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보다 훨씬 더 대접받는 '희귀본'

조회 수 6183 추천 수 1 2015.07.14 17:00:22

미국의 경매 사이트를 검색해보면, 1890년대에 출간된 코난 도일의 단편집 두 권 묶음(<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의 회상>)이 1만5000 달러, 레이먼드 챈들러의 1945년판 <빅 슬립>이 1만5000 달러에 ‘즉시 구매 가능’으로 되어 있다.

요즘 갑자기 값비싼(?) 500원짜리 동전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많이 띄었다. 19세기도 아닌 1998년에 발행한, 기념주화도 아닌 평범한 500원 동전에 ‘값비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게 뭔가 이상하게 보였다. 발행한 양이 적어서 희귀한 물품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주머니 속의 동전을 살펴보았지만 당연히 없었다. 발행한 양이 적다고 해도 8000개나 된다는데, 그것들이 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혹시 1998년에 출간된 추리소설의 가격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온라인 서점과 헌책방 등을 살펴보니, 1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절판된 책도 있고 아직 판매되는 책도 있다. 아무리 비싸도 1만원 이상의 가격이 붙은 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다지 의외의 일도 아니다. 오히려 500원 동전의 가치 상승이 놀라운 현상인 셈이다.

1998년이 아닌 1980년대나 1970년대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비로소 찾기도 힘들고 값도 올라간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뛰어들 만큼 환금성(換金性)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몇 년 더 지난다고 해서 가치가 상승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물론 100년 전에 출간된 이해조의 <쌍옥적>이 경매에 나온다면 꽤 비싼 값에 거래될 것이다. 이건 골동품적인 의미에서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고 ‘추리소설 고서’로서 대접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경매 사이트(이베이)에 올라온 챈들러의 <빅 슬립>

유명작가의 데뷔작 초판 인기 높아한국에서 나온 추리소설이 ‘희귀본’ 대접을 받기는 쉽지 않다. 우선 존재 자체가 드물어야 하고, 거기에 출간 연대, 작품 수준, 저자의 명성 등 몇 가지 조건이 붙어야 한다, 또는 책 자체는 흔하지만 저자의 자필 서명 등이 있으면 희귀본이 된다. 한때 절판된 문고판 추리소설이 2만~3만원씩에 거래된 경우도 있고, 출간 당시에는 호응이 없다가 정작 절판된 후에 찾는 사람이 많아 가격이 오른 작품도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꽤 많은 추리소설이 재출간되면서 옛 책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구입하는 일이 드물어진 것 같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추리소설의 가격이 상승하는 경우는 웬만해서는 보기 힘들다. 외국의 경우는 많이 달라 오래된 걸작 초판본은 만만찮은 가격에 팔린다. 미국의 경매 사이트를 검색해보면, 1890년대에 출간된 코난 도일의 단편집 두 권 묶음(<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의 회상>)이 1만5000 달러, 레이먼드 챈들러의 1945년판 <빅 슬립>이 1만5000 달러,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중 하나인 <문레이커>(1955) 초판은 1만1000 달러에 각각 ‘즉시 구매 가능’으로 돼 있다.

스티븐 킹의 서명
이 책들은 최소한 반세기 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의 작품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작품 활동 중인 현역 작가의 작품에도 높은 가격이 매겨진다. 유명 작가의 데뷔작 초판이 수집가의 목표물이 되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캐리>(1974)는 7500 달러, 존 그리셤의 <타임 투 킬>(1989)은 2000 달러, 데니스 루헤인의 <전쟁 전 한 잔>(1994)은 300 달러,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 에코>는 200 달러에 올라가 있다. 일본도 비슷해서, 역시 경매 사이트를 보면 가장 비싼 가격에 올라온 책은 나가이 히데오(<허무에의 제물>이 번역돼 있다) 전집 11권으로, 무려 102만 엔이다. 에도가와 란포의 1940년대 책들은 15만 엔을 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추리소설 고서 시장이 활성화돼 있다 보니, 고서점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도 종종 볼 수 있다. 존 더닝은 전직 형사 출신 헌책방 주인 클리프 제인웨이를 주인공으로 한 <책 사냥꾼의 죽음>

등의 시리즈를 썼다. 미카미 엔은 놀라운 추리력을 가진 고서점의 젊은 여주인 시오리코가 등장하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를 발표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추리소설의 가격 상승 이유는 아마도 수집가의 증가 덕택이 아닐까. 예전에는 책을 구하려면 헌책방을 찾아 발품을 팔아야 했지만, 요즘은 온라인으로 검색과 구매가 가능해서 별다른 수고 없이 입수가 가능해진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왼쪽부터)존 더닝의 <책 사냥꾼의 죽음> 표지,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표지, 엘러리 퀸의 <퀸의 거실에서> 표지

‘완벽한 상태의 초판본에 작가 사인’ 최고

심심할 때 가끔 꺼내보곤 하는 엘러리 퀸의 칼럼집 <퀸의 거실에서>에는 책 수집가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초심자 수준의 수집가는 ‘애호가(Book Lover)’. 이 때는 상태에 문제가 없는 책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이다. 그 다음 단계는 ‘감식가(Connoisseur)’로, 자신의 수집품을 모두 초판본으로 바꾸고 싶어지는 상태가 된다. 이어진 세 번째 단계는 ‘수집광(Fanatic)’으로, 단순한 초판본이 아니라 인쇄소에서 갓 나와 손도 안 댄 듯이 완벽한 상태여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서적광(Bibliomaniac)’이라는 최고 수준인데, 그가 원하는 것은 완벽한 상태의 초판본에 저자의 서명을 받는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저자 서명’에 대한 것이다. 언젠가 헌책방에 들렀을 때, 낯익은 책이 있어 표지를 들춰보았더니 거기에는 ‘000선배님께’ 라는 서명이 있었다. 선후배 작가 사이에 전달된 책일 것이다. 아마도 이사를 가는 등의 어떤 일 때문에 서가를 정리하면서 밖으로 나온 것이겠지만, 약간 기분이 묘해지긴 했다. 어떤 사람은 증정본을 버릴 때 서명 부분을 다 찢어낸다고 한다. 저자의 서명이 있는 책은 가치가 상승한다는 외국과는 많이 비교가 된다. 작고한 작가의 서명본은 당연히 비싸다. 생존 작가 중에는 스티븐 킹의 서명본이 비싼 편이다. 한정판 <다크 타워> 전집 세트는 1만5000 달러 이상의 가격에 경매로 올라와 있다. 현역 작가의 작품들 역시 몇 십 달러씩 비싸다. 다만 요즘은 서명 이벤트가 많아져 과거보다는 가치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출간된 추리소설을 챙겨 오다 보니 얼떨결에 수집가 비슷한 모양이 돼버렸다. 엘러리 퀸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읽을 수 있는 상태’의 책이 대부분이니 애호가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다만 본의 아니게 초판본이 대부분이고 흔하지 않은 작품도 약간 있으니 ‘감식가’에 한 걸음 다가선 셈이다. 적당히 읽고 꽂아놓으니 세 번째 단계로 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언젠가 우리나라도 추리소설 고서(古書)의 가치가 상승할 수 있겠지만, 종종 헌책방을 찾아가 구입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수천원대의 저렴한 책값이 훨씬 반갑긴 하다. 어쩌다 보니 저자에게 증정 받은 서명본도 약간 있다. 혹시 나중에 귀중품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허망한 생각도 잠깐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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