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 / 김원룡

조회 수 2658 추천 수 1 2017.01.08 14: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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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韓國)의 미()


                                                                       김원룡  

                                                                                        

   한국(韓國)의 미()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자연(自然)의 미라고 할 것이다. 자연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은 한국적(韓國的) 자연으로, 한국에서의 미술 활동(美術活動)의 배경(背景)이 되고 무대(舞臺)가 된 바로 그 한국의 자연이다. 한국의 산수(山水)에는 깊은 협곡(峽谷)이 패어지고 칼날 같은 바위가 용립(聳立)하는 그런 요란스러운 곳은 적다. 산은 둥글고 물은 잔잔하며, 산 줄기는 멀리 남북으로 중첩(重疊)하지만, 시베리아의 산맥(山脈)처럼 사람이 안 사는 광야(曠野)로 사라지는 그러한 산맥은 없다. 둥근 산 뒤에 초가집 마을이 있고, 산봉(山峯)이 높은 것 같아도 초동(樵童)이 다니는 길 끝에는 조그만 산사(山寺)가 있다. 차창(車窓)에서 내다보면, 높은 산 위에 서 있는 촌동(村童) 2, 3인이 키가 상상 이외로 커 보이는 곳은 우리 나라밖에 없다. 그만큼 우리 나라의 산은 부드럽고, 사람을 위압(威壓)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여기에 진달래가 피고, 가을이 오면 맑은 하늘 아래 단풍(丹楓)이 든다. 단풍은 세계 도처(世界到處)에서 볼 수 있으나, 미국(美國)이나 캐나다처럼 길을 뒤덮고 산을 감추어 버리는 그러한 거대(巨大)하고 위압적(威壓的)인 단풍은 아니다.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인식(認識)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주장(主張)하지 않는 겸손(謙遜) 그대로의 단풍이다. 아니, 겸손하기보다는 아주 자기의 존재(存在)조차 무각무인(無覺無認)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 해탈성불(解脫成佛)한 것 같은 단풍이다. 단풍 든 시절의 한국의 산은, 보고 있으면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산꼭대기서부터 옆으로 누워 데굴데굴 굴러보고 싶은 그러한 산이다. 이것이 한국의 자연이다. 한국의 산에는 땅을 가르고 불을 내뿜는 그 무서운 화산(火山)도 없다. 또한, 한국의 하늘에도 구름이 뜨지만, 태풍(颱風)을 휘몰아 오는 그런 암운(暗雲)은 없다. 여름에는 때때로 하늘을 덮고, 우뢰 소리로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추석(秋夕)이 되면, 동산에 떠오르는 중추 명월(仲秋明月)에 자리를 비켜 주는 그런 구름이다. 세상 또 어디에 흰구름 날아간 뒤의 맑은 한국 하늘의 어여쁨이 있을까! 이 맑은 하늘 밑, 부드러운 산수 속에 그 동심 같은 한국의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미의 세계요, 이 자연의 미가 바로 한국의 미다. 여기에서 어떻게 사색(思索)을 요구하는 괴이(怪異)한 미가 나타나고, 인공(人工)의 냄새 피우는 추상(抽象)과 변화(變化)가 일어날 수 있을까? 되풀이하지만, 한국의 미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자연의 미'라 할 것이다 


  자연에 인공이 끼여서는 자연이 아니다. 자연은 미추(美醜)를 초월(超越), 미 이전의 세계다. 사람의 꾀에서 생겨나는 인공의 미가 여기에는 있을 수 없다. 자연에는 오직 자연의 미가 있을 따름이며, 자연의 섭리(攝理)에 입각(立脚)한 만유 존재(萬有存在) 그 자체(自體)의 미가 있을 뿐이다. 미추(美醜)를 인식하기 이전, 미추의 세계를 완전 이탈(離脫)한 미가 자연의 미다 


