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隨筆)
피천득
수필(隨筆)은 청자 연적(靑瓷硯適)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淸楚)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女人)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平坦)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街路樹) 늘어진 포도(鋪道)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住宅街)에 있다.
수필은 청춘(靑春)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中年)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情熱)이나 심오(深奧)한 지성(知性)을 내포(內包)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隨筆家)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餘韻)이 숨어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恍惚燦爛)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退落)하여 추(醜)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읽는 사람 얼굴에 미소(微笑)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懶怠)하지 아니하고, 속박(束縛)을 벗어나고서도 산만(散漫)하지 않으며,
찬란(燦爛)하지 않고 우아(優雅)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生活經驗), 자연 관찰(自然觀察), 인간성(人間性)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個性)과
그 때의 심정(心情)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筆者)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芳香)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과 같이 무미(無味)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소설가나 극작가(劇作家)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性格)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率直)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親密感)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德壽宮) 박물관(博物館)에 청자 연적(靑瓷硯適)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硯滴)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整然)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均衡) 속에 잇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 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焦燥)와 번잡(煩雜)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끝>
작품의 이해
이 작품은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형상적, 비유적 언어로 친절하게 서술한 수필로 쓴 수필 이론이다.
수필은 원숙한 생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고아(高雅)한 글이고 독특한 개성과 분위기가 있어야 하며, 균형(均衡) 속에서도 파격(破格)을 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귀결점이다. 작자의 내적 호흡을 따라가며 글을 읽다 보면 수필이 갖는 예술적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함은 물론, 수필을 쓰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원래 수필의 특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문으로서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러나 개념적 지식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로 바꾸어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비유의 원관념을 해석하는 데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만들어 내는 문학으로서의 미적(美的) 감성을 느끼면서 글을 감상하여야 한다.
수필의 여러 가지 특징을 그야말로 자유롭게 생각나는 대로 열거한 이 글은 수필의 성격을 중심으로 수필의 제재와 형식, 수필을 쓰는 마음가짐 등 수필을 쓰는 태도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자는 결국 수필을 쓰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자신의 생활 때문이라고 반성하는 고백적 목소리로 글을 끝내고 있다.
수필을 설명하기 위해 청자 연적, 난, 학, 여인, 가로수 늘어진 포도, 서른 여섯 살 중년의 고개를 넘어선 사람, 누에고치, 차(茶) 등의 비유를 수도 없이 끌어들이고 있어 자못 상상력이 풍부하고 활력 넘치는 수필이다.
참고사항 : '수필'에 대한 윤오영의 평가
필자(筆者) 피천득 자신의 수필론이다. 논(論)이라면 학술 논문이나 논설문을 생각할지 모르나 수필가가 쓴 것은 문장론, 작품론, 문화론, 시사론이 다 수필인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의 수필관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수필을 논한 글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글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라고 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피요, 눈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고 했지만 때로는 남성적일 수도 있다. '수필은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 했지만, 모든 것이 신기하고 청신하게 느껴지는, 때 안 묻은 소년의 글일 수도 있고, 인생을 회고하며 생을 거의 체념한 노경(老境)의 글일 수도 있다.
이 수필론으로 포섭할 수 없는 그 밖의 수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수필론을 뒷받침하는 수필이 따르지 않는 수필론들은 우리에게 아무 흥미도 없다. 오직 이 글의 작자의 수필 세계가 알고 싶고, 듣고 싶을 때 이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이것은 한 작가로서 자기의 문학 세계를 말해 준 것이요, 스스로의 수필 문학을 탐색하는 과정의 기록인 것이다. <'수필 문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