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오영의 창작수필론

조회 수 9434 추천 수 2 2015.04.20 08:48:45

윤오영의 창작수필론

-『수필문학입문』에 나타난 창작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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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우리 수필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필과 에세이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치옹(痴翁) 윤오영(1907∼1976) 선생도 그의『수필문학입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에세이는 영국의 특한 문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수필과 에세이는 동일한 것이다.”(관동출판사, 1975. P. 246.)

  윤오영 수필가           필자는 우리나라 수필이론서를 말하면서 이관희 선생의『창작문예수필이론서』(청어, 2007.)가 나오기 전까지의 동양의 문장론 중심의 이론서로는 윤오영의『수필문학입문』이 대표적인 이론서라고 말한 바 있다. 창작문예수필 이론서가 나오기 전까지를 동양적 수필론으로 잘 정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문장론 중심의 동양문학론이지만 창작론 중심의 현대문학에 다리를 놓고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수필 전문지 월간《隨筆文學》(관동출판사, 1972.)의 창간호가 나온 것은 1972년 3월 1일의 일이다. 발행인은 김승우, 주간은 박연구였다. 이 월간지는 1981년 11·12월호, 통권108호를 내고는 재정난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그동안 윤오영은 1972년《隨筆文學》통권 3호에 ‘수필문학의 첫걸음(1회)’을 싣기 시작하여 13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2호에서는 桐梅室主人(동매실주인)이란 필명으로 ‘수필문학 강론’을 6회에 걸쳐서 연재했다. 그러니까 같은 수필 전문지《隨筆文學》에 수필론을 두 가지로 연재하였고, 연재가 끝나자 이를 한데 묶어《隨筆文學入門》을 내어놓은 것이다. 수필의 이론서가 없던 당시에는 큰 사건이었다.

참고로 지금 간행되고 있는 같은 제호인《隨筆文學》은 1988년 9월에 창간호가 새로 나왔으니, 발행인 겸 편집인은 강석호, 주간은 오창익이었다. 굳이 애초의《隨筆文學》후신을 따진다면 지금의《에세이문학》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隨筆文學》이 재정난에 허덕일 때 정기 구독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국수필문학진흥회’가 창립되어 꺼지려는 불빛을 살려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隨筆公苑》을 창간(1981, 대표 차주환)하여 운영하다가《에세이문학》으로 제호를 바꿔(1999) 지금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隨筆公苑》창간호에 차주환 교수의 <윤오영과 수필문학>이 실렸는데 첫 문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치옹(痴翁)이 5년 전에 죽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소.” 이 말은 피천득(皮千得) 씨가 만년에 접어든 윤오영 씨에게 한 농담이다.”

윤오영 선생이 70평생의 끝 무렵 4∼5년 동안에 그의 저서가 나왔기 때문에 한 말이다. 피천득 교수는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정말 우리나라 수필계를 위해서 ‘큰일 날 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무렵에 윤오영 선생의 모든 저서가 나왔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타계하기 직전에 나온《隨筆文學入門》에 산재한 수필의 창작론, 특히 에세이에서 ‘창작수필’로 진화·발전하는 데 다리를 놓아준 이론의 편린들을 찾아서 창작수필론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자 하는 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Ⅱ.『수필문학입문』에 나타난 수필 창작론

 

윤오영(1907∼1976) 선생은 서울 출생으로 호는 치옹(痴翁) 또는 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라 했으며, 보성고등학교에서 20년 간 교편을 잡았다. 현대문학에 <측상락(廁上樂)>을 발표한 이래 많은 주옥같은 수필을 발표했고, <방망이 깎던 노인>이 중학교 교과서에, <마고자>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다. 수필집 『고독의 반추』(관동출판사, 1975.)와 편저『批點評解 한국수필정선』(관동출판사, 1976.)이 있고, 이 소론의 텍스트로 삼은『수필문학입문』(관동출판사, 1975.) 등이 있다.

『수필문학입문』은 1972년 3월 이후《隨筆文學》에, 실명 윤오영과 호인 동매실 주인을 가지고 두 가지로 연재한 수필론을 연재가 끝나자 한데 묶어낸 책이다.「수필문학의 첫 걸음」이 제1부로 실제 작법의 강의요, 제2부는「수필문학강론」으로 이론 편이다. 그리고 부록이 6개 항으로 되어 있다. 이 관동출판사『수필문학입문』이 절판되자 ‘태학사’에서 2001년에 같은 내용으로 새로 나온 책이 있는데 부록만 하나 더 추가 되어 7개항으로 되어 있다.

