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파도꽃(넌픽션)

조회 수 1969 추천 수 5 2016.09.05 15:36:02

                                      

                                                              

 

 

                                                                                          하얀 파도꽃

 

                                                                                                                                                                     홍용희

-나의 항구
  기온이 화씨 100도를 넘던 날 오후, LA에서 가까운 헌팅턴 비치(Huntington Beach)에 갔다. 끝없이 펼쳐진 고운 모래 위에 샛노란 햇살이 비치고 파도는 포말이 채 지기도 전 또 다른 하얀 파도꽃을 피우고 있다. 수평선에 걸린 해의 뒷모습은 내 모국의 석양을 방불케 하다가 주홍빛으로 하늘을 가득 물들인다. 태양의 뒷모습은 검붉은 울음을 토하게 했던 내 지난날을 불러왔다.

  미국에 사는 여고 동창인 단짝 친구, 남자 이름을 가진 강석태. 지금은 수잔 리,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이씨가 된 친구다. 40여 년 전, 고등학교 3학년 수학 시간에 미국에 이민 간다는 내용을 선생님 몰래 속닥거리다 울면서 아쉬워했던 단짝이다. 그녀가 시흥에 살았을 땐 시흥 출입이, 김포공항 근처에 살았을 땐 공항동에 가기 위해 한강다리를 건너며 출입이 잦았다.
  석태가 내 큰아들 우권이가 대학입시에 두 번 실패한 후 전화를 했다.
  “얘, 우권이 어떻게 되었어. 또 안 됐어?”
  “넌 왜 우권이를 유학(留學) 보내지 않니. 다른 애들은 잘도 오더구먼. 어쩌면 거기서 하는 것보다 이곳이 더 좋을 수 있어.”
  ‘유학’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게 어디 만만한 일인가. 군(軍) 문제며 미국에서 확실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고, 이산가족이 되어야 하는 문제라 가슴속에 넣고 말았다. 그렇지만 큰애 우권이가 고등학교 2, 3학년 때 국어, 영어, 수학 과외학원에 다니는 것만 해도 사교육비는 엄청나게 들었다. 그 경비를 합치면 유학에 드는 비용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우권이는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 우권이는 새벽 4시면 일어나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정규수업 후 야간자율학습 그리고 곧바로 학원에서 공부하느라 제대로 잠자지 못했다. 밥도 편히 앉아 먹지 못했다. 어떤 날 아침에는 밥을 먹으며 조는 것이 너무나 가여웠다.
  사당오락(四當五落), 근 40년 전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간이 떨리게 많이 들었던 유행어다. 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엄마가 겪은 그런 현실을 몇 십 년째 대물림하는 현실이 싫어졌고, 우권이를 유학(留學) 보내면 아들의 성격상 유학(遊學)은 아닐 거고 영어는 확실하게 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들었다.
  유학에 관한 생각이 들자, 약 1,500여 년 전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떠올랐다. 그분들 외에도 신라시대 때 선진문화를 갈구했던 선각자들인 고운 최치원, 혜초스님, 원광스님 등은 열악한 그 시대의 교통수단을 감내하면서 당나라와 인도까지 가서 배움의 갈망을 해소한 선례가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세상인데… 친구 석태와의 국제통화 내용을 남편과 상의했다. 남편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라고 대답했다. 남편의 확답은 받았지만 그래도 차마 우권이에게 말을 하지 않자 하루는 남편이 다그쳤다. “왜 말만 꺼내고 실행 안 하느냐.”고. 아마 자식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나의 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결심했다. 그래, 남편도 적극 동의하고 있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으니…. 하루는 가족이 다 모인 곳에서,
  “우권아. 너 미국으로 유학 갈래?”
  “엄마, 저는 도피유학은 안 가요.”
  “도피유학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공교롭게도 우권이가 다니는 학교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 미국에 유학 한 어느 아이가 부모에게 많은 송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아이가 한국에 돌아와서 부친을 살해했다. 아마 그 사실이 큰애의 가슴에 각인된 듯싶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송이, 중학교 2학년 셋째 우정이가 유학을 가겠다고 적극 나섰다.