 한국의 미에는 이러한 미 이전의 미가 있다. 이것은 시대(時代)와 분야(分野)에 따라서 미의 형태(形態)가 바뀌고 강약 집산(强弱集散)의 차()는 있으나, 한국의 미의 근본(根本)을 흐르는 이 자연의 미의 성격(性格)에는 변함이 없다. 고구려 시대(高句麗時代)의 고분 벽화(古墳壁畵)에는 중국 회화(中國繪畵)에서 보는 세련(洗練)된 선()이 없을는지 모른다. 나뭇잎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손바닥 같고, 연봉(連峯) 잇닿는 산맥(山脈)이 사람이나 호랑이보다 작게 나온다. 그 선은 굵고 색()은 어둡다. 그뿐 아니라, 이 고구려(高句麗)의 벽화(壁畵)에는 기교(技巧)가 없다. 유치원(幼稚園)이나 국민 학교 아동들처럼 화면(畵面)에 그저 자기가 기도(企圖)하는 대상물(對象物)이나 장면(場面)을 재현(再現)하려고 할 뿐, 구도(構圖)나 배색(配色)에 아무런 생각이나 욕심이 없다. 그림을 부탁(付託)한 사람도,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린 사람도, 그림의 결과나 효과(效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림의 내용(內容)이 주문(注文)한 대로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 미술 작품(美術作品)이라야 한다는 생각도 없고, 미술 작품을 만든다고 자각(自覺)한 것도 아니다. 석공(石工)들이 묘실(墓室)을 쌓아올리면 화공(畵工)이 들어가서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이것은 예술가(藝術家)로서의 화가(畵家)가 아니고, 기술 직업인(技術職業人)으로서의 화공, 화장(畵匠)이 그린 그림이다. 옛날, 골목길 구멍가게 간판(看板)에 그려 있던, 담배 피우는 호랑이같이, 이것은 예술가가 기질(氣質) 이전의 순진 무구(純眞無垢)한 작품이다. 이런 그림에 무슨 기질이 들면, 그 그림은 아예 망그러지고 만다. 고구려 벽화(壁畵)에서도 강서(江西)의 삼묘(三墓)나 퉁코우(通溝)의 사신총(四神塚)처럼 화공의 기술(技術)이 발달된 예에 있어서는, 전대(前代)의 순진(純眞)한 벽화에서 보고 느끼던 고구려의 세계는 많이 변하고 속화(俗化)되어 있다. 이것을 나는 중국의 영향(影響) 때문이라고 본다. 중국인(中國人)이 그린 중국화(中國畵)에서는 중국이 가지는 중국적(中國的)인 격()과 정신(精神)이 있으나, 외국에서 그 외형(外形)만을 빌려 가면, 외형과 내형(內荊)과의 융화(融化)가 잘 되지 않아 이상(異常)한 것으로 되고 만다. 고구려는, 말기(末期)에 새로 밀려들어오는 중국 회화(中國繪畵)의 영향을 충분히 소화(消化)해서 다시 고구려 자체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적(時間的) 여유(餘裕)를 가지지 못한 채 망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벽화에는 확실(確實)히 남쪽 나(羅濟)의 미술(美術)과 공통(共通)되는 점이 있다. 고구려 벽화의 미는 날카로운 선과 강렬(强烈)한 색채(色彩)에서 오는 그런 미가 아니라, 보통 세상살이하는 사람의 세계에서 생겨 나오는 은근한 자연의 미다. 한편에서는 산야(山野)를 질주(疾走)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조용히 씨름을 구경하는 장면이 나오고, 주인이 앉아 있으면 옆에 부인이 나오고, 손님이 오면 시녀(侍女)가 음식을 날라 온다. 아무 신기(新奇)한 것도 없고, 인목(人目)을 놀라게 하려는 선이나 색도 없다. 아무 과장(誇張)도 장식(粧飾)도 없고, 그저 일상 보아 오는 세상이다. 그러면서, 여기에 생생한 고구려의 세계가 있고, 미가 있다. 아니, 그렇게 자기를 솔직(率直)하게 나타내니까 우리에게 더 강한 고구려의 체취(體臭)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눈을 돌이켜 고구려의 조각(彫刻)을 보자. 고구려의 조각으로서 가장 확실한 것은 평양 부근(平壤附近)의 사지(寺址)에서 나온 이불(泥佛)들로서, 이는 흙으로 만든 조그만한 불상(佛像)들이다. 이 불상들의 범본(範本)이 된 것은 틀림없이 중국 북조(北朝)의 불상들이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히 중국이 틀을 벗어나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복스럽고, 어린아이 같은 아름다운 웃음이 소리 없이 퍼지고 있으며, 뺨에 붙은 부드러운 살은 손등에도 있고, 대좌(臺座)의 연판(蓮瓣)에도 있다. 이 부드러운 살은 신라(新羅)나 백제(百濟)의 와당(瓦當)에서 보는 것과 근본적으로 통하고 있다. , 고구려의 미술에는 신라, 백제에서 보기 힘든 강한 힘이 있으나, 중국의 미술에서 보지 못하는 유화(柔和)와 온순(溫順)이 있고, 인공적(人工的)인 자극(刺戟)을 피하는 자연에의 복귀(復歸)’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미가 서 있는 한국의 세계인 것이다 