윤오영의『수필문학입문』에는 수필(에세이)의 창작문학 쪽으로 진화 현상을 예견하게 하는 이론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예문들을 찾아내어 창작수필의 이론과 연관 지어 보는 일이다. 본 예문 텍스트는 관동출판사(1975) 본에 의거한다.

 

1. “이것이 동양에서의 수필의 정확한 개념이다.”(152쪽)

윤오영이 <수필의 개념>에서 밝힌 내용이다. 윤오영의 수필론은 동양 수필론에 그 이론적 근거가 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 내용은 ‘① 수필이란 자유로운 산문이다. ② 마음 내키는 대로(隨心所慾수심소욕), ③ 얽매임이 없으며(毫無滯碍호무체애), ④ 운(韻)이 없는(無韻曰筆무운왈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자유롭다’는 말은 고전 문장의 일체의 규격과 제한된 사상에서 탈피한다는 뜻이요, 산문이란 말은 낭송체에서 오는 대구여사(對句麗辭)와 같은 수사법을 파기한다는 뜻이니, 원래 산문은 변문(騈文)에 대칭되는 말이라 했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는 항고혁신(抗古革新의 낭만 문학을 제창한 만명(晩明)의 소품문 운동을 들고 있다.

 

2. “《용재수필》자체가 곧 수록(隨錄)이요, 문학 작품으로서의 수필은 아니다.” (152쪽)

윤오영은 홍매(洪邁, 1123∼1202)의《용재수필》을 문학 작품이 아닌 수록(隨錄), 즉 그냥 기록으로 보았다. ‘붓 가는 대로’를 수필문학의 개념으로 삼은 종래의 수필관과는 다르다. ‘붓 가는 대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3. “에세이라 해도 좋고, 수필이라 해도 좋다. 요는 하나의 문학작품이라야 한다.” (155쪽)

영국에서 에세이라 부르고, 중국에서 소품문 혹은 수필이라 부를 때, 결국 이것이 문학수필이요, 본격적인 순수 수필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 수필은 문학적 생명을 가진 ‘창작문예수필’과 같은 뜻이 된다. 어떻게 부르든 수필은 문학 작품으로서의 자유로운 산문을 말하는 것이다.

 

4. “이제(1975) 무명 유명의 수필이 우후죽순같이 양산의 홍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 실제와 이유는 여하 간에 수필이 하나의 새로운 문학의 장르로서 신아(新芽)가 미동(微動)하기 시작한 것이요, 한국적인 참다운 수필문학이 태동하려는 희망으로 받아들여 좋을 것이다.” (155쪽)

‘희망으로 보았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요, 이제 태동(胎動)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현대문학이 본격 출범(1908)한 이후 반 세세기를 훌쩍 넘긴 때였다. 그런 때-1975년-에 윤오영은 아직 한국적인 수필문학이 태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창작문예수필로 치고 있는 최남선의 <가을>(1917)이 나온 것도 참고할 일이다.

 

5. “수필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볼 때 흔히 수필이라고 일컫는 세간의 비문학 작품적인 문장들은 한낱 잡문에 불과하다.” (156쪽)

‘수필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보는 것은 창작 작품을 두고 하는 얘기다. 몽테뉴나 베이컨의 작품은 비창작 일반산문문학이고, 창작문학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문학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고 했다.(173쪽) 그렇다. 문학수필은 형상화가 되어야 문학수필이고 잡문은 형상화가 되지 않은 소재의 나열에 불과한 작품이다. 소설과 시는 원래 창작이기 때문에 잘못되어도 태작일수는 있어도 다른 문학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의 수필가 기리우메(桐梅: 예명)의 <수필의 성격>에서 말한 “소설은 밤(栗)에, 시는 복숭아(桃)에 비유한다면, 수필을 곶감(乾柿)에 비유될 것이다.”라는 말을 상기하면 쉽게 알 수 있겠다.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은 잡문’이라는 말은 창작수필의 개념인 ‘시적 영감의 산문적 형상화’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6. “하여간 정서적(情緖的)이란 것은 문학수필의 중요한 속성이다. 아니, 어쩌면 본질일지도 모른다.” (169쪽)