 

-닻을 띄우다
 정작 유학을 보내려던 우권이는 빠지고 대신 둘째, 셋째가 결정되었다. 두 아이가 다닐 학교, 비용 등 여러 가지가 걱정되었으나 서울에 있는 유학원에 가서 필요한 절차를 마쳤다.
  1997년 가을, 석태 동생의 도움으로 버지니아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시키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국에는 전대미문의 1998년 외환위기사건 IMF가 터진 것이다. 1달러에 천원 미만이던 원화가 1,200원을 웃돌기 시작했다. 마치 졸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이러다가는 교육은커녕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겠다는 위기감이 들자 남편과 급히 의논했다. 그 결과, 내가 미국에 가서 애들과 함께 살면 더 경제적이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여 친구 석태랑 상의했다.
  친구 석태가 있는 LA에 정착하기로 하고 석태 남편의 도움으로 라미나다(Lamirada)에 주택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두 아이를 주택 가까운 학교로 옮겼다.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니 좋았으나 한국에 있는 큰아들과 남편을 볼 수 없어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 우권이는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휴학한 후 입대했다. 이렇게 되니 남편은 서울의 집 규모를 줄이며 회사생활을 하다가 퇴직하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우권이는 군대를 마치면 미국으로 올 것이고, 한 가족이 다 같이 살게 된 것은 좋았는데, 남편은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다름이 아니라 몇십 년간 근무하고 받은 퇴직금과 주식을 죽마고우라고 생각했던 김민갑에게 맡긴 것이다. 미국은행 시스템은 별반 이자가 없다는 것을 안 남편은 친구에게 맡겨 놓고 조금씩 돈을 받아 생활할 생각이었다.

 

