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관광객이 경복궁을 방문하면 베이징 쯔진청(紫禁城)과 비교하면서 규모가 작다고 얘기하곤 한다. 절대왕권을 휘둘렀던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신권이 강해 궁궐 등 왕과 관련된 건축물을 크게 짓지 못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건물이 다른 나라에 비해 소규모인 것은 이런 이유뿐 아니라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건물까지 크게 지으면 양(陽)이 넘쳐 손해보고 쇠퇴하는 화를 당한다고 믿는 전통도 작용했다. 나라에서는 대궐이든 민가든 집을 높게 짓지 못하도록 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 그러나 그 폐해는 적잖았다.

 "국상이 나서 장례를 치를 때마다 흥인문(동대문)을 통해 드나드는데 큰 수레의 지붕이 걸려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드시 문 밑의 땅을 파서 움푹하게 했다가 장례가 끝난 뒤에 다시 메워야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다르지 않아 강종 원년(1212) 금나라 책봉사가 상아로 꾸민 수레를 선물했지만 수레의 높이가 19척인 데 반해 개성 광화문의 높이가 15척에 불과해 성문 문지방 아래 땅을 파고 수레지붕을 떼어낸 뒤에야 끌고 들어 갈 수 있었다."(晝永編)

일제시대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보물1호 홍인지문(동대문) 사진. 흥인지문은 한양도성 4대문 중 하나이지만 문이 너무 작아 국상을 치를 때마다 출입문 바닥을 파야만 겨우 수레가 통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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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보물1호 홍인지문(동대문) 사진. 흥인지문은 한양도성 4대문 중 하나이지만 문이 너무 작아 국상을 치를 때마다 출입문 바닥을 파야만 겨우 수레가 통과할 수 있었다.


 주영편이라는 책은 정조시대 학자인 현동(玄同) 정동유(鄭東愈)가 조선 23대 순조 5년(1805) 여름부터 이듬해 사이에 지은 만필집(일정한 형식이나 체계 없이 느끼거나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다. 주영은 낮이 긴 여름날의 무료함을 달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상하 2권으로 이뤄져 있으며 우리나라의 문자, 지리, 역사, 풍속, 언어, 제도 등 여러 분야를 고증하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책에서 조선의 풍습 가운데 3가지가 매우 졸렬하다고 지적한다. 놀랍게도 당시만 해도 조선에는 바늘이 없었다. 정동유는 이것이 첫 번째 졸렬함이라고 했다. 바늘이 생산되지 않아 중국 연경에 가서 사와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베와 명주가 있더라도 옷을 꿰맬 길이 없다고 개탄했다. 소와 양은 육축(소, 말, 양, 돼지, 개, 닭) 중 으뜸이다. 하지만 조선은 양을 칠 줄 모르니 이는 두 번째 졸렬함이다. 세 번째는 중국과 달리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대 의식이 있는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조선이 수레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보 1호 숭례문 현판을 쓴 인물로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 조선 전기의 명필 안평대군설이 대두되지만 정동유는 중종 때 명신 죽당 유진동(1497~1561)이 글씨의 주인공이라고 했다. 그 집안에 죽당이 쓴 숭례문이라는 세 글자를 쓴 수백 장의 종이가 전해오는데 숭례문 편액을 걸 때 연습한 것이라고 했다. 숙종 때 후손 유혁연이 문루를 수리하려고 편액을 떼어내니 뒷면에 "가정(청나라 가정제 치세의 연호, 1522~1566) 모년 죽당이 쓰다"라고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개국 초기에 문루가 세워졌음을 감안할 때 원래는 양녕대군이 썼으며 화재로 손상돼 유진동이 고쳐 쓰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이 화재로 폐허가 된다. 서울 수복 이후 경복궁 재건 논의가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조선은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와 토지와 곡식신을 모신 사직을 우선시했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달아날 때에도 세자에게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가라고 명했다. 전쟁이 끝난 후 종묘를 중건하느라 가뜩이나 부족한 재정을 모두 쏟아붓다 보니 경복궁까지 새로 지을 여력이 없었다.

일제시대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종묘 사진. 선조는 임진왜란후 법궁인 경복궁을 복원하는 대신 종묘와 사직단을 최우선적으로 재건했다. 종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안치했으며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셨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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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종묘 사진. 선조는 임진왜란후 법궁인 경복궁을 복원하는 대신 종묘와 사직단을 최우선적으로 재건했다. 종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안치했으며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셨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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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직단 사진. 선조는 임진왜란후 법궁인 경복궁을 복원하는 대신 종묘와 사직단을 최우선적으로 재건했다. 종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안치했으며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셨던 장소다.



