. “학창시절 중국 북송 산수화가 범관의 계산행려도를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이 멎는 듯했다. 웅장하고 빼어난 산세와 작은 빗방울 모양(우점준)으로 거대한 자연을 화폭에 담아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런 벅찬 감동의 기억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산수를 감히 그리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6년 전 어느 날 TV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중국 황산을 보고 다시금 마음을 곧추세웠다. 먼저 황산으로 달려갔다. 수차례 순례기행을 감행했다. 처음엔 음식과 물이 안 맞아 병원 신세도 졌다.
“만반의 채비를 하고 황산에 올라도 산이 허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운무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여러 번 헛수고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6년간 그렇게 중국과 한국의 산수기행을 해왔다. 특히 다양한 산수화 기법을 탄생시킨 중국 산수의 실체에 다가가고 싶었다.
“산수화의 전성기인 북송 화가들이 올랐던 산에 올라 그들이 보았던 것을 보고 싶었다.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그렸는가 시간을 거슬러 똑같은 현장에서 그들을 다시 만난 셈이라 할 수 있다.”
황산 등 중국에 있는 여러 산을 여행하면서 그가 제일 부러웠던 것은 우리 땅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산세들이었다.
북송 화가 이당의 ‘만학송풍도’를 재해석해서 그린 ‘신만학송풍도’. 여러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몽유도원도와 같은 풍광이 중국 후난성 장자제 공중정원에 펼쳐져 있는 모습에 놀랐다. 우뚝 솟은 봉우리 꼭대기에는 넓은 논밭이 있었고,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복숭아나무들이 즐비하고, 바로 옆에는 장자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봉우리들이 산재해 있었다. 바로 그곳이 그림속 무릉도원 선경(仙境)이었다.”
중국 산하를 여행하면서 그는 그동안 관념으로 알던 풍경들이 현실세계에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 그림들의 원형이 그곳에 있었다. 다양한 바위의 생김새에서 부벽준, 마하준, 피마준 등 산수화의 여러 가지 준법들이 탄생했음을 알게 됐다. 황산만 해도 선과 면이 다채로워 여러 가지 준법 모양이 펼쳐져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는 도끼로 내리쳐서 생긴 자국 모양의 부벽준이었다. 네모난 바위가 쌓여 마치 말 이빨 모양을 한 마아준과 베나 마와 같은 섬유를 푼 것 같은 꺼칠꺼칠한 감촉을 가진 피마준도 있었다. 장자제는 토산을 닮은 바위들이 많아 범관이 주로 쓰던 우점준의 준법이 어울렸다.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가 황산의 판박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금강산 내금강 여행 땐 실감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겸재가 이곳에 왔다 가지 않았나 할 정도다. 앞으로 미술사학자와 미학자들이 연구할 과제라 생각한다.”
아마도 역대 화가들이 산수를 직접 보지 않고 그렸다면 지금과 같이 다양한 준법과 형상들이 창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는 그만큼 상상외의 선경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정선의 금강전도와 같은 선경이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북송시대부터 화가들이 발아래 펼쳐진 험준한 산들을 친히 임해서 그린 칼날 같은 사실 추구 정신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방불케 하는 장자제 공중정원을 배경으로 선 김종우 작가. 6년간 중국 산을 답사한 그는 “이 시대 산수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선 머리보다 발아래의 고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화가에게 풍경을 그리는 일 못지않게 풍경을 바라보는 자체도 창조적인 일이다. 그만큼 화가들은 자기가 그리고자 하는 장소를 물색하는 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느 곳을 선택하고 어떠한 시점으로 바라보았는가에 그림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선경은 관념 속에 있는 초현실적인 백일몽일수도 있지만, 조금만 수고하면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세계에서의 비경인 것이다.
‘내가 분명히 본 것’ 또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우리는 대부분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허술한 구석이 많다. 인간의 뇌는 자주 착각하는데 사람들은 그 착각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확실하다고 믿는 것, 분명히 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예부터 선비들은 마음속 의문이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 공부라고 했다.
“산수화에 덤벼드는 일이 때론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앞서간 대가들의 영향을 피해 돌아가는 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여기에 맞설 수 있는 신념만이 나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서 산수기행을 지난 6년간 해왔다.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발아래의 고행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에겐 선경(仙境)을 찾아서 떠나는 여정이자 나름의 산수화 작업의 시작이었다. 결론은 점으로의 귀환이었다. 송대 미불이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미점준(쌀알 크기의 점으로 그려가는 수묵산수화법)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윤곽선은 사용하지 않고 사물을 먼저 번지게 하고 그 위에 점을 찍는 기법이다. 미세한 점으로 그려가는 점자준도 있다. 서양 근대화가 쇠라(점자준)와 시냑(미점준)도 사용했다. 이른바 점묘법이다.
“점묘법은 결코 새로운 기법은 아니다. 선을 유독 강조하는 동양화에선 선을 긋고 선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툭툭 점을 찍어가는 방법(태점)을 썼다. 나는 보완의 이미지가 강한 작은 점으로 광대한 자연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은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중용의 도이기도 하다. 산수화의 힐링적 요소를 가슴으로 이해했다.”
전통이라는 잘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그의 우리 그림에 대한 새로운 발걸음에서 한국화의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