-폭풍우
 남편이 미국에 왔으니 여기서 수입을 만들어 기반을 잡아야 했다. 그동안 남편은 틈틈이 생활비와 학비로 송금했던 돈을 바탕으로 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그래도 한국인이 쉽게 할 수 있는 장사, 음식 만드는 것이 괜찮을 것으로 보여 가게를 물색해 계약했다.
  가게의 중도금으로 받기 위해 남편이 친구와의 통화를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통화해 돈 일부를 받은 뒤부터 소식은 영 끊기고 말았다. 돈 인심은 죽마고우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김민갑은 금전유혹에 쉽게 허물어지는 그런 실체를 남편은 몰랐던 것이다. 서울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연락하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찾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친구 김민갑은 아예 증발해버린 것이다.
  중도금과 잔금이 큰 걱정거리였다. 여기저기 통장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으고 부족한 돈은 서울의 친구와 친척을 통해 뒤처리하는 동안 남편은 큰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돈은 날아가고, 내가 그 돈을 친구에게 빌릴 때의 기분은 참 묘했다. 친구의 기분을 짐작하며 정말 미안했다.
  남편은 장사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계속 그 친구를 찾기 위해 전화하기가 바빴다. 일 갔다 와서도 한국으로 전화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증발해버린 친구랑 함께 날아간 돈과 증권들, 그것은 고스란히 독이 되어 남편의 정신과 몸은 점차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전화가 계속 안 되자 하루는 “내가, 왜 천안 땅을 근저당하지 않았는지 정말 통탄스럽다.”라고 말했다. 김민갑이가 천안에 있는 땅을 살 때 남편은 얼마간의 현금을 아무 조건 없이 빌려주었다. 이는 김민갑의 필요 때문에라도 남편과 연락은 끊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애통함과 분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남편을 옥죄고 있는 것이 더 많았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들, 들리지 않는 귀와 트이지 않는 입, 날아간 재산과 자존심은 남편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런 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허탈해하며 말까지 급속도로 잃어갔다. 삶의 터전을 옮긴 죄(?)로 받은 남편의 고통이었다. 가장 신뢰했던 친구의 배신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견뎌야 했으니 말이다. 하루하루 기막힌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락에 함께 떨어져야 했다. 그래도 애들은 재잘대고 학교에 잘 다니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난파선
  얼바인(Irvine)에 있는 고층건물 실내 카페테리아(Cafeteria)에서의 장사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이곳에는 증권회사와 인터넷 관계 회사 등 몇 회사가 있었지만, 공실률(空室率)이 높아 늘 고정적이고 유동 인구가 별로 없는 가게였다. 날마다 샌드위치 등을 만들어 팔았지만, 특별히 장사가 잘되는 날 없이 운영해나갔다. 직원이 하나 있었지만, 곧 정리했다.
  남편은 이 상황을 파악하고 이 가게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 장로의 소개로 치과기공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 주인이 바뀌었다. 새 주인이 잘 운영해서 공실률을 줄이고 입주회사가 늘면 손님들이 늘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쫓겨나게 된 것이다. 얼마의 보상금을 받기는 했지만, 우리가 투자했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금액이었다.
  남편은 치과기공소에 다시 다녔고 나는 커뮤티니 칼리지(Community College)에서 사회학과 영어를 수강했다. 남편이 일을 배우러 갈 때 김밥을 싸서 주곤 했다. 어느 날은 거의 안 먹고 남겨왔다.
  “아니, 왜 이리 못 드세요?”
  “응, 배가 안 고파. 왜 그런지 모르겠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집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급하게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했다. 목사님의 도움으로 윌셔거리에 있는 교우의 병원에 가서 몇 가지 진찰했다. 그는 별로 큰일은 아닌 것 같으나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별로 큰일은 아닌데 왜 큰 병원일까 하면서 기분이 이상했지만 큰 병원에 갔다.
  각종 검사 끝에 진단결과가 나왔다. 위암 4기, 앞으로 남은 기간은 6개월이라 했다.
