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눈물
정순옥
‘소녀의 눈물’을 본다. 박남 원로화백의 명화 중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림이다. ‘소녀의 눈물’엔 나의 꿈이 서려있다. 소녀 시절에 품었던 나의 꿈과 이루지 못한 꿈 그리고 노인이 되어 품고 있는 나의 꿈이 고인 눈물에 서려있다. ‘소녀의 눈물’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초연한 모습으로 살아온 나의 무언 속의 항변을, 움직이면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눈망울 속에 머금고 있는 듯하다. 그림이 너무도 좋은데 이런 그림을 소유할 수 없는 지금 형편의 내 마음도 명화 “소녀의 눈물”에 담기는 기분이다.
나는 미술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감상하는 걸 좋아한다. 잊어버렸던 무엇이 생각난 듯이 명화감상 하고싶어 스마트폰을 움직인다. 보고 또 보아도 좋은 세계적인 명화들을 보면 추억에 빠져들게 한다. 그 옛날 밀레 특전이나 피카소 특전을 친구와 함께 보면서 감탄했던 그림들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문득 한국미술이 보고 싶어 손을 움직인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훌륭한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한민족의 정서를 잘 표현한 예술적인 그림이 세계에서 으뜸일 것으로 생각해본다. 그중에서도 ‘소녀의 눈물’은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나의 눈물을 무언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슴이 짜릿하다. 내 마음을 앗아간 듯한 작가는 그동안 참아왔던 나의 말들을 토해내게 할 모양이다. 뾰로통하게 오므린 입술을 열어 기어이 맺힌 눈물방울을 떨어지게 할 것만 같다.
추억 속의 그 시절은 나도 머리가 기다란 소녀였다. 기다란 하얀 목선을 타고 내려오면 보이는 자두색깔 셔츠는 내가 소녀 시절에 즐겨 입던 옷과 비슷해 마음을 흔든다. 뾰로통하게 생긴 입술은 수많은 말들을 품어낼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있는 나의 소녀 시절의 모습이다. 그래도 가려진 생명줄인 작은 가슴에선 희망이 솟아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난한 소녀 시절을 보내면서 생긴 한의 정서가 담뿍 담겨 있는 듯한 그림을 보면서 나는 기어이 눈물을 훔친다.
한국전쟁을 치른 후의 서민들의 생활은 대부분이 가난과 질병 속에서 허덕이고 많은 것들이 혼돈상태였다. 그래도 생명줄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나는 농촌에서 대가족의 일원으로 늦게 태어나 늙은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랐다. 가난해서 수많은 날을 굶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솔나무가지 껍질을 벗기거나 칡뿌리를 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랐다. 보리나 호밀로 무쇠솥에 밥을 지을 때 솔가지 연기 탓에 눈을 비비며 콜록거리면서 불을 때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나는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소녀 시절을 보내면서 빈부의 차이도 느꼈다. 이 시절에 “사람이라면 서로 사랑하면서 콩 한 쪽이라도 나눠 먹으며 살아야 한다.”라는 부모님의 교훈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나는 가난을 이겨내는 허기진 정서 속에 살면서도 사랑을 나누는 행복이 있어 꿈과 비전을 품게 되지 않았나싶다. 나는 그 시절 나의 가슴 빈 공간에 아름다운 꽃씨를 뿌려 싹 틔우기 시작했나 보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있다.
여린 소녀시절에 다녔던 초등학교 미술시간엔 언제나 도화지와 크레용이나 창호지에 수채화 그리는 물감이 필요했다. 가난한 농촌에서 사는 우리 형제들은 모든 것을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야 하기에 많은 것들을 대대로 물려받아 사용했다. 그러니 언제나 몽땅 크레용이나 쓰다 남은 물감이고 때로는 색깔이 없기도 했다. 도화지나 크레용이나 물감이 없는데도 돈이 없어 미술도구를 마련하지 못해 미술 시간에 맘껏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던 날은 내 마음과 입술이 한없이 오그라들었다. 활짝 핀 샛노란 개나리꽃이나 연분홍 진달래꽃을 예쁘게 그리고 싶은 맘과는 달리 물감이 없을 때는 그릴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새로 구입한 크레용을 들고서 신나게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얼마나 부럽던지….
성숙한 소녀 시절에 나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나는 입을 악물어야 했다. 나를 초대한 부유한 친구방엔 벽 한쪽을 차지할 만큼의 커다란 서양화가 걸려 있었는데 직접 그린 유화 그림이라 했다. 정말이지 화폭에 담겨 있는 유화 물질만 봐도 부럽기 그지없었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윤기나는 유화물감을 사용할 기회를 얻을 수 없는 나의 환경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눈물을 머금은 추억 속의 소녀로 남아 있는 느낌이다.
나는 미주 한인으로 살면서 은근과 끈기로 가난의 한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정서를 갖도록 노력하고 있다. 높은 자존심을 지닌 듯한 박남 화백의 ‘소녀의 눈물’은 나의 소녀 시절의 정서를 표현한 그림 같아 자꾸만 마음이 쏠린다. 언젠가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원로화백의 화폭에서 생명선을 타고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뜀은 웬일일까. 어느 날 ‘노인의 미소’ 을 그린 명화가 생면부지의 화가의 화폭에서 살아나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녀의 눈물이 아닌 가난의 한을 초월한 행복한 노인의 미소가 담긴 명화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