이렇게 윤오영은 수필문학의 ‘속성과 본질을 정서적’인 데에 두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문학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고 보았다. 창작문예수필이 ‘시적 영감의 산문적 형상화 문학’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7. “문학이 예술이요, 수필이 문학이라면 수필은 하나의 기술적인 표현일 수밖에 없다. 내용이 아무리 좋고, 심오한 사상이 축적되어 있어도 표현의 기술이 없으면 문학은 될 수 없다. 문학은 결국 표현 형식이다.” (169쪽)

현대문학의 예술은 그 뜻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기술(技術)·재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예술이란 구체적으로 작품 형성을 목표에 둔다(백철)는 말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오덕렬의 소론 <수필 창작론>을 다시 보자.

 

예술은 기술(技術)이 필요하다. 이 기술적인 측면 때문에 누구나 예술인이 될 수 없다. 문학을 하기 위해서 그 문학적 기술을 익히기 위해 지금 우리나라 곳곳에 ‘문예창작반’이 개설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즉 음악, 회화, 건축, 문학, 연극, 영화 등은 인간의 특기의 활동 방면을 말한다. 인용문에서 ‘예술이란 구체적으로 작품 형성을 목표에 둔다’를 생각해 보자. 지난날에는 스포츠는 인간의 기술적인 활동이지만 예술활동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의 묘기나 손연재의 리듬체조 묘기를 누가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예술 체육이기 때문에 예술 점수가 따로 매겨지는 것이다.

 

8. “문학에 있어서 내용(思想)이 더 중하냐, 형식(技巧)이 더 중하냐는 논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다 같이 중시(重視)되어야 한다.’” (175쪽)

여기에서도 오덕렬의 소론 <수필 창작론>을 보면서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분명히 해 보자.

 

백철 교수는 그의『문학개론』에서 “형상은 문학의 衣裳”이라 했다. “문학 작품은 살아 있는 인간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정신과 육체로써 살고 있는 것과 같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으로써 살고 있다. … 말하자면 작품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의 것이다(100쪽).”라고 했다.

뮬러는 “작품 특히 형식적인 특징을 가진 작품의 체재를 갖춘 것만을 예술로서 인정한다.”고 했다.

위의 윤오영 선생의 이론에서는 장르의 특성은 형식(기교)에서 뚜렷이 나타남을 알 수 있고, 백철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할 수 없으며, 뮬러의 이론에 기대면 무형식의 수필은 문학이 될 수 없겠다. 그렇다면 기존의 수필에서 말하는 ‘무형식(無形式)의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은 수필에서 떠나야 할 이론 아닌 이론인 것이 여기서도 확인되었다.

조연현 교수는『改稿 문학개론』에서 “사람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어떤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그 형식이며, 어떤 형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그 내용이라는 것이다(71쪽)”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 내용을 그 내용 되게 하는 것은 곧 그 형식이며, 그 형식 되게 하는 것은 곧 그 내용이라는 뜻이다.

이관희 평론가는 그의 이론서에서 창작문예수필의 본질적 문학 형식은 서정수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창작문예수필의 원형적 형식은 서정 수필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면서 창작문예수필의 일정한 형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는 운문이 아닌 ‘현대적 의미의 산문 양식’의 문학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도 될 수 없고, 소설도 될 수 없는 수필만의 수필문학적 감성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이고, 외형적으로는 시보다 길고 소설보다는 훨씬 짧은 길이의 문학 양식이라는 것이다.(『창작문예수필이론서』(청어, 2007. 127쪽.)”라고 밝혔다.