  순간, 담당 의사의 얼굴이 노랗게 보였다. 청천벽력 같은 대포 소리에 “수술날짜를 잡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담당의사는 단호했다. “병원 치료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다 퍼져있다. 복부에도 모래알 같은 암세포가 퍼져있어 어느 한 부분을 수술할 수가 없다. 키모테라피(Chemotherapy)도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당신 남편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마지막 날까지 편안하게 살아라!”라고 단호하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
  하나의 파도가 그 물거품이 사라지기도 전인데 더 큰 파도가 덮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왜 이리도 힘든 일이 계속 일어나나. 제대로 숨도 못 쉬겠네.”라고 떠들어 댔다.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복도에 나오니 눈물부터 쏟아졌다. 우리 부부 사이로 지나가는 환자가 보였다. 머리카락이 없어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환자였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랬다. 병실에서 누가 암 수술을 받는다고 하면 ‘아, 저분은 그래도 수술할 수 있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부러워했고, 키모가 어렵다는 어느 환자도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어쩌다 내 남편은 아무 치료도 못 받고 6개월 안에 가야만 하나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났다. 남편이 없는 곳이면 아무 곳에서나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도움 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가슴은 끝없이 무너져 내렸다.
  무엇보다 남편은 차오르는 복수(腹水)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 때문인지 몸은 자꾸 여위어가고 밥을 먹지 못했다. 남은 밥을 버리기가 아까워 내가 대신 꾹꾹 먹다가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 병원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목사님과 상의했다. 한 교우가 경영하는 민간요법을 추천해 주었다. 병원에서는 더 할 것이 없다고 했으니 그 방법에 매진하는 것이 최선인 듯해서 한국에 갔다. 그런데 왜 그리 암에 좋다는 민간처방이 많은지…. 남편은 교우가 운영하는 곳에서 민간요법에 집중했다.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낫겠다는 일념 하나로 밥을 굶으며 민간요법을 했으나 남편은 점점 더 야위어 가고 뼈만 남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 부부는 경기도 고양 부근에 옮겨 일반병원 치료를 계속했다.
  추운 겨울이다. 한 번은 눈을 밟으며 산책하다 남편이 미끄러졌다. 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미끄러지면서 배를 땅에 댔어. 복수가 빠지라고.”
  빼내도 이내 차오르는 복수, 서울의 한 일반의사는 복수를 빼면 그 용액 속에 전해질도 같이 빠져나오니 좋지 않다면서 회피했다.
  이때 대구에서 홀로 계셨던 시아버지, 그렇잖아도 평생 잉꼬부부로 지내셨던 시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채 가기도 전에 아들이 이랬으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남편은 둘째 아들이었다. 평소 부모님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시아버지는 철도공무원을 그만두신 뒤 연사공장을 대구 동촌에서 경영했다. 동네에서 인망이 높으셔서 신용협동조합 이사장 일을 한 이 어진 시아버지, 그가 사랑하고 믿었던 둘째 아들이 이 지경이 되니 삶의 의미를 잃으신 듯 보였다. 늘 베풀어 주셨던 인자한 사랑과 따스한 미소에 이런 꼴을 보였으니 정말 죄송했다.
  한국으로 갈 땐 희망을 품고 갔지만 아무런 기적은 없었다. 대구에 있는 남편의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남편에게 고향 선산 어머니가 묻힌 곳을 묘지로 정하라고 했다.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듣고만 있었다. 친구 잃고 돈 잃고 이제는 목숨까지 잃게 될 남편, 남편의 묘지 자리를 자신에게 정하란 말을 들었을 때 남편의 심정은 어땠을까.
  별 차도가 없으니 마냥 있을 수도 없어 우리 부부는 다시 LA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를 당신이랑 애들이 있는 곳에 묻어 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내가 어디에 돈을 감춰놓았으니 찾아 써라.”
  “그래요? 아이 좋아라. 거기가 어디예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은 온통 가족으로 꽉 차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농담까지 했다. 그것은 남편의 무의식적 희망이었지 현실은 아니었다. 남편이 남기고 떠나야 할 우리 가족을 걱정한 헛소리였다.
  복수는 여전히 찼고 대변은 온통 검었다. 가끔 병원에 가서 복수를 빼고 검은 용변의 치료를 받으며 사과즙과 채소즙 등으로 연명했다. 그러나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암 판정 6개월 만이다. 남편의 주검이 바퀴 달린 카트에 누이어 하얀 보자기에 덮여 가던 날이다. 남편의 주검을 본 순간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스스로 깨어났다. 나는 그때 알았다. 지극한 슬픔에는 넋이 먼저 알고 사라진다는 것을. 눈물이 되기 전에, 말하기 전 나의 넋이 먼저 배웅하러 간다는 것을 말이다.

