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강 정 실
요즘은 비 오는 날 우산처럼 낭만이 즐비하지 못하다
국내외 뉴스를 보다가, 미국 서부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등지의 대형산불은 천둥에 놀란 개 뛰듯 멀쩡한 사 십여 명과 주택 수백 채를 잡아먹고 한낮 태양은 심한 연기로 연붉은 보름달처럼 앙당그레하게 떠있다 코로나(COVID-19)로 멀쩡한 사람이 죽어가고 세상은 온통 마스크로 숨이 퍽퍽 막혀가는데도 식당, 커피점, 이발소, 유흥시설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경고문을 입구에 붙여놓고는 11월, 59번째 대통령 선거엔 빠짐없이 참여해달라는 전화 편지세례를 퍼붓는 미국, 태평양 건너 두 전·현직 법무장관의 말은 거품 내뿜으며 헛발질만 해대는 주전자 속의 게처럼, 그리고 앞뒤 안 가리며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쏟아내는 사람들의 말·말·말에 지쳐 파김치 같은 날이 계속된다
비 오는 날
호숫가에 서면 빗방울은
동그랗게 톡톡 그림 그리며
낭만과 그리움을 이야기하는데,
빈 가슴 빈 머리에 잇속만 꽉 찬
세상의 이야기들을
커다란 연잎이 덮어버리고
빗소리는 점점 더 큰 소리로
인제 그만 들으라 한다
꽃 피면 꽃 지는 거
바람 불면 바람 자는 거
일어서면 앉는 게 편하고
앉는 것 보다 눕는 게 편한 거
흥망성쇠 세상살이는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판인 거
이 모든 삼라만상이
저 연잎 위에 있어
빗방울은 닭똥 같은 눈물로
생불(生佛)의 깨달음을 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구월의 중순입니다
서부지역 산불이 어서 그 기세를 꺾기를 바라며
동부의 태풍이 큰 비를 서쪽에 부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연 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하는 말
귀 기울여 들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