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 맞은편.. 재개발로 철거 위기
서울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왼쪽 상가건물 사잇길로 한 발짝만 들어서면 허름한 업소들이 한 줄로 다닥다닥 붙은 골목이 나온다. 모두 여관 건물이지만 'OO여관' 'OO호텔' 등 간판을 내건 곳은 몇 개 안 된다. 영세한 여인숙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세탁소와 양복점 같은 작은 가게들도 있지만 건물들은 칠이 벗겨지거나 빛이 바랬고 전봇대엔 수십 가닥의 전깃줄이 뒤엉켜 하늘을 가리고 있어 한눈에 봐도 영락없이 퇴락한 마을이다. 서울성곽으로 올라가는 길 양옆에 내놓은 화분들에게서 그나마 생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 건너편 마을에 자리잡은 '옥바라지 여관 골목'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사람들을 옥바라지 하던 이들이 기거하던 곳이며 골목길 해설사의 해설코스로 지정되어 있다.
▲ 좁은 골목 안에 자리잡은 여관.
그러나 이곳도 한때는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엔 장사가 잘 됐죠. 손님들 대부분이 다음날 구치소 면회하러 시골에서 올라와 하룻밤 눈을 붙이기 위한 사람들이지만, 옥바라지 하러 시골에서 올라온 아낙네들도 많았어요. 어찌 보면 그네들의 눈물로 여기 사람들이 먹고 살았던 겁니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현저동 토박이' 곽선진(56)씨의 말이다. 지금은 종로구 무악동이지만 예전엔 이 일대가 모두 현저동이었다.
그런데 옥바라지라고? 맞다. 이곳은 약 30년 전만 해도 건너편에 서대문구치소가 있었다.
아들의 석방 기원하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기거하던 곳
아직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인 1907년,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서대문에 형무소부터 지었다. 잡범들도 함께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해방 이후에도 군사독재정권과 싸워온 민주열사들이 수용돼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 곳이다.
사람들은 보통 서대문형무소와 그 안에 수용됐던 사람들만 기억하지만, 그들이 하루빨리 풀려나기만을 고대하며 묵묵히 뒷바라지해왔던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공간도 분명히 있었다. 바로 이곳이다. 그렇게 치면 '옥바라지 여관 골목'이라 불리는 이곳은 역사가 100년이 넘은 셈이다.
죄수들 상당수가 남자였던 만큼 그들의 아내, 누나, 여동생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어머니'가 많았다는 게 이곳에 오래 산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하루에 한 번 허용되는 면회시간에 밤새 정성껏 세탁한 옷 꾸러미를 들고 면회실 앞에서 순번을 기다리는 여관 골목의 '어머니'들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그 '어머니'들이 형무소 서쪽 안산 중턱의 새절(봉원사)에서 형무소를 향해 절하면서 아들의 석방을 위해 불공을 드렸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절에서 보면 형무소 경내가 훤히 보였던 것이다.
곽씨는 "폭력사건에 연루된 아들이 20년형을 받았는데,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이곳 여관에 묵으며 매일 탄원서를 내 결국은 7년형으로 감형받는 걸 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씨 등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들이 이 골목의 여관에서 심부름하면서 자식들을 옥바라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한겨레> 2012년 2월 11일자 기사에는 인혁당 사건 당시 군종참모였던 박정일 목사가 전날 '서대문구치소 근처 여관'에서 묵은 뒤 다음날 죄수들의 사형 집행을 참관했다는 기록이 나와, 이곳이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치소 이사 가자 쇠락의 길로... 몰려오는 재개발 바람
▲ 한 여관방에서 내다본 형무소 자리. 지금은 상가건물과 숲에 가려져 잘 안 보이지만 예전에는 형무소 담장이 마주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잘 나가던' 여관 골목은 1987년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이사 가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옥바라지 손님들은 당연히 없어졌지만 구치소를 따라갈 수 없었던 여관 주인들은 일반 손님들을 받으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한 여관집 주인은 "아베크족(젊은 한 쌍의 남녀)과 장기 투숙 손님들 덕에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 여느 퇴락한 마을과 마찬가지로 '옥바라지 여관 골목'도 재개발의 바람을 비껴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6년 이후 '무악제2재개발지구'로 묶여오다가 재개발조합이 지난달 17일 관리처분계획을 종로구청에 접수하고, 26일 구청이 인가를 내주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해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반대 주민들은 종로구청에 몰려가 기자회견을 여는 등 언론에 호소하는 작전으로 맞서고 있다. 종로구청은 당초 3일 고시를 마치는 즉시 재개발조합과 함께 철거와 주민이주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김영종 구청장이 2일 주민들과 면담한 뒤 일정을 미루는 바람에 주민들은 약간의 시간을 벌게 됐다.
비대위와 같이 활동하고 있는 김한울 노동당 서울시당 사무처장은 "무악제2구역은 일제시대부터 100년 동안 일제와 독재정권에 의해 핍박받아 온 이들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던 곳"이라며 "한 번 사라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역사문화 자원의 훼손에 (종로구청이) 분별없이 손을 들어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서울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서울성곽과 서대문형무소의 주변 환경을 이루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지역임에도 아파트 재개발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공공의 역사문화 자원을 훼손하거나 훼손을 방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대주민 "갈 곳이 없다" - 구청 "재개발 불허할 이유 없다"
아이러니컬 한 것은 이곳이 종로구가 지난 2011년 11월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골목길 해설사의 해설 코스로 지정한 곳이라는 점이다. 지금도 골목에 들어서면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아낙들의 임시기거 100년 여관골목'이라고 써있는 표지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이 사라진다면, 관할 지자체가 인정한 역사적 자원을 불과 3년여만에 없애는 셈이다.
김 사무처장은 또 "관리처분계획 수립 과정에서 분양신청자와 현금청산자의 비중이 크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충분히 설명되지 않거나, 일반 분양가가 시세보다 과도하게 높게 책정되어 사업성이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며 사업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옥바라지 여관 골목에서 '구본장' 여관을 경영하고 있는 주민 이길자(62)씨는 "이 여관은 35년 동안 내 모든 것을 바쳐 일궈온 나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며 "재개발이 이뤄져 보상을 받는다 해도 이 근처 어디서도 이같은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최은아 비대위 총무는 "오래된 동네라고 해서 무조건 때려 부수고 아파트를 짓기보다는 서촌이나 북촌처럼 예쁘게 꾸며놓으면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마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역사문화유산의 보존과 재개발 위주 개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조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관심을 기울여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종로구청 주택과 관계자는 "그동안 반대 주민들로부터 재개발의 사업성에 대한 문제 제기만 들었지 여관 골목 얘기는 처음 듣는다"며 "관련 규정이나 지침을 찾아봤지만, 여관 골목을 이유로 재개발을 불허할 근거가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또 "사업성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청 주거재생과 관계자도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인가권이 구청에 있는 만큼 원칙적으로 서울시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