 

-새로운 항구
  6개월여를 날마다 남편의 무덤에 갔다. 어느 한날 문득 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큰아들 우권이는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와 세리토스 커뮤니티에 다니고 있었고, 둘째 송이는 아직 오렌지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고 있다. 막내 우정은 미시간대학에 입학하여 그리로 갔다.
  가게에서 쫓겨나올 때 받은 돈, 남편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들어둔 교육보험에서 찾은 돈, 남편의 생명보험에서 받은 돈과 LA집을 팔아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았다. 이제 남아 있는 돈이 얼마 없으니 앞으로 살 궁리를 하는 게 당연했다.
  카페테리어를 운영할 때다. 한 손님의 말이 생각났다. 손님은 우체국에서 일하는데, 급료가 시원치 않아 엘브이엔(LVN)을 하려 한다고 했다. 그 과정에 들어가려면 영어와 수학 시험을 봐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손님의 남편은 이미 알엔(RN)에 취업했는데 급료가 좋다고 했다.
  커리어 칼리지(Career College)에 찾아갔다. 그리고는 영어와 수학 두 과목 시험을 봤다. 담당선생은 수학성적이 개교 이래 제일 좋으니 알티(Respiratory Therapist)과정을 밟을 것을 권했다. 당장 찾아와 시험은 보았지만, 이 학교의 과정을 자세히 들어본 적이 없어 고민스러웠다. 수학성적이 좋았다지만 수학은 싫었고 무엇보다 2년이라는 기간과 수업료가 비쌌다. 또한, 어떤 난관이 있을지 도대체 짐작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더군다나 국문학을 공부한 내가 수업료로 몇만 불을 빌려야 하고, 특히 53세의 이 나이가 모든 과정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집에 도착해 몇 날을 고민하고 큰애와 둘째 송이와 상의도 했다. 또 며칠을 보내면서 ‘그래 한 번 해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어!’ 하면서 결심했다.
  대학 졸업한 지 30년, 대학원 졸업한 지 15년 만에 다시 교실에 앉았다. 그러나 과연 학교수업은 턱없이 힘들기만 했다. 영어라고는 중·고등학교 영어 시간, 커뮤티니 칼리지와 어둘트 스쿨(Adult School)에서 몇 과목 들은 것이 전부였다. 한순간도 마음 놓고 느긋할 수가 없어 학교에 제일 먼저 갔다. 그리고는 후미진 곳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공부했고, 교실 문이 열리면 교실에서 공부했다. 빨리 이해가 안 가고 귀가 안 들리는 문제는 시간을 집중적으로 할애했다. 그래도 항상 불안했고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나토미엔 피지올로지(Anatomy & Physiology), 크리티컬 딩킹(Critical Thinking) 등은 겨우 쫓겨나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었는데, 하루는 담당선생이 나를 불렀다.
  “영어가 어렵지 않아요?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나는 할 수 있어요. 졸업하고 취업해 애들하고 먹고살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사실 속으로 엄청나게 놀랬다. 나의 얼굴을 한참 훑어 본 담당선생은 나만을 위한 영어 선생을 별도로 배정해 주었다.
  그 후 학교에서 영어 선생과 단둘이 몇 시간을 서너 번 공부했다. 거의 잘릴 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다. 학급에서 대충 반수는 도중하차했다. 영어가 모국어인 학생들도 잘려나갔다. 이러한 살벌한 수업 중 서울에 있는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김민갑이가 경찰에 잡혔대. 어쩔래? 와서 대질신문해 볼래?”
  “그럼요. 가야지요. 그 인간이 어떤 꼴을 하는지 보고 싶어요.”
  내가 김민갑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이 별스런 의미도 없으리라 짐작은 갔지만, 그래도 한 푼이라도 건졌으면 싶었다.
  분당경찰서에서 그를 만났다. 지명수배자였기에 경찰서 감방에서 지내다 포승줄에 묶여 나오는 그를 보았다. 순간 나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마구 해댔다. 김민갑이가 나오는 순간부터 나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는 내가 전혀 염두에 없는 듯했다. 그러나 나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김민갑은 잠시 움찔했다.
  이윽고 신분확인이 끝나고 경찰은 내가 보는 앞에서 심문에 들어갔다.
  “왜 남의 돈을 본인의 동의 없이 썼습니까?”
  “박훈익은 제 친구라 제가 돈 좀 벌어주려고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주식값이 떨어지는 것을 제가 어찌합니까?”
  반박할 수 있는 내 남편은 이미 지하에 있음을 아는 김민갑은 오히려 당당했다. “왜 본인의 동의 없이 돈을 썼느냐?”라는 것이 질문이었는데, 답변 대신 자신의 선의만을 강조하니 경찰도 별로 말이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경제사범의 초범은 법적 조치가 미약하다고 했다. 경찰도 어차피 구속되지 않을 것인데 뭐 하러 소득도 없이 이곳에 왔느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분당경찰서를 빠져나오면서 별스런 생각이 다 들었다. 애초에 남편이랑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 좋았을까 싶었다. 금전적 유혹을 견뎌내지 못해 친구를 함정에 빠뜨린 나약한 우정(友情), 그러한 우정에 남편은 자신의 형제나 처남에게도 안 준 신뢰를 김민갑은 철저히 배신한 것이다. 이곳까지 찾아온 친구의 부인에게 응당 사과라도 하는 것이 도리이련만 도리어 뻔뻔스러운 얼굴….