 

9. “수필도 일반 문학으로서의 통성(通性)과 수필만이 가진 특질의 수법이 없을 수 없다. 무형식이 형식이라는 애매한 말로 덮어버릴 수만은 없다.” (176쪽)

윤오영은 수필계의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붓 가는 대로’와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종래의 수필문학의 이론 아닌 이론·이론의 오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 있는 뮬러의 이론 ‘무형식의 수필은 문학이 될 수 없다.’를 재확인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10. “예술이 아무리 위대한 창작을 했다 해도 자연 법리(法理)의 극히 적은 부분의 터득에 불과하다. 이 자연 법리란 동서고금의 모든 문장의 공통된 문리다. 그러나 문장마다 형식이 같지 않다. 또 변천이 있어왔다. (177쪽) … “몽테뉴나 베이컨의 글에 문학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치는 그 글이 수필이라는 데에 있지 않고 다른 데 있다. (156쪽) … 영국의 찰스 램은 『엘리아 수필』을 들고 나와서 영국 문단의 한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다. (158쪽)”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또 변천이 있어 왔다.’이다. 문학의 진화·변모를 말하는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이가 찰스 램에 이르러 창작수필로 진화·변모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뒤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찰스 램에 와서 몽테뉴나 베이컨의 수필이 변천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1. 윤오영은 이양하 역 ‘푸루우스트 산문’을 인용하고서, 그 인용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수필이라면 반드시 사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김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상화(具象化)할 필요가 있고 따라서 상징적 우유(寓喩)도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또한 수필의 한 수법이다.” (180쪽)

수필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우유는 비유의 하나로 구성적 비유가 여기에 있다. 구상화는 형상화(形象化)와 같은 뜻이요, 기록과 구상화는 다르다. 어떻게 그렇게 사실의 소재가 ‘작품화, 문학화, 상상력의 세계화’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본질적인 대답은 구성 작업이며, 얽어 짜는 그 작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건의 배열, 즉 플롯론인 것이다. 이관희 선생의『형상과 개념』에서 더 알아보자.

 

“문학예술이 창작하는 형상(形象)은 사실적 사물의 형상(形象·形相)이 아닌 예술적 형상이다. 현실적 사물은 현실적 구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실적 대상이다. 그것은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져 볼 수도 있는 감각적 구체성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문학예술이 창작하는 형상은 현실적 구체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상상적 형상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는 마음이란 추상적 대상을 호수라는 현실의 사물을 보조관념으로 동원하여 예술적인 상상적 대상으로 형상화(形象化·창조)한 것이다 (53쪽).”

 

12. “수필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를 쓸 수는 있어도,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필을 쓸 수는 없다.” (192쪽)

윤오영은 장차 나타날 창작문예수필의 창작 개념인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를 내다본 것이다. 작가는 평생 남이 못한 말 한 마디만 하면 된다고 한 분도 치옹인데 이 말이야말로『수필문학입문』을 통틀어 남이 못한 말을 한 것으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창작문예수필’을 내다 본 명언으로 창작문예수필과 함께 영원히 빛날 구절이다.

 

13. “수필은 감정의 유로(流露)다.” (192쪽)

이 말은 워즈워드의 ‘시는 감정의 유로다.’라는 말을 그대로 수필론에 차용한 것이다. ‘수필 = 시’라는 등식이 설립한다는 말이다. ‘수필은 감정의 유로(流露)’란 곧장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라는 뜻이 되지 않는가.

 

14. “순문학적(주로 상상의 세계) 산문으로서 하나의 형태를 갖추고 등장한 것이 소설이요,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한 것이 장편 수필이다.” (193쪽)

윤오영은 장편 수필문학이 소설문학에 견줄 수 있는 순문학임을 말하고 있다. 순문학일 때 소설문학과 장편수필이 동격임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대하는 장편수필로는 김태길 교수의『흐르지 않는 세월』(관동출판사, 1976.)이 있다.

 

15. “수필은 하나의 시여야 한다.” (198쪽)

이것은 이관희 선생이 말한 <산문의 시>의 출현을 내다본 말이다. 치옹은 이것이 ‘동양적인 수필의 높은 경지’(198쪽)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수필계가 1975년에 나온 치옹의 『수필문학입문』의 이론만 받아들였어도 반세기 동안은 더 밝은 수필의 시대를 열었겠다. 필자가 알기로는『수필문학입문』을 연구하여, 평론에 등단한 분도 두어 분 있는 줄 안다. 그런데 그분들은 소위 허구 논쟁에서 허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창작수필 쪽으로 이론 전개를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필자도『수필문학입문』에 관한한 자랑스럽지 못하다. 책이 출판되면서 바로 수중에 넣고, 읽고 또 읽으며 공부했다. 그러나 창조적 독서를 하지 못하고 내용을 부분적으로 익히기에만 급급했을 뿐이었지 뚜렷한 주관을 갖지 못했다. 문학의 주변 공부가 옅었기 때문이었다. 문학의 진화(進化)를 염두에 둔 것도 연전의 일이다.