 신라, 백제에서는 많은 불상(佛像)이 제작(製作)되었으나, 양식상(樣式上), 형식상(形式相)의 출발점(出發點)이 된 것은 중국 불상이었다. 이 경우, 작은 불상들은 여행자들에 의해 운반(運搬)될 수도 있었으나, 큰 불상이나 마애불(磨崖佛) 같은 것은 직접 가서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화공들, 즉 조각승(彫刻僧)들이 유학승(留學僧)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을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불상 의궤(佛像儀軌)에 의한 도상(圖像)뿐 아니라, 조각법(彫刻法) 자체도 공부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마침내 중국의 불공(佛工)이 되고 만 것은 아니다. 충남 서산(忠南瑞山)의 마애 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이나 경북 군위(慶北軍威)의 삼존 석굴(三尊石窟)에서 보는 것처럼, 비록 옷이나 자세(姿勢)는 중국을 따르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얼굴에 있어서만은 어디까지나 백제의 얼굴이요, 신라의 얼굴인 것이다. 백제불(百濟佛)의 얼굴에는 나 자신이 백제의 미소(微笑)’라고 명명(命名)했던, 백제에서만 볼 수 있는 화창(和暢)하고 인간적(人間的)인 웃음이 있고, 군위불(軍威佛)의 얼굴에는 보이소.’ 하는 경상도(慶尙道)의 고집이 뚜렷하다. 이것들은 모두 중국불(中國佛)에서처럼, 인격(人格)을 초월(超越)하여, 불격(佛格)을 과시(誇示)하려는 상상 세계(想像世界)의 얼굴이 아니라, 살고 있는 백제인(百濟人), 신라인(新羅人), 인간으로서의 얼굴들이다. 국립 중앙 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이 자랑하고 있는 유명한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에도 같은 인간의 얼굴이 달렸다. 규각(圭角)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곡선(曲線)이 넘친 아름다운 육체(肉體)에 조용히 자기 혼자 웃는 삼매경(三昧境)의 얼굴……, 발버둥치며 자기를 보라는 그러한 것도 아니면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도 움켜잡을 수 있는 바로 그것이 한국의 미가 아닌가? 설탕처럼 달콤하지는 않으나, 언제 먹어도 맛있는, 본래 무미(無味)의 흰 쌀밥 같은 자연의 맛, 그것이 바로 한국의 미가 아닌가  


  석굴암(石窟庵)의 조각(彫刻)은 고대 한국(古代韓國)의 미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의 미가 가장 발달된 솜씨, 세련(洗練)된 형태를 통해서 구상화(具象化)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조각(韓國彫刻)의 울타리를 벗어나 인류 미술(人類美術)의 정화(精華)로 꽃 핀 것으로서, 이것은 고구려의 벽화(壁畵)에 비하면 확실히, 사람에게 탄성(歎聲)을 발하게 하는 예술(藝術)의 세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한국 특유(特有)의 정밀(靜謐)의 미, 적막(寂寞)의 미, 그리고 자연의 미가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석굴암이 불도(佛道)의 도량(道場)이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조용한 산중에 그리 단순(單純)하지 않은 화강석(花崗石)을 재료(材料)로 썼을 뿐, 특별히 사람의 눈에 자극(刺戟)을 주는 기발(奇拔)한 규각(圭角) 있는 선이나 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화강석 위에 이루어진, 종이보다도 엷고 부드러운 천의(天衣)에 가리어, 입상(立像)의 보살(菩薩)들이 영겁(永劫)의 명상(冥想)에 잠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 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그저 그것뿐이다. 참배인(參拜人)들을 보고 어서 오라는 듯이 야단법석하는 나마(喇嘛)의 불()도 아니고, 해골 같은 형상(形相)을 하고 사람을 멀리하는 인도(印度)이 고행상(苦行相)의 불()도 아니다. 그저 본존(本尊)은 앉고, 보살은 서고, 뒤에는 제자(弟子)가 있고, 문에는 인왕(仁王)이 지키고, 앞에서는 감로수(甘露水)가 흐르는 조용한 산암(山庵)의 석불(石佛)이다. 이것이 바로 석굴암의 미의 세계다. 그의 표현이 하도 잘 되고 정화(淨化)되고 세련되었기 때문에, 석굴암의 정밀 세계(靜謐世界)에 들어선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종의 삼엄(森嚴)한 전율감(戰慄感) 같은 것을 느낀다. 조상(祖上)이 만들어 낸 미의 극치(極致) 속에서, 감탄(感歎)을 넘어선, 신앙(信仰)에 가까운 신비감(神秘感)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포(恐怖)가 아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밑에서 느끼는 이국(異國)의 문물(文物)에 의한 위압감(威壓感)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조상의 미에 대한 경건(敬虔)한 마음이며, 자기의 미감(美感)과의 공감(共感)에서 오는 민족적(民族的) 희열(喜悅)이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초월(超越)하며 우리들 몸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의 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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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룡(金元龍, 1922824~ 19931114)은 대한민국의 문인화가이자 고고미술사학자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고고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1] 1945년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뉴욕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김정학, 김재원, 김정배 등과 함께 고고학 분야 뿐 아니라 역사학, 미술사, 건축학, 그리고 한국 철학에 영향을 미친 현대 대한민국 학계의 개척자로 여겨지고 있다. 김원룡은 일제시대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재학시절 일본인 역사학자 스에마쓰(末松保和)의 제자였으며 전 서울대교수 이병도와 함께 대표적인 친일사학자이다.

그의 스승인 스에마쓰

(末松保和)는 조선총독부의 관리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하는 등 식민주의 역사학을 제창하고 수립한 중심인물로 손꼽히는 일제 사학자이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을 때 석사 논문을 작성하였는데, 이는 신라 도자기에 대한 것이었다. 이후 뉴욕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귀국했다. 1961년 서울대학교에서 교수가 되었으며 그 이후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71년 국립박물관장으로 재직시 무령왕릉 발굴을 총지휘했다.1947년 한국산악회의 독도 학술 조사에 참가하는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울릉도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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