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효석 문학관 이효석의 고향인 봉평면 창동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깔끔한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좋은 볼거리다. | |
ⓒ 류효정 |
우리가 이효석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자신의 고향을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은 흔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이 작품을 쓰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고향을 잃어버린 이효석
이효석(1907~1942)은 강원도 창평군 봉평면에서 출생하여 평양 기림리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하기까지 36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산 작가다. 그리고 짧은 생애의 절반 가량을 작품 활동으로 보내며 삶을 예술화했다.
▲ 이효석 사진 문학관 내에 전시된 학창 시절의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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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모님을 따라 잠시 서울에서 생활한 것을 제외하고는 1920년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근 10여 년을 고향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그의 장녀 이나미씨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5살 무렵에 친어머니를 여의고 그 뒤 계모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계모와 사이가 좋지 않아 8살이 되던 해 본가로부터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평창공립보통학교에 보내져 6년간 하숙을 했다는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로 진학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그 뒤 함북 경성 출신의 아내를 만나 경성과 평양에서 생활을 했으니 그는 36년 생애 중 10여 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은 고향을 떠나 생활한 셈이다.
▲ 이효석 생가 실제 생가터는 현재 다른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관계로 그곳에서 약 700m 떨어진 곳에 지역 원로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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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고향을 등졌다. 부모와의 불화 때문인지 그는 스스로 고향이 없다고 여겼으며, 심지어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부정하기도 했다.
"나는 시골로 돌아가 영서에 내려가 볼 때 거기에 또한 뿌리 깊은 친척은 없는 것이라 여남은 살까지의 들에 뛰놀던 시절과 보통학교 시절과 철든 후 서울서 가끔 내려가 한철씩 지낸 때의 일과-이것이 영서에서 보낸 생활의 전부이다. 눅진하고 친밀한 회포가 뼈 속까지 푹 젖어들 여가가 없었던 것이다. 고향의 전경이 일상 때 마음에 떠오른 법 없고 고향 생각이 자별스럽게 마음을 숙여준 적도 드물었다. 그러므로 고향 없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때때로 서글프게 뼈를 에이는 적이 있었다."(<영서의 기억>)
그에 대한 다른 기록들에서 아버지가 등장하는 때는 함북 경성에서 치러진 그의 결혼식과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그의 장례식 때뿐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어머니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의 장녀 이나미씨도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있었을 적에는 친가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이렇듯 자신의 고향과 아버지를 부정했던 그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메밀꽃 필 무렵>은 70여 편 되는 그의 소설에서 고향을 다룬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고향을 마주한 이효석
▲ 이효석 동상 문학관 외부에 전시된 것으로 그의 집필 모습을 형상화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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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메밀꽃 필 무렵>로 인해 그를 순수 서정의 작가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작품 활동의 초기 10여 년간 좌익사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씀으로써 '동반자 작가'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이런 그의 작품 활동에 전환점이 된 것은 1931년 총독부 경무국 도서관 검열관으로 취직한 일이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이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쓴 글을 검열하는 자리였기에 그의 행위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배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취직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이갑기라는 문학청년으로부터 "너두 개가 다 됐구나"라는 말을 들은 봉변을 당한 뒤로 이내 일을 그만두고 1932년 부인의 고향인 함북 경성으로 내려간다.
▲ 메밀꽃밭 예전에는 메밀꽃밭이 그리 넓지 않았다고 하는데 관광지화가 된 뒤로는 여기저기 넓게 펼쳐진 메밀꽃을 볼 수 있게 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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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불행이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경성에서 그는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해 경제적 안정을 찾았고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을 재인식함으로써 문학의 전환점을 맞았다. 또한 백계 러시아 피난민들이 머물렀던 주을온천에서의 경험을 통해 본격적으로 서양 문명에 젖은 생활을 시작했고 이를 작품에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절의 경험이 그에게 '고향'을 되돌려주었다는 점이다. "나는 자주 관북의 경성과 부근 이야기를 지금까지 썼으나 살고 있는 당시의 일종의 고향의 느낌을 그곳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일 뿐이다"라고 수필 <영서의 기억>에서 고백하고 있거니와 경성 생활 이후 그는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를 작품 속에 담기 시작한다.
이후 경성 생활을 접고 그는 1936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다. 평양 창전리 '푸른집'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윤택한 때를 보내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한다. 그리고 이때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하여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몇몇 작품을 발표한다.
즉, 그는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난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고향과 아버지를 마주하고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에 투영된 이효석의 삶
<메밀꽃 필 무렵>은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완벽한 짜임새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묘사의 정점을 보여주는 표현력으로 인해 한층 빛나는 작품이다.
▲ <메밀꽃 필 무렵>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한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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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메밀꽃 필 무렵>)
사실 그가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보통학교 시절 본가로부터 약 4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하숙했기 때문이다. 하숙집에서 본가까지의 그 먼 길을 어린 나이에 몇 번이고 왕복을 했던 그가 그 풍경 하나하나를 <메밀꽃 필 무렵>에다가 새겨놓은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그 안에서 이효석의 삶을 반추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장돌뱅이인 허생원의 떠돌이 생활은 고향을 떠나 서울, 경성, 평양을 전전했던 이효석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 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라는 허생원에 대한 설명은 이효석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도 들린다.
▲ 가산공원 내의 충주집 자료에 의하면 허생원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이효석의 동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충주집 주인인 송씨가 장돌뱅이인 허씨와 통정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설은 성공여와 그의 딸 옥분이가 있었는데 집안이 기울자 일가가 충북 제천으로 이주했고 옥분이가 허씨와 물방앗간에서 인연을 맺었다는 소문이 충주집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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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레방앗간 가산공원에서 이효석 문학관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건물 옆으로 물레방아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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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충주집을 사이에 두고 연적으로 만난 허생원과 동이가 사실은 부자지간임을 밝혀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허생원의 진한 부성애는 그간의 이효석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이는 이효석이 고향에 있는 아버지를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깊숙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소설을 쓸 당시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가 새롭게 자신의 아버지를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는 시류에 따른 흉내 내기를 멈추고 외면했던 과거와 마주하여 진정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음으로써 문학에 있어서도 일정한 경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