고백하건데 문학의 바다를 독학하기에는 시행착오가 너무 많았다. 치옹에게 사숙(私淑)을 끝내고, 지난해 가을, 이관희 선생을 사사(私事)하면서 수필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 이론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었고, 창작문예수필도 몇 편 얻었다. 일반적으로 제 하던 일을 마무리할 나이에 즈음하여, 이론을 공부하여 수필 평론에 등단을 하고, 수필문학의 신천지를 개척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졸면서, 새벽을 맞기도 하고, 낱말 하나의 뜻을 규명하기 위해 비싼 책도 두어 권 샀고, 항상 시간이 없다는 타령을 하다가, 여기저기서 타박을 받기도 하고…. 이런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 할 수가 없지만 ‘대가에 사숙(私淑)하거나 사사(私事)하지 않으면 무엇을 탈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물음에 답을 내놓고 싶은 것이다. 늦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6. “일반 수필과 문학 수필은 구별된다.” (203쪽)

이는 수필의 장르를 ‘에세이’와 ‘창작문예수필’로 크게 구분하는 것과 같다. 오덕렬의 <수필문학의 두 방향>(《광주문학》 2014. 겨울호)에서 두 장르의 변모 양상을 보자.

 

수필문학은 결국 ‘에세이(수필)’와 ‘창작문예수필’의 두 줄기로 도도히 흐를 것이다. 에세이(수필)는 몽테뉴(Mishel de Montaigne, 1533∼1592)가 창시한 ‘에세이’를 말하는 것이요, 창작문예수필은 에세이가 몽테뉴의 손을 떠나자 진화를 시작하여 찰스 램(1775∼1834)에 이르러 나타난 직능을 달리한 에세이의 새로운 이름인 것이다. 이런 진화·변모 양상은《Essais》(1580)가 발행된 이후, 찰스 램의《엘리아수필집》(1823)이 나오기까지는 2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던 것이다.

 

17. “찰스 램의 작품이 나오자 그 형태와 관념은 일변했습니다. 비로소 시·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의 한 장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수필문학사의 통념(通念)입니다.” (205쪽)

찰스 램은 창작문예수필의 시조이다. 이것이 지구촌 문학 이론인 것이다. 여기서 윤오영 은 이미 에세이의 창작문학 쪽으로 진화·발전을 인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그의 수필론이 문장론 위주의 동양 수필론임에도 창작론을 염두에 두고, 찰스 램을 문학 수필의 효시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찰스 램을 창작수필의 시조로 받아들인 것은 수필문학의 진화·발전을 믿는다는 증좌다. 치옹은 창작문예수필을 알아보고 또 받아들인 것이다.

 

그보다 먼저 ‘영미어학총서’ 제5권《영미 희곡·수필 평론》(신구문화사, 1964)에서 공정호 교수는 를 말하면서 “Dr. Johson(1709-84)의 말을 빌린다면 한 편의 essay는 ‘한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 즉 불규칙적이고 소화되지 않은 작품이며 규칙적이고 질서 잡힌 작문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정의는 고도로 진화한 현대수필에 부합되기까지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였으나 ‘a loose sally of the mind’라는 어구는 분명히 흥미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고도로 진화한 현대수필’이라고 하여 ‘진화’란 단어를 쓴 것이 처음 발견되었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공정호 교수가 1964년에 말한 바 있고, 백철(1908∼1985)은 그의 『문학개론』에서 “그(찰스 램)는 純文學的인 수필을 처음으로 쓴 사람으로서 세평과 같이 그의 수필의 특징은 절실한 애정으로써 추억적인 재료를 써 간 것이다.(361쪽)”라 하였다. 이렇게 ‘순문학’이란 용어를 썼으며, 조연현(1920∼1981)교수는 수필을 ‘창작적인 변화를 용인’(『문학개론』: 정음사, 1973. P. 100.)하는 산문의 대표라 했고, 윤오영(1907∼ 1976)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수필을 독립된 장르로 보았다.

