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후 ‘성취감’ 느끼는 살인마를 소재로… 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슬픔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떠올렸다.”
차가운 족쇄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발목에 채워졌다. 그는 시베리아의 옴스크에 위치한 감옥에서 이 무거운 족쇄를 질질 끌며 4년을 보냈다. 읽거나 쓰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고,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비참한 감옥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글 | 실리어 블루 존슨
차가운 족쇄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발목에 채워졌다. 그는 시베리아의 옴스크에 위치한 감옥에서 이 무거운 족쇄를 질질 끌며 4년을 보냈다. 읽거나 쓰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고,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비참한 감옥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인물이 겪고 느끼는 일들이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는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훗날 작가는 《죄와 벌》이 감옥에서 지은 이야기라고 전하며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슬픔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회고했다. 감옥생활을 계기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 그 동기에 관해 진지하게 숙고해보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한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1847년 초,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매주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문학, 철학, 정치를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어느 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벽 4시에 잠에서 깼다. 그의 방에 웬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에 가담한 죄로 긴급 체포되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는 유럽 전역에 퍼진 정치적 불안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프랑스에 공화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러시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정치적 질서를 바로잡는 동시에 자신의 통치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는 잠재적인 반체제 단체를 면밀히 감시했다. 그리고 운 없게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 그 감시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강도 높은 심문이 넉 달이나 이어진 끝에,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구성원들에게 전원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혹독한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던 12월의 어느 날 아침, 간수들이 스물여덟 살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죄수들을 어딘가로 끌고 가 일렬로 세웠다.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열여섯 명의 사수(射手)들이 있었다. 곧이어 죄수들은 명령에 따라 세 명씩 짝을 이뤄 나뉘었다. 가장 먼저 처형될 세 명에게 두건이 씌워졌다(도스토예프스키가 속한 무리는 다음 차례였다). 집행관의 우렁찬 신호가 울려 퍼졌다.
“장전! 조준!”
뒤이어 정적이 흘렀다. “발사!” 신호는 없었다. 대신 특사가 가져온 황제의 새 명령문이 큰소리로 낭독되었다.
“죄인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되, 사형 대신 장기간 복역형을 명하노라!”
@정가애
이 극적인 상황은 전부 니콜라이 1세가 꾸민 일이었다. 그들이 죄의 무게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사형집행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 간 후에 형량을 감해준 것이다. 얼마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한 1850년 1월부터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고된 일과를 마친 후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운 순간, 작가의 뇌리를 스친 문학적 영감이 어두운 감방에 한 줄기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빛은 훗날 《죄와 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에서 복역하던 시절에 이미 ‘범죄의 고백’ 을 다루는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지만, 1860년에 이르러서야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딱 알맞은 실존인물을 우연히 알게 된 덕이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친형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Vremya(시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브레미아>는 일반인의 사회 참여를 도모하는 데 주력하는, 자그마치 5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잡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삿거리를 찾아 프랑스의 법정을 뒤지고 다니다가 아주 이례적인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피에르-프랑수아 라스네르는 여느 범죄자와 확연히 달랐다. 그는 재기 넘치고 박식하며 자의식이 강한……, 살인마였다. 라스네르는 주먹다짐을 하던 상대가 죽어버린 일을 계기로 본인이 타고난 범죄자임을 깨달았다. 죽어버린 상대 앞에서 그가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듯, 성취감마저 느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관심사를 시 쓰기로 돌렸지만, 시인으로서의 평온한 삶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라스네르는 수차례에 걸쳐 강도행각을 벌였고, 매번 누군가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범죄예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쇠창살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죄를 탓하는 데 허비하지 않았다. 그에게 감방이란 문학과 정치와 종교에 관해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비상한 범죄자의 사연에 매료된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네르를 모델로 《죄와 벌》의 타락한 주인공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를 탄생시켰다. 소설과 현실의 두 범죄자는 모두 살인을 돈 버는 수단으로 치부하고, 둘 다 죄질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실상 라스네르는 라스콜니코프만큼 돈에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의 비애에 관해서라면, 감방에 갇힌 프랑스의 살인마보다 작가 자신이 훨씬 더 전문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빚쟁이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1865년, 그는 돈 문제를 잊고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그렇지만 빚쟁이들에게서 벗어났을지언정 나약한 자신에게선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도 도박에 빠져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순간이 곧 《죄와 벌》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생각의 단편들이, ‘파산의 충격’으로 한데 모여 하나의 이야기틀로 짜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필에만 몰두했다. 물론 돈이 절실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꺾을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어느덧 꽤 많은 분량으로 늘어난 《죄와 벌》 원고를 깨끗이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새로운 형식, 새로운 줄거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그때까지 쓴 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전했다. 과연 작가의 본능은 옳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펜이 종잇장 위를 훨훨 날듯이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866년 1월, 《죄와 벌》 제1부가 <러스키 베스트니크Ruskii Vestnik(러시아 통보)>에 실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써왔지만, 이번 작품은 그의 전작들을 모두 뛰어넘는 수작이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러스키 베스트니크>는 12개월 동안 《죄와 벌》을 연재했고, 그동안 정기구독자 수가 500명이나 늘어나는 특수를 누렸다. 이렇듯 문예지를 통해 러시아 문학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 받은 《죄와 벌》은, 이듬해인 1867년에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러시아의
대문호로, 182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과도기 러시아의 시대적 모순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이것이 작품세계에 투영됐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백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