 임금의 정복인 곤룡포와 옥을 늘어뜨린 면류관의 유래에 대해서도 책은 언급한다. 고려 공민왕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곤룡포와 면류관을 제대로 만들 줄 몰랐다. 원나라 말기 혼란기에 명옥진은 서촉(西蜀) 지방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하(大夏)라 하고 황제에 올랐다. 이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대하를 토벌하고 명옥진의 아들 명승을 고려로 귀화시킨다. 명승은 명옥진의 곤룡포와 면류관, 영정을 보관하고 있었다. 조선 태조가 신묘에 제향을 올릴 때 면류관과 곤룡포를 착용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명승 집안의 것을 본뜬 것이 분명하다고 정동유는 설명한다.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외교노선은 폐단도 컸다. 청나라 사신들이 외국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 주머니가 두툼하기로는 조선이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청나라 관작은 뇌물로 얻는 데다 매년 그 값이 올라서 사신으로 나온 자가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상납한 비용을 메울 수 없다. 1803년 중궁전 책봉칙사로 온 후성덕(侯成德), 명지(明志)는 사신이 지나가는 길에 대접하는 음식 대신 그 값을 은(銀)으로 받아갔다. 명나라 말년 사신들의 가렴구주는 더욱 심하다. 1625년 환관 왕민정(王敏政)이라는 자는 은 10만7000냥과 함께 인삼 2100근, 표범 가죽 204장, 큰사슴 가죽 200장, 흰종이 1만600권, 호랑이 가죽, 부채, 기름먹인 종이, 강원도 평창에서 생산되는 설화지(雪花紙), 기름먹인 베 등의 물품을 챙겼다. 정동유는 "나라가 망하려면 염치가 먼저 없어지는 법"이라고 탄식했다.

 원나라 지배기 고려는 해마다 미녀를 공물로 바쳤지만 명나라 시기에도 이 공녀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명 태종의 경우 5명의 조선 여인을 후궁으로 두고 있었는데 현비 권씨가 특히 아름다우며 시도 잘 짓고 퉁소도 잘 불었다고 명나라 기록은 전한다. 많은 수의 환관도 명나라로 보내졌다. 1468년 명나라 황제가 환관 정동(鄭同) 등을 보내 예종을 국왕으로 책봉했다. 정동은 명나라에 바쳐진 조선인이었으며 조상의 묘소와 친척이 모두 조선땅에 있었다. 명나라 조정 신하도 아니고 조선 출신 환관에게 그 나라 임금으로 임명하는 일을 대신하게 하는 것을 두고 명나라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다. 황제는 그리하여 상을 내릴 때는 환관을, 책봉할 때는 조정 신하로서 학실과 행실이 뛰어난 자를 보내게 했다.

 중국과의 무역에 관여했던 역관들은 비록 신분이 중인이었지만 부유한 자가 많았다. 그들은 명주 비단을 수십 겹 겹치고 안쪽에 짐승의 털을 댄 사치스런 옷을 입었다. 그 값은 털가죽 옷보다 곱절이나 비싸며 가볍고 따뜻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수십 명에서 100명의 사람이 입을 옷감으로 겨우 옷 한 벌을 만드는 것이다. 명주 1000여 겹 사이사이에 비단을 끼워 버선의 화려함을 극대화했던 당나라 황제를 흉내낸 것이라고 책은 소개한다.

 석가탄신일이 음력 4월 8일, 즉 초파일로 된 유래도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4월 8일은 잘못된 날짜다. 부처가 태어난 날은 주나라 소왕 24년(기원전 102) 4월이다. 주나라 4월은 지금의 2월에 해당한다. '요사(遼史)' '금사(金史)' 모두에 "2월 8일을 부처의 탄신일이라고 하여 도성과 여러 고을에서 모두 갖가지 놀이를 즐겼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태조때 2월 보름에 연등을 켠 것도 이런 관례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사는 곳을 동(洞)이라고 하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라고 저자는 기술했다. 동은 물가의 주거지를 이르는 말이다. 거주지가 물이 가까이 있는 계곡이나 산골짜기 사이에 사는 족속은 오랑캐이다. 우리나라는 서울이나 큰 도로의 골목이나 마을까지도 모두 동이라고 말하는데 이 명칭은 잘못 쓴 말이다. 도시의 거주지는 방(房)이라고 해야 한다. 책은 "지금도 동이라고 하는 것은 삼한시대 오랑캐 풍속의 유습"이라고 평가했다.

 책은 명사들의 숨겨진 일화도 다룬다. 소론의 핵심 인물로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1674~1740)는 함경도 안변 기생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남겼다.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안변에 이르러 기생을 가까이 했는데 수청을 들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광좌는 기둥에 선을 그으면서 "키가 이 곳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다시 안변에 들러 그 기생을 다시 만났다. 기생은 나이가 차고 키가 이미 그 선을 넘어 드디어 수청을 들게 하였다. 이광좌는 훗날을 기약하는 징표로 부채를 건넸다. 기생을 약속을 믿고 절개를 지켰고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어느 날 안변의 관기 한 명이 이광좌에게 만나 뵙기를 청했다. 그녀는 "몇 해 전 인연을 맺은 기생의 언니"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동생은 부채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애써 정절을 지키면서 대감이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리움이 도져 죽었다"며 "동생이 죽으면서 부채를 대감에게 드리라고 해서 이렇게 갖고 왔다"고 아뢰었다. 부채를 펼치니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기둥에 선 그은 옛 은혜 마음속 깊이 새겨, 이별할 적 넋이 사라질 듯 슬펐다오. 상자 속에 담긴 둥근 부채 한번 보소서, 절반은 맑은 향기요 절반은 눈물일 테니."

 이광좌는 매우 놀라고 후회하면서 장례비용을 넉넉히 주어 장사를 지내게 했다.

▶정동유(1744∼1808)는 정조 원년(1777) 34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한 뒤 음서로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를 가르치는 각 군현의 교관)이 되고 의금부 도사, 공조정랑, 익산군수, 홍주목사 등을 지냈다. 명문가 출신으로 학식이 높았지만 정치가로서 역량을 펴지 못한 채 직책이 낮은 실무자 수준의 벼슬을 전전했다. 풍부한 학식에도 평생 '주영편'과 2책의 작은 문집 '현동실유고(玄同室遺稿)'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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