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안진

조회 수 5094 추천 수 1 2016.12.11 11: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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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란지교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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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 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와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히 없을 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쳐 주고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 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없다. 만약 내가 한 두곳 한 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는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지는 앖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가 제 자리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이다.

나는 때대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베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고 해도 우리의 향기만을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을 피 할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닫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내게도 울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혜프지 않게 ,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 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인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 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 꽃을 사서 그에게 안겨줘도 그는 날 주착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추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살아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 <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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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안진

안동임동초등학교, 대전여자중학교, 대전호수돈 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졸업.
마산제일여자중고등학교와 대전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1970년 서울대학교 교윳대학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성신여자대학교 단국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교수로 재직

1965, 1966, 1967년 3회에 걸쳐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서 시<달> <별><위로>로 등단했고 1970년 첫 시집 <달하>를 출간했다. 이향아 신달자와 함께 펴낸<지란지교를 꿈꾸며>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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