  아무 소득 없이 일주일 만에 LA로 돌아왔다. 예상했지만 학교 공부는 엄청나게 밀려 있었다. 매주 보는 시험,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잘리느냐 마느냐 조마조마하게 공부했는데, 한 주를 빼먹었으니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러시아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를 했던 내 짝 마크는 도중에 탈락했다. 중간고사 성적 몇 과목이 기준에 못 미쳤던 것이다. 옆에서 잘려나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라이센스를 땄다. 취업에 어려움은 없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까지 식구들 걱정했던 남편을 볼 면목이 생겨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리고 항상 남편이 벌어다 주던 돈으로 생활했던 나에 대한 믿음도 함께 생겼다.
  내가 병원에서 알티(RT)로 일하면서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남편이 생존했을 때다. 남편이 무척 기뻐한 순간이 있다. 바로 큰아들 우권이가 UCLA에 입학했을 때다. 또 하나는 막내 우정이가 미시간대학과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ity)에 입학신청을 했다. 미시간대학에서는 입학허가서가 도착했으나 코넬대학교에서는 통보가 안 왔다. 미시간대학에 입학했는데, 늦게 코넬대학교에서 입학허가서가 온 것이다. 남편과 우정이 그리고 내가 코넬대학교를 돌아보기 위해 셋이서 함께 갔다. 이타카(Ithaca)에 갔던 날 장대비가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심했다. 남편은 LA에서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아들의 밝은 장래를 기대할 수 있어 그랬을까, 남편은 애들의 낭보에는 참으로 즐거워했다.
  큰아들 우권이는 집념이 강한 아이였다. 세상에 이렇게 입학하기가 힘든 사람도 드물 것이다. 제대한 뒤 LA에 있는 세리토스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편입했을 때다. 정확하게 한국에서 삼 수, 미국에서 삼 수, 커뮤니티에서 2년, 그렇게 따지고 보면 팔 수만에 우권이가 원하던 로마린다 치과대학(Lomalinda Dental School)에 들어간 것이다. 그 과정이 참으로 순탄치 않았다.
  치과대학에 첫 번째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학교에 찾아가 왜 자신이 떨어졌는지에 대해 문의했다. 두 번째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또 찾아가 문의했다.
  담당자는 “너의 영어 실력이 모자라 안 됐어.” 하면서 대기자목록을 보여 주었다. 이때 담당자에게 “나, UCLA 생화학과를 졸업했어요. 내가 영어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여기 지원생들보다 영어가 모자랄 거로 생각하세요?”
  이런 불합격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권이의 인생이 너무나 가여웠다. 서울과 이곳에서도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우권이가 절망할까 봐 정말 걱정되었다. 다행히 포기하지 않고 학교 입시위원회 위원 중 한 분을 찾아가 질문하고 또 응시하는 끈기. 어떻게 그런 일이 서울에서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한 개인 수험생을 상대해 주는 미국의 교육기관, 입학허가를 떠나 한 사람의 인격을 그렇게 존중해준 학교, 참으로 고맙다. 다행히 세 번째 해에는 입학 되어 무사히 졸업하고 개업했다. 지금 자신의 덴탈 오피스(Dental Office)는 댈러스 근처에 있다.
  몇 년째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내 딸 송이도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내가 나온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송이도 모든 과정을 잘 끝내고 같은 직장에 취업했다. 모녀가 직장 동료가 되어 함께 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심사가 공통된 것이라 대화가 잘 되었다. 그러면서 한 부서에서 크고 작은 일을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다. 나의 친구이자 나의 후배 박송이, 귀엽게만 키운 딸이다. 송이는 그림을 좋아해 그 방면의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림 그릴 때는 밤을 새우는 딸이었다. 딸은 좋아하는 것에는 집중했지만,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남편은 항상 걱정했다.
  하루는 송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엄마가 공부했던 그 교실에서 공부하며 엄마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
  그 말을 듣던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철없이 몇 년을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녔던 송이가 철드는 소리였다. 그 이후로 송이는 사려가 깊어졌다. 우리 가족에 그런 아픔이 없었다면 송이가 저렇게 철들 수가 있었을까 싶었다.
  막내아들 우정이는 원래 조금은 조숙했다. 15살에 미국 와서 동부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외환위기로 LA로 온 막내다. 아빠가 없는 가정의 가장 노릇을 하느라 집에서 남자의 일은 막내 몫이었다. 아이케아(IKEA)에서 사온 조립식 가구의 설치나 쓰레기 버리는 일, 남자가 해야 하는 힘든 일을 했으니 일찍 철이 드는 듯했다. 가정경제를 고려했음인지 가고 싶어 했던 코넬대학교를 포기하고 미시간대학에 그대로 다녔다. 졸업 후 월스트릿에서 써티와이드 화이낸셜 애널리스트(Certified Financial Analylist)로 일하다가 지금은 뉴욕에 있는 훼드랄 리저브드 뱅크(Federal Reserved Bank)에서 일하고 있다.

