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2.26 03:14

 

134711, 흑해서 온 배 입항마을 폐허되고 유럽·러시아로 번져

"우물에 독 뿌려" 유대인을 범인 지목수천명 산채로 태워

 

- 1차대전보다 많이 죽은 스페인 독감

1918년 창궐, 2000만명 목숨 앗아南美 퍼진 천연두도 2000만 희생

1817년 콜레라는 조선까지 번져

- 몽골군, 시체 투척최초의 세균전

14세기 페스트 중국에서 시작한 듯교역로 타고 몽골군과 함께 西

1346년 흑해 도착세균전 기록

 

 

인류 역사는 전염병과 함께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상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든 대유행병(pandemic) 사례도 많이 있다. 1918년에 창궐한 스페인 독감의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엇갈리지만 대체로 2000만명 이상이었으리라고 추산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에 이 병이 유행했는데,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보다 이 병에 당한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1817년에는 콜레라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이 병은 인도에서 창궐한 후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어 조선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 후 증기선의 발달에 힘입어 5~6차례 세계적으로 콜레라가 유행하여 각지에서 엄청난 공포를 일으켰다. 19세기의 콜레라는 현재보다 훨씬 병세(탈수 증상)가 심해서, 심지어 감염 하루 만에 피부가 시커멓게 변하고 온몸이 쪼그라든 채 사망하는 수도 있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1520년에 코르테스가 이끄는 소수의 스페인인 부대가 남미 대륙에 퍼뜨린 두창(천연두)을 들 수 있다. 잠복기가 열흘 이상이었던 당시 이 병의 특성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한 마을에 병이 퍼지면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디오들이 이웃 마을로 피신해서 그곳에 병균을 퍼뜨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의학사가(醫學史家)들은 천연두로 아메리카 주민 2000만명 이상이 숨지고 한 세기 동안 전 세계 인구 1억명이 죽었으리라고 추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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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가 유럽에 창궐했던 13492월 스트라스부르 유대인 대학살. 당시 유대인 2000여 명이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페스트, 역사상 가장 큰 공포의 전염병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공포를 각인한 전염병으로는 14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을 강타한 페스트를 들 수 있다. 페스트를 일으키는 박테리아(Yersinia pestis)1894년에 가서야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정체를 밝혀냈다. 그렇지만 페스트·흑사병·괴질 등이라 부른 과거의 병이 모두 이 병원균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분명 병원균 자체가 계속 변이(mutation)를 일으키면서 질병도 변화했음이 틀림없다. 사실 이 병은 14세기에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마도 2만년 전부터 인류가 알고 있던 오래된 질병이었다. 서기 6~7세기에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을 때에는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 병에 걸렸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14세기의 페스트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아마도 중국에서 처음 발생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피해를 보았다. 학자들은 1331년부터 1393년까지 중국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사망해서, 12500만이던 인구가 9000만명으로 줄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후 이 병은 중앙아시아 교역로를 통해 서쪽으로 전파되었다. 페스트의 빠른 전파는 몽골 제국 건설과 관련이 깊다. 몽골 전사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광범위한 지역을 정복하고 그 후 제국 질서 아래서 원거리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이 병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페스트는 사람의 이동 경로를 따라서 사마르칸트 같은 카라반 중간 지점을 거쳐 1346년에 흑해에 도착했다. 이때 전설적 '세균전'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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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1562년에 그린 '죽음의 승리'는 중세에 만연했던 흑사병으로 해골의 군대(죽음)가 살아 있는 인간을 학살하는 지옥 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흑해 연안의 카파(Caffa·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페오도시야)는 이탈리아 제노바 상인들의 동방 무역 거점이었는데, 이해에 몽골 군대에 포위당해 있었다. 그런데 몽골군 내에서 페스트가 발병하여 더 이상 전투가 어려워지자 투석기를 이용하여 페스트 환자 시체를 성 안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데 무르시스(de Mursis)라는 이탈리아인 연대기 작가가 기록한 이 내용이 과연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이 시기 흑해 연안에서 페스트가 창궐했고, 이탈리아 무역선들을 매개로 유럽에 이 병이 유입된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흑해 연안을 떠난 배들이 터키와 그리스, 이집트의 항구들, 지중해의 여러 섬에 균을 뿌렸다. 공포에 싸인 제노아가 카파에서 출발한 선박 입항을 거부하자, 이 선박들은 할 수 없이 마르세유로 갔다. 134711월에 이 도시는 입항을 허락해 주었다. 이 부주의한 행위의 결과는 참혹했다. 마르세유 일부 지역은 주민이 몰살당했다. 남부 프랑스와 이탈리아 도시들을 황폐화한 다음 프랑스 중심부를 거쳐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급기야 스칸디나비아와 모스크바까지 병이 확산되었다. 교역로를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맹렬하게 퍼져 간 것이다.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실증 연구에 따르면 노르망디 지방에서는 1340년부터 1460년까지 인구 70%가 사라졌다. 독일 지역에서는 페스트 이전에 17만 마을이 존재했지만 1500년에는 13만 곳만 남았다. 마을 전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폐촌(廢村) 현상이 극심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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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3월 미국 캔자스주 포트 라일리의 캠프 펀스턴 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스페인 독감 환자들.