 

18. “허구에는 구성의 허구와 표현의 허구가 있다.…수필의 구성은 허구가 아니다. 사실이 없으면 수필은 없다.…표현의 허구에는 지적인 허구와 정적인 허구가 있다.” (227쪽)

수필의 태생적 속성은 ‘사실의 소재’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 ‘작품의 제재’로 삼는데 있다. ‘수필의 구성은 허구가 아니다’에서의 ‘허구’는 소설적 허구를 말하는 것이다. 치옹은 수필문학의 허구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소설적 인물 서사 허구는 수필의 본령이 아니었음을 말했을 뿐이다. 수필의 허구는 ‘정적 표현의 허구’라는 것이다. 이것은 창작문예수필의 개념인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치옹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말하고 있다.

“이하(李賀)의 시에 오동잎에 바람이 일고, 귀뚜라미가 우는데 어여쁜 혼(魂)이 비를 타고 찾아온다. 자기는 무덤 속에 누워서 포조(鮑照)의 시를 읽겠다는 것이다. 환상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허구다. 이 정적, 시적 허구는 본인에게는 백 번 물어봐도 사실이다.” (227쪽)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는 분명 허구인데 본인에게는 백 번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는 곧 오늘날 창작문예수필의 ‘대상과의 교감의 세계의 상상력’이 아닌가. 사랑하는 가족의 무덤 앞에 가서 사자와 나누는 대화는 분명 허구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현실의 삶의 연장인 것이다. 치옹은 벌써 이 같은 창작문예수필의 ‘교감의 상상력의 창작 세계’까지 내다 본 것이다.

 

19. “수필은 소설과 같이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며 사건(事件)의 정서적 서술이 줄거리다.” (228쪽)

수필에서는 소설적 허구를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쓰이고 있는 ‘사건의 줄거리’에서 줄거리는 플롯론에서 ‘줄거리’와 ‘구성’의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정서적 서술로서의 줄거리가 문학이 되려면 마땅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정서적 줄거리도 신변잡사나 미숙한 센티멘탈리즘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다. 사건의 줄거리에서 줄거리는 정적 허구를 말하는 것이고, 소설적 허구를 반대하고 있다. 소설적 허구 인물 서사를 경계한 치옹으로서는 어렵게 비집고 나오는 이론적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소설적 플롯을 허구적 인물 서사 쪽으로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정서적 서술이 줄거리’란 말로써 이론적 빈약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20. “수필을 말한 사람은 무수히 많으나 정확한 답을 한 사람은 없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다.’, ‘수필은 무형식이 형식이다.’, ‘수필은 심경적·체험적 개성적인 글이요 위트와 유우머가 있는 글이다.’, ‘잘 되면 문학, 못 되면 잡문이다.’, ‘인간미가 가장 많이 풍기는 글이다.’, ‘평론이 아니면서 평론 이상의 글이다.’, ‘문학이란 좁은 범주로는 포용되기 어려운 다양 다채하고 광범한 문학이다.’―이런 말들이 통설로 돼 왔다. 그럴 듯하면서도 한 걸음만 나아가서 따져 물으면 말문이 막히는 애매모호한 말들뿐이다.” (242쪽)

윤오영 자신도 해결의 길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명쾌한 해결의 길이 있으니 지구촌 모든 문학인들이 하고 있는 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된 문예창작론이다. 곧 현대문학 이론을 받아들이면 즉석에서 모든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윤오영은 “수필은 소설과 같이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라고 했고, 피천득은 작품 <수필>에서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뒤에 교과서에 실리면서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꼭’자를 넣는 걸 허락은 했다.-는 말을 한 걸 보면 두 분이 플롯 개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Plot론을 깜빡했던 모양이다.

