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사자 논란 재점화…원작자 규명 '글쎄'>
'누가 우리나라 애국가를 지었느냐''누가 우리나라 애국가를 지었느냐'
(서울=연합뉴스) 애국가 가사에 대한 원작자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는 가운데 현재로선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해방 이후 미주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항일민족신문 '국민보' 1953년 5월 20일자를 발췌한 모습. 신문은 '애국가는 청일전쟁 이후 광무(光武·고종) 시대에 미국에서 유학한 윤치호가 짓고 곡조는 영국 노래 '올드랭자인(Auld lang syne)'으로 하였는데 추후로 애국가를 안창호가 개선하고 곡조도 안익태가 변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2014.1.22 << 사회부 기사 참조, 독립기념관 제공 >> photo@yna.co.kr
한 시민단체가 '작자 미상' 상태였던 애국가 가사의 원작자를 규명하는 이른바 '애국가 제자리 찾기' 운동에 돌입하면서 애국가 작사자를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혜문 스님이 이끄는 시민단체 '문화재 제자리 찾기'는 지난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윤치호(1865~1945)의 애국가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가사 친필본 '원본'이 미국 에모리대에 보관돼 있다"며 이달 말 민주당 안민석 의원 등과 함께 에모리대를 방문해 환수 의사를 전하겠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친필본에 적힌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서명 등을 근거로 윤치호가 애국가 가사 원작자라는 데 무게를 두고 20일부터 한 포털 사이트에서 '친필본 환수 모금 운동'도 시작했다.
그러나 22일 연합뉴스가 확인한 광복 후 발행된 신문 내용 등을 종합하면 애국가 가사 원작자를 규명하는 것은 현재로선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항일민족신문 '국민보'는 1953년 5월 20일자 '누가 우리나라 애국가를 지었느냐'로 시작하는 기사에서 '애국가는 청일전쟁 이후 광무(光武·고종) 시대에 미국에서 유학한 윤치호가 짓고 곡조는 영국 노래 '올드랭자인(Auld lang syne)'으로 하였는데 추후로 애국가를 안창호가 개선하고 곡조도 안익태가 변경하였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는 '성자신손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빈도는 우리나라일세'이었던 애국가 1절이 안창호에 의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4절의 '사농공상 귀천 없이 직분만 다하세'가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로 변경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애국가와 곡조에 관하여''애국가와 곡조에 관하여'
국민보 1958년 4월 9일자 지면. 신문은 애국가와 관련해 '국민회 당시 최정익과 안창호의 제안으로 두 차례에 걸쳐 교정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2014.1.22 << 사회부 기사 참조, 독립기념관 제공 >> photo@yna.co.kr
신문은 애국가의 2, 3절은 이전과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국민보는 이후 1958년 4월 9일자 기사에서도 애국가와 관련해 '국민회 당시 최정익과 안창호의 제안으로 두 차례에 걸쳐 교정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 같은 국민보의 기사는 해방 이후 발행된 간행물 중 애국가의 탄생 과정에 대해 비교적 가장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애국가 가사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윤치호, 안창호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학계의 기존 의견에도 설득력을 실어주고 있다.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때아닌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불거지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특정 인물을 애국가 작사자라고 입증할 만한 자료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며 "애국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탄생한 '합동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