 

-하얀 파도꽃
 그리도 번민이 컸던 내 직업학교,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인 듯싶다. 시작할 때의 나이가 53세였기에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 때문에 무척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도 시작한 것이 나를 수렁에서 건진 것이다. 지금 와서 53세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젊어 보인다. 그때 나는 공부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과정을 다 끝내고 그 후로도 십 년 넘게 일하다 은퇴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오늘처럼 가끔 내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삶의 터를 옮겼던 죄(?)가 중했고 일 처리를 똑똑히 못 했던 죄가 무거워 죗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한꺼번에 다가왔을 때의 당혹감과 좌절감을 말이다. 이제는 그 고비가 다 지났으리라고 본다. 다시는 그런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헌팅턴 비치에 바람이 불어온다. 해가 서녘 수평선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그때다.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본 해넘이 장면이 뇌리에 살아 숨 쉬며 아름다운 장관을 보는 듯 갑자기 다가왔다. 그게 언제 때 일인가, 내가 어릴 때 친구 석태를 만나기 위해 공항동으로 가면서 한강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해넘이 장면이 아닌가.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해넘이가 지금 이 순간 뇌리에 살아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래, 그때 보았던 아름다운 해넘이다. 뒷모습. 그 멋진 뒷모습이다.”
  이걸 보여주기 위해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풋풋했던 내 어린 기억을 남편이 꺼내어 보내주었으리라 싶다.
  하루를 살다가는 태양의 뒷모습처럼, 나의 뒷모습도 저리 닮아 가고 싶다는 욕망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파당했을 땐 참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물살이 잦아진 뒤의 지나온 행로를 되짚어 보면 잃은 것이 있고 얻은 것도 많았다. 세상이 온통 양지가 아니고 음지가 아니듯, 내 삶의 일에도 음양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게 인생이니까.

  노을은 이미 지고 별빛이 총총하다. 간단없이 파도는 계속 밀려오며 사라져 간다. 밀려온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며 파도꽂을 예쁘게 피우고 있다. 밀물 따라 급하게 밀려와서 하얀 파도꽃을 피운 후 사라져 가는 게 꼭 우리네 인생을 닮았다 싶다.

                                                                                                                                                                                                        


  
 


박송이

2016.09.08 20:23:14
*.170.5.75

아.. 엄마 정말 눈물났어요. 그 시간 다들 잘 보내고 지금 편하게 기억할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아빠도 다 알고 계실 거에요.

김창옥

2016.09.30 19:03:08
*.40.65.223

용희야

이곳에서읽고있는 내가슴이 먹먹하구나

짐작은하고있었지만 생각보다훨씬힘들었구나

우권아빠의모습도아련하게 세월이흘렀지만

늦었지만 네길을가게되서 축하한다

작가는 경험도중요한것이니 그동안의고생을 토대로

좋은작품 많이쓰기를 바란다

홍용희

2016.10.01 13:54:34
*.240.233.194

내 오랜 친구 창옥아.


우린 참 좋은 세상을 살고있구나,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소통이 잘 되니 격세지감을 느끼네.

전화나 편지나 엽서로 소통을 하던 우리가 이 편리한 인터넷 세상에서 너를 본다.

네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복바쳐오네.


수영은 아직도 하니?

벌써 몇 십년은 됐지?

김창옥

2016.10.01 17:53:51
*.40.65.223

30년가까이된거같구나

우리가만난지도올해로52년이네?

길다면길고찗다면짧은세월이지만 그세월 우리는여전히뜨겁지도 차지도않은친구로

너는그곳에 나는이곳에서 마음한곳을 차지하는친구로살고있네

단발머리로만나이제는내세를생각하는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돌이켜본다


너의미국생활이궁금했는데

이글로 대략이나마알수있구나

짐작은했어도 차마묻지도못했었지

너의세아이가 모두 한몫하게되어 고생한보람이있네


이제늦게라도 네전공을살려 수필가로이름을올리게되어너무 반갑고 흥분되네

열심히써서 장편소설도하나 쓸수있기를 간절히바란다

서가에꽂힌책중에 홍용희란이름이있는책이꽂혀있는날을기대하면서

홍용희

2016.10.01 20:42:13
*.240.233.194

창옥아.


그래, 그렇구나.

한여름의 뜨거움도 없고, 한겨울의 얼음이 아닌 우리들 사이였지만

언제나 필요할 땐 그곳에 있는 사람이 너였어.

어쩌면 인간 관계의 해답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 나이에 겨우 찾아든 길,

욕심 없고 야망도 없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뿐.

마음 비우고 천천히.

여기서도 무소요가 통하나 모르겠네.

그러면, 나는 된 것인데...ㅎㅎ

이렇게 대화하니 좋구나 친구야.

석송

2016.12.20 12:44:13
*.198.22.110

한편의 영화를 보는것같습니다 모든것을 견뎌온 홍자가님 존경스럽습니다 건필 하시기 바랍니다.. 

홍용희

2016.12.26 23:40:03
*.240.233.194

석송 시인님, 감사합니다.

지나온 시간이 주마등같이 흘러갑니다. 새삼스럽게요.


웹싸이트에 있으니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아 좋습니다. 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읽어주셔서 그리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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