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정조, 개혁적 생각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조선의 산문 역시 조선 초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던 변계량(1369~1430) 이래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관각체(館閣體)가 자리 잡는다. 관각체는 바로 명나라의 대각체(臺閣體)와 비슷한 것이다. 그런 조선의 관각체에 대한 비판은 중종 때 기묘제현(己卯諸賢)의 한 사람이었던 김정국(1485∼1541)에 의해 시작된다.
연산군의 패악한 폭정과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무오사화, 그리고 무혈 쿠데타로 중종이 들어서고, 다시 많은 선비들이 죽어야 했던 기묘사화를 겪었던 시기이다. 건국 초기의 힘에 의한 태평성대(피지배층에게는 해당 없는 용어이다)가 끝나고 사회적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하던 때다. 임꺽정이 출현한 시기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의고파의 내용서 개혁성 찾기 쉽지 않아
그랬으니 중국에 갔던 주청사가 의고파의 저서를 가지고 들어오자 그 내용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의고파의 사고방식은 비슷한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의 의고파 저서들은 거의 대부분 수입되어 읽혔다. 그 중심에 허균이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허균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의고파가 그 자체로 개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의고파의 내용에서 개혁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굳이 찾는다면 유교 경전만을 중심으로 하는 편협한 사고방식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장자>나 <전국책>과 같은 책이 그랬다. 이 책들은 일찍부터 널리 읽히긴 했지만 전범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고파는 이 책들 역시 사서삼경과 마찬가지로 전범적인 텍스트로 삼았다.
<장자>는 유가 이념을 조소하며 그들의 성현을 거리낌 없이 모독한다. 또 <전국책>은 인간관계를 물리적·정치적 이해관계라는 관점으로 쓴 책이다. 그러니 유가의 도덕적 당위성에서 보면 이것들은 이단이고 사설(邪說)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 때문이었을까. 허균만이 아니라 당대의 많은 문인들이 의고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1563~1628)이 그랬을 뿐 아니라 17세기 전반 조선 문단을 주도한 사대가 이정구·장유·이식·신흠의 경우도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의고파에 경도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수용과정을 거쳐 조선에서는 진한고문파가 성립하는데, 이는 의고파와 같은 내용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 속하는 문인들 가운데 많은 이가 당대의 문형이었다. 문형은 한 시대의 문풍을 상징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외교문서나 과거의 시험문제를 관장하는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글과 창작론이 당시 문단에 미친 파급효과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런 의고파라고 해도 시대의 흐름과 함께 비판적 발전의 계단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인적 교류가 매우 활발해진 시기였다. 중국에서 의고파를 비판하는 논리가 당송파와 공안파에 의해 적극 개발되어 문단을 주도하고 있었고, 그 내용 역시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그런 비판정신을 꺾어버린 것이 정조의 문체반정이다. 물론 정조가 의고파를 그대로 수용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의고파에 담긴 이단과 사설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당송파의 비판적 논리를 일부 받아들임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 정조는 당송팔대가의 문집과 함께 ‘성인의 도’를 다루는 주자학만을 고집했다.
이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당송파와 공안파가 의고파를 비판한 구체적인 내용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더 진행되기 전에 당송고문운동에 대한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정조가 원한 문체반정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당송고문운동은 사상적으로 유학 부흥운동이었고, 문학적으로는 문체 및 문학 언어의 개혁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결과로 사상 분야에서는 사회의 부분적 위기를 만회하여 당나라 왕조의 천하 통일을 공고히 하고 강화시켰으며, 문화 분야에서는 ‘변문’의 지배적 지위를 대신한 ‘고문’이 더 많은 문인과 학자들에게 숙달되도록 만들기 시작하였다.”(<중국산문간사>)
문체 바꾸는 것은 사회개혁 위한 사상투쟁
실제로 안사의 난 이후 거의 결딴날 위기에 처했던 당나라는 고문운동을 거친 뒤 다시 1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다. 시대의 맥락을 살펴보면 당대의 고문운동은 지배층의 자정운동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유학이 정통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되찾고 체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당송고문운동의 과정을 보면 문체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큰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지 알 수 있다. 문체를 바꾸는 것은 사회개혁을 위한 사상투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문학이 통치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통치 권력이 강할 경우 법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법치는 지속불가능할 만큼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더 좋은 방법은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고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내면화해서 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체제친화적이고 체제 유지를 위해 유용한 도구인 문학에 개혁적인 내용이 담기면 혁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바뀐다.
정조는 명말청초 중국에서 시작되어 조선에서 유행하고 있던 공안파 문학이 체제를 뒤엎을 만큼 엄청난 힘을 내장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문체반정은 그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시작되었다. 그 과정은 세련되고 부드러웠지만 단호했고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조의 의도는 철저히 관철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사상을 드러내고 그 사상의 실현을 유혹하는 문학은 더 이상 유행하지 못했다. 정조가 개혁적인 생각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