 

21. “신변잡사란 어디까지나 수필의 소재다. 여기서 온축된 체험과 풍부한 상상력에 의하여 시화(詩化)함으로써 재구성해서 문학 작품을 만들어야 비로소 문학수필인 것이다.” (245쪽)

윤오영의 ‘문학수필’이란 다름 아닌 백철 교수의 ‘순문학’으로서의 수필을 의미하고, 이는 곧 창작수필을 의미하며, 우리에게는 창작문예수필을 의미하는 것이다. 치옹은 그때 이미 창작문예수필의 작법까지 갈파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22. “에세이란 시필(試筆)이란 뜻이다. 수필이 지금도 시필이래서야 말이 되는가.” (248쪽)

여기서도 윤오영은 ‘수필이 지금도 시필이래서야 말이 되는가.’라고 말하면서 에세이의 창작문학 쪽으로의 당연한 진화론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Ⅲ. 끝맺는 말

 

이상에서 치옹(痴翁) 윤오영 선생의 수필 이론서『수필문학입문』에 나타난 창작론을 간추려 보았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수필(에세이)의 창작문학 쪽으로 진화 현상을 예견하게 하는 이론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붓 가는 대로 쓴다거나 아무 것이나 솔직하게 쓰기만 하면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문학은 없습니다.” (209쪽)

 

이렇게 치옹은 분명한 목소리로 ‘붓 가는 대로’를 부정하고 있다. 좋은 글을 쓰자면 우선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하고, 얼음은 물에서 되고, 글은 글에서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창작은 모방의 탈피에서 오고, 대창작은 자연의 모방이라 했다. 위대한 문학이란 그 종류의 여하를 막론하고 심혈을 기울인 고심의 소산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필에 정서가 흐르는 것은 서정시에서 빌어온 법이요. 수필에서 서술이 긴박하고 빈틈없이 나가는 것은 단편소설에서 빌려온 법일세. 설리(設理)는 평론의 수법에서, 묘사는 배경 소설의 수법에서, 문장의 탁의는 시의 메타포에서 확충된 것이요,… 문장의 활기 있는 긴장은 희곡의 수법에서, 문단과 문단이 갈릴 때마다 청신한 전환은 시나리오의 씬을 바꾸는 솜씨에서 자유자재로 섭취 활용해 가며 자기의 독특한 문체와 참신한 문태(文態)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225쪽)

 

윤오영은 창작문예수필의 먼 앞날까지를 내다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창작문예수필은 문학의 모든 장르와 일정 부분 상호 호환성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창작수필의 이런 유연성은 한 세대쯤 지나면 모든 장르를 포섭하며, 문학의 왕자 자리를 차지할 것을 점친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도 오덕렬의 <창작수필론>에서 말하는 아래의 <창작문예수필의 외연 확장도>를 생각하게 하고 있음을 본다.

 


“창작문예수필문학이 제3의 창작문학이 되면서 이제 변방문학 시대를 청산하고 문학의 중심부에 서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림 <창작문예수필의 외연 확장도>처럼 중심부에서 주위에 시· 소설· 희곡· 문학평론은 물론 창작적인 변화를 용인하는 기타 시문을 모두 포용할 시대가 열린다는 말이다.”
 

수필도 진화하여 결국에는 에세이(수필)와 창작문예수필의 두 줄기로 도도히 흘러 문학의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라 했다. 여기서 에세이를 쓰느냐, 창작문예수필을 쓰느냐는 작가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다만 현대문학 이론, 즉 창작문예수필 이론에 따라 글을 쓰면 창작문예수필가가 될 것이고, 허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은 소재의 성격에 따라 직능을 달리하는 두 장르 중에서 택하여 쓸 수 있어야 진정한 수필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 創作文學(poetry) ……… 소설, 시, 희곡 + 창작문예수필

  문학 ……┊

​               …… 散文文學(prose) ……… 수필, 평론, 비교문학

 

위의 표는 구인환·구창환 교수가《문학개론》에서 몰톤(Moulton)의 문학 형태를 수정한 것에다가, 필자가 다시 ‘창작문예수필’을 ‘창작문학(poetry)’에 보태 놓은 것이다. ‘일반수필’은 산문문학(prose)이고 ‘창작문예수필’은 창작문학(poetry)임을 보인 것이다.

우리나라 삼천 여 수필가들이, 지금 바로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를 버릴 수 없다면『수필문학입문』의 이론부터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창작문예수필 쪽으로 이동하면 좋을 것이다. 에세이에서 창작문예수필로 놓은 다리는 치옹 윤오영 선생의『수필문학입문』이 튼튼하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

 

『창작문예수필 작품과 작법』

[출처] 윤오영의 창작수필론

|작성자 오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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