 

 

전염병은 정신까지 황폐화한다

 

전염병은 사람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황폐하게 만든다. 질병을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하고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자기 몸을 채찍질하며 행진하는 고행자들(flagellant)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크게 확산되었다.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는 차라리 낫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신의 응징을 찾기 시작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유대인, 이방인, 유랑 걸인, 순례자, 이교도, 나병 환자 등에 대한 공격이 급증했다. 특히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어서 병이 퍼졌다는 유언비어가 번지면서 가혹한 유대인 학살 사건들이 일어났다. 1348년 스트라스부르에서는 900명 가까운 유대인을 살해하거나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유대인 여인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기독교 세례를 받게 하느니 차라리 불 속에 던져 넣었고, 그다음에는 자기 몸을 던져서 남편과 아이 뒤를 따랐다"고 당대 기록은 전한다. 카라반이 페스트를, 증기선이 콜레라를 전파하는 이상으로 현대사회에서는 비행기 여행이 각종 전염병을 신속하게 퍼뜨릴 수 있다. 세계적 질병 확산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신종 플루, 메르스, 사스 그리고 현재의 코로나19와 유사한 사태는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의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더욱 철저한 준비를 갖추어 가는 수밖에 없다.

 

 

"회개와 눈물을 버무려 고약을 만들어라"

  -교회가 내놓은 황당한 처방

 

페스트의 발병 원인을 조사하라는 국왕 필리프 6세의 지시를 받은 파리대학 의대 교수들은 이렇게 답했다. "1345320일 정오 지나서 한 시간이 지난 뒤 세 별이 물병자리에 들어갔다. 이것이 우리 주변 공기를 치명적으로 오염시켜서 죽음을 초래했다. 목성은 습하면서 뜨거우므로 땅의 사악한 수증기를 불러일으키고, 화성은 극히 뜨겁고 건조하므로 이 수증기를 불태워서 그 결과 번개가 치고 사악한 증기와 불이 공기 중에 가득하게 되었다." 당시 한 의학 논문에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걸고 거짓된 맹세를 많이 한 것이 원인"이라고도 주장했다.

 

병의 원인 분석이 이 수준이니 올바른 대응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의사들은 "매일 공복 상태에서 토하고, 일주일에 최소 두 번씩 따뜻한 침대에서 이불을 잘 덮고 따뜻한 음료수를 마셔서 땀을 흠뻑 내라"고 처방했다. 분명 방의 환기를 막아서 역효과를 냈을 것이다. 교회 또한 막연하기 짝이 없는 대책을 내놓았다.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한 통렬한 혐오감과 또 같은 양의 회개를 모아서 그 둘을 눈물로 잘 버무려 고약을 만든다. 그러고 꾸밈없이 정직한 고백을 토하면 죄의 치명적 독성에서 벗어나고 악덕의 종기가 완전히 녹아서 사라지게 되리라."

 

방역 대책도 향기 좋은 나무를 태워서 공기를 정화한다든지, 교회 종을 난타해서 성스러운 울림이 공기 중에 퍼져나가도록 하는 식이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페스트 치료에 영험하다는 로크 성인(Saint Roch)의 성상을 찾아 기도하거나 성지 순례를 떠났지만, 이것이 오히려 전염병 확산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교황청에서 만류하기에 이르렀다.

 

전염병의 원인에 대해 하느님의 진노 혹은 '마귀의 시샘' 같은 것으로 돌리지 않고 세균·바이러스를 찾는 과학적 접근은 19세기